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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미사]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왜 주일마다 미사를 거행해야 하나요?
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08-01-11 조회수2,000 추천수0

[전례와 생활]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왜 주일마다 미사를 거행해야 하나요?

 

 

* 일러두기

 

이번 달부터 게재되는 <전례와 생활>의 주제를 ‘미사’로 선정하였고, 아울러 전례에 관련된 내용도 함께 소개할 것입니다. 가톨릭 신앙인으로서 미사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가지기는 쉽지 않습니다. 식상할 수 있는 주제라 생각할 수 있겠으나, 우리는 세상에서 미사를 완전히 이해 할 수 없기에 미사에 대해서는 강조하고 또 강조해도 언제나 모자랄 뿐입니다. 

 

독자들이 쉽게 접근하고 이해할 수 있는 길을 찾던 중 전례학자이자 저술가인 Klemens Richter 교수의 소책자 《Was ich von der Messe wissen wollte, 내가 미사에 대해서 알고 싶었던 것들》과 《Was ich vom Kirchenjahr wissen wollte, 내가 전례력에 대해서 알고 싶었던 것들》이라는 책이 비교적 쉬운 질문과 알찬 내용, 짧은 대답형식으로 구성되어 있어 이 두 권의 소책자를 중심으로 본인이 편역을 하였습니다. 아무쪼록 가톨릭 신앙의 핵심이자 원천인 미사와 전례력에 대해 보다 많은 이해를 가지며 그로 인해 한 단계 깊은 신앙의 성숙이 이루어지기를 소망해봅니다. - 편역자 주(註)

 

 

미사 - 첫 번째 이야기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왜 주일마다 미사를 거행해야 하나요?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주간 첫날’(사도 20,7-12), ‘부활의 날’(마태 28,1; 마르 16,9; 루카 24,1; 요한 20,1)에 모여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고 친교를 이루며 빵을 떼어 나누고 기도하는 일에 전념하였다.”(사도 2,42) 공동체는 ‘주님의 날’(묵시1,10)에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부르심에 찬미와 찬양 그리고 감사로 응답하기 위하여 모입니다. 이 모임은 그리스도교 공동체에게는 매우 중요하여 스스로를 ‘공동체 집회’로, ‘교회(에클레시아)’로 표시할 정도였습니다.(예. 사도 4,31; 12,12; 14,27; 15,30; 1코린 11,17-20)

 

그러나 신약성경 시대에 이미 주일에 대한 권고 또는 주의가 통용되었습니다. : “어떤 이들이 습관적으로 그러듯이 우리의 모임을 소홀히 하지 말고, 서로 격려합시다.”(히브 10,25) 이미 1세기 이래 주님의 부르심에 상응하여 주일에 대한 의무가 공동체 안에서 생겨났습니다. “주님의 주일마다 여러분은 모여서 빵을 나누고 감사드리시오.”(디다케, 열두 사도들의 가르침, 14장) 그러니까 이날은 임의로 정한 어느 한 날이 아니라 주님의 날인 주일(主日)이며, 근원 축일이고, ‘전례주년 전체의 토대이며 핵심’(전례헌장 106항)이 되는 날입니다.

 

112년에 비트니아와 폰토 지방(지금의 터키)의 총독인 플리니우스(Plinius)가 당시 로마 황제인 트라야누스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리스도인에 대해서 “그리스도인들의 한 가지 유일한 잘못은 그들의 습관대로 정해진 어느 날에 그들이 모인다는 점입니다.”하고 보고하였습니다. 304년 2월 12일에 카르타고에서 49명의 그리스도인들이 법정에 세워졌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로마 황제의 금령에 맞서서 모이기’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이 그리스도인이었다는 것이 죄목이 아니라 모였다는 것이 그들의 죄목이었습니다. ‘왜 모이느냐?’는 질문에 그들이 ‘모이지 않는 그리스도인은, 주님의 날이 없는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인일 수 없기 때문입니다.’라고 대답하였습니다.

 

공동체 주일 집회의 중심 되는 내용은 주님의 식사, 우리 주님의 죽음과 부활에 대한 기념, 즉 주간 부활축제입니다. 이 식사 잔치는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라.”하신 그분의 명을 따르는 것입니다. 주일의 공동체 집회와 성찬례 거행의 연결은 공동체의 본질에서부터 요구되는 사항입니다. 여기에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세 가지 근본과업, 곧 신앙을 증거하는 과업(Martyria, 마르티리아), 신앙을 거행하는 과업(Liturgia, 리투르기아) 그리고 신앙을 실천하는 과업(Diakonia, 디아코니아) 이렇게 세 가지가 서로 결합되어 있습니다. 달리 표현하면 사도들의 가르침을 듣고(증거), 빵을 나누어 먹고 기도하는 일에 전념하고(전례), 서로 도와주며(봉사) 신앙을 실천하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기쁨에 차서 하느님을 찬양하는 그들의 모습을 보고 믿지 않는 모든 사람들이 하느님을 믿게 되었다고 사도행전은 우리에게 전하고 있습니다.(사도 2,42) 아울러 복음선포는 식사잔치와도 결부되어 있는데, 이는 “주님께서 오실 때까지 주님의 죽음을 전하는 것입니다.”(1코린 11,26)라는 고백과 함께 성찬 전례에서의 감사기도를 통해서뿐만 아니라 독서들과 성경해설(참조. 사도 10,7.11)을 통하여 증명되고 있습니다.

 

말씀의 전례와 성찬례 거행이 아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어 서로 떼려야 뗄 수 없는 하나를 이루는 것처럼 일상에서 그리스도인의 삶과의 결합에도 소위 삶의 예배는 나타나야 합니다. 이 말은 전례적인 행위와 사회적인 삶 또한 서로 분리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정기적인 공동체 모임이 필요하다는 것은 일반적인 인간적 체험에서도 인정하는 사실입니다. 모임을 생각하지 않는 공동사회는 없습니다. 사람들은 서로 좋아하는 이들을 만나고 싶은 열망을 가지고 있습니다. 따라서 주일 계명을 지적하는 것이 꼭 필요한 사항은 아닙니다. 단 그리스도교 공동체 집회의 본 의미가 더 이상 이해될 수 없는 지역에서만 주일 계명은 필요했습니다.

 

아울러 주일의 집회라는 이 주제와 관련하여 신자들의 언어사용 습관에 대해서도 한번쯤은 생각해봄직한 단어가 있습니다. 사회에서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언어인 ‘일요일’이란 단어를 우리 또한 아무런 생각이나 거부감 없이 습관적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일요일’이란 표현은 고대 이교문화에서 태양신 숭배사상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일요일이 아니라 우리의 신앙의 근원이자 뿌리가 생겨난 날, 곧 ‘주님 부활의 날’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자신의 언어 표현에서 ‘주님의 날’, ‘주님 부활의 날’을 나타내는 ‘주일(主日)’이라는 말을 즐겨 사용하고 습관화되도록 해야 하지 않을까요?

 

단어 하나가 이미 내가 신앙인임을 드러내줍니다. 마치 믿지 않은 이들이나 타종교인과 함께 식사를 하는 자리에서 십자성호를 자신 있게 그리고 떳떳하게 긋는 것이 주님을 증거 하는 표시가 되듯이, 일요일이란 단어 대신 ‘주일’이라고 표현할 때 그 말은 저절로 주님을 증거 하는 행위가 되는 것이니까요.

 

* 이번 호부터 <전례와 생활>을 집필해 주실 최창덕 신부님은 1978년 사제품을 받고,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대학에서 전례학 석사와 전례학 박사, 대구가톨릭대학 신학대학과 미국 교포사목을 거쳐 현재 포항 장량성당 주임으로 사목하고 계신다.

 

[월간 빛, 2007년 12월호, 최창덕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신부(장량성당 주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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