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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미사] 평화의 예식
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09-07-02 조회수2,659 추천수0

[전례 해설] 평화의 예식

 

 

“인사 나누시지요.”

“악수하셔도 좋습니다.”

“친한 사이면 포옹하십시오.”

“거룩한 입맞춤으로 서로 인사하십시오”(로마 16,16).

 

이 인사말들은 영성체 전 전례 인사의 발전 과정을 거꾸로 거슬러 올라가며 살펴본 내용이다.

 

미사 중 평화의 기도를 바친 다음 주례 사제가 신자들에게 “서로 평화의 축복을 나누십시오” 한다. 이때 인사 나누는 모습이 천태 만상이다. 본당마다 다르고, 나라마다 다르며 시대에 따라 변하였다. 목례, 절, 악수, 대화, 포옹, 입맞춤 등 다양하다.

 

 

평화의 입맞춤

 

세상 사람들은 친한 사람이거나 좋아하는 사람 또는 사귀고 싶은 사람이 있으면 찾아가 마주 서거나 혹은 옆에 앉기를 원한다. 학교, 직장, 사회가 일종의 사교장이다. 그러나 교회는 개인적인 사교장이 아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서로의 평화와 화해가 먼저 요구되는 친교의 장소이다. 그러므로 포옹이나 입맞춤을 세속적인 애정 표시의 기회로 삼거나 착각해서는 안된다.

 

예루살렘의 성 치릴로(387년 사망)는 입맞춤을 화해의 표시라고 하였다. “여러분은 이 입맞춤이 저잣거리에서 어떤 친구에게 하는 것과 같은 그런 종류의 하나라고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이 입맞춤은 서로의 영혼을 일치시키는 것이며 모든 불화를 치유한다는 서약입니다. 이것은 화해의 표시이기 때문에 거룩한 것입니다.”

 

200년경의 성 히폴리토(Hippolytus)는 그의 저서 “사도들의 전승”에서 이렇게 설명하였다. “세례받은 사람들은 서로 인사를 해야 한다. 남자는 남자끼리, 여자는 여자끼리 그러나 남자들이 여자들에게 인사해서는 안된다.”

 

고대 사회에서는 친척들간의 입맞춤이 애정의 표시일 뿐 아니라 존경의 표시이기도 하였다. 구약성서에서 ‘아론’은 모세를 만나 입을 맞추었다(출애 4,27). 복음 성서에서 잃었던 아들이 집으로 돌아오는 것을 보고 아버지는 달려가 아들의 목을 끌어안고 입을 맞추었다(루가 15,20). 이것은 고대 동방 사람들의 인사 표시였다. 바오로 사도는 “거룩한 입맞춤”(1고린 16,20)으로 그리스도인들이 서로 인사하도록 권고하였다. 그러나 유다의 입맞춤은 배반의 신호였다(마르 14,44 참조).

 

 

평화의 인사

 

어떤 중학생이 이사를 왔다. 아는 사람이라고는 하나도 없었다. 성당에서도 인사 나눌 기회가 없었다. 그런데 본당 신부가 미사 강론 중에 먼저 사제와 인사하고 옆 사람과도 인사를 나누라고 하였다. 영성체 전 평화의 인사는 자연스러웠다. 이 인사를 통하여 몇몇 친구를 사귀게 되었다. 감사의 편지가 신부에게 전해졌다.

 

인사는 우선 일치의 표시이다. 영성체의 뜻도 주님과의 일치요 신자들 서로의 일치를 표시한다. 너와 내가 다같은 하느님의 자녀요 형제 자매이며 같은 신자라고 생각할 적에 서로 일체감을 갖는다. 그래서 신자라면 서로 반갑고 기쁘고 사랑스럽고 평화와 감사를 느낀다.

 

평화는 히브리말로 “샬롬”이지만 육체의 건강과 세속의 평화뿐 아니라 인간과 하느님의 조화 그리고 사람들 상호간의 영원한 안녕 즉 구원의 뜻이 담겨 있다. 하느님의 가장 큰 선물은 파스카 신비의 열매이고 신약의 완성인 구원이다.

 

 

평화의 예식

 

평화의 예식은 세 부분으로 나뉘어 있다.

 

첫째, 평화를 위한 사제의 기도.

둘째, 사제와 신자들 간의 인사 교환과 응답.

셋째, 모인 신자들의 상호 인사와 표시.

 

순서를 바꾸어 평화의 기도는 뒤로 미루고 둘째 부분부터 설명해 보자. “주의 평화가 항상 여러분과 함께”라고 인사말을 하면서 사제가 팔을 벌린다. 그것은 기도의 모습이 아니라 모든 신자를 한꺼번에 포옹하려는 사랑과 평화의 자세이다.

 

2세기경 평화의 인사는 성찬의 전례 직전에 교환되었으나 5세기부터는 성찬 기도 후로 옮겨져 영성체 준비 예식이 되었다. 6세기에는 주의 기도의 다섯 번째 청원인 “우리에게 잘못한 이를 우리가 용서하듯이 우리 죄를 용서하시고”를 확인한 다음 평화를 받으라는 뜻으로 주의 기도 후로 다시 옮겼다. 이것은 당시 영성체를 하지 않고 미리 퇴장하는 사람들을 위한 파견 축복도 겸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면 평화의 인사는 꼭 해야 하는가? 권고 사항이지 의무 조항은 아니다. 교회와 인류 가족의 평화와 일치를 간구하며 성체를 나누기 전에 사랑을 표시하는 것이다. 꼭 이런 방식이라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어떻게 인사하는 것이 타당한가? 평화의 인사 방법은 지역 주교회의가 지역의 특성과 풍습을 고려하여 결정한다.

 

한국 교회는 어떻게 결정하였는가? 행동 없이 “진심으로 축복합니다.”란 말마디로 평화의 인사를 나누도록 결정하였다. 대부분의 나라에서는 아무 말없이 악수나 고개 숙임으로 인사 표시를 하고 있다. 개정의 여지가 있다.

 

 

피 흘려 이룩한 평화

 

평화 예식의 첫 부분인 사제의 기도를 다시 두 부분으로 나눈다. “주 예수 그리스도여, 일찍이 사도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너희에게 평화를 두고 가며, 내 평화를 주노라 하셨으니 …….”

 

이 기도를 들으면 최후의 만찬 장소를 연상케 된다. 당시 (수난 전) 예수께서는 장엄한 고별 설교를 하셨다. “나는 너희에게 평화를 주고 간다. 내 평화를 너희에게 주는 것이다.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는 다르다. 걱정하거나 두려워하지 말라”(요한 14,27).

 

예수님이 주고 가시는 것은 무엇인가? 근심이 아니라 평화다. 그러나 당시 그분 앞에는 죽음의 위협과 침울한 분위기만 감돌고 있었다. 그날 밤(게쎄마니 동산의 밤) 하느님과 인간 사이에는 평화가 깨어지는, 오직 하느님의 분노만이 있는 두려움의 상태였다. 그런데 십자가의 핏방울로써 예수 성탄 날(베들레헴의 밤)에 시작된 하늘의 평화가 죽음의 순간 골고타 언덕에서 완성된 것이다.

 

“그를 찌른 것은 우리의 반역죄요, 그를 으스러뜨린 것은 우리의 악행이었다. 그 몸에 채찍을 맞음으로 우리를 성하게 해주었고, 그 몸에 상처를 입음으로 우리의 병을 고쳐 주었구나”(이사 53,5).

 

이렇게 이룩한 값진 평화를 그분은 우리에게 유산으로 남겨 주셨다. 그분은 “내 평화”를 준다고 하셨다. 평화는 주님의 것, 주님의 소유, 주님의 마음, 주님 자신이시다. 더 이상 걱정, 불안, 고뇌, 혼란, 갈등, 다툼, 불화 따위에 휘말릴 필요가 없다. 이 평화야말로 우리 인간에게 준 가장 고귀한 선물이 아니겠는가.

 

 

성교회의 믿음

 

“우리 죄를 보지 마시고, 오직 성교회의 믿음을 보시어, 성교회로 하여금 주의 뜻대로 화목하여 평화를 누리게 하소서.” 우리 죄를 보지 말라는 청원은 바로 이 값진 평화와 일치를 깨뜨릴 수 있는 모든 잘못을 없이하려는 일종의 속죄 기도이다. “그러므로 제단에 예물을 드리려 할 때에 너에게 원한을 품고 있는 형제가 생각나거든 그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그를 찾아가 화해하고 나서 돌아와 예물을 드려라”(마태 5,24).

 

회개와 믿음이 있어야 평화를 청할 수 있다. 구약성서(이사 9,6)에서 예언된 ‘평화의 왕’인 그리스도께서 평화의 원천이 되셨다. 따라서 영성체할 사람은 다시 한 번 주님 앞에 속죄하며 주님과 일치하고 형제와 하나가 됨으로써 참 평화를 누리도록 기원할 것이다.

 

참 평화는 주님만이 줄 수 있다. 주님만이 사람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고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 볼 수 있다. 실제로 예수님은 부활하신 후 “너희에게 평화(샬롬)가 있기를”(요한 20,19) 하고 인사하며 제자들에게 당신의 손과 옆구리를 보여 주셨다.

 

믿지 않는 이들에게는 부활이 없다.

믿지 않는 이들에게는 주님이 현존하실 수 없다.

믿지 않는 이들에게는 참 평화가 있을 수 없다.

 

[경향잡지, 1992년 8월호, 안문기 프란치스꼬(천안 봉명동본당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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