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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강론] <연중 제13주일 본문+해설+묵상>-김수복
작성자김종연 쪽지 캡슐 작성일2010-06-26 조회수2,034 추천수0
 

연중 제13주일

(교황주일)


제1독서


<엘리사는 엘리야를 따라나섰다.>

열왕기 상권의 말씀입니다. 19,16ㄴ.19-21

그 무렵 주님께서 엘리야에게 말씀하셨다. 16 “아벨 므홀라 출신 사팟의 아들 엘리사에게 기름을 부어 네 뒤를 이을 예언자로 세워라.”

19 엘리야는 그곳을 떠나 길을 가다가 사팟의 아들 엘리사를 만났다. 엘리사는 열두 겨릿소를 앞세우고 밭을 갈고 있었는데, 열두 번째 겨릿소는 그 자신이 부리고 있었다. 그때 엘리야가 엘리사 곁을 지나가면서 자기 겉옷을 그에게 걸쳐 주었다.

20 그러자 엘리사는 소를 그냥 두고 엘리야에게 달려와 이렇게 말하였다. “아버지와 어머니에게 작별 인사를 한 뒤에 선생님을 따라가게 해 주십시오.” 그러자 엘리야가 말하였다. “다녀오너라.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하였다고 그러느냐?”

21 엘리사는 엘리야를 떠나 돌아가서 겨릿소를 잡아 제물로 바치고, 쟁기를 부수어 그것으로 고기를 구운 다음 사람들에게 주어서 먹게 하였다. 그런 다음 일어나 엘리야를 따라나서서 그의 시중을 들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화답송


시편 16(15),1-2ㄱ과 5.7-8.9-10.11(◎ 5ㄱ 참조)

◎ 주님, 주님은 제가 받을 몫이옵니다.

○ 하느님, 저를 지켜 주소서. 주님께 피신하나이다.

주님께 아뢰나이다. “주님은 저의 주님이시옵니다.”

제가 받을 몫이며 제가 마실 잔이신 주님,

주님께서 저의 제비를 쥐고 계시나이다. ◎

○ 저를 타일러 주시는 주님을 찬미하오니,

밤에도 제 양심이 저를 일깨우나이다.

언제나 주님을 제 앞에 모시어,

주님께서 제 오른쪽에 계시니,

저는 흔들리지 않으리이다. ◎

○ 제 마음 기뻐하고, 제 영혼이 뛰놀며,

제 육신마저 편안히 쉬리이다.

주님께서는 제 영혼을 저승에 버려두지 않으시고,

주님께 충실한 이는 구렁을 아니 보게 하시나이다. ◎

○ 주님께서 저에게 생명의 길을 가르치시니,

주님 면전에서 넘치는 기쁨을,

주님 오른쪽에서 길이 평안을 누리리이다. ◎


제2독서


<여러분은 자유롭게 되라고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사도 바오로의 갈라티아서 말씀입니다. 5,1.13-18

형제 여러분, 1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자유롭게 하시려고 해방시켜 주셨습니다. 그러니 굳건히 서서 다시는 종살이의 멍에를 메지 마십시오.

13 형제 여러분, 여러분은 자유롭게 되라고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다만 그 자유를 육을 위하는 구실로 삼지 마십시오. 오히려 사랑으로 서로 섬기십시오.

14 사실 모든 율법은 한 계명으로 요약됩니다. 곧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하여라.” 하신 계명입니다. 15 그러나 여러분이 서로 물어뜯고 잡아먹고 한다면, 서로가 파멸할 터이니 조심하십시오. 16 내 말은 이렇습니다. 성령의 인도에 따라 살아가십시오. 그러면 육의 욕망을 채우지 않게 될 것입니다. 17 육이 욕망하는 것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께서 바라시는 것은 육을 거스릅니다. 이 둘은 서로 반대되기 때문에 여러분은 자기가 원하는 것을 할 수 없게 됩니다. 18 그러나 여러분이 성령의 인도를 받으면 율법 아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음환호송


1사무 3,9; 요한 6,68ㄷ

◎ 알렐루야.

○ 주님, 말씀하소서.

주님 종이 듣고 있나이다.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나이다.

◎ 알렐루야. 

 

복음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가시려고 마음을 굳히셨다.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스승님을 따르겠습니다.”>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9,51-62

51 하늘에 올라가실 때가 차자,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가시려고 마음을 굳히셨다. 52 그래서 당신에 앞서 심부름꾼들을 보내셨다. 그들은 예수님을 모실 준비를 하려고 길을 떠나 사마리아인들의 한 마을로 들어갔다. 53 그러나 사마리아인들은 예수님을 맞아들이지 않았다. 그분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길이었기 때문이다.

54 야고보와 요한 제자가 그것을 보고, “주님, 저희가 하늘에서 불을 불러 내려 저들을 불살라 버리기를 원하십니까?” 하고 물었다. 55 예수님께서는 돌아서서 그들을 꾸짖으셨다. 56 그리하여 그들은 다른 마을로 갔다.

57 그들이 길을 가는데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스승님을 따르겠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58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여우들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들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사람의 아들은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다.”

59 예수님께서는 다른 사람에게 “나를 따라라.” 하고 이르셨다. 그러나 그는 “주님, 먼저 집에 가서 아버지의 장사를 지내게 허락해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60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죽은 이들의 장사는 죽은 이들이 지내도록 내버려 두고, 너는 가서 하느님의 나라를 알려라.” 하고 말씀하셨다.

61 또 다른 사람이 “주님, 저는 주님을 따르겠습니다. 그러나 먼저 가족들에게 작별 인사를 하게 허락해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62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쟁기에 손을 대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느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영성체송


시편 103(102),1

내 영혼아, 주님을 찬미하여라.

내 안의 모든 것들아,

주님의 거룩하신 이름을 찬미하여라.

 

해설과 묵상


제1독서(1열왕 19,16ㄴ.19-21) 해설

<엘리사는 엘리야를 따라나서

그의 제자가 되었다>


엘리사가 소명을 받는다. 엘리야는 고요한 가운데 하느님을 만나고(19,11-13), 자기가 받은 사명의 의미를 다시 발견한다. 그 사명은 유일하신 하느님께 충실한 백성을 이루어내고 자기 사업을 이어받을 계승자를 찾아내는 것이었다.

그 계승자는 엘리사로서, 엘리야는 엘리사에게 자기 겉옷을 걸쳐 줌으로써 자기가 예언자로서 받은 권한과 능력을 넘겨준다(참조. 2열왕 2,14). 그 행위는 예언자가 되라는 소명을 효과적으로 나타내 준다.

엘리사는 모든 것을 버리고 엘리야를 따라나선다. 그와 마찬가지로 뒤에 예수님의 제자들이 모든 것을 버리고 스승을 따라나설 것이다. 엘리사는 아마도 부유했던 것 같다. 그러나 그는 엘리야의 제자가 되기 위해 서슴없이 모든 것을 포기한다.

엘리사가 “아버지 어머니에게 작별 인사를 한 뒤에 선생님을 따라가게 해 주십시오.”라고 말하자, 엘리야는 “다녀오너라.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하였다고 그러느냐?”라고 대답한다. 이는 엘리사가 책임감이 강하다는 것을 드러낸다.

사람이면 누구나 철이 들고 현실과 사회현상을 비판적으로 파악하기 시작하면서부터는 고요한 가운데 자기 양심 속에서 절대자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게 되어 있다. 그럴 경우 물질과 명성 따위 부질없고 스러지고 말 것에 집착하지 말고 단호하게 그 부르심에 응하여 ‘함께 사는 세상’, ‘하느님을 섬기는 세상’을 건설하는 데 이바지해야 할 것이다.


화답송(시편 16[15],1-2ㄱ과 5.7-8.9-10.11[◎ 5ㄱ 참조])

주님, 주님은 제가 받을 몫이옵니다.


올바른 사람, 하느님께서 보호해 주셔서 행복해 하는 사람, 자기 장래를 하느님께 맡기고 살아가는 사람이 부르는 노래와 기도를 이 시편에서 볼 수 있다. 하느님께 자신을 맡기는 그 같은 신뢰는 죽음 너머에까지 연장되는 신뢰다(10절).

올바른 사람은 주님만을 자기 모든 선익(자기 몫, 유산)으로 여기고, 하느님과 맺는 정다운 관계와 친교만을 자기 기쁨(자기 잔)으로 여기며, 다른 모든 것 위에 하느님을 선택한다. 하느님께서는 올바른 사람 곁에 항상 보호자로 계시며, 그 때문에 올바른 사람은 위험한 가운데서도 안전과 평온을 유지할 수 있다.

신약성경에서는(사도 2,25-31; 13,35-37), 이 시편을 메시아와 관련지어 해석하여, 예수님과 예수님의 부활에 적용한다.


제2독서(갈라 5,1.13-18) 해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해방하여 주셔서

우리는 자유로운 몸이 되었다>


우리는 자유로운 시대에 살고 있다. 노예를 종살이에서 벗어나게 하려고 돈을 치르듯이,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속량하려고 당신 수난과 죽으심과 피와 목숨을 우리 대신 몸값으로 지불해 주셨기 때문이다. 이제 사람은 사람의 노예가 아니게 되었다. 사람이 사람 위에 올라설 수도 없게 되었으며,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짓눌리거나 빼앗겨서는 결코 안 되게 되었다.

자유롭게 되었다 함은 무엇인가를 할 수 있게 되었다는 의미가 아니다. 자유롭다는 것은 육체의 욕정을 채우려 하지 않고, 성령께서 이끄시는 대로 살아가는 것을 뜻한다. 성령께서는 우리를 절대자 하느님과 친교를 맺도록 열어 주지만, 육체의 욕망과 육정은 우리를 우리 자신 안에 갇히게 한다. 자기 안에 갇힌 사람은 자기밖에 모르고 자기 가족과 자기 친구밖에 모르며 자기 나라밖에 모른다. 그런 이기주의와 자기중심주의를 벗어나서 진정 사람에게 열리고 인류전체에 열린 사람이라야 자유로운 사람이다. 자유인들만이 증오와 분열과 전쟁을 이겨내고 합심과 친교의 기쁨을 창조해 낼 수 있는 사람이다. 자유인들만이 다른 사람을 자기 욕망과 야욕을 충족시키기 위한 이용물로 여기지 않고, 다른 사람들에게 자기 노동과 땀과 생명까지 바칠 수 있는 사람들이다.


복음(루카 9,51-62) 해설

<예수님을 따라 예루살렘을 향하여 가는 길>


우리도 예루살렘을 향하여 간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을 향하여 나아가시는 것은 단호한 결단에 의해서였다. 예수께서는 예루살렘에서 기다리고 있을 죽음을 똑똑히 알고 받아들이신다. 우리도 예수님을 따라가면 반드시 치욕과 수난과 죽음이 기다리고 있는 장소에 다다르게 된다는 것을 똑똑히 의식할 필요가 있다. 사회의 온갖 병리현상과 구조악은 결코 우리를 그냥 놔두지 않을 것이다. 하느님을 편들고 억울한 형제들을 편들어 반대하고 부딪치는 우리를 가두고 때리고 죽이기까지 할 것이다.

우리는 끝까지 예수님을 따른다. 스승 예수님의 삶을 이어가는 우리의 삶은 지상의 재물과 권세와 세력과 결탁하거나 영합할 수 없고, 그것들을 차지하고 누리는 것이 인생목표가 될 수 없다. 우리도 예수님처럼 ‘머리 둘 곳조차 없는 사람’(58절)이 되고, 뒤를 돌아보지 않는 사람‘(62절)이 된 다음, 억울하게 당하는 하느님의 백성을 해방하기 위하여 박해와 고문과 죽음까지라도 무릅쓰고 몸 바쳐 행동에 나서야 할 것이다.

우리는 막중한 소명을 받았다. 오늘도 그리스도께서는 우리 모든 사람 마음속에 당신 성령을 통하여 재촉하고 자극을 주신다. 사람이 온 세상을 다 얻을지라도 제 목숨, 참 생명을 잃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고 일깨워 주고, 그러니 목숨을 내걸고 내던져 당신을 섬기고 인간해방과 인류일치를 위해 일생을 바치라고 부르신다. 그러한 자기헌신 안에만 인생의 참된  성취가 있다고 가르치신다.


묵상

<제자가 된다는 의미>


성경 안에서 우리는 스승-제자 사이의 관계에 관하여 흔히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심오한 관념을 발견하게 된다. 제자가 된다는 것은 단순하게 스승이 제시하는 가르침을 이해하는 정도에 그치지 않고, 생활의 도리에 대한 스승의 특별한 가르침을 받아들여 자기 것으로 삼는 것을 뜻한다.

성경에 나오는 제자가 지닌 또 다른 특징은, 그가 스승이 하는 인간적인 말을 따르지 않고, 예언자가 되었든 현자가 되었든, 스승의 가르침을 통하여 전달되는 하느님의 말씀을 따른다는 점이다. 예언자들의 신탁에 따르자면, 메시아 시대에는 더 이상 지상의 스승들을 필요로 하지 않고, 우리 모두가 주님의 제자가 되고(이사 54,13), 직접 주님을 알게 될 것이다(예레 31,34).

이 같은 개념에 비추어 우리는 예수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이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쉽게 알 수 있다. 복음서들에서, 제자란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받아들이고, 그분의 인격에 자기 전 존재를 내걸고 매달리는 사람을 가리킨다. 이 제자 됨은 항구히 지속되는 생활조건을 말한다. 예수께서는 당신을 믿는 사람들에게 항상 스승이 되어 주실 것이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당신과 함께 있도록, 즉 당신 생명에 친밀하게 참여하고 당신 인격과 당신 운명에 깊이 동참하고 나누도록 부르심을 받고 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됨으로써 우리는 스승을 중심으로 삼는 새로운 존재가 되어 새로운 생활을 하게 된다. ‘스승과 함께 있다.’는 것은 그분의 구원 사업에 참여함을 뜻한다.

바오로가 내리는 정의에 따르면, 제자가 된다는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와 더불어 살아감’을 뜻한다. 이 표현은 주님과 주님께 속한 사람들 사이에 맺어지는 영적 관계를 나타낸다. 새로운 아담(사람)이신 그리스도께서는 당신 안에 당신께 속한 모든 사람들을 껴안으신다(로마 5,15).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과 부활에 참여함으로써 그분과 친교를 맺는 사람들이다.

극심한 시련 가운데서도 스승의 운명에 동참한 예수님의 제자들은(마르 10,38-39) 약속된 나라를 차지할 것이다(마태 19,28-29). 아버지께서 몸소 당신 아들을 따른 제자들에게 영예를 안겨주실 것이다.


<예수님을 따르는 길>


제자가 어떤 사람인가를 이해하는 이 같은 시각은 예수님을 따라 예수님과 더불어 걸어가려 하는 우리에게 중대한 과제들을 안겨준다.

먼저, 우리를 주님과 맺어 주는 관계에 철저함이다. 그 관계는 우리 존재와 실존과 생활을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고 새롭게 만든다. 우리는 이제 마음 내키는 대로 아무렇게나 욕심대로 살아갈 수 없고, 우리 귀감이신 예수님의 말씀에 맞추어 살아가야 하게 되었다.

이제 우리 생명과 생활은 우리 것이 아니게 되었다. 그리스도를 본받는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생활방식대로 살아간다는 뜻이고, 그리스도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그리스도다운 삶을 살아간다는 뜻이다. 이제는 더 이상 내가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서 그리스도께서 살아가신다는 뜻이다. 이기심과 욕심에 사로잡힌 옛 사람을 청산하고 그리스도처럼 사람을 순수한 애정으로 대하는 새 사람이 된다는 뜻이다.

오늘 복음은 우리에게 그리스도를 따르자면 용기를 내야 한다고 말한다. 구세주이신 사람의 아들(인자)은 머리 둘 자리도 없는 분이시다. 예수님을 따르자면 피상적이고 감상적인 태도로는 불가능하다. 예수님의 철저한 가난을 실천적으로 받아들여야만 가능하다. 희생이 필요하며, 자기 욕심을 깡그리 버리고 포기해야만 가능하다.

 예수님을 따르자면, 단호하게 결단을 내리고, 자꾸만 미련이 남아서 뒤를 돌아보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 많은 사람을 구하기 위하여, 그리고 세상의 죄를 없애기 위하여 하느님의 어린 양 그리스도와 더불어 철저한 가난과 십자가를 끝까지 지고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은 분명 부활하는 영광과 환희를 맛볼 것이다.


복음해설(2)

예수께서 사마리아를 거쳐 가신다(9,51-56)

이 이야기는 네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ㄱ) 들어가는 말이 나온다. 이 말은 여행 전체에 해당한다(51절). ㄴ) 사마리아인들이 예수님 일행을 거절한다(52-53절). ㄷ) 야고보와 요한이 강하게 반응한다(54-55절). ㄹ) 예수님 일행이 다른 마을로 갔다는 말로 이야기가 끝난다(56절). 51절뿐 아니라 사마리아인들의 일화 전체가 여행 이야기의 입구 역할을 한다.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는 여행 이야기는, 나자렛을 방문하실 때처럼(4,14-30), 예수께서 배척당하시는 일화로 시작한다. 이 일화는 메시아께서 마지막으로 배척을 당하고 당신 백성의 손으로 죽임을 당하시는 장면으로 독자를 인도한다.

51절: “하늘로 올라가실(‘아날렘프세오스’) 때가 차자(‘심플레루스타이’)…” 이 표현은 하느님의 구원 계획에 관한 표현이다. 이렇게 루카 복음서에서 예루살렘이 차지하는 비중이 두드러진다. 루카 복음서는 온 세상에 구원을 퍼뜨리는 도시 예루살렘에 집중되어 있다(참조. 사도 1,8). 그러나 그 예루살렘은 ‘예언자들을 죽이고’(루카 13,34), 은총이 내리는 때를 알지 못한다(루카 19,44). 예수님의 여행은 하느님의 뜻에 따른 것이다. 당신 아버지께서 세워놓으신 계획을 충실하게 따르는 예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가시려고 마음을 굳히셨다.”

예수께서 ‘올라가시는 일’에 관해서는, 엘리야의 승천(2열왕 2,9-11), 고통을 받은 종의 들어 높여짐(이사 42,1), 당신 영광 안으로 들어가신 예수님의 승천(사도 1,2.11; 참조 1티모 3,16)에서 거의 같은 표현을 사용한다. 이 개념은 예수님의 마지막 날들, 즉 당신의 고통스러운 운명의 마지막 날들(수난과 죽음)과 당신의 영광스러운 운명의 첫 날들(부활과 승천)을 다 아우르고 있다. 요한은 ‘영광스럽게 되다.’라는 개념을 사용할 것이다(요한 7,39; 12,16.23; 13,31 이하). 그리고 예수께 ‘십자가에 못 박힘’은 ‘들어 높여지심’이 될 것이다(요한 12,32). 그런 모양으로, 51절은 예수님의 죽음을 새롭게 조명한다. 예수님의 죽음은 끝이 아니라 당신이 영광을 받으시는 데 필요한 과정이라는 것이다.

52-53절: 예수께서 전령들을 파견하신다. 그 전령들은 구약성경에서 주님께서 파견하신 사람들을 상기시킨다. 사마리아인들은 주전 721년에 이스라엘 사람들이 포로로 끌려간 다음 이스라엘 지방에 정착한 이방인들이 뒤섞인 백성이었다(2열왕 17; 에즈 4,1-3; 느헤 4,1-9). 사마리아 사람들은 유다인들에게 반감을 가지고 있었다(참조. 요한 4,1-9). 특히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순례자들을 싫어했다. 그런 이유로 유다인들은 사마리아를 지나가지 않으려 했다(참조. 마태 10,5). 루카와 요한(4,1.42)만이 예수께서 그런 이단자들의 땅을 지나셨다고 말한다(참조. 17,11-19). 초기 교회는 사마리아로 가신 스승을 당장 본받을 것이다(참조. 사도 8,5.25).

54-55절: “주님, 저희가 하늘에서 불을 불러내려 저들을 불살라 버리기를 원하십니까?” 어떤 수사본들은 “엘리야가 한 것처럼”이라는 말을 덧붙인다(2열왕 1,10.12를 인용한다.). 야고보와 요한은 자기들이 정말 ‘천둥의 아들들’(마르 3,17)임을 보여준다. ‘아들들’은 꼭 육체와 피를 가진 아들들을 가리키지는 않는다. 성경에서는, ‘예언자들의 아들들’의 경우처럼, 특정한 인간 범주 또는 인간 집단에 속해 있다는 것과 같은 뜻으로 쓴다. 여기에서는 ‘천둥 같은 목소리를 가지고 있는 자들’ 또는 ‘천둥처럼 소리를 내는 자들’을 가리킬 수 있다.

예수님의 답변은 비폭력의 실천만을 뜻하지 않는다. 예수께서는 스승인 당신의 기본 태도를 고스란히 보여주고 계신다. 앞에서 이미 다룬 경우, 즉 겉으로 예수님과 함께 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이 마귀(악)를 몰아내는 경우를 제시했다(루카 9,49-50).

56절: “그들은 다른 마을로 갔다.” 아마 사마리아에 있는 다른 마을로 갔을 것이다. 사도 8,5-25에 따르면, 사마리아인들은 그리스도교에 호의를 보이고 그리스도교를 받아들였다. 루카는 자기 복음서에서, 나자렛을 다시 언급하지 않는 것처럼, 사마리아를 다시 언급하지 않는다. 그렇게 함으로써 예수님을 거절하는 사람들이 어디까지 갈 것인가를 강조한다. 그들은 마침내 예수님을 죽이고 말 것이다.

위에서 한 말을 요약해 본다. ㄱ) 51절은 죽음으로 끝나지 않는 예수님의 길에 관한 많은 고찰 가운데 첫 번째 관찰이다(참조. 루카 9,57; 13,22; 17,11; 19,11; 19,28; 19,41). 독자는 그 길을 따르도록 초대받는다. ㄴ) 예수께서 야고보와 요한을 꾸짖으신 일은 독자에게 교훈, 즉 하느님의 나라는 불과 칼로 심어지지 않는다는 교훈이 된다. 제자라면 스승처럼 고통과 멸시를 견뎌야 한다. 예수께서는, 사마리아인들이 당신을 거절한 이유를 따지기에 앞서, 그들의 결정을 일단 존중하신다. ㄷ) 예수께서는 사마리아인들이 당신을 받아들이거나 거절할 수 있는 가능성을 앞에 두고서 그들의 문을 두드리고 계신다. “보라, 내가 문 앞에 서서 문을 두드리고 있다. 누구든지 내 목소리를 듣고 문을 열면, 나는 그의 집에 들어가 그와 함께 먹고 그 사람도 나와 함께 먹을 것이다.”(묵시 3,20)


예수추종의 요구조건(9,57-62)

마태 8,19-22(Q)도 예수께서 처음 하신 말씀(‘로기온’) 두 가지를 전하고 있다. 그리고 그 말씀들을 예수께서 갈릴래아에서 활동을 펼치기 시작하실 시점에다 배치한다. 그 두 말씀은 스승과 함께 길을 가기 위해 필수적인 자세를 제시한다. 이 대목에서 열쇠가 되는 낱말들은 ‘따르다.’(세 번), ‘사람의 아들’(두 번), ‘하느님의 나라’(두 번)다.

이 이야기는 다음과 같이 나눌 수 있다. ㄱ) 어떤 사람이 예수께 당신을 따르게 해 주시라고 청한다. 그러자 예수께서 그 사람에게 모든 것을 포기하라고 요구하신다(57-58절). ㄴ) 또 어떤 사람이 예수께 당신을 따르게 해 주시라고 청한다. 그러면서 먼저 자기 아버지를 장사지내게 해 달라고 말씀드린다(59-60절). ㄷ) 마지막으로, 다른 사람이 예수를 따르겠다고 하면서 조건을 내세운다. 예루살렘을 향하여 길을 가기 시작한 예수께서는 이상 세 가지 대화에서 당신을 따르는 일의 시급성과 위험에 대하여 말씀하신다.

이 짧은 대목은 마르 1,16-20의 이야기 신학 노선에 속한다. 즉 예수님을 따르고자 하는 사람은 모든 것을 포기하지 않으면 안 된다. 예수추종은 ‘그물을 버리는 것’을 뜻한다. 하던 일을 그만두고 아버지까지 떠남(가족 유대까지 끊는 것)을 뜻한다. 이 세 가지 일화는 짧은 이야기 틀 안에 담긴 예수님의 중요한 금언들 또는 말씀들에 속한다.

57-58절: 예수님과 그 일행이 가장 기본적인 것도(여우들과 새들도 가지고 있는 것까지도) 가지고 있지 않다는 말을 어떤 사람들은 문자 그대로 알아듣는다. 즉 길을 갈 때 예수께서는 최소한으로 필요한 것도 가지고 다니지 않으셨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가정은 복음서 다른 대목들을 통하여 우리가 알고 있는 내용과 어긋나는 것으로 보인다. 즉 예수님과 그 일행은 얼마간 규모가 있는 살림을 꾸리고 있었으며 살림살이 책임자(유다)도 두고 있었다(유다는 인색하고 탐욕이 있었던 것 같다.). 어떻든 이 경우에서는 무엇인가에 집착하면 예수님을 따를 수 없음을 알아듣게 해 준다. 예수님을 따르고 예수님처럼 살기 위해서라면 언제든 무엇이든 포기하겠다는 결심을 세워야 함을 알아듣게 해 준다.

59-60절: “죽은 이들의 장사를 죽은 이들이 지내도록 내버려 두어라.” 예수님의 요구는 구약성경의 요구를 뛰어넘는다(참조. 창세 50,5; 토빗 4,3; 6,15; 탈출 13,19; 레위 21,1-3). 이 구절은 은유다. 영적으로 죽은 이들(예수님의 부르심을 듣고도 무감각한 이들)이 육체적으로 그리고 영적으로 죽은 사람들을 장사지낸다는 뜻이다. 효심, 특히 부모를 장사지내는 데서 드러나는 효심은 유다이즘 안에 깊이 뿌리박고 있었다. 그래서 예수님의 말씀을 문자 그대로 알아들어서는 곤란하고 그 뜻을 살펴야 한다. 그 표현은 “눈을 뽑아버려라.”, “손을 잘라버려라.” 등처럼 과장법에 속한다. “죽은 이들의 장사를 죽은 이들이 지낸다.”는 말은 늙은 부모를 돌볼 처지에 있는 다른 형제자매나 친척이 있음을 전제로 하고 있다. 그럴 경우 그 말은 부모를 버리라는 뜻이 아니라, 하느님의 나라를 위하여 몸 바치는 일이 부모에게 효도하고 자녀를 위하는 일보다 더 위에 있다는 뜻이다. 예수님을 따르고 예수님처럼 살고자 하는 사람은 누구든 모름지기 가족이기주의를 넘어서야 한다는 뜻이다. “너는 가서 하느님의 나라를 알려라.”라는 말은 루카 복음서에만 나온다.

61-62절: 이 마지막 말씀의 배경은 엘리야와 엘리사의 경우일 것이다. 엘리야는 엘리사에게 자기 가족에게 작별을 고하도록 허락한다(1열왕 19,19-21). 그러나 예수께서는 엘리야보다 더 많은 요구를 하신다.

예수께서는 격언을 들이대면서 제자들더러 당신께 마음을 온전히 기울이라고 요구하신다. 가족을 돌보는 일도 하느님의 나라를 심는 일의 일부가 되도록 하라고 요구하신다. 쟁기는 팔레스타인 땅에서는, 더구나 겐네사렛 호수 부근 농촌에서는 사용하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농부는 자기 손으로 농토를 일구어야 했다. 뒤를 돌아보는 것은 자기가 할 일을 소홀히 하거나 내팽개치려는 마음을 나타낸다.   

위에서 한 말을 요약해 본다. ㄱ) 이 금언들은 오로지 예수님을 따라서 예수님처럼 살기로 결심하도록 초대하고 있다. 그 요구를 다른 어떤 필요보다 위에 놓도록 초대하고 있다. ㄴ) 분명히 피할 수 없는 일들이 있다. 그러나 예수께서 보시기에는 하느님의 나라를 심는 일을 그만 둘 정도로 결정적인 일은 아무 것도 없다. ㄷ) 예수님이 하신 이 짧은 말씀들은 가족 관계를 모질게 끊으라는 뜻이 아니다. 다만 그 관계를 절대적인 것으로 여기지 말라는 뜻이다. 그런 온갖 관계가 결정적인 것이 아니고 하느님의 나라와 그 가치만이 결정적인 것이라는 뜻이다. 개인과 가족과 집단과 국가의 이기주의를 벗어나야 진정으로 예수님처럼 하느님의 나라를 위하여 몸 바칠 수 있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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