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미사

전례/미사

제목 [사순부활] 사순시기
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08-01-10 조회수4,156 추천수0

[이달의 전례] 사순 시기

 

 

역사적 개관

 

이미 2세기부터 그리스도교인들은 부활 축제를 앞두고 이틀 동안 슬픔의 단식을 지켜왔고, 3세기에 이르러 비록 완전한 단식은 아닐지라도 성주간 전체에 걸쳐서 단식이 확산되었다는 사실을 그 시대에 나온 여러 문헌들에서 쉽게 찾아 볼 수 있습니다.(사도교훈, 디오니소스의 편지) 그리고 4세기에 와서 첫 번째 공의회인 니체아 공의회(325년)는 그 기간도 40일로 발전한 준비시기인 사순절(Quadragesima)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습니다.

 

사순절의 기원과 내용을 살펴보면, 부활절 준비로서의 단식과는 별도로 40일 동안의 단식이 3세기 말이나 또는 4세기 초 에집트에서 나타납니다. 이 단식은 파스카를 준비하기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예수님께서 요르단 강에서 세례를 받으신 후 40일 간 단식하신 것을 기념하기 위한 것으로 보입니다.(마태 4,2; 루가 4,1) 물론 교부들은 이 부분에서 출애급 이후 광야에서의 40년 간의 유랑의 길을 생각했으며, 시나이 산에서의 모세의 40일 간의 단식을 생각했습니다.(출애 34,28; 1열왕 19,8) 하지만 이 단식은 매우 짧은 시기에 주님의 죽음과 부활을 지내기 위해 참회하며 준비하는 형태를 띠게 되었습니다.

 

원칙적으로 40일을 의미하는 사순절은 부활 전 6주일에 시작하지만, 로마교회에서는 공적 참회자들을 교회로 다시 받아들이는 전례가 거행되었던 성 목요일까지 연장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주일에는 단식을 하지 않았고, 또 5세기 사람들은 실제 단식하는 날을 40일로 만들고자 하였기 때문이지요. 그럼 어떻게 계산하여 40일을 만들어 내었는지 살펴보겠습니다.

 

이것은 두 단계를 거쳐야 했는데, 먼저 성 금요일과 성 토요일을 파스카 삼일에서 분리시켜서 40이라는 숫자에 계산했다는 것입니다. 그 후에 시작을 6주일 전 4일을 40일에 포함시킴으로써, 오늘날 수요일을 그 시작일로 계산한 것이지요. 즉 6주간×7=42일-6일(주일)+4일=40일이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시작하는 수요일이 오늘날 재의 수요일의 기원이 됩니다.

 

8세기 말에 나온 로마 예식서(Ordines Romani XXII)는 재의 수요일 전례에 대해 잘 알려주고 있는데, 이 날 모든 백성들은 팔라티노 언덕 기슭에 있는 성녀 아나스타시아 성당에 모여서 교황을 따라 아벤티노 언덕의 성녀 사비나 성당으로 행렬하여 갑니다. 행렬을 하는 동안 ‘옷을 바꾸어 베옷을 입고 잿더미에 파묻혀 단식하며’라는 후렴을 노래합니다.

 

이렇듯 로마의 전례문은 영적의미를 띠고 있었는데, 10세기 라인강 지방의 프랑크 전례에서는 여기에 감각적 표현을 덧붙입니다. 그것이 바로 머리에 재를 얹는 예식입니다. 재를 머리에 얹는 것은 참회와 슬픔의 표지로써 구약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초세기 그리스도인들도 이러한 관행을 개인적으로 자주 행하였다고 합니다. 이러한 행위는 참회자들이 자신의 참회를 공적으로 드러내는 것이기는 하지만, 어떤 특별한 전례적 의미를 내포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10 - 11세기에 접어들면서 이 관행은 로마에 들어오게 되었고, 곧 공적 전례예식의 한 요소가 되었습니다. 1091년 이탈리아 베네벤토에서 열린 공의회는 다음과 같이 선언하고 있습니다. “재의 수요일에 모든 성직자와 평신도, 남자와 여자 모두 재를 받을 것이다.”

 

 

의미 부여

 

이처럼 기간이 길고 엄격한 단식 실천을 위한 초대교회의 동기는 유대인들과 많은 이방인 종교들에서의 엄한 단식 관습에 대한 선교적인 고려 외에도 단식을 기도의 보강으로, 영을 모시기 위한 준비로, 부활성야에 세례 준비자들의 세례를 받고 성체성사를 모시기 위한 가장 적합한 준비로 여기는 데 있습니다. 또한 각자의 소비를 절제함으로써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실제적으로 도움을 줄 수 있다고 여긴 까닭이기도 했지요.

 

초대교회가 그 당시 공적 참회자들과 세례 준비자들에게 전례적, 금욕적인 노력을 요구했던 바를 신자들 역시 뜻을 같이 해서 함께 그리고 서로를 위해 실천한 것입니다. 물론 주님의 수난에 함께 하고자 하는 연대감 또한 사순절의 강렬한 동기였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사순절의 새 규정

 

전례력 개정에서 새 규정은 재의 수요일을 사순시기(단식시기)의 시작일로 확정합니다. 독일어 언어권에서는 ‘단식 시기(Fastenzeit)’라는 표현 외에도 미사 전례서나 시간기도(성무일도)에서는 ‘부활절 속죄 시기’라는 표현을 쓰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 단어로써 부활절 준비라는 의미가 보다 포괄적으로 표현되고 있다고 사람들은 이해한 것이지요. 또한 이 표현은 무엇을 포기하는 행위(담배나 술, 또는 나쁜 습관 등) 외에도 하느님 말씀에 보다 열려진 자세와 전례의 적극적인 참여 그리고 보다 실제적인 사랑과 자선의 행위를 베푸는 의미로도 이해했습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전례헌장은 이 시기의 의미에 대해서 아래와 같이 정의하고 있습니다. “사순 시기는 두 가지 성격을 지니고 있으니, 특히 세례의 기억이나 준비를 통하여 또 참회를 통하여 신자들이 더 열심히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기도에 전념하며, 파스카 신비의 경축을 준비하게 함으로써 전례에서나 전례 교리 교육 이 두 가지 성격이 더욱더 분명하게 제시되어야 한다.”(전례헌장 109항)

 

글로리아와 알렐루야는 이제까지와 마찬가지로 부활성야까지는 노래하지 않습니다.

 

 

재의 수요일에 대한 묵상

 

한때 푸르고 고운 종려나무 가지가 불속에서 타고 그 남은 회색빛의 재가 부활절의 참회시기 시작인 우리 앞에 놓여 있습니다. 우리는 이 재를 축성하고, 축성된 재는 우리의 이마나 혹은 머리 위에서 십자가 형태로 그어질 것입니다. 이렇게 하는 데는 여러 가지 심오한 뜻을 알려주는 표지가 담겨져 있습니다.

 

재가 우리에게 알려주는 그 첫 번째 표지는 무엇보다도 우리가 살아가면서 자주 잃어버리거나 잊어버리고 또 의식적으로 몰아내었던 것을 다시금 생각하게 하여 그 뜻을 깨닫게 해줍니다. 그것은 우리의 인생의 한계, 인생의 끝은 곧 죽음이라는 사실입니다. 달리 말한다면 우리는 이 죽음을 피할 수 없이 맞아야 하는 인생, 즉 우리 인생길이란 바로 죽음을 향해  가는 길이라는 사실입니다. 세상에서 한없이 계속되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인생에서 우리가 바라고 꿈꾸어 왔던 바를 완전하게 실현시키지는 못합니다.

 

우리가 인생이라 부르는 그 안에서 자신의 꿈과 이상을 펼쳐나가고 아름다운 색을 칠하고, 향기를 내게 하고 아름다운 꽃을 피우기는 하지마는 그러나 그 무엇도 영원히 내 곁에 머물러 있게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언젠가 인생은 내게 모든 것에서 작별하고 떠나기를 요구합니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 내가 가지고 있던 것, 내가 이루어 놓았던 모든 것에서 떠나야 하는 죽음은 피할 길 없이 우리에게 와서 나를 덮칩니다.

 

건강으로부터의 이별, 생생한 발랄함과 생명력으로부터, 그토록 간절히 소망했고 노력해서 이제 겨우 찾아낸 인생의 행복에서부터도 이별이요, 우리가 사랑하고 또 우리를 사랑하는 사람들로부터도 이별이요 그리고 마침내는 인생 전체로부터도 작별을 고해야 합니다. 이 모든 것은 우리를 우울하게 만들고 슬프게 만듭니다.

 

우리가 받는 재를 가지고 자신을 이 재와 함께 나타내 보이는 사람은 누구나 어쩔 수 없이 인생의 이 슬픈 사실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기에 사람은 재와 함께 살아갑니다. 비참함과 함께 살아간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팡세》의 작가 파스칼(R. Pascal)은 “인간의 위대함은 그 자신이 비참하다는 것을 아는 데 있다.”고 했습니다.

 

재가 우리에게 주는 의미가 이처럼 부정적이고 슬픈 것만이 전부는 아닙니다. 종려나무 가지가 불 속에서 타고 남은 회색빛 재는 전혀 다른 면을 우리에게 일깨워줍니다. 재는 생물학적으로 보면 단순한 먼지나 생명이 없는 물질, 완전한 연소과정에서 남은 생존 불가능한 단순한 찌꺼기가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재에서 항상 되풀이되어 새 생명이 생겨납니다. 재는 생명을 공급해주는 재료로써 새 생명의 생산과정의 기본토양이 되며 모태가 됩니다.

 

새로운 생명의 미래를 여는 희망을 열어 보입니다. 이 사실은 인간역사 안에서 깊이 새겨졌습니다. 불사조의 신화에서 그 생생한 표현을 찾을 수 있습니다. 전설적인 새인 불사조는 스스로가 타오르는 불 속에 자신을 던져 재가 되게 하고, 자신의 그 재 속에서 새로운 불사조가 되어 나온다고 합니다. 재는 생물학적으로는 희망의 신호가 됩니다.

 

한계에 부딪히고 끝이 있으며 죽음으로 갈 수밖에 없는 인생으로 표시된 우리의 삶 속에는 동시에 동경과 약속 그리고 새로운 모습의 인생이라는 희망이 숨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재를 받고 자신을 재와 함께 드러내 보이는 사람은 누구나 삶의 다른 면, 희망의 진리를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삶은 결코 완전히 없어지지 않습니다. 삶은 비참한 곳으로 흘러가지 않고 새로운 모습으로 변화됩니다.

 

마지막으로 이 재는 우리에게 귀중한 진리를 깨우쳐 줍니다. 이 재는 우리 모두에게 십자표시를 선물로 주게 합니다. 십자가는 나자렛이 고향인 한 청년, 다른 사람과 마찬가지로 한계성을 가지고, 미움을 받고 죽어간, 참으로 비참하게 죽어간 예수님의 역사를 기억하게 합니다. 그렇지만 그분은 인생의 비참함 그 자체인 죽음으로 가면서도 동시에 새 생명에 대한 이 희망과 동경 그리고 그분의 삶이 뜬구름이 아니라 생명의 하느님께서 그것을 채워주시고 완성시켜 주셨음을 알려줍니다.

 

전설 속의 불사조는 바로 예수님 안에서 이루어졌습니다. 십자표시의 재를 선물 받고 그로써 자신을 나타내는 사람은 누구나 이제 나자렛 예수님의 역사를, 그분의 삶과 죽음 그리고 부활을 고백합니다. 이제 우리는 그분 앞에 서 있으며 그분과 함께 살아갈 것입니다.

 

사순절의 시작에 회색 빛 재가 주는 뜻을 깨닫는 사람은 이제 자기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그리고 우리가 궁극적으로 무엇을 희망할 수 있는지를 똑바로 알고 살아갑니다. 우리가 받는 재는 이처럼 삶의 심오한 신비를 알려주며, 그 신비의 완성이자 주인은 바로 수난하시고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일깨워줍니다. 재는 바로 그분의 삶입니다. 신자 가정 모든 이에게 뜻깊은 사순절이 되기를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월간 빛, 2004년 3월호, 최창덕 F. 하비에르 신부(성바울로성당 주임)]

태그
COMMENTS※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26/500)
[ Total 27 ] 기도고침 기도지움
등록하기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파일 찾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