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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전례]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전례 개혁 정신과 전례적 삶
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10-08-07 조회수2,091 추천수0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전례 개혁 정신과 전례적 삶

 

 

예전에 우연히 어떤 수녀님들의 대화를 들은 적이 있었다. 한 수녀님이 "난 이번에 전례가 무엇인지 확실히 알았어."라고 하자 다른 수녀님이 "전례가 뭔데?"라고 물었고, 처음에 말한 수녀님이 "응, 그건 신부님 맘대로 하는 거야."라며 서로 신나게 웃는 것이었다. 이 대화에는 '사제와 수도자와 교우들이 어떤 존재인지, 전례는 무엇인지' 등과 관련한 굵직한 질문들이 들어 있어 의미심장하게 들렸다. 이런 질문들에 대한 진지한 고민과 성실한 대답이 제2차 바티칸 공의회라 할 수 있겠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일관된 정신이란 무엇일까?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밝은 면과 고통스럽고 어두운 면을 동시에 갖고 있는 교회가 복음에 비추어 어제와 오늘의 자기 모습을 바라보기를 두려워하지 않은 것이기에 '참된 용기'를 보여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공의회는 자신 속에 웅크리고 앉아 고립되지 않고 하느님께서 인도해 주실 것을 믿으며, 갈라진 형제들을 비롯한 선의의 모든 사람이 함께해 주리라고 신뢰했기에 가능했던 일이었으므로 '하느님과 인간에 대한 진정한 믿음과 사랑'을 보여준 것이며, 하느님께서 가리키시는 방향을 향해 나아가는 데에 감수해야 할 시행착오와 실패의 두려움까지도 기꺼이 받아들인 것이기에 '미래에 대한 흔들리지 않는 굳센 희망'을 보여준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러한 정신이 공의회의 일관된 정신이며, 전례 개혁 정신이라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흔히 공의회의 정신을 가리키는 말로 현대화, 쇄신, 적응, 개방 등의 의미로 풀이된 'aggiornamento' 라는 단어가 표어처럼 사용되었지만 공의회의 정신을 그 표현 하나로 다 요약하기는 어렵다고 생각된다. 그것은 공의회가 보여 준 정신과 의미가 그 만큼 다양하고 풍요롭다는 뜻이다.

 


전례가 과연 그런 것일까?

 

우리는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전례를 '어떤 특별한 예식(행사)을 잘 치러내는 것', 그래서 '구체적인 우리의 삶과는 별로 상관없고 특정한 때에나 하는 그 무엇' 정도로 오해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이런 이유에서 많은 이들이 전례를 어렵고 지루한 것으로서 세세한 규정을 하나도 어기지 않고 지켜야만 합격할 수 있는 시험 같은 것으로 생각하는 경우를 퍽 자주 보았다. 그래서 세세한 것을 규정하고 까다로운 규정들에 능통하며 어렵고 복잡하게(?) 만들어야 전례를 '잘 안다'고 착각하기도 한다. 간혹 본당에서는 전례를 두고 갈등과 불화가 빚어져 심할 경우 당사자들이 서로 대립하고 갈라지기도 한다. 그리스도께서는 사람들을 위하여 자신을 내놓으셨는데 전례 때문에(?) 그분을 믿는 사람들이 갈라진다니 이처럼 황당하고 어처구니없는 일이 또 어디 있을까?

 

 

전례 이해와 교회 이해는 손바닥 안과 밖의 관계이다

 

필자의 견해로 전례와 관련된 이런 오해들은 교회에 대한 균형 잡힌 이해에서 해결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으리라고 본다. 전례와 교회를 이해하는 것은 깊은 상관관계가 있다. 공의회는 하느님 백성에 사제, 수도자, 평신도가 각기 고유하고 독특한 역할을 갖고 모두 포함되며, 이로써 교회가 교계 제도와 조직 적 면모를 분명히 지니고 있지만 동시에 누구나 다 사랑의 완덕으로 부름받고 있다고 말한다(교회에 관한 교의현장[인류의 빛]39항 참조). 이 하는님의 새 백성은 하느님을 섬기는 사제들이 되었고, 모든 활동을 통하여 자신을 하느님께서 기쁘게 받아주실 거룩한 산 제물로 바치고, 세상 어디에서나 그리스도를 힘차게 증언하며, 사람들에게 영원한 생명에 대하여 자신들이 간직하고 있는 희망을 설명해 주어야 할 사명이 있음을 역설한다(교회 헌장. 10항 참조).

 

교회가 자신의 정체성과 사활이 걸려 있는 이런 본질적인 사명을 이루어 가는 과정에서 전례는 빼놓을 수 없는 역할을 한다. "전례는 신자들이 그리스도의 신비와 참 교회의 진정한 본질을 생활로 표현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드러내 보이는 데에 가장 크게 이바지한다."(거룩한 전례에 관한 헌장 [거룩한 공의회], 2항), 전례는 그리스도를 선포할 수 있도록 힘을 북돋워 주는 것으로서 전례를 거행할 때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우리 생명을 되찾아 주신 그 파스카 신비를 선포하는것이다. 왜냐하면 이 파스카 신비를 통해서 인간을 구원하고 하느님께 완전한 영광을 드리는 일이 성취되었기 때문이다(전례 헌장, 5항. {가톨릭 교회 교리서}, 1067-1068항 참조).

 

그러므로 전례가 비록 예식적인 측면과 불가분의 관계가 있지만 그저 '어떤 특수한 예식(행사)을 잘 치르는 것'이나 '예식과 관련된 세세한 규정들을 안 빼먹는 것' 정도로 여긴다면 너무나 폭이 좁은 이해라고 아니할 수 없다. 그리스도께서는 항상 교회에, 특별히 전례 안에 현존하시는데 그 안에서 교회는 주님을 통하여 영원하신 아버지께 예배를 드리는 것이다. 그러므로 전례 안에서 그리스도와 그분의 지체들이 하느님 아버지께 완전하고 공적인 예배를 드리는 것이다(교회 헌장, 7항 참조).

 

 

전례는 우리의 삶 그 자체

 

앞에서 살펴본 대로 전례가 그리스도의 파스카 신비를 거행하는 것으로서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하느님 아버지께 참되고 영원한 예배를 드리는 것이라고 한다면 바로 이것이야말로 우리(교회)가 세상 안에서 존재하는 이유가 아닐까? 그래서 전례는 하느님 백성이 죽을때까지, 또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언제나 어디서나 삶의 현장에서 여러 가지 모습으로 꾾암옶아 계속해야 하는것이 아닐까?

 

그러므로 '교회(우리)는 전례를 거행하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라고까지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바로 이런 이유로 우리를 가리켜 사제직을 수행하는 백성이라고 부르는 것이리라. 그래서 우리에게 전례는 해도 좋고 하지 않아도 무방한 것이 아니라, 하지 않으면 우리의 존재 이유를 우리 스스로 망각하는 것이요, 우리에게 살아갈 힘과 용기를 주는 그 원천을 스스로 막아 버리는 것이 되는 것이다(전례헌장, 10항 참조). 

 

예부터 그리스도인들은 삶으로 전례를 거행하는 것이라고 깨달았기에 매일의 삶을 전례를 거행하는 자세로 살았고 거기서 참혹한 박해도 기꺼이 이겨 낼 수 있는 용기와 힘을 얻었다. 한국 교회 박해 시대의 교우들은 그들의 삶으로 하는님을 예배하였다. 그들은 미사와 여러 성사들을 중심으로 언제나 기도하고 나누는 삶을 살았는데, 그들에게 하느님을 예배한다는 것은 단지 미사에 참석하고 성사를 배령하는 것만이 아니었고, 살고 죽는 모든 것이 온통 전례를 거행하는 것이었다. 이것을 본 파리 외방 전교회의 선교사 보두네 신부는 감격하여 1889년 보고서에서 뮈텔 주교에게 "교우들이 사는 모습을 보면 마치 사도행전에 나오는 초대 교회에 와 있는 것과 같다."(김진소.{천주교 전주교구사} 364면)라고 썼던 것이다.

 

사도행전에 제시되는 초대 교회의 모습(사도 2,42-47;4,32-37)을 보아도 거기에서는 전례가'세세한 규정을 까먹지 않고 잘 지키는 것'정도로 나타나지 않는다. 그것은 그들의 삶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했을 때 그들은 사람들에게 '두려움과 호감의 대상'이 되었다(사도 2,43,47 참조)여기서 오늘날 한국 천주교 신자 수의 증가가 의외로 높교 천주교에 대한 호감도(?)또한 높다는 통계 조사로 위로를 삼는 것은 멋쩍다. 그 수치와 반 비례하는 모습도 엄청나기 때문이다.

 

초대 그리스도인들이 사람들에게 두려움과 호감의 대상이 되었던 것은 그들의 삶이 하느님을 체험할 수 있게 해주는 삶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인들을 두려워하지도, 호감을 갖지도 않는다. 자기들과 별 차이가 없기 때문이다. 물론 초대 교회도 완벽한 공동체는 아니었다. 그때도 하느님과 공동체를 속이는 사람들이 있었고(사도5,1-11), 바오로 사도가 수많은 편지를 쓰게 된것도 많은 경우 공동체의 불화와 혼란이 원인이기 때문이었으니 말이다 그러나 그들은 부단히 성령과 사도들의 인도를 따라가며 복음 말씀을 따라 살고자 노력했다. 개인이나 공동체나 이런 삶을 사는 것이 하느님을 삶으로 예배하는것, 곧 삶으로 전례를 거행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으리라. 이것을 잘할 수 있도록 돕기 위한 것이기에 여러 규정과 절차들이 필요하고 또 소중한 것이다. 그러나 비유컨대 우리가 보아야 할 것은 달이지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이 아니지 않겠는가.

 

 

나가면서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전례의 의미는 엄청나게 크고 넓고 깊다. 그 의미를 따라 살자면 우선 우리가 '삶으로 하느님과 서로를 섬기며 살도록 불린 행복한 존재들'이라는 자각이 분명해져야 한다고 본다. 결국 이것은 '우리가 예배해야 할 분은 오직 하느님뿐이요 우리는 모두 형제자매' 라는 신앙 고백과 우리(교회)의 정체성에 대한 자각이기도 한다.

 

많은 목사님들과 개신교 형제들이 자기를 소개할때 현재 어떤교회에서 그곳 신자들을 '섬기고'있다고 말한다. 이것이 정말이냐 아니냐 하며 따질 필요가 없다. 아직까지 우리에게는 말로라도 그렇게 할 용기(?)와 자각이 없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망할 것은 아닐지도 모른다. 우리나라 어느 수도 공동체의 장상이 자기 소임의 좌우명으로 선택한 것이 '서로 섬기자'는 것이었다고 들었을 때 오래토록 가슴 뭉클했던 기억이 새롭다.

 

주교와 사제, 교구민들이 서로를 섬기고 있다고 말하고, 수도회 장상과 공동체가 서로를 섬기고 있다고 여기며, 교우들도 서로를 섬긴다고 말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으랴. 그래서 전례가 우리의 삶과 무관한 것이 아니라, 하는님을 아버지로 모시고 서로 형제가 되어 섬기며 살도록 부름 받은 우리(교회)가 날마다 일상에서 계속하는 사람의 구체적인 표현이라고 여기게 되고, 매일의 시간들이 하느님을 예개하는데 바쳐지는 소중한 순간이라고 여기게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느님께서 공의회를 통해 가르쳐 주신 정신과 전례의 의미도 그런 것이 아닐까. 그러고 그 정신을 잊지 않고 끊임없이 기억하며 사는 것은 우리를 믿고 맡겨 주신 복된 천명이 아닐까.

 

마지막으로 어렵고 힘든 여건 속에서도 하느님과 이웃을 믿고 사랑하면서 삶의 현장에서 몸과 마음으로 생각과 말과 행동으로 하느님을 예배하는 삶 곧 전례를 거행하며 살고자 애쓰는 모든 분에게 하느님께서 넘치는 기쁨과 용기를 주시기를 빌어 본다.

 

[김훈 신부 / 김종헌 신부의 전례 & 전례음악 홈페이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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