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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묵상/체험

제목 영원성(실재) II - 증언
작성자송규철 쪽지 캡슐 작성일2005-11-08 조회수3,636 추천수0 반대(0) 신고

②- 하느님은 인간을 어디로 이끄시는가/스즈키 히데로/생활성서 - P.73

생명의 빛에 둘러싸여


[...]

한없는 기쁨과 해방감이 가슴에 넘쳐왔다. 마침내 마지막 한장의 꽃잎만 남게 되자 ‘나는 이것만 떨어지면 완전히 자유롭게 되겠구나.’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그 마지막 꽃잎이 떨어지는 대신 몸이 가볍게 쑥 솟아오르더니 그때까지 바라보고 있던 나와 바라보여지던 내가 하나가 되었다.

  

 몸이 하늘로 비상하는 그 순간 나는 지금까지 본 적이 없는 아름다운 빛으로 에워 싸였다. 흰빛을 띤, 금색의 빛이 가득 찬 빛의 세계로 들어갔던 것이다. 그것은 빛나는 광채였으나 그렇게 눈부시지는 않았다.

   

그것은 인격을 가진 생명 그 자체의 빛, 깊은 곳에서 자신과 연결되어 교류하는 살아 있는 빛이었다. 나는 ‘이것이 바로 지복이요, 완전한 자유’임을 느끼게 되었다.

나의 오감(五感)과 사고가 이상할 정도로 생생하게 맑아졌다. 올림픽 선수가 최상의 컨디션으로 신기록을 세우는 순간의 상태가 이러할까? 몸의 모든 기능들이 완전한 조화 가운데 최고의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고 감각도 고도로 예민해졌다.

  

그 맑아진 의식 가운데서 나는 이 생명 자체인 빛의 주(主)에게 나의 전 존재가 알려지고 이해되고 받아들여지고 용서되고 완전히 사랑받고 있다는 것을 확실히 이해할 수 있었다. 이것이 사랑의 극치라고.

 

만일 궁극적으로 완전한 사랑의 상태라는 것이 존재한다면 이런 느낌에 사로잡히게 되는 것이 아닐까? 진리에 충만된 상태란 이러한 경지를 말할 것이다. 게다가 그 충만된 빛의 세계에는 시간이 존재하지 않았다. 나는 ‘이것이 바로 영원이다’라고 생각했다. 마음은 사랑으로 충만되고, 지성은 맑아지고, 능력은 최고로 고조된 상태 에서 완벽한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그런 지복감에 싸여 있을 때 어디선가 목소리가 들려왔다. “낫게 해주세요. 낫게 해주세요.“ 그 목소리가 들리는 순간, 빛이며 생명 자체인 빛의 주(主)가 ”현세로 돌아가라“라고 말하였다. 그것은 물론 말로 표현되지는 않았지만 나에게 그렇게 전달되었다. 뿐만 아니라 나는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아는 것과 사랑하는 것이다“라는 메시지를 받았다.

 

 [책 내용에서 인용 끝]

 

 

 

 

 

 


<가장 아름다운 이별 이야기> 에서

복음환호송
요한 8,12
◎ 알렐루야.
○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라오는 사람은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 알렐루야.



문예춘추사에서 <가장 아름다운 이별 이야기>

( 원제 : 죽어가는 사람들이 전해주고 싶은 말 - 역자주)라는 책이 출판된 것은

1993년 8월 15일이었습니다. 눈 깜짝하는 사이에 많은 이들로부터 숱한 반응이

있었습니다. 더구나 이 책에 대한 반응은 전혀 예기치 못한 모양으로 나타났습니다.

 

 많은 편지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강연 후나 여행중에 여러분야의 사람들이 “

<가장 아름다운 이별 이야기>를 읽었습니다. 얘기하고 싶습니다”라며 인사를

했고 , 그들과 새로운 만남을 갖게 됐습니다.

 얘기의 내용은 단순한 독후감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가장 아름다운 이별 이야기>를 읽은 뒤, “내 내면에 큰 변화가 일어났다”

혹은 “상상도 못했던 체험을 했다”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한 분들의 얘기에 귀를 기울이면서 저는 20년 전쯤에 ‘죽음체험’을 했을 때의

일을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당시엔 아직 죽음체험이라는 말조차 없었고 남에게

얘기를 해도 전혀 믿어주질 않았습니다.

 

 그랬던 것이 요즘에 와서는 죽음체험이라는 말을 당연한 것처럼 얘기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여태껏 입을 다물고 있던 분들이 잇따라 자기의 체험을 털어놓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거기엔 공통된 패턴이 있었습니다. 죽음체험을 한 뒤엔

죽는 것이 두렵지 않게 되었다든가, 죽는 순간엔 지복 (至福)의 상념으로 충만

된다

든가, 저승이 얼마나 아름다운가 하는 것을 체험했다든가 하는 것들입니다.

 

 “사람은 죽음을 맞이하면 순간적으로 자기의 일생을 회고한다. 이승에서 함께

지낸 자기의 몸을 조금 높은 위치에서 바라보고 있다. 이어서 어두운 터널을

굉장히 빠른 속도로 빠져나와 들판에 이른다. 그러면 거기엔 아름다운 꽃들이

눈부시게 만발해 있고, 지난날 사이가 좋았었던 죽은 이들이 따뜻하게 맞아준다.

그이들에게 인도되어 안심하고 강을 건너 행복의 세계로 들어간다. 빛의 원천,

생명의 근원인 인격을 지닌 빛 그자체인 분을 만나 지복으로 충만된다.

많은 이들이 이러한 체험들을 얘기해주었습니다.

 

 과학적인 진위(眞僞)는 어찌 됐건 죽음체험을 한 이들은 대부분 그것을 계기로

인생이 달라졌다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가장 아름다운 이별 이야기>를 계기로 새로운 체험을 하신 분들은 그 신비스런

체험을 통해, 그 후의 자기 인생이 크게 달라졌다고 했습니다.

 

저는 많은 이들의 체험담을, 제가 죽음체험을 했던 때와 똑같이 신선한 놀라움과

감동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전혀 다른 장소에서 전혀 관계없는 이들로부터 들었음

에도 불구하고, 이분들의 이야기에는 불가사의하게도 일정한 패턴이 있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것은 죽음 체험자들처럼 놀랄 만한 것들이었습니다.

 

 이 책에 수록한 일련의 체험들은 과학적으로는 설명이 불가능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체험한 당사들에게는 ‘현실’이며 ‘진실’인 것입니다.

저는 그분들의 얘기를 경청하면서, 다른 사람의 처지에서서 보면 백일몽, 꿈,

환상에 불과한 것일지라도, 본인에게 그것이 진실되었음을 증명하는

 

유일한 증거는 ‘그 체험 후의 삶의 태도에 달려 있다는 것, 즉 삶의 근본적인

가치관에 변화가 일어나게 됐다’

점에 있음을 확신했습니다.

 

 제가 만난 모든 이는

‘이러한 체험을 계기로 내 자신의 삶의 태도가 달라졌다. 나에게 참된 인간으로서

살아가는 길이 됐다.’

라고 느꼈으며, 인생에 대한 견해나 대인관계가 따뜻하고 마음 뿌듯해지는 방향

으로 바뀌고 있다고 했습니다.

그것은 마치 이미 이승을 떠난 분들이 사랑하는 이들에게

한권의 책 <가장 아름다운 이별 이야기>를 통해 따뜻한 메시지를 보내며, 저승과

이승의 연줄을 서로 더 강하고 든든하게 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들이 전한 거의 모든 메시지는 다음과 같은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죽음은 두려운 것이 아니다.  죽어가는 사함에게 죽음은 자연이다.

 사람은 이승에서의 자기 사명이 끝났을 때에 죽는다.  죽는 순간

 육신은 괴로워하는 것같이 보여도, 사실은 지복에 충만돼 있다.

 

 살아 있는 한 , 한 사람 한 사람에게는 이승에서 다해야 할 사명이

 있으며 그 어떠한 사람이라 해도 반드시 쓸모가 있다.

 그 어떤 사람에게도 삶의 의미가 있으며 가치가 있다.

 때문에 자기답게 생기에 넘쳐 산다는 것은 누구에게나 소중하다.

 

인간은 생명을 창조할 수 없다.

생명은 인간을 살려주시는 분이 주시는 사랑의 증거이다.

생명은 은혜다.

삶의 존엄성.

죽음이 있음으로 해서 삶은 빛난다.

고통에는 의미가 있다.

살아가는 가운데 가장 소중한 것은 사랑이다.

용서야말로 사랑의 근원이고 용서야말로 치유이다.

자기나 남을 책망하지 말아야 한다.

문제를 해결해나갈 힘은 각자에게 주어져 있다.

모든 인간관의의 목적은 ‘깊고 무조건적인 사랑으로 조화 속에 하나로 결합

되는 것’이다.

모든 행위의 궁극적인 목표는 ‘마음의 평화’와 ‘지복감’이다.

세계를 새로운 눈으로 보는 것이야말로 치유의 시작이다.

대우주는 당신 편이니 당신은 외롭지 않다.

행복하게 되는 비결은 남에게 봉사하는 것이다.

전 인류는 사랑이라는 원천으로 연결돼 있다.’

 

 죽은 이들은 이러한 메시지를 알기 쉽게 전하면서 이승에 살고 있는 이들과 화해

를 바라며 사랑을 보내고 있습니다.

죽은 이들은 따뜻한 격려와 자비에 넘쳐, 우리들이 ‘살아 있다’는 그 한없는 기쁨

에 눈뜨고 미래에 대한 불안으로 ‘생명이 있는 지금’을 오염시키지 않기를 기대

하고 있습니다.

과거에 사로잡혀 ‘지금 살고 있다는 존엄성’을 더럽히지 않도록 가르쳐주는 것

입니다.

죽은 이들은 우리가 지금 여기서 자기와 남을 소중히 하며 밝고, 행복하게 살도록

북돋워 주고 있습니다.

 

 <가장 아름다운 이별 이야기>가 계기가 되어 죽은 이로부터 사랑에 넘친 선물을

받은 많은 분들처럼, 이 책이 당신에게도 ‘죽은 이와 산 이의 화해의 시간’을 가져

다주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당신 주위에서 ‘행복감’ ‘지복감파동이 파문처럼 크게 널리 퍼져나가

길 바랍니다.

 

생명 있음을 함께 기뻐하고 서로 도우면서 괴로움을 이겨내어, 살아 있는 우리들

이 마음 깊은 곳에서 연대하는 ‘코뮤니온’을 체험하면서 참된 ‘화해의 시간’을 하루

하루 살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귀중한 체험을 나눠주신 분들에게 감사를 드리면서 그분들의 양해를 얻어 저도

또한 그분들로부터 들은 바와 제 생각을 여로분과 서로 나누고 싶습니다.

 

‘함께 나눔’이라는 선물을 주신 분들에게 폐가 안 되도록 이름과 상황, 특히 지명

을 고친 경우도 있지만. 그분들이 전해주고 싶었던 내용에는 경의를 갖고 성실

하게 대하도록 노력했습니다.



     책머리에  가장아름다운 화해 이야기 / 스즈키 히데코 수녀/생활 성서

    (2005-11-2)

 

 

 

     단순한 지성적 문제를 넘어, 인간존재의 심오한 요구와 결정적인 가치에 
    관계되어 있는 이러한 최종적인 문제들을 기꺼이 대면하고자 하지 않는다면, 
    어떤 의미에서 성장한 어른들은 누구도 그리스도교의 대답을 들으려 하지도 
    않고 또 듣는다 해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우주는 은총의 결실인가? 
    혹은 신에 의하여 계획된 컴퓨터인가? 사랑의 삶은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인가? 
    이런한 모든 기본적인 질문들이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비그리스도교에 관한 선언]
    안에 아주 잘 요약되어 있다. 
     사람들은 어제도 오늘도 인간의 마음을 번민하게 하는 인생의 숨은 수수께끼
    들의 해답을 여러 가지 종교에서 찾고 있다. 사람이란 무엇인가? 
    인생의 의의와 목적은 무엇인가? 선이 무엇이고 죄는 무엇인가? 
    고통의 원인과 목적은 무엇인가? 진실한 행복으로 가는 길은 어디에 가는가? 
    마침내 우리들 자신의 기원이자 종착역이며 
    우리의 실존을 애워싸고 있는 형언할 수 없는 마지막 신비는 과연 무엇인가?
    (1항) [사목헌장]4-10항도 참조하라
     한편, 이러한 질문들은 임의적으로 작성된 목록이 아니라, 우리가 지속적으로 
    체험하고 있는 인간존재의 본성에서부터 솟아나오는 질문들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이들은 자기자신에 대한 질문과 하느님께 대한 질문에로 결국은 
    귀결된다. 
    불트만과 라너 그리고 이외 다른 이들이 옳게 주장하고 있는 바와같이, 
    하느님께 대한 질문의 밑바닥에는 인간에 대한 질문이 자리잡고 있음. 
    인간에 대한 질문 뒤에는 하느님께 대한 질문이 자리잡고 있다. 
    우리는 하느님께 대한 질문을 제기하지 않고서는 인간존재에 대한 
    심오한 질문을 제기할 수없으며, 인간에 대한 질문을 제기하지 않고서는 
    하느님께 대한 질문을 제기할 수 없다. 
    성 아우구스띠노의 훌륭한 기도는 하느님을 추구하는 것이기도 한 자신에 대한 
    이러한 최종적 탐구를 함께 연결시키고 있다 : 
     "주님, 내가 나 자신을 알 수 있다면! 내가 당신을 알 수 있다면!"  
    성 아우구스띠노가 고민스러웠고 도피적 이었던 자기 삶을 통하여 깨달은 바와 
    같이, 우리의 모든 근원적인 불안과 우리 자신에 대한 질문은 하느님께 대한 
    우리의 탐구를 감추고 있는 엷은 베일일 뿐이다.
     
    기초신학/김광식 신부역/분도출판사.(가톨릭 교육원 기초신학 교재)에서 
    "이해를 추구하는 신앙"(fides quaerens intellectum)의 훈련이라면, 이 신앙은 
    자주 의심과 그리고 미약한 실천적 행위와 투쟁하는 가운데 조금씩 앞으로 
    나아갈 것이다. 신학은 (포괄적인) 이해를 추구하는 완전한 신앙이 아니다." 




    에니어그램 http://cafe.daum.net/Enneagram
    ○ 참자기 발현과 성숙을 지향하는 이들의 모임 ○

    글쓴이 : s.사도요한

     

     

     

      ① 개인 신앙체험을 굿뉴스에 2004년 8월경에 올렸던 내용


    "사실 제단을 두고 한 맹세는 제단과 그 위에 있는 모든 것을 두고 한 맹세이고 성전을 
    두고 한 맹세는 성전과 그 안에 계신 분을 두고 한 맹세이며 또 하늘을 두고 한 맹세는
    하느님의 옥좌와 그 위에 앉으신 분을 두고 한 맹세이다."- 마태 23,20-22

      찬미 예수님 신부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초신학에서 "이해를 추구하는 신앙"(fides quaerens intellectum)의 훈련이라면, 이 신앙은 자주 의심과 그리고 미약한 실천적 행위와 투쟁하는 가운데 조금씩 앞으로 나아갈 것이다. 신학은 (포괄적인) 이해를 추구하는 완전한 신앙이 아니다."라고 글을 읽으면서 왜 나는 자주 의심을 하는가? 늘 그것이 큰 불충스럽고 죄스러운 자신의 모습에 너무 비참함 에서 어느정도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이런 일이 생길경우에 참으로 저자신 놀랠 수 밖에 없습니다. 제가 하고서도 스스로 놀랠일이 있었습니다. 어떻게 식별해야 할지 한말씀 하여 주실 수 있으신지요? 1)2년여전 감실앞에서 느닷없이 빛안에서 저너머에 영원성이 실재하는 세상이라고 표현해야 할지? 느낌이라고 해야할지? 언어로는 표현할 수 없지만 광명(光明)을 보았다고 하는 듯한 자각, 스스로는 깨달음 이라고 표현을 빌릴 수 밖에 없습니다. 실재 앞에 즉 형체도 없고 무어라 말로 그 느낌 상황을 표현 할 수 없는 저 너머, 그 앞에서 기쁨의 눈물과 크게 다가오신 실재 앞에 죄스러움과 더욱 작아진 자신의 비천함에 눈물을 흘렸던 개인신앙체험이 있었습니다. 그때 그 깊은 순간에 주님앞에 감히 "늘 깨어 기도하는 사도(평신도)가 되겠습니다" 하고 독백(하느님과의 약속) 이라고 해야 할지? 신앙고백 이라고 말할 수 있는지?를 하였습니다. - 참조 註.1 회상해 보면 마치 안하고는 도저히 못견딜 감사함이라고 해야할른지요? - 참조 註.2
      
      "참조 註.1- 2004,8,23일 복음말씀
      사실 제단을 두고 한 맹세는 제단과 그 위에 있는 모든 것을 두고 한 맹세이고 
      성전을 두고 한 맹세는 성전과 그 안에 계신 분을 두고 한 맹세이며 또 하늘을 두고 
      한 맹세는 하느님의 옥좌와 그 위에 앉으신 분을 두고 한 맹세이다." 
      (마태 23,20-22) 2004,8,23일 복음말씀에서  영성체후 살아있는 말씀으로  
      제가 무지하게  "...독백인지? 신앙고백?인지 ..."모르는  마음(신앙안의 표현)을 
      예시하여 주시는 듯이  성서의 말씀을 통하여  먼저 말을 건네 주시는 다정하신 
      선생님으로 오신 하루 였습니다.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감사와 회개의 기도를  올린 
      새날의 미사와 묵상 이었습니다.)
      
       "참조 註.2 - 2004,8,27 복음환호송
      ◎ 알렐루야. 
      ○ 사람의 아들 앞에 설 수 있도록 늘 깨어 기도하여라.(루가복음 21,36)
      ◎ 알렐루야  
      2004,8,27일 새벽미사  - "...도저히 못견딜 감사함이라고 해야할른지요?"하는 마음이
      복음환호송 이었음을 예시하여 주신는 듯 오늘 살아있는 성서 말씀을 통하여 다가 오신
      새날의 미사와 묵상 이었습니다)
      복음 말씀 "그날과 그 시간은 아무도 모른다. 그러니 항상 깨어 있어라."(마태 25,13)
      
      
      그리고 진리에 대한 기쁜 마음과 작은 실천에 죄스런 마음으로 집으로 늘 걸어다니는
      같은 그 길과 주변 자연이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차원의 경이롭고 환희로운 아름다움이
      평생 처음 이었습니다.  그 이후 한동안 계속...
      
      
      
      
      
      
      
      참조: 
      "[...]우리가 믿는 복음 선포의 본질적인 내용은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히 새로운 차원의
      존재 세계가 열렸다는 것, 곧 하늘나라입니다. 이 하늘나라는 하느님의 자녀들이자
      그리스도의 형제 자매들인 우리들 안에서 자라나고 익어 갑니다.[...]
      
      [...] 세상은 탄생의 고통 중에 있습니다. 만물은 애초의 존재 상태에서 나와 생명을 향해
      발전해 나아갑니다. 생명은 인간 안에서 정신으로 변형되는 가운데 완성됩니다. 정신은
      하느님을 인식하고 사랑 안에서 그분께 자신을 봉헌함으로써, 그리고 그럴 때에만, 자기
      자신을 제어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과 인간의 이런한  합일(合一)은  만물을 영원한 완성
      속으로 가져갑니다. ...[...] 우주는 통일된 전체를 이룹니다. 창조사업은 여전히 진행
      중에 있습니다...요한의 묵시록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습니다."그러므로 나는 이제 
      너를 위해서 문을 열어 놓았다. 그리고 아무도 그 문을 닫을 수 없다"[3,8]....
            -  죽은 후에는 /김진태 신부譯 에서
      
      ‘[...] 십우도’ 중에 아홉번째는 반본환원(返本還源)이다. 본래로 돌아간다는 의미이다. 
      소도 잊고 나도 잊고 깨침이라는 것도 잊은 상태에서 자연의 모습이 있는 그대로 비치는 
      경지를 표현한다.  산은 산, 물은 물 그대로의 모습을 꿰뚫어볼 수 있는 지혜를 터득한 
      경지를 표현하는 말이다. “본래로 돌아올 걸 공연히 애썼구나. 차라리 눈멀고 귀먹었던들, 
      집 앞에 물건을 왜 못 봤던고? 물은 절로 흐르고 꽃은 절로 피어 있네.”[...] 
           -  8월 야곱의 우물에서 
      
      " [...]밥 한 숟가락을 떠서 입에 넣으려는 순간, 그 날 따라 습관적으로 바치던 식사 전 
      기도가 되뇌어졌습니다. 주님, 은혜로이 내려 주신 이 음식과 저희에게 강복하소서. 
      그러자 문득  목이 메어왔습니다. 한순간에, 믿을 수 없을 만큼 갑작스레 감사의 정이 
      복받쳤던 것이지요.  밥 한 톨에 깃들어 있는 햇빛과 빗줄기와 누군가의 수고와 땀이 
      고스란히 보였습니다. 부드럽게 갈아엎은 흙 위에 씨가 뿌려지고 자라고  영글어서, 
      지금 나를 배불리기 위해 식탁에 오른 따뜻한 밥 한 그릇. 그 자체로 사랑이고 신비
      였습니다. 
      
      몇십 년을 습관적으로 먹어오던 밥이 그 날 따라 왜 그렇게 처음 맞닥뜨리는 새로운 
      경이처럼 느껴졌는지, 아마 은총이라는 말밖에는 표현할 수 없을 듯싶습니다. 그 날 
      이후로 이 세상을 바라보던 내 눈에서 습관의 굳은 껍질이 한 꺼풀 벗겨진 것 
      같았습니다. 앞산의 푸른 나무와 나를 둘러싼 모든 사물과 거리에서 마주치는 이름 
      모를 사람들에게서도 밥 한 그릇에 담겨 있는 것과 같은 우주적 사랑이 깃들어 있는 
      것이 보였습니다. 
            - 8월 8일 주보 이삭의 글에서
       
      그 일을 체험한 후 지금까지 매일 새벽미사를 나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기도안에 영적위로와 기쁨, 회개,통회의 은총을 가끔 받아가면서, 간혹 성체성사안의 신비스런 은총도 함께, 때로는 깊은 침묵안에 기도하는 그 침묵이 충만케 하였습니다. 참조: [...] 그곳에는 어떤 견해나 관점도 없다....그리고 동시에, 이 무한의 모든 부분을 채우는 침묵이 존재한다. 그 침묵은 단순히 소리가 없는 상태가 아니라 분명한 감각의 대상이 되는, 소리보다 더 분명한 침묵이다. [...] -시몬느 베이유 2004년 8월 중순 s.사도요한

     

        그렇다면 의심도 우리 그리스도교적 실존에 속합니다. 물음을 묻는 사람은 항상 사물의 심연 속으로 파고들어야 하고, 그때그때 주어지는 답을 위해, 이 답이 진솔한 것이려면, 자기 자신의 영혼을 걸고 그 일에 뛰어들어야 합니다. 그리고 자신이 찾는 답을 고백하면서도 인간은 그 답이 옳은 것인지 모릅니다.계속
    2004-08-19
     
        그는 언제나 똑같은 기도를 묵묵히 드립니다. "주님, 저는 믿습니다. 저의 불신을 도와 주십시오" [마르 9,24] - 죽은 후에는... : 죽음에 대한 새로운 신학적 묵상/ 라디스라우스 보로스 저./ 김진태 신부譯 / 가톨릭대학교 출판부 - P.16
    2004-08-19
     
        제가 광명으로 표현한 내용이 신학적으로는 : 우리가 감각에 불을 붙이시라고 성령께 드리는 찬가 "악첸데 루멘 센시부스"(Accende lu-men sensibus)에서 기도하는 내용, 그 말로 이루 형언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날 것입니다.하느님의 광채가 우리의 모든 감각을 비출 것입니다.
    2004-08-28
     
        우리는 하느님을 우리 전 존재를 통해 만지게 됩니다. 영적인 모든 것이 감각적인 안으로 들어가고, 감각적인 모든 것이 영적인 것 안에 통합됩니다. 인간은 현실 세계 전체를 이해하게 되는데, 그것은 육체와 정신, 형체와 빛, 존재와 의미가 하나를 이루는 것입니다....
    2004-08-28
     
        하느님에 대한 생각을 보존하기보다 그분의 현존에 의하여 깨달음을 얻은 순간들을 기억하라. " 너희가 바로 나의 증인이다 " (이사야 43:10) 우리에게 밝게 드러났던 것을 상기시켜주는 것들이 우리의 혼 위에, 멀리 마음을 압도하는 장엄함으로 별처럼 걸려 있다.
    2004-09-02
     
        그것들은 어둡고 위태로운 시대를 관통하여 빛나고 있으며, 이 부주의한 광야의 삶 속에서 양심과 기억의 오솔길을 지키고 있는 자들의 살아가는 모습에서 그 반사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 사람을 찾는 하느님 >에서 발췌 아브라함 요수아 헤셸 지음, 이현주 옮김 / 종로서적



    일반적으로 보면 이치로 보면 우리는 먼저 이해하고 나서, 그러니까 먼저 알고 나서 사랑한다.

    예를 들어 우리는 먼저 여러 해 동안 철학이나 과학을 공부하고 나서 문제점을 직관적으로 해결해

    나간다.
    하지만 초자연적 질서 속에서는 거꾸로 이어진다. 시편작가에 의하면 우리는 먼저 맛보고 즐긴

    다음에 이해한다. 우리는 다윗과 앞의 여인들이 그러했듯이 하느님을 이해하고 응답하기에 앞서

    먼저 사랑으로 하느님을 체험한다.

    [...]
    하느님은 우리 영혼의 가장 깊은 심연에 본질적으로 현존하시는데, 우리 영혼의 가장 깊은 심연에

    본질적으로 현존하시는데, 만일 그분이 그곳에서 당신의 현존이 감지되도록 하실 경우에 가장

    적합하고도 유사한 것이 바로 미각이다.

    감각을 체험하는 데 가장 친밀하고 가장 직접적인 것이 이 미각이다.

    그리고 미각은 하나의 유추작용이며 감각적 실체가 아닌 영적 체험이다. [...]

    - 신앙의 위기 사랑의 위기/토머스 키팅 /성바오로딸에서 발췌

     이번 1학기 가톨릭 교육원 수강을 통하여서도 더욱 더 믿음안에 이해를 추구하는 
    신앙을 갖게 되었습니다. 선경험(체험)을 하고 참으로 묘하신 방법으로 인도하여 
    주심을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 안에 함께 계시는 그리스도님이 실재하시며 
    성령의 도움심으로 아버지 하느님의 은총 실재를 체험하였으며, 그리고 더 중요한 것
     습관적인 죄에 빠지지말고 실재의 반이 원죄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성적?으로도 믿게되었습니다. 
     [...]사실 우리는 대부분 원죄를 실감하지 못하고 산다. 
    일이 잘 풀릴 때는 특히 그렇다. 우리는 몇 년 동안 사람들에게 친절하게 대하고 
    또 몇 년 동안 육정에 시달리지 않으면 골칫거리는 모두 사라졌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천사 같은 삶을 시작했으며 앞으로는 분노나 육욕의 발작 따위는 더 이상 
    겪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바꾸어 말해 원죄란 아예 존재하지도 않는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원죄는 엄연히 존재하기 때문에 사실 원죄을 무시하는 것은 겸손하지 못한 
    이다. 겸손은 실재를 온전히받아들이는 데 있다. 
    그런데 원죄는 적어도 이 실재의 절반을 차지한다.[...] 
    - 신앙의 위기 사랑의 위기/토머스 키팅 /성바오로딸 

    마카엘 신부

    사도 요한 형제님, 저희 참 인간 교육에 한번 참여해 보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자신을 새롭게 발견하고 복음적인 정신과 가치에

    한발작 더 다가서게 할 것입니다. 12월 10,11, 12일에 단기 과정이

    있습니다. 영성에 나가가는 길목에 꼭 풀어가야 할 문제들을 다룹

    니다. 사도요한 형제님의 열성에 감탄하며. 미카엘 신부

    [2004/07/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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