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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대림성탄] 성탄절 구유 이야기: 프란치스코 성인과 구유
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09-06-30 조회수2,674 추천수0

성탄절 구유 이야기 - 프란치스꼬 성인과 구유

 

 

크리스마스를 불과 보름 앞두고 프란치스코는 폰테 콜롬보에 있는 그의 은둔소에 머무르고 있었다. 그는 로마에서 교황께 그의 규칙을 승인받고 막 돌아온 참이었다. 삼 년 뒤에 그가 세상을 떠났으므로 이번이 그의 마지막 로마 여행인 셈이었다. 얼마 뒤에 프란치스꼬는 그리스도의 오상(五傷)의 고통까지 겪게 된다.

 

어떻게 성탄을 경축할 것인가? 프란치스꼬는 성지 베들레헴을 방문했을 때를 떠올렸다. “왜 거기서는 구유를 꾸미지 않는 걸까? 그레치코 가까이에는 동굴이 있는데…….”

 

프란치스꼬의 친구로서 군인이자 그레치코의 영주인 죠반니(요한) 벨리타가 십여 리 떨어진 곳에 살고 있었다. 요한은 프란치스꼬가 가진 매력에 흠뻑 빠져 세상 모든 명예를 내팽개치고 프란치스꼬의 삶을 온통 닮고자 했다.

 

프란치스꼬는 그에게 전갈을 보냈다. “만일 그대가 그레치코에서 주님의 축일을 지내기를 바란다면 내가 시키는 대로 부지런히 준비하여 주시게. 나는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신 아기 예수님을 재현해 보고 싶다네. 나는 소와 나귀들이 서 있는 가운데 건초더미 위에 누우신 아기 예수님이 겪으셔야 했던 그 고초들을 우리 눈으로 직접 보기를 바란다네.”

 

요한은 곧바로 준비를 하였다. 횃불과 촛불들이 밤의 어둠을 밝힐 것이다. 동굴 안에는 구유가 꾸며졌고 소와 나귀도 데려왔다. 수사들의 은둔소에 도착한 프란치스꼬는 매우 기뻐하였다.

 

저녁이 되자 그레치코에서 손에 손에 횃불과 촛볼을 들고 줄지어 모여든 사람들의 노랫소리로 숲 속이 떠들썩하였다.

 

동굴 둘레에 사람들이 모이자 사제가 미사를 시작하였다. 프란치스꼬는 설교를 하였다. 프란치스꼬와 같은 시기 사람으로 전기 작가인 토마스 첼라노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하느님의 성자(聖者)가 구유 앞에 서 있었다. 사랑에 가득 차 행복에 겨운 채로…… 그는 사람들을 최상의 선물로 초대하며 낭랑한 목소리로 복음을 낭송하였다. 그리고는 가난하신 왕과 베들레헴 고을에 관해 아름다운 말로 이야기하였다.”

 

오늘날도 그레치코에 가면 사람들은 건초더미 위에 놓인 넓이가 60cm, 높이가 90cm 되는 돌 하나를 볼 수 있다. 아래위가 모두 어두운 갈색을 띤 이 돌의 가운데에는 갈색 줄무늬가 있다. 위는 울퉁불퉁하고 얄은 V자 홈이 파여 있다. 누워 있는 아기의 모습을 조각한 것이다.

 

이렇게 소박하게 예수님의 탄생을 기념한 것이 프란치스꼬가 처음은 아니나 프란치스꼬는 매우 극적으로 이를 기념했다. 프란치스꼬는 무한한 광경을 이러한 모습으로 되살렸다. 그는 예수께서 이미 아기 때부터 고난을 당하셨다는 것을 보여 주고자 하였다. 성 바오로의 대담한 표현처럼 그는 여인에게서 태어나 냉혹하고 거역하기만 하는 세상에 던져진 하느님의 아기의 충만한 영광을 보았다. 프란치스꼬는 “하느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어떻게 가난을 택하셨는지”를 깨닫도록 사람들을 도와주고자 하였다. 프란치스꼬는 몸소 어떤 자금이나 보호책도 없이 공동체가 겨우 살아갈 정도로 극도의 가난을 택하였다. 성탄날에 그는 하느님께서 신성을 겨우 간직하신 채로 거기에 계신 것을 보았다.

 

프란치스꼬가 끊임없이 몰두한 것은 인간이 되시고 십자가에 달리시기까지 하신 그분의 겸손이었다. 그는 오직 베들레헴과 갈바리아만을 생각하였다.

 

프란치스꼬의 삶의 중심은 가난과 겸손과 순명의 덕이었다. 그는 그의 형제들에게 구걸하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말라고 하였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셨으니, 가난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얻어 주신 유산입니다.”

 

“프란치스꼬는 자주 그리스도와 성모님의 가난에 대해 묵상하며 눈물을 짓곤 하였다.”고 첼라노는 말한다. 이 축제를 지낸 다음해에 프란치스꼬는 그리스도께서 입으셨던 것과 똑같은 다섯 상처[五傷)를 그의 몸에 받는다.

 

프란치스꼬 시대 이전, 5세기 초엽에, 로마에 있는 성모 대성전에는 베들레헴의 동굴과 비슷한 기도실이 있었다. 실제로 그 기도실 때문에 이 대성전은 “구유가 있는 성모 성전”이라 불리게 되었다. 관례적으로 교황은 성탄 첫미사를 여기서 봉헌한다.

 

11세기에 부활 시기의 수난극을 본뜬 성탄극이 생겨났다. 프란치스꼬 바로 전 세기에는 성직자들이 산파와 동방 박사, 목동들 그리고 성탄 이야기에 나오는 다른 인물들처럼 분장을 하기 시작했고 살아 있는 동물까지 동원되었다.

 

그렇지만 단순하고도 강렬한 예식으로 가톨릭 신자들을 감동시킨 이는 프란치스꼬였다. 1226년 그가 죽은 뒤, 성탄 구유를 꾸미는 풍습은 유럽 전체에 널리 퍼져 나갔다.

 

“새 가톨릭 백과사전”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바로크 시대가 시작됨에 따라 구유는 복잡하고 생생한 풍경으로 치장되고 오늘날처럼 성가정의 인물과 목동들과 동방 박사들과 같은 세속적인 조각물들이 놓이게 되었다. 그래서 구유 만들기는 민간 예술로 발전되었는데 포르투갈, 티롤 그리고 그중에서도 특히 시칠리아의 두 왕국이 그러하였고 부르봉 왕조의 샤를르 3세가 활발히 장려하였다.”

 

“가정 구유는 카푸친회 수사들의 노력에 힘입어 1600년 이후에 유럽의 가톨릭 국가에서 성행됐다고 한다. 경건파 모라비아인들의 구유(‘푸츠’)를 제외하고는 프로테스탄트들은 처음부터 구유 만들기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종교 개혁 이전 영국에는 아기 요람처럼 생긴 긴 타원형의 구유가 있고, 다진 고기가 든 크리스마스 파이를 만드는 고유한 구유 만들기 풍습이 있었다.”

 

프란치스꼬 성인은 멋지게 번쩍이는 오늘날의 구유를 보고 웃을 것이며, 아마도 살아 있는 동물들과 함께 바깥에 서 있기를 더 좋아할 것이다. 그리고 오늘 우리들 앞에 서서 설교를 한다면 이렇게 말할 것이다. “이 즐거운 광경보다 더 깊은 것을 바라보십시오. 짐승들의 마구간에서 여러분들의 영원한 음식이 되신 여러분의 하느님을 보십시오. 수놓인 옷도 없이 헝겊 조각에 싸인 힘없는 아기를 보십시오. 초라한 옷을 입은 아기의 부모님을 바라보십시오. 작은 불씨만이 비추이는 춥고 더러운 동굴을 느껴 보십시오. 그리고 더할 수 없는 사랑과 처절한 고통을 아는 인간의 마음을 취하시어 죄인과 나병 환자를 팔로 그러안으시고, 볼에 흐르는 눈물을 못에 뚫린 손으로 닦아 주시는 여러분의 하느님을 경배하십시오. 가난하고 겸손하신 여러분의 하느님을 경배하십시오.” (“Catholic Digest” 1990년 12월호에서 배봉한 옮김)

 

[경향잡지, 1992년 12월호, 레오나르도 폴리(성 프란치스꼬회 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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