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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전례] 전례학 입문3: 전례와 파스카
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06-10-13 조회수3,741 추천수1

전례와 파스카 (전례학입문 3)

 

 

전례는 파스카의 동반자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한마디로 전례를 위한 공의회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1959년 1월25일 교황 요한 23세는 “쇄신(Aggiornamento)”이라는 주제를 가지고 공의회 개최를 선포하였다. 그리고 이 공의회에서 강조한 쇄신의 정신은 다른 어느 곳에서보다 전례 안에서 확실하게 구현되었다. 그래서인지 공의회의 여러 문헌 중에서 제일 먼저 공포된 것도 전례헌장이었다.

 

전례 헌장에서는 교회가 하느님 백성을 모으는 깃발이라고 선언하면서(2항), 전례는 교회 생활의 정점이며 원천이라고 정의한다(9항). 하느님 나라를 향해 나부끼는 깃발의 중심에 전례가 위치하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전례란 하느님 백성이 주님께 드리는 공적인 예배이며 하느님께서 피조물인 교회에 자신을 건네주시는 친교의 마당이기 때문이다.

 

 

전례가 우리를 데리고 가고 싶은 곳(언덕)

 

만약 전례가 살아있는 우리처럼 어떤 감정을 가진다면 그것은 분명히 사랑일 것이다. 왜냐하면 전례 안에는 하느님의 아름다운 은총과 우리네 인간의 아름다운 갈구가 만나기 때문이다. 이 두 가지 아름다움, 은혜로움과 간절함이 겹쳐지는 것은 필경 사랑일 것이다.

 

전례가 살아 움직이는 어떤 것이라면 그 전례는 그리스도를 따르는 우리를 어디로 데려가기를 원할까? 전례는 자신이 사랑하는 우리들을 하느님을 만날 수 있는 신비로운 언덕으로 이끌어 데려갈 것이다. 그리고 이 신비의 언덕을 우리는 파스카라고 부른다. 다시말해서 전례는 저 파스카의 신비로 신자들을 이끌어 그들과 하느님이 사랑 안에 하나가 되도록 보듬어 줄 것이다. 그래서 전례는 파스카로 신자들을 이끌어주는 가장 중요한 길이라고 공의회는 말한다. 이렇듯이 전례가 우리에게 원하는 것은 파스카의 신비로 함께 나아가는 것일 것이다. 머리는 하느님 나라를 그리워하면서도 몸은 세속 위에 둔 채 조금 기뻐하고 더 많이 슬퍼하며 살아가야 하는 하느님 백성인 우리를 토닥이고 부축하며 전례가 우리와 함께 가고싶어 하는 곳이 저 그리운 “파스카”라는 곳이라는 것이다.

 

가톨릭교회의 전례는 일곱 가지 성사와 성무일도, 전례주년, 준성사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일곱 가지 성사를 포함한 전례는 우리가 기뻐할 때는 찬미를 통해 더 큰 기쁨으로 우리를 이끌며, 슬퍼할 때는 위로자의 모습으로 우리를 어루만진다. 우리가 분노할 때는 인내를 가르치는 선생님이 되며, 우리가 절망할 때는  절망을 넘어서는 방법을 일깨워준다. 우리가 잘못 길을 걸을 때는 우리를 위해 이정표가 되며 우리가 수렁에 빠졌을 때 사다리가 되어 다시 오르게 한다. 그리하여 우리 모두가 함께 파스카를 향해 나아가도록 우리를 향하여 열려 있는 것이다. 지금도 전례는 파스카를 그리워하며 우리들에게 속삭이고 있다. “그대 하느님의 사람이여, 함께 갑시다. 저 파스카의 언덕으로...”

 

 

전례적 파스카의 의미

 

그러면 파스카라는 말이 무슨 뜻인지 알아보기로 하자. “파스카”라는 말은 사전적으로는 통과함, 지나감 등을 의미하는 말이다. 그런데 파스카라는  이 말안에는 우리 교회가 선포하는 모든 신앙내용이 요약되어져 있다. 파스카라는 말 안에 우리 인간을 구원하시려는 하느님의 자비의 역사적 자취가 그대로 녹아 있다는 것이다.

 

성서적인 사건으로서의 파스카는 구약의 파스카와 신약의 파스카로 나눌 수 있다. 구약의 파스카란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에서 당했던 죄와 죽음의 노예살이에서 하느님의 권능에 의지해 홍해를 건너고 황야를 가로질러 약속된 땅으로 들어가는 해방(Exodus)을 말한다. 이에 비해 신약의 파스카란 하느님의 아들이시며 빛이신 예수그리스도께서 죄와 죽음의 상태에 놓인 인류를 부활과 생명의 하느님 나라로 이끌어 가시기 위해 몸소 십자가의 수난을 당하시고 부활하신 사건을 의미한다. 따라서 한마디로 생명의 나라로 하느님과 함께 여행을 떠나는 것을 파스카라고 하겠다. 그리고 전례는 파스카에 도달하기 위해 우리를 싣고 있는 배(교회)의 돛인 것이다. 

 

파스카라는 말의 어원을 가만히 살펴보면 어떻게 우리가 파스카의 신비에 더 잘 참여할 수 있는지를 깨닫게 해준다. 파스카(Pascha)라는 말은 성서의 히브리말 뻬-삭(Peh-Sagh)에서 유래했다고 본다. 이 말은 말 그대로 통과해 나가는 것, 이집트의 노예살이에서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으로 넘어가는 것(Passover)을 의미한다. 이 말은 우리가 파스카의 신비에 제대로 참여하려면 우리도 통과해 나가고 넘어가야 한다는 것을 일깨워준다. 우리가 스쳐지나버려야 할 것들이 우리 주위에 얼마나 많은가? 그리고 그것들을 뛰어넘지 못하고 얼마나 많이 우리는 넘어지는가? 우리가 넘어질 때 우리도 울고 또 우리를 파스카로 데려가길 원하는 전례도 운다. 그러나 그 넘어짐이 끝은 아니다. 넘어지면 다시 일으켜 세우는 전례가 있으니 고해성사와 병자성사, 축복식 등이 우리를 일으켜 세워 다시 저 파스카를 향하게 한다. 이렇듯이 전례는 우리가 넘어져도 다시 일어나게 한다. 

 

파스카의 또 다른 어원을 신학적으로 주장하는 사람들 중에는 희랍어 파스코(Πασχ?)라는 동사의 역할을 강조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 말은 수난하다, 특별한 것을 견뎌내다, 몸과 마음이 상할 정도로 열광하다라는 뜻이 있는 동사이다. 후에 라틴어 Patior, Passio등의 어원이 되는 말인데 이는 그리스도의 수난, 십자가의 고통 등을 지칭한다. 그리스도의 수난과 십자가는 강요된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사랑 의한 것이었다. 마치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라면 우리도 무엇이든지 할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그렇기에 이 Passio라는 말은 열정적으로 끌어안는 큰 아픔의 사랑을 의미한다. 베토벤의 피아노 소나타 중에 열정이라는 곡이 있는데 그 곡이 이태리어로 Apassionato라고 불리는 것도 그런 연유에서다. 사랑에 사로잡혀 쩔쩔매면서도 어쩔 수 없이 애태우는 아픔, 그러나 기쁨...  파스카가 그런 것이라는 것이다. 예수께서 십자가를 끌어안음으로 자신의 살과 피를 음식으로 우리에게 주시는 사랑이 파스카라는 것이다. 전례는 우리가 파스카에 머물기를 원한다. 우리도 작은 파스카로 변화되어 희망과, 믿음과, 사랑과 평화와 정의와... 이 모든 아름다움을 끌어안기를 바란다. 세례와 견진, 혼인과 신품, 그리고 무엇보다도 성체성사에서 우리는 그 깊은 사랑의 신비에 참여하게 된다.

 

 

마하반야 바라밀다 - 지혜의 파스카

 

이와 같이 전례는 우리를 파스카로 초대하며 우리와 함께 파스카로 나아가길 원한다. 일전에 우연한 기회에 우리 교회의 전례와 불교의 의식을 비교해 본적이 있었다. 공부하던 중에 불교 용어인 “바라밀”이라는 말에 흥미를 느끼게 되었다. 파라 미타(Para mita)라는 범어의 한문 음역이라고 하는데 그 의미는 “언덕을 넘어서(Over the hill)라는 뜻이라고 한다. 업(karma)으로 인한 고뇌가 끝나지 않는 미혹의 고리를 끊고 저 깨달음의 언덕을 넘어가는 것을 뜻하는 말인 것이다. 그래서 불교에서 흔히 외는 경문인 ”마하반야 바라밀다“라는 말은 커다란 혜안으로 저 피안을 건넘을 뜻하는 것이다. 그리스도교의 파스카라는 말 역시 이승의 부자유, 억눌림, 서러움, 절망, 고통, 질병, 죽음, 책임 따위의 고뇌를 가로질러 저 약속된 땅으로 나아감을 의미하는 것이니 불교의 바라밀과 그리스도교의 파스카는 놀라울 정도로 같은 의미를 담아내고 있는 것이다.

 

 

전례 - 파스카를 이뤄내게 하는 힘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기 위해 정진수행하는 불자들의 용기는 참으로 대단한 것이다. 그들은 무문관을 만들기도하고 철저한 수행을 통해서 저 깨달음의 벽을 넘어서려는 것이다. 그들의 노력을 이름하여 용맹정진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우리에게는 다행이 아주 편안한 파스카의 길이 놓여져 있다. 이는 스승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완전한 자기비허(Kenosis)로 가능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이 스승의 자기비허에 참여할 자격이 우리에게 있으니 그것이 전례인 것이다.

 

우리의 파스카도 현세의 유혹을 뛰어 넘어서(Pass over), 주님과 함께 사랑의 여행(passion)을 떠나는 것이리라. 그리고 거기에 우리의 전례가 함께 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의 태어남의 장엄함에 세례성사가, 우리의 성장과 성숙의 징표로 견진성사가, 우리 사랑의 하나됨의 표징으로 혼인과 신품성사가, 우리가 사랑으로 양육되어야하기에 거기에 또 성체성사가, 그리고 우리의 나약함과 서러움을 이겨낼 표징이 되는 고백성사와 병자성사가 거기에 있는 것이며, 또한 세월을 함께 읽어내기 위해서 전례주년이 우리에게 놓여있는 것이다. 우리가 저 파스카의 삶을 원하기만 하면 우리는 우리 앞에 놓여진 그길을 달음질쳐 나가면 되는 거싱다. 거기에 우리와 함께 파스카 여행을 떠나고 싶은 전례가 편안한 단장을 하고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이완희 신부(인천가톨릭대학교 교수) / 인천가톨릭대학교 홈페이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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