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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강론] <연중 제11주일 본문+해설+묵상>-김수복
작성자김종연 쪽지 캡슐 작성일2010-06-10 조회수2,051 추천수0
 

연중 제11주일


제1독서


<주님께서 임금님의 죄를 용서하셨으니

임금님께서 돌아가시지는 않을 것입니다.>

사무엘기 하권의 말씀입니다. 12,7ㄱㄷ-10.13

그 무렵 7 나탄이 다윗에게 말하였다. “주 이스라엘의 하느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너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의 임금으로 세우고, 너를 사울의 손에서 구해 주었다. 8 나는 너에게 네 주군의 집안을, 또 네 품에 주군의 아내들을 안겨 주고, 이스라엘과 유다의 집안을 주었다. 그래도 적다면 이것저것 너에게 더 보태 주었을 것이다.

9 그런데 어찌하여 너는 주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주님이 보기에 악한 짓을 저질렀느냐? 너는 히타이트 사람 우리야를 칼로 쳐 죽이고 그의 아내를 네 아내로 삼았다. 너는 그를 암몬 자손들의 칼로 죽였다. 10 그러므로 이제 네 집안에서는 칼부림이 영원히 그치지 않을 것이다. 네가 나를 무시하고, 히타이트 사람 우리야의 아내를 데려다가 네 아내로 삼았기 때문이다.’”

13 그때 다윗이 나탄에게 “내가 주님께 죄를 지었소.” 하고 고백하였다. 그러자 나탄이 다윗에게 말하였다. “주님께서 임금님의 죄를 용서하셨으니 임금님께서 돌아가시지는 않을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화답송


시편 32(31),1-2.5.7.11(◎ 5ㄷ 참조)

◎ 주님, 제 허물과 잘못을 용서해 주소서.

○ 행복하여라, 죄를 용서받고 잘못이 덮여진 이!

행복하여라, 주님께서 허물을 헤아리지 않으시고

그 얼에 거짓이 없는 사람! ◎

○ 제 잘못을 주님께 자백하며

제 허물을 감추지 않고 말씀드렸나이다.

“주님께 저의 죄를 고백하나이다.”

그러자 제 허물과 잘못을 주님께서 용서하여 주셨나이다. ◎

○ 주님은 저의 피신처.

곤경에서 저를 보호하시고 구원의 환호로 저를 에워싸시나이다. ◎

○ 의인들아, 주님 안에서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마음 바른 이들아, 모두 환호하여라. ◎ 

 

제2독서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입니다.>

사도 바오로의 갈라티아서 말씀입니다. 2,16.19-21

형제 여러분, 16 사람은 율법에 따른 행위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율법에 따른 행위가 아니라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으로 의롭게 되려고 그리스도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어떠한 인간도 율법에 따른 행위로 의롭게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19 나는 하느님을 위하여 살려고, 율법과 관련해서는 이미 율법으로 말미암아 죽었습니다.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 20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입니다. 내가 지금 육신 안에서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시고 나를 위하여 당신 자신을 바치신 하느님의 아드님에 대한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21 나는 하느님의 은총을 헛되게 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율법을 통하여 의로움이 온다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돌아가신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음환호송


1요한 4,10ㄴ

◎ 알렐루야.

○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시어

당신 아드님을 우리 죄를 위한 속죄 제물로 보내 주셨도다.

◎ 알렐루야. 

 

복음


<이 여자는 그 많은 죄를 용서받았다.

그래서 큰 사랑을 드러낸 것이다.>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7,36─8,3 또는 7,36-50

짧은 독서를 할 때에는 < > 부분을 생략한다.

그때에 36 바리사이 가운데 어떤 이가 자기와 함께 음식을 먹자고 예수님을 초청하였다. 그리하여 예수님께서는 그 바리사이의 집에 들어가시어 식탁에 앉으셨다. 37 그 고을에 죄인인 여자가 하나 있었는데, 예수님께서 바리사이의 집에서 음식을 잡수시고 계시다는 것을 알고 왔다. 그 여자는 향유가 든 옥합을 들고서 38 예수님 뒤쪽 발치에 서서 울며, 눈물로 그분의 발을 적시기 시작하더니 자기의 머리카락으로 닦고 나서, 그 발에 입을 맞추고 향유를 부어 발랐다.

39 예수님을 초대한 바리사이가 그것을 보고, ‘저 사람이 예언자라면, 자기에게 손을 대는 여자가 누구이며 어떤 사람인지, 곧 죄인인 줄 알 터인데.’ 하고 속으로 말하였다.

40 그때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시몬아, 너에게 할 말이 있다.”

시몬이 “스승님, 말씀하십시오.” 하였다.

41 “어떤 채권자에게 채무자가 둘 있었다. 한 사람은 오백 데나리온을 빚지고 다른 사람은 오십 데나리온을 빚졌다. 42 둘 다 갚을 길이 없으므로 채권자는 그들에게 빚을 탕감해 주었다. 그러면 그들 가운데 누가 그 채권자를 더 사랑하겠느냐?”

43 시몬이 “더 많이 탕감받은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옳게 판단하였다.” 하고 말씀하셨다.

44 그리고 그 여자를 돌아보시며 시몬에게 이르셨다. “이 여자를 보아라. 내가 네 집에 들어왔을 때 너는 나에게 발 씻을 물도 주지 않았다. 그러나 이 여자는 눈물로 내 발을 적시고 자기의 머리카락으로 닦아 주었다. 45 너는 나에게 입을 맞추지 않았지만, 이 여자는 내가 들어왔을 때부터 줄곧 내 발에 입을 맞추었다. 46 너는 내 머리에 기름을 부어 발라 주지 않았다. 그러나 이 여자는 내 발에 향유를 부어 발라 주었다. 47 그러므로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이 여자는 그 많은 죄를 용서받았다. 그래서 큰 사랑을 드러낸 것이다. 그러나 적게 용서받은 사람은 적게 사랑한다.”

48 그러고 나서 예수님께서는 그 여자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49 그러자 식탁에 함께 앉아 있던 이들이 속으로, ‘저 사람이 누구이기에 죄까지 용서해 주는가?’ 하고 말하였다.

50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 여자에게 이르셨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평안히 가거라.”

<8,1 그 뒤에 예수님께서는 고을과 마을을 두루 다니시며,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시고 그 복음을 전하셨다. 열두 제자도 그분과 함께 다녔다. 2 악령과 병에 시달리다 낫게 된 몇몇 여자도 그들과 함께 있었는데, 일곱 마귀가 떨어져 나간 막달레나라고 하는 마리아, 3 헤로데의 집사 쿠자스의 아내 요안나, 수산나였다. 그리고 다른 여자들도 많이 있었다. 그들은 자기들의 재산으로 예수님의 일행에게 시중을 들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영성체송


시편 27(26),4

주님께 청하는 것이 하나 있으니,

내 한평생 주님의 집에 사는 것이로다. 

 

해설과 묵상


제1독서(2사무 12,7ㄱㄷ.10.13) 해설

<주님께서 임금님의 죄를 용서하셨으니

임금님께서는 돌아가시지는 않을 것입니다>


다윗이 우리야의 아내를 빼앗기 위하여 우리야를 전선 최전방으로 보내어 죽게 하자, 하느님께서 보내신 예언자 나탄은 다윗이 저지른 죄를 사정없이 꾸짖는다.

용서하실 수 있는 능력은 하느님께서 지니신 가장 큰 위대함 가운데 하나이자 성경에 들어 있는 가장 위대한 계시 가운데 하나다. 그리고 사람으로서도 자기가 죄인임을 깨닫고 인정해야 진정으로 사람다워진다.

격정적인 성격을 지닌 다윗은 예언자 나탄의 엄한 꾸지람을 받자, 즉시 자기 죄를 인정하면서 용서를 빈다. 자기 잘못을 솔직히 인정하고 뉘우치는 다윗을 하느님께서는 용서하신다.

오늘 독서는 하느님께서는 죄인이 제아무리 큰 죄를 지었어도 죽어 멸망하기를 바라지 않고 뉘우쳐 용서받고 살아 구원받기를 간절히 원하신다는 뜻 깊은 계시를 밝히고 있다. 죄를 범한 사람 앞에 서 계신 하느님께서는 당장 벌을 내리지 않고, 그 사람더러 빨리 자기가 지은 죄를 인정하라고 재촉하신다.

우리야를 죽이고 그 아내 밧 세바를 취한 다윗의 약점까지도, 다윗이 뉘우치고 용서받았기 때문에, 구세사에서 일정한 역할을 한다. 밧 세바는 그리스도의 족보에서 한 고리가 된다.

다윗은 겸허한 마음으로 원래 가진 것 없고 죄스런 자기 처지를 통감하고 구원을 애타게 호소하는 죄인들, 세리들, 창녀들 같은 사람들의 선조다.

그리스도께서는 다윗처럼 죄를 짓고 가련해진 자기 처지를 뉘우치고 구원을 바라는 사람들을 당신 수난과 십자가로써 용서하러 오셨다.


화답송(시편 32[31],1-2.5.7.11[◎ 5ㄷ 참조]) 해설

<주님, 제 허물과 잘못을 용서해 주소서>


하느님께로부터 죄를 용서받았다는 체험은 새로운 행복이 솟아나는 샘이다. 다윗처럼 끊임없이 반성하면서 자기 자신에게 솔직하고 정직하려 애쓰는 사람은 누구나 하느님을 용서하시는 분으로 느껴 알게 된다. 용서야말로 하느님의 논리요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것임을 깨닫게 된다.


제2독서(갈라 2,16.19-21) 해설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신다>


이 대목에서는 바오로가 자기의 전언에 대하여 결정적인 확신을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그 확신은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고 사람끼리 올바른 관계를 맺게 되는 것은 율법을 철저하게 지켜서 얻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 대한 확고한 믿음을 통해서만 얻는다는 것이다. 바오로의 전언과 유다인들이 고집하는 주장 사이의 대립은 신앙과 율법 사이의 대립이다.

바오로에게 올바른 관계를 맺는다 함은 법률적인 차원에서 올바르고 정당하다고 선언하는 단계보다 훨씬 깊은 의미를 가지고 있다. 바오로가 말하는 올바른 관계는 무상으로 당신 생명과 은총(사람의 자격과 능력을 전적으로 뛰어넘는 당신 생명)을 베풀고 용서하시는 하느님의 말씀이 지닌 위력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지는 관계다.

이 같은 바오로의 확신은 어떻게든 율법을 형식적으로라도 지켜내기만 하면 당연한 권리인 양 올바른 사람으로 인정을 받게 된다는 유다인들의 확신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바오로는 예전의 자기는 죽어 없어지고, 이제는 그리스도께서 자기 안에서 살고 계신다고 말한다. 이제는 그리스도의 생명을 자기 생명으로 삼고 성령의 충동과 지시에 따라 산다고 말한다. 그리스도의 사랑을 가지고 이 세상을 살아간다고 말한다. 그래서 바오로는 자기가 전하는 복음이 참되다고 말한다.

그리스도의 생명을 받아 그리스도처럼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의 삶 자체만이 참된 복음이 된다.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고 사람끼리 올바른 관계를 맺게 해주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만이 참된 복음전달자가 된다.


복음(루카 7,36-8,3 또는 루카 7,36-50) 해설

<이 여인은 많이 사랑하였으므로

많은 죄를 용서받는다>


루카 복음서가 다루는 기본 주제 가운데 하나는 예수께서 죄인들을 용서하는 분으로 당신 자신을 제시하고 계신다는 것이다. 여기서 예수께서는 당신 자신이 마치 하느님인 양 선언하신다. 유다인들은 오직 하느님만이 죄를 용서하실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예수님은 하느님께서는 거룩하므로 죄인과 가까이 하지 않으신다고 생각하는 바리사이들의 그릇된 사고방식을 꾸짖으신다. 바리사이들은 스스로 올바른 사람으로 자처하면서 거룩하신 하느님 앞에 떳떳하고 당당하게 얼굴을 쳐들 수 있다고 자신하고 있었다. 그런 생각으로 굳어진 그들은 자비롭고 사랑에 넘치시는 하느님을 상상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사람이란 하나같이 용서받을 필요가 있음을 인정하려들지 않았다.

오히려 행실이 나쁜 여자로 낙인찍힌 여인이 용서받아 하느님 앞에 올바른 사람으로 인정받는다. 엎드린 자세는 생명을 건진 사람이 자기 구원자를 향하여 감사하고 헌신하려는 마음을 드러내는 자세다. 그리고 여인으로서 공적인 자리에서 자기 머리카락으로 발을 닦아 주는 행위는 커다란 겸손을 드러내는 행위였다. 그 여인은 하느님의 위대한 사랑의 능력이 자기에게 내려지는 것을 느꼈다.

44-46절의 의미를 이해하려면 ‘아가판’이라는 단어가 ‘감사’라는 뜻도 가지고 있음을 유념할 필요가 있다.

십자가상에서 당신 생명을 바치고 나누어주신 그리스도께로부터 용서를 받으려면, 바리사이들처럼 위선적으로 경건하고 완벽한 것처럼 겉꾸며서는 안 된다. 지도자의 안정된 위치를 차지하고서 허점투성이로 보이는 보잘것없는 대다수 사람들을 경멸하고 이용하는 죄스런 삶을 고집해서는 안 된다. 그리고 늘 당하고만 사는 하찮은 사람들도 자기의 작은 잘못일망정 크게 뉘우치고 용서를 간청해야 한다.


묵상

<하느님 홀로 사람을 용서하실 수 있다>


예수님을 앞에 두고 유다인들이 도저히 묵인할 수 없었던 점 한 가지는, 예수께서 당신 스스로 죄를 용서하신다고 선언한 사실이다.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러 온 나탄 예언자 앞에서 다윗은 “내가 주님께 죄를 지었소.”라고 자신이 큰 죄를 저질렀음을 고백한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가 죄 중에 있음을 느끼지 못하고 있을 때가 있으며(1베드 1,14; 시편 73,22), 죄악에 사로잡혀 있으면서도(로마 6,17) 진실을 외면하고 거짓을 꾸미고 있는 수가 있다(로마 5,6). 우리는 거짓된 나와 전적으로 다르신 분, 진실한 그분과 만나야만 비로소 진실한 자아를 되찾을 수 있다. 사랑으로 가득하신 그분 능력이라야 우리로 하여금 죄악의 가면을 벗고 “나는 죄인입니다.”고 부르짖게 할 수 있으며, “나는 정말 아무것도 아니며 진정 내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이 헐벗은 사람이며 해놓은 것이 있다면 악행뿐입니다.”라고 고백하게 할 수 있다.

죄스럽기만 한 사람끼리 서로에게 해줄 수 있는 오직 한 가지는 서로 상처를 감싸 주고 어루만져주고 껴안아 주는 일뿐이다. 바리사이들은 예수님의 발치에 앉아 눈물을 떨구며 자기 머리카락으로 발을 닦아 드리는 행실 나쁘기로 소문난 여인을 도저히 참아줄 수가 없었다. 죄인에게는 경멸과 처벌만이 남아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뜻밖에 예수께서는 그 여인의 죄를 용서한다고 선언하신다. 하느님께서 뉘우치는 다윗을 용서하셨듯이, 그리고 뉘우치고 돌아온 아들을 용서하고 받아들이는 아버지처럼(루카 15,21), 예수께서는 그 여인을 용서하신다. 하느님을 닮아야 할 사람끼리 용서하는 일이야말로 서로 받쳐 주고 자라게 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고 선언하신 것이다.


<용서하는 사람은

하느님 아버지를 닮은 사람이다>


진정 하느님 홀로 죄를 용서하실 권한이 있으며, 사람들에게 진심으로 서로 용서하는 능력을 줄 수 있는 분이시다. 다른 사람에게 용서를 베풀기를 거절하는 사람은, 용서하시는 하느님의 사랑과 권한을 받아들이지 않고 부인하는 사람으로서, 그릇된 사람이요 거짓된 사람이며 하느님의 용서를 스스로 거절하는 사람이다.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가 용서하오니 저희 죄를 용서하소서.”라고 기도하도록 가르쳐준 예수께서는 사람이 다른 사람을 용서하는 그만큼 하느님께로부터 용서받을 수 있음을 분명히 밝히신다. 용서하지 않는 사람은 사람다운 사람이 아니요 용서와 자비와 사랑에 넘치시는 하느님의 자녀도 아니며 악마의 자식임이 분명하다.

용서는 무조건 이미 용서해 버린 용서라야 하며 처음서부터 사람에게 미운 감정이나 증오를 품지 않았던 용서라야 한다. 용서는 미움에 사무친 반격보다 한없이 크고 힘이 있다. 사람을 결코 미워할 수 없는 순수하고 진정한 용서라야 상대방으로 하여금 진실을 깨닫고 정의로 돌아서게 할 수 있다. 어디까지나 사람에게 실망하거나 포기하지 않는 진정한 사랑에서 우러나오는 용서는 상대방의 행복과 구원을 기원하고 꾀한다. 죄악에 들어서 있는 사람을 무심하게 외면하고 피하고 부딪치지 않으려고만 애쓰는 자세는 용서가 아닌 독선이요 위선이며, 그런 독선과 위선은 하느님의 용서를 받을 수 없다. 한편, 진정으로 용서하는 자세를 굳게 지키는 사람은 자꾸만 비뚤어지고 고집부리는 자식을 바로잡으려고 회초리를 드는 듬직한 어머니의 자세를 취할 경우도 있다.

경제적 또는 군사적 제국주의라는 악마의 세력에 사로잡힌 사람들과 독점과 독재라는 악마의 세력에 사로잡힌 사람들에게 근본적으로 증오를 품지 않고 진정으로 용서하는 자세란 그 악마의 세력의 앞잡이들에게 굽실거리고 아부하고 편승하는 자세가 결코 아니다. 오히려 그런 사람들을 사람다운 사람으로 만들어 멸망하지 않고 구원받게 하기 위해 온갖 수단을 강구하면서 최선을 다하는 자세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가난하고 억눌리고 당하는 사람들 자신이 하느님다운 사람사랑과 정의감과 용서하는 마음으로 단단히 무장하고 뭉쳐야 한다.


복음해설(2)


31-37절: 옥상은 저녁에 시원한 바람을 쐬는 데 좋았다. 옥상에는 외부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곤 했다. 그런데 무엇인가를 가지러 옥상에서 아래로 내려갈 시간이 없다. 내려갔다가 돌아올 시간도 없다. 전적이고 결정적인 투신이 필요한 시점이다. “너희는 롯의 아내를 기억하여라.” 롯은 흔들린 나머지 뒤를 돌아다보았다(참조. 창세 19,26). “제 목숨을 보존하려고 애쓰는 사람”(참조. 9,24). 이 문맥에서는 보존해야 할 것과 둘째 차원으로 미뤄놓아야 할 것에 관하여 깊이 생각하라고 주의를 준다.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버려둘 것이다.” ‘사람의 아들’의 날은 남편과 아내, 주인과 종, 모든 사람에게 똑같이 들이닥칠 것이다. 그러나 똑같은 모양으로 들이닥치지는 않을 것이다. 밀은 창고에 들어갈 것이고 검불은 불길 속에 던져질 것이다.

37절은 예수님의 입술 위에 올려놓은 격언이다. 마태오는 그 격언을 다른 문맥에다 배치한다. 여기에서는 ‘사람의 아들’의 날이 나타나는 데 관하여 말한다. 그 날은 먹잇감 주위로 몰려드는 까마귀 떼처럼 들이닥칠 것이다. 이는 또한 구원의 때를 가리키는 징조들에 관심을 기울이라는 경고일 수도 있다.

위에서 한 말을 요약해 본다. ㄱ) 하느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 가운데’ 와 있음을 깨달을 때에는, 그 나라가 언제 어떻게 영광중에 나타날 것인지를 묻는 바리사이들의 질문은 관심의 대상이 되지 못한다. 중요한 것은 구원을 얻어내야 할 ‘지금’이다. 준비를 하는 일이 중요하다. 왜냐하면 롯과 노아의 날처럼 그 날이 갑작스럽게 들이닥칠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종말론적 충만함은 예수님을 따라 그분처럼 살아가는 가운데 어떤 모양으로 미리 체험할 수 있다(참조. 루카 22,19-20; 23,43). ㄴ) 제자는 하느님의 나라가 권능을 떨치며 영광스럽게 나타나기를 기다리기보다 누룩처럼 부풀어 오르고 완성되어가는 하느님의 나라, 겨자씨처럼 모르는 사이에 크게 자라고 있는 하느님의 나라에 눈길을 고정시켜야 한다.


기도에 관한 가르침(18,1-4)  

이 두 비유는 따로 전달되었다. 그러나 똑같은 모양으로 되어 있다. 들어가는 짧은 말, 비유, 예수님의 말씀으로 되어 있다. 루카는 기도라는 주제를 다룬다.

불의한 재판관의 비유(1-8절)는 다음과 같이 다시 나누어 볼 수 있다. ㄱ) 들어가는 말(1절). ㄴ) 비유(2-5절). ㄷ) 예수님의 말씀(6-8절).

바리사이와 세리의 비유도 다음과 같이 다시 나누어 볼 수 있다. ㄱ) 들어가는 말(9절). ㄴ) 비유(10-13절). ㄷ) 예수님의 말씀(6-9절).

1-8절: 불의한 재판관의 비유는 “늘 기도하십시오.”(1테살 5,17; 2테살 1,11; 로마 1,10; 12,12; 에페 6,18), “실망하지 마십시오.”(2테살 3,13; 2코린 4,1.16; 갈라 6,9; 에페 3,13)와 같은 바오로의 전형적인 표현으로 시작한다. 그러나 단순히 끈질기게 기도하라고 하는 데 그치지 않고 주님이 들어주실 때까지 끊임없이 기도하라고 말한다(참조. 루카 11,5-8. 시도 때도 없이 성가시게 구는 친구). 믿음을 가지고 바치는 기도에 관한 언급(참조. 루카 5,20; 7,9)은 ‘사람의 아들’의 날에 대하여 말하는 앞 대목과 접촉점이 된다. “주님, 땅 위에서 믿음을 찾을 수 있겠나이까?”는 “믿음을 가지고 기도를 바치는 제자들을 만날 수 있겠나이까?”와 같은 뜻이다. 항구한 기도에 관한 비유가 사람의 아들이 오시는 날을 대비하라고 권고하는 비유로 바뀐 것이다.

과부는 너무 가난해서 재판관에게 뇌물을 쓸 돈 없다. 재판관도 귀찮은 일에 끼어들고 싶지 않다.

6-8절에 나오는 예수님의 말씀은 ‘더 작은 자와 더 큰 분’ 또는 ‘가장 나쁜 자와 가장 좋은 분’에 대한 논증을 해 보이신다. 이 말씀은 사뭇 악한 재판관과 비교하면서 하느님에 대하여 가질 수 있는 거짓 관념을 바로잡아주고자 하는 비유를 우의화(寓意化)했다고 할 수 있다. “이 세상에서 믿음을 찾아볼 수 있겠느냐?” 하느님은 그 불의한 재판관 같은 분이 아니시다. 이 구절이 영감을 받은 것으로 보이는 집회 35,18-19에서는 하느님이 짓눌리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정의를 바로 세워주는 일을 참아주지도 늦추지도 않으시리라고 말한다. 많은 사람들은 여기에서 관념이 바뀐다고 본다. 즉 하느님이 그런 자들에게도 인내심을 발휘하신다는 것이다(‘파루시아’가 지연되는 것을 설명하려고 한 것이다. 참조. 2베드 3,9; 묵시 6,9.11에도 그와 비슷한 태도가 나온다.). 또 어떤 사람들은 그런 해석은 문맥을 벗어난다고 여긴다. 그리고 “그들에게서 기대할 것이 있겠느냐?”라는 두 번째 질문을 본다. 그 질문에 대한 답변은 “하느님께서는 그들에게 지체 없이(‘엔 타예이’) 올바른 판결을 내려주실 것이다.”가 될 것이다. 루카는 ‘파루시아’의 때를 짧게 언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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