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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묵상/체험

제목 원체험
작성자송규철 쪽지 캡슐 작성일2005-11-08 조회수2,837 추천수1 반대(0) 신고

윗글 영원성의 실재를 쓴 것처럼

가톨릭 교육원을 다니면서도, 피정을 다녀 보았어도,

그리고 영적독서를 하면서도

'원체험'이라는 단어는 처음 들었읍니다.

 

개인적 신앙체험을 쓰면서

그간 영적 체험이

여정안의 원체험 이라는 것이었으며

정통 가톨릭 신앙안에 쓰이는 용어이며 의미를 알게되어

안도하는 마음이었습니다.

위로와 격려가 되었습니다.

 

 공세리 피정후 들은 원체험 글을  이곳 사이트 올리고

 또 내면에서 이거 오버?하는 것 아닌가? 할때

 참으로 우연찮게 들린 곳에서

바로 아래 올린 글 (성서 돋보기)에

김혜윤 수녀님의 '원체험'이라는 의미를 해설해 놓은 글을 읽고서

가톨릭 교리안에 신학적 여정임을 알게되니

신앙안에 큰 기쁨이었습니다.

 

추가로 말씀하자면

무지개의 신앙안에 의미를 혼자 이곳 사이트 올려놓고

이것 완전 오버?하는게 아닌가

마치 또 의심하는 토마사도의 마음처럼 망설일 때

여러장 쌓여있던 카톨릭 신문에서 한장 들었는데

어 왠 '무지개' 와 신비다. 마치 격려해 주시는 듯 

수녀님의 신앙안에 개인적 체험으로

'무지개'라는 의미를 스스로 열어 놓으신

 수녀님 글이 실려 있어 '원체험''무지개'두글을 각기

 답변자료로 첨부하여 올려 놓으니

 우연치고는 참 이상합니다.신비입니다. 샬롬!

생명의 땅       성서 돋보기
  하느님 사랑의 여정-탈출기[김 혜 윤]



자기가 아닌 존재를 꿈꾸고 자기가 갖고 있지 않은 것을 가지려 할 때 삶은 피곤하고 두려워진다.

 

반대로 삶의 목표가 너무 낮을 때도 일상은 무료한 것이 된다. 그렇다면 삶의 해법은 무엇인가? 답부터 말하자면 ‘앎’이다.

 

자기가 누구인지, 무엇을 하기 위해 태어났는지에 대한 ‘인식’이 삶을 진정한 것이게 하는 요체인 것이다.

 

탈출기는 이스라엘이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과정을 통해 이러한 ‘앎’이 곧 해방이며 구원임을 제시해 주고 있다.

탈출기 개관
모세오경은 원래 한 권의 책이었고, 그런 맥락에서 본다면 탈출기는 창세기의 내용과 본질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복을 주시고자 세상을 창조하셨고, 이스라엘의 성조들에게 그 축복을 약속하셨다는 이야기가 창세기의 요지라면 탈출기는 ‘땅’과 ‘민족 번성’에 대한 축복이 더이상 ‘약속’으로만 남아 있지 않고 출애굽 사건과 시나이 계약을 통해 이스라엘의 구체적 삶과 해방의 역사로 ‘실현’됨을 증거하고 있다.
‘출애굽기’ 혹은 ‘탈출기’라고 붙여진 우리말 제목 때문인지 모세오경의 두번째 책은 이스라엘의 이집트 탈출과 그 과정을 소개한 책 정도로만 인식되어 왔다. 그러나 이러한 이해는 이 책의 전반적인 내용을 다 포함하지 못한다. 오히려 이 책이 본격적으로 다루고 있는 주제는 ①이스라엘 민족의 형성 ②계약 체결과 전례적 규정 ③하느님을 알아가는 여정이라고 해야 한다. 성서가 매우 장엄한 필치로 묘사하고 있는 출애굽 사건은 이 모두를 가능하게 하기 위한 하느님의 배려 정도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1. 이스라엘 민족의 형성
탈출기는 급격히 불어난 이스라엘을 언급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이는 창세기와 구별되는 모티브로, 창세기는 그저 족장을 중심으로 구성된 하나의 ‘가족’(부족) 수준으로 이스라엘을 묘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탈출기는 이스라엘이 거대한 무리로 성장했음을 제시하며 앞으로 이스라엘이 하나의 민족, 하느님 백성으로 탄생되는 과정이 전개될 것임을 암시한다. 결국 창세기가 ‘세상의 탄생’을 제시하고 있다면 탈출기는 ‘이스라엘 민족 공동체의 탄생’을 서술하고 있는 것이다.

2. 계약 체결과 전례적 율법 규정
이렇게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을 하나의 민족으로 형성하신 궁극적 목적은 당신과 절대적인 ‘계약을 체결’하기 위한 것이었다. 즉 출애굽의 모든 여정과 광야의 사건들은 당신을 왕으로 고백하는 새로운 백성의 탄생을 준비하는 전(前) 작업이었던 것이다.
탈출기의 후반부는 바로 이러한 계약(하느님을 왕으로 섬기고, 그들은 그분의 백성이 됨을 체결하는 시나이 계약)을 심층 보도하고, 이스라엘이 이 계약을 성심껏 지키게 하는 여러 법령들을 제시한다. 이러한 법령들은 탈출기 다음에 등장하는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에 계속 제시됨으로써 탈출기와 다음의 책들을 하나로 이어준다.

3. 하느님을 알아가는 여정
이스라엘이 하나의 ‘민족 공동체’를 이루어 하느님과 절대적 계약을 체결하는 과정에서 반드시 체험해야 할 것은 하느님이 누구이신지 그분에 대한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앎이었다.

계약을 맺으려면 상대가 누구인지를 분명히 알아야 한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이 누구신지를 이스라엘에게 알려주시기 위해 모세에게 당신의 이름을 알려주시고(3장) 출애굽 과정에서 놀라운 기적을 행하시며(12­-14장) 아무것도 없는 광야에서 이스라엘을 먹이시고 보호하신다.

결국 이러한 과정을 거치면서 이스라엘은 ‘조상들의 하느님’으로만 알고 있던 분을 ‘자신들의 하느님’으로 믿고 고백하게 하는 ‘원체험’을 하게 된다. 조상들에게 언약하신 것을 단지 약속으로만 제시하시지 않고 이스라엘의 구체적 삶과 역사 안에 실현시키시는 분이 바로 야훼 하느님이심을 체험함으로써 하느님이 어떤 분이시지를 더욱 분명히 깨닫고 믿게 된 것이다.

 

에니어그램을 통하여 증언

 

글쓴이 - s.사도요한 (에니어그램 카페에 올린글)

 

?번 유형으로 실제로 아래와 같은 글처럼 개인 신앙  체험을 하고 서리

어느 순간에는 불쑥 회의,두려움이 솟구쳐 올라

교차하듯이 내면의 번뇌가 일어난다.

 

그럴때

회의, 두려움은 ?번 유형의 집착이라는 것을

성찰하면

자유스러워진다.

 

 

 

내면으로 공감하는 생각 한조각

 

 

[...]40일 간의 피정이 끝나고 수도자들은 다시 자기 나라로 돌아 갔다.

 

매일 매일 보이지 않는 하느님과 대화하고 그 분이 얼마 자신을 사랑하시며

가까이 계시고 싶어하시는가를 깊이 느끼는 체험.

 

그러한 영적 기쁨으로 충만되는 체험공유한 사람들 다시 만나지 못해도,

또 편지를 주고받지 않아도  일생 동안 영혼 깊은 곳으로 부터

일치하고 있다는 강한 확신을 가지고 각자 하느님께서 자기를 두어두신 곳으로

돌아간 것이다.[...] 

 

p.47 하느님은 우리를 어디로 이끄시는가?/스즈키 히데코수녀/생활성서 (영적독서로 추천)

 

 

증언 : 이것이 저의 유형의 원형이었습니다. 얼마나 놀랬는지요?

본질이 나타남

 

  ? 번 유형은 깊은 내면으로부터 우주가 자비로우며 완전히 자신을 지원하고 있음을 알고 있다.

이들은 자신이 존재 안에 자리잡고 있으며 신성한 본성의 일부라는 것을 알게 된다.

 

  ? 번 유형은 마음이 차분하게 가라앉아 있을 때 존재의 근원인 내면의 공간을 경험한다.

이들은 본질이 추상적인 생각이 아니라 실제로 존재하는 것임을 깨닫는다.

실제로 본질은 모든 존재의 근원이다. 사람들은 이러한 내면의 평화를 신의 존재와 연관시킨다.

그것은 매순간 스스로를 발현시키며 매순간 모든 사람 가까이 있다.

 

 ? 번 유형이 이 진실을 경험할 때 안정감을 얻고 지원을 받고 있다는 느낌을 갖는다.

이러한 기반이 삶에서의 유일하고 진정한 안전임을 깨닫는 것이다.

이런 깨달음이 ?번 유형에게 엄청난 용기다.

 

 ? 번 유형 성격의 대부분이 이미 자신은 안전하며 신성의 표현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대체물을 찾으려 하기 때문에 생긴다. 그러나 자신의 안에서 본질이 드러날 때

존재 안에서 ?번 유형은 확고한 자신의 자리를 마련할 것이다.

 

우리는 모두 본질의 한 부분이다.

 

                                      ( - 에니어그램의 지혜/돈 리처드 리소:한문화 p.327)

사람은 왜 신을 찾는가?
 
인간은 신을 믿도록 만들어졌다는 새로운 증거가 발견되었다
저자 빈스 로스는 신경학자인 앤드루 뉴버그와 함께
[신은 왜 사라지지 않는가?]라는 책을 집필
 
빈스 로스는 펜실베이니아대학교 교수인 앤드루와 종교에 대한 생물학적 이론에 대해 토의하기 위해 만났다.
 
2001년 4월 어느날 밤, 빈스 로스의 집엣 몇 킬로미터 떨어진 어느 집 다락방에 성모마리아가 나타났다는 소문이 퍼졌다. ....
그 집 앞에는 수백 명의 사람 들이 그 기적을 보기 위해서 장사진을 이루고 몇 시간씩 기다리고 있었다.
그 광경을 보는 저(빈스로스)는 TV로  그 광경를 지켜보며 이렇게 자문했다.
이런 개명된 사회에서 저렇게 많은 사람들이 성모 마리아의 영상을 보겠다고 밤중에 몰려 나오다니 어떻게 된 일인가?
또 이런 의문도 떠올랐다. 내 안에 어떤 충동이 잠재해 있기에 나 또한 그리로 차를 몰고 가고 싶은 생각이 드는 것일까?
 
앤드루 교수는 자신의 이론이 인간의 신에 대한 갈증의 신경학적 토대를
마려해 줄거라고 믿고 있다. 이 이론은 35세의 나이에 앤드루는 영성과
두뇌의 관계를 탐구하는 새로운 학문인 "신경신학"의 선두주자 가 되었다.
앤드루는 빈스로스에게 이해하기 힘든 이야기를 했다.
 
신비주의자들이 말하는 " 더 높은 실재"가 실재할지도 모른다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비유적으로' 실재한다는 말이 겠지요?"
빈스 로스가 조심스레 슬쩍 물었다.
"아뇨. 이 탁자처럼 실재하지요. 아니, 이 탁자보다 더 분명하게 존재한다고 할 수 있죠." 그는 말했다
 
"교수님의 연구가 더 높은 실재의 존재를 입증한다는 말씀인가요?"
"그런 실재의 가능성이 과학과 상치되지 않는다는 얘기를 하고 있는 겁니다."
"하지만 그런 것을 과학적 방법으로 '관찰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앤드루는 싱긋 웃었다. 그는 그런 상태를 관찰 하지는 못했지만 사진을 찍는 데는 성공 했다는 것이다.
 
1990년대 초 다퀼리는 방사선학자였던 앤드루와 팀을 이루었다.
두 사람은 다퀼리의 이론을 다듬고 시험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SPECT스캐닝(주사)이라고 불리는 영상기술을 이용해서 명상하는
티벳 승려들과 명상 기도에 몰두하는 프란시스코회 수녀들의 뇌를 관찰했다
 
중략
 
뇌가 신비스런 초월의 경지-모든 주요 종교에서 가장 심오한 영적 경험이라고 보는 상태-에 다가가는 순간을 포착해낸 것 같았다.
 
카톨릭 성자들은 그런 초월의 경지를 하느님과의 '신비로운 합일"이라고 했고 한 불교 승려는 그것을 "몰아의 경지"라고 불렀다.
 
중략
 
그러나 앤드루와 다퀼리는 그보다 정도가 낮은 차단 상태가 더 부드럽고
일반적인 영적 경험을 일으킬 수 있다고 믿었다.
일반 신자들이 기도에 몰입했을 때나 예배중에 느끼는 합일의 상태가
바로 그런 것이었다.
그들의 연구는 이런 느낌이 정서난 소망적 사고에 기인하는 것이 아니라
뇌의 본래 구조에 기인하는 것임을 암시하고 있다
 
"이성의 시대에 종교가 번창하고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고 앤드루는 말한다.
 
신의 존재를 "사고(思考)"로 간단히 부정할 수 없는 것은 종교적 느낌이 사고에 의해서보다는 경험,느낌,체험에 의해서 일어나기 때문" 이라고 앤드루는 말한다.
그런 느낌은 영적인 결합의 순간에 나타나며 뇌는 그런 느낌을 일상적인 물리적 실체에 대한 인식 못지 않게 생생하게 느낀다는 것이다.
 
"하느님이 뇌에 의해서 발생하는 인식에 불과하다는 뜻입니까?  아니면
뇌가 하느님의 실재를 경험하도록 설계되어 있다는 뜻입니까?"  빈스 로스가 물었다
 
"두 질문 모두에 대해 내가 드릴 수 있는  가장 이상적인 최선의 대답은
'그렇다'는 대답 입니다."  앤두라가 대답했다.
 
 
중략

[...]

 

이슬람의 한 신비주의자는 말했다.
 "우리와 우리의 존재는 존재하지 않는다"
 
한 불교 승려는 이렇게 말했다
"그것은 존재한 적도, 존재하지 않는 적도 없다."
 
그리고 중세 기도교 신비주의자인 미이터 에카르트는 하느님은
"존재를 초월한 존재, 존재를 초월한 비존재"
 
중략 [...]
 
그러던 중 빈스 존스는 현대의 베네딕트회 수도사인 비드 그리피스이 글을 접하게 되었다.
그리피스는 어린 시절의 경험을 서술했다. 그는 어느 날 밤 산책을 하다가 문득 새들의 아름다운 노랫소리에 넋을 빼앗겼다.
새들의 노래가 그가 전에 한 번도 사용한 적이 없는 감각을
일깨운 것이다.
그 순간 세상이 갑자기 변한것 같았다고 그는 썼다.
 
"깊이을 알기 어려운 신비 속으로" 걸어 들어간 것 같았고 "
그 신비가 자기를 끌어당기고 있는 것 같았다"
불나는 덤불도 아니고 불꽃을 내뿜는 전차도 아니었다.
 다만 부드럽고 미묘한 인식, 많은 사람들이 그저 어깨를 으쓱하며
넘겨버릴 수도 있는 가벼운 깨달음이었다.
그러나 그것이 그리피스이 삶을 영원히 바꾸어놓았다.
 
곧 빈스 존스는 다를 비슷한 계시의 예들을 접할 수 있었다.
 
시를 읽거나, 우주에 대해 명상하거나, 기도를 올리다가 경이로운 흥분을 경험했다는 사람들의 이야기였다.
 
신비의 경험은 어느 먼 낙원으로의 마술적인 승천이 아니라는 것을 나는 깨닫기 시작했다. 다시 말해 그것은 기적과 세속적인
일이 똑같이 하나요, 그 둘이 바로 우리 눈앞에 있다는 조용하고 개인적인 깨달음이었다.
 
곧 나는 우리가 진정한 실재를 볼 수 있는 것은 명상을 통해서
자아를 밀쳐버릴 때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앤두루의 주사사진은 뇌가 두 개의 실재를 경험할 수 있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한 실재에서는 인식은 자아라는 필터를 통해 우리 정신에 도달한다. 또 다른 실재에서는 자아가 밀려난다,
따라서 인식이 더 넓어지고 더 통일성을 갖게 된다.
 
중략[...]
 
그 때 나에게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의 말이 생각났다.
"우리가 경험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일은 신비스러운 것이다. 과학의 시작은
바로 그  기본적인 정서이다. 그것을 모르는 사람, 경이를 느낄 수 없는
사람, 놀라움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은 죽은 것이나 다름없다."
 
곧 나는 아인슈타인으 이런 생각에 닐스 보어, 막스 플랑크,
베르너 하이젠베르크같은 다른 위대한 과학자들이
공감하고 았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이들 위대한 과학자들은 이성적인 우주에 이해할 수 없는 경이를
수용할 공간이 있다는 결론에 도달했던 것이다.
 
책의 집필을 끝낸 후에도 나는 종교를 발견했다고 말할 수는 없다.
하지만 나는 가장 크고 매혹적인 신비는 풀어야 할 대상이
아니라 즐겨야 할 대상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신비는 우리 주의에 널려 있다.
 
우리는 그저 겸손한 마음으로 주의를 돌리기만 하면 된다.
 
" 내 구원은 듣고 반응하는 것이다. 그래서 내 삶은 침묵해야 한다. 따라서 내 침묵은 나의 구원이다."  라고 트라피스트회 수사 토머스 머튼은 말했다.
 
나는 그것을 나의 새로운 중요 계획으로 삼기로 했다.
지식과 재미와 이성(理性)에 대해 잊어버리기로 한 것이다.
모든 문을 닫아버리고 잠시 귀를 기울이기로 한 것이다.
 
리더스 다이제스트 2002년 9월호 p49-53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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