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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오병이어와 예수 그리스도 (요한 6.1-14)
작성자김종업 쪽지 캡슐 작성일2018-06-18 조회수8,443 추천수0 반대(0) 신고

오병이어와 예수 그리스도

 

(요한 6.1-14)

1 그 뒤에 예수님께서 갈릴래아 호수 곧 티베리아스 호수 건너편으로 가셨는데, 2 많은 군중이 그분을 따라갔다. 그분께서 병자들에게 일으키신 표징들을 보았기 때문이다. 3 예수님께서는 산에 오르시어 제자들과 함께 그곳에 앉으셨다. 4 마침 유다인들의 축제인 파스카가 가까운 때였다. 5 예수님께서는 눈을 드시어 많은 군중이 당신께 오는 것을 보시고 필립보에게, “저 사람들이 먹을 빵을 우리가 어디에서 살 수 있겠느냐?” 하고 물으셨다. 6 이는 필립보를 시험해 보려고 하신 말씀이다. 그분께서는 당신이 하시려는 일을 이미 잘 알고 계셨다. 7 필립보가 예수님께 대답하였다. “저마다 조금씩이라도 받아 먹게 하자면 이백 데나리온어치 빵으로도 충분하지 않겠습니다.” 8 그때에 제자들 가운데 하나인 시몬 베드로의 동생 안드레아가 예수님께 말하였다. 9 “여기 보리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진 아이가 있습니다만, 저렇게 많은 사람에게 이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10 그러자 예수님께서 사람들을 자리 잡게 하여라.” 하고 이르셨다. 그곳에는 풀이 많았다. 그리하여 사람들이 자리를 잡았는데, 장정만도 그 수가 오천 명쯤 되었다. 11 예수님께서는 빵을 손에 들고 감사를 드리신 다음, 자리를 잡은 이들에게 나누어 주셨다. 물고기도 그렇게 하시어 사람들이 원하는 대로 주셨다. 12 그들이 배불리 먹은 다음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버려지는 것이 없도록 남은 조각을 모아라.” 하고 말씀하셨다. 13 그래서 그들이 모았더니, 사람들이 보리빵 다섯 개를 먹고 남긴 조각으로 열두 광주리가 가득 찼다. 14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일으키신 표징을 보고, “이분은 정말 세상에 오시기로 되어 있는 그 예언자시다.” 하고 말하였다. 아멘.

 

이제 요한복음에 4번째 표적과 다섯번째 표적에 들어있는 이제 6장으로 넘어왔습니다. 이 요한복음 6장은 71절까지 있는 아주 긴장이에요 요한복음 6장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만 말미암는 구원이라는 복음의 핵심이 아주 잘 설명이 되어 있어요

요한은 두가지의 기적과 또 여러가지의 에피소드를 그리고 그 기적들에 대한 예수님의 감회까지 곁들어서 생명의 떡이신 그 예수 그리스도와 그 생명에 빵을 이해하지 못하고 세상에 빵을 쫓는 사람들을 극명하게 대조해서 복음을 설명하고 있어요 그래서 이 6장만 잘 공부를 해도 세상에 빵을 쫓는 것이 얼마나 우매한 것인지를 잘 알 수 있죠

  오병이어

오병이어의 기적은 세상의 빵을 기대하는 사람들에게 하늘의 빵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설명하는 이야기에요 그 하늘의 빵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설명이 예수 그리스도로 부터 사람들에게 명쾌하게 전달이 되자 세상의 빵을 기대했던 이들이 전부다 떠나가죠. 결국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까지도 너희도 가려느냐?’ 라는 그런 질문을 하실 만큼 철저하게 세상 빵을 구하는 자들에게 버림을 당해요 그러한 버려짐의 모습이 바로 이제 십자가로 이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 십자가는 예수님이 철저하게 버려진 현장인 거에요 여기서 우리가 알 수 있는 분명한 사실은 세상의 빵을 기대하고 예수를 쫓고 있는 사람들은 언젠가 자기들이 원하는 것이 주어지지 않을때 반드시 예수를 떠나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유대인들은 오병이어의 기적을 체험한 후에 예수님을 쫓아와서 억지로 왕을 삼으려고 그랬어요 그리고 예수님을 가리켜서 모세와 같이 자신들에 제2의 출애굽을 이루실 그 예언자로 신명기 1815절에 나오는 그 예언자로 불렸어요 그러한 모습으로 본다면 그들이 메시아이신 예수님을 알아본듯 싶지 않습니까? 그런데 주님은 그들을 떠나서 산으로 도망가셨어요 왜 그러셨을까요. 루가 복음에 보면 심판을 받는 자들은 하느님을 왕취급하지 않는 자들이다라고 분명히 밝히고 있어요 그런데 이들은 예수님을 왕 취급하려고 쫓아왔는데 도망가셨단 말입니다

루가복음 1927절 보세요 그리고 내가 저희들의 임금이 되는 것을 바라지 않은 그 원수들을 이리 끌어다가, 내 앞에서 처형하여라.’ 원수가 누구에요 하느님, 예수님을 왕취급 안하는 자들 그런데 주님은 자신을 왕으로 추대하려는 이들을 피해서 산으로 도망가셨단 말이에요 유대인들의 유대신학은 종말을 태초의 회복이라고 보았어요 구원의 시대에는 그 태초의 회복이 일어날 것으로 생각을 했단 말이에요 그건 아담이 잃어 버렸던 낙원이 다시 회복된다라고 그렇게 생각했단 말이죠 이스라엘의 출애굽은 이스라엘의 구원사건이였죠? 따라서 유대인들은 출애굽사건은 종말론적으로 또 동시에 태초론적으로 해석을 했어요 그 말은 그들은 그때에 에덴의 회복이 일어났었다라고 믿고 있었다라는 거에요 그리하여 이스라엘이 출애굽하여 약속의 땅 그 구원의 땅 가나안으로 가는 도중인 시나이산에서 체험한 그런 하느님에 영광에 빛은 태초에 있었던 그러나 아담에 의해서 상실된 하느님에 형상과 영광, 계시에 회복으로 봤다구요

 

유대신학이 다 틀린건 아닙니다 하박국 33절 한번 보세요 3하느님께서 테만에서 오신다. 거룩하신 분께서 파란 산에서 오신다. 그분의 영광이 하늘을 뒤덮고 그분을 찬미하는 소리가 땅을 가득 채운다. 4 그분의 광채는 빛과 같고 두 줄기 빛이 그분 손에서 뻗어 나온다. 거기에 그분의 힘이 숨어 있다. 하느님에게서 광명과 광선이 나오고 있죠 출애굽기 3429절 보세요 모세가 그 증거의 두판을 자기 손에 들고 시네산에서 내려오니 그 산에서 내려올때에 모세는 자기가 여호와와 말씀하였음으로 인하여 얼굴 꺼풀에 광체가 나나 깨닫지 못하였더라 29 모세는 시나이 산에서 내려왔다. 산에서 내려올 때 모세의 손에는 증언판 두 개가 들려 있었다. 모세는 주님과 함께 말씀을 나누어 자기 얼굴의 살갗이 빛나게 되었으나, 그것을 알지 못하였다. 30 아론과 이스라엘의 모든 자손이 모세를 보니, 그 얼굴의 살갗이 빛나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그에게 가까이 가기를 두려워하였다. 31 모세가 그들을 불렀다. 아론과 공동체의 모든 수장들이 그에게 나아오자, 모세가 그들에게 이야기하였다. 32 그런 다음에야 이스라엘의 모든 자손이 그에게 가까이 왔다. 모세는 주님께서 시나이 산에서 자기에게 말씀하신 모든 것을 그들에게 명령하였다. 33 모세는 그들과 이야기를 다 하고 자기 얼굴을 너울로 가렸다. 34 모세는 주님과 함께 이야기하러 그분 앞으로 들어갈 때는 너울을 벗고, 나올 때까지 쓰지 않았다. 나와서는, 주님께서 명령하신 것을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하였다. 35 이스라엘 자손들이 자기 얼굴의 살갗이 빛나는 것을 보게 되므로, 모세는 주님과 함께 이야기하러 들어갈 때까지는, 자기 얼굴을 다시 너울로 가리곤 하였다.

하느님을 대면하고 내려온 모세에게서 그 하느님에 광체를 반사한 그 광체가 흘러나오고 있는 거에요 그런데 하박국에서 나타나는 그 하느님에게서 나오는 그 광체와 모세에게서 나오는 광체가 같은광체란 말입니다 바오로는 그 모세의 광체를 가리켜서 하느님의 영광이라고 명확히 이야기하고 있어요

 

고린도후서 37절 보세요 7 돌에 문자로 새겨 넣은 죽음의 직분도 영광스럽게 이루어졌습니다. 그래서 곧 사라질 것이기는 하였지만 모세의 얼굴에 나타난 영광 때문에, 이스라엘 자손들이 그의 얼굴을 쳐다볼 수 없었습니다. 8 그렇다면 성령의 직분은 얼마나 더 영광스럽겠습니까? 9 단죄로 이끄는 직분에도 영광이 있었다면, 의로움으로 이끄는 직분은 더욱더 영광이 넘칠 것입니다. 10 사실 이 경우, 영광으로 빛나던 것이 더 뛰어난 영광 때문에 빛을 잃게 되었습니다. 11 곧 사라질 것도 영광스러웠다면 길이 남을 것은 더욱더 영광스러울 것입니다.

따라서 시나이산에서 모세와 이스라엘에게 나타나셨던 그 빛은 태초에 아담에게 부어졌던 하느님의 형상과 영광에 재현이였던 것이 맞는 거죠 그러나 그 영광은 어떠한 것을 설명한 후에 곧 사라질 영광이였던 것이지 에덴의 회복으로서의 영광은 아니였어요 그래서 모세는 그 사라질 영광을 백성들에게 들키지 않기 위해 수건을 쓴 것입니다 그 영광에 광체가 너무 눈이 부셔서 사람들에게 그걸 못보게 할라고 가린게 아니라 이게 곧 없어질 영광이기 때문에 가린 거에요

따라서 유대신학이 그 시나이산에 빛이 하느님에 영광에 빛이였다라는 것은 잘본것이지만 그 영광이 회복이 된 것은 아니였다 라는 것이죠 뿐만 아니라 유대신학은 출애굽때 광야에서 먹은 그 만나와 무리바의 그 물도 아담이 태초에 낙원에서 먹고 마셨던 천사들의 그 음식에 회복으로 봤어요 그렇게 유대신학에 있어서 이스라엘의 출애굽은 태초에 회복에 개념에 있었던 거에요 그런데 출애굽 이후에 금송아지 사건이 터졌죠? 유대신학은 그걸 뭘로 볼거에요 아담에 타락에 재현으로 본다 말입니다. 따라서 그들은 이제 제2에 출애굽을 기다리면서 왜 제1의 출애굽이 그 금송아지 사건으로 다시 아담의 타락의 재현으로 타락이 되어 버렸기 때문에 이제 제 2의 출애굽을 기다리면서 제2의 모세인 메시아를 기다리게 된 거에요 그게 유대신학인 거에요

 

그들은 그들에 그러한 신학적 배경에다가 신명기 1815절에 나와있는 하느님께서 모세와 같은 예언자를 일으키시겠다는 약속을 결부시켜서 종말에는 모세와 같은 예언자가 와서 모세가 이룬 그 출애굽 구원을 재현하리라고 본 거에요 그렇게 해서 태초에 잃어버린 낙원의 그 축복을 재현하리라고 기대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낙원의 회복이 다윗 왕국에서 재현이 되는듯 했는데 다윗 왕국은 다윗의 후대에서 홀랑 망해버렸잖아요 그러나 그들의 에덴의 회복에 대한 기대는 여전히 수그러들지 않았고 그들은 계속해서 모세와 같은 예언자 메시아가 나와서 그들에게 다윗 왕국에 그런 영화와 같은 태초에 회복을 이루게 해줄 것이라고 믿고 있었어요 바로 그러한 관점에서 유대인들은 이 예수님에 표적 오병이어의 표적을 이해를 한거에요 첫 출애굽때 시나이광야에서 하느님이 만나를 먹이셨듯이 예수께서 첫 출애굽을 기념하는 오병이어의 기적이 유월절에 일어난 거에요 그렇게 첫 출애굽을 기념하는 유월절에 광야에서 5천명을 먹이셨다라는게 딱 들어맞은 거에요 따라서 유대인들은 자기들의 그런 신학적 관점에서 예수가 바로 신명기에서 약속된 모세와 같은 예언자인 제2의 모세라고 생각했고 그 모세가 이루었던 첫 출애굽을 재한현다고 생각한 거에요 더우기 예수님께서 갈릴레아 호수 위를 걸어서 건너가시는 사건은 홍해를 건넌 사건과 맞물리게 된다 말이에요 그래서 그러한 예수님께서 갈릴레아 호수 위를 걸어서 건너가시는 사건은 유대인들의 이러한 해석을 더욱더 강화시켜 주는 거였어요

 

요한은 6장에서 그러한 유대교에 정치적 메시아사상과 물질주의적 구원관을 지금 배격하고 있는 거에요 6장에서 구원이라는 것은 유대신학이 이야기 하는 것 처럼 단순히 출애굽 사건에 문자적 재현이 아니라는 것이죠 6장 전체에서 구원의 목적은 정치적 자유와 경제적 풍요와 사회적 정의에 실현이 하느님 나라의 완성이 아니다라는 거에요 왜냐하면 그러한 삶은 편안한 삶을 우리에게 제공하는 것은 분명하지만 영생을 주는 삶은 아니기 때문에 그러는 거에요 성경에 관심을 갖고 있는 것은 영생인 것입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자기들에게 있어서 구원이라는 것은 이미 선민으로 자기들이 그냥 따 놓은 당상이고 예수께서 모세와 같은 예언자로서 출애굽의 구원을 문자적으로 재현해서 이땅에서도 정치적으로 로마로부터 독립시켜서 자유를 가져다주고 만나와 물과 같은 경제적 풍요를 주고 신에 율법에 의한 사회 정의를 재현하는 메시아로 생각을 한 거에요 그렇게 해서 예수님을 붙잡고 모세와 같은 지도자요 왕으로 삼으려 했다라는 것입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영적 메시아는 필요가 없죠 왜? 그들은 이미 선민이라고 자기들이 자부하고 있었기 때문에 영적 메시아는 필요없는 거에요 그들에게는예수님을 통해서 정치적 자유와 경제적 풍요와 사회적 자유를 얻으려고 예수님에게 몰려든거에요 그래서 예수님은 도망가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런 자들은 필요 없다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러나 오늘날 성당에서 그러한 것들을 위해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아요? 여러분 그건 다 꽝인 거에요 예수님이 도망가셨는데 누구를 섬기는 것입니까 하느님은 분명하게 선민같은거 없고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모두다 죄인이므로 그들 모두에게 공히 메시아가 필요하다라는 것을 반복해서 필역하고 계세요

 

로마서 39절 보세요 9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우리가 유다인으로서 나은 점이 있습니까? 전혀 없습니다. 사실 우리는 이미 앞에서 유다인들이나 그리스인들이나 다 같이 죄의 지배 아래 있다고 고발하였습니다. 10 이는 성경에 기록된 그대로입니다. “의로운 이가 없다. 하나도 없다. 11 깨닫는 이 없고 하느님을 찾는 이 없다. 12 모두 빗나가 다 함께 쓸모없이 되어 버렸다. 호의를 베푸는 이가 없다. 하나도 없다.

유대인들도 죄인이다라는 것입니다 그들에게도 메시아가 필요하다라는 것이죠 예수님은 요한복음 6장에서 그렇게 엉뚱한 구원관과 메시아관을 갖고 있는 유대인들과 오늘날의 교회에게 친절하게 오병이어의 기적을 강해를 해주세요 6장에서 예수님은 구원이 무엇인지 알지못하는 세상사람들이 공히 원하고 있는 이 세상의 빵으로 배불리 먹기 위해 예수님을 찾아오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라고 분명하게 말씀을 하십니다

 

요한복음 626보세요 26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징을 보았기 때문이 아니라 빵을 배불리 먹었기 때문이다. 27 너희는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고 힘쓰지 말고, 길이 남아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을 얻으려고 힘써라. 그 양식은 사람의 아들이 너희에게 줄 것이다. 하느님 아버지께서 사람의 아들을 인정하셨기 때문이다.”

 

세상에 빵때문에 나를 찾아온 자들은 다 돌아가라란 뜻이에요 그런 경고는 오늘 본문 서두에 이미 예표가 되어 있어요 2절 볼까요 2 많은 군중이 그분을 따라갔다. 그분께서 병자들에게 일으키신 표징들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 오병이어에 현장에 모여있는 사람들이 왜 모였어요 병고치는 기적보고 모인 사람들인 거에요 그러니까 당연히 세상의 빵을 구하는게 당연한거죠 그러나 예수님은 이 세상에서 당신을 쫓는 이들에게 그런 세상적 기적을 경험케 해주기 위해 오신 분이 아니다라는 그런 결론이 2절에 내포되어 있는 것이죠 예수님은 이 땅에 빵이 아닌 본질적인 생명 즉 영생을 주기 위해 당신자신이 빵으로 이 세상에 오신 것임을 거듭 천명하세요 우리는 하느님의 공급하심이 없이는 이 땅에서 존재할 수가 없어요 그런데 그거 안구하고 어떻게 살아요 문제는 하느님이 아닌 하느님이 갖고 있는 어떤 것을 탐내는 그게 문제인 것이지 필요한 것들을 하느님께 전혀 구하지 말라는게 아닙니다 여러분 잘 구별하셔야 되요 그건 교만인 거에요

 

요한복음 632절 보세요 32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하늘에서 너희에게 빵을 내려 준 이는 모세가 아니다. 하늘에서 너희에게 참된 빵을 내려 주시는 분은 내 아버지시다. 33 하느님의 빵은 하늘에서 내려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빵이다.” 하느님의 떡은 하늘에서 내려 세상에게 뭘 주는 것이다 생명을 주는 거라 말이죠 하느님에 떡은 요한복음 63535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내가 생명의 빵이다. 나에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을 것이며, 나를 믿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성경은 이 오병이어의 빵을 만나와 비교해서 자주 설명을 하잖아요 그렇죠 따라서 하늘로 부터 내린 그 출애굽 광야의 만나도 하늘로 부터 내려와서 영생을 주시는 예수그리스도라는 빵의 예표였던 것이지 단순히 인간들의 굶주림을 해결하는 양식으로 내린 것은 아니였단 말이에요

요한복음 653절 보세요 53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사람의 아들의 살을 먹지 않고 그의 피를 마시지 않으면, 너희는 생명을 얻지 못한다. 54 그러나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고, 나도 마지막 날에 그를 다시 살릴 것이다. 55 내 살은 참된 양식이고 내 피는 참된 음료다. 56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른다. 57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고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는 것과 같이, 나를 먹는 사람도 나로 말미암아 살 것이다. 58 이것이 하늘에서 내려온 빵이다. 너희 조상들이 먹고도 죽은 것과는 달리, 이 빵을 먹는 사람은 영원히 살 것이다.” 

 

이것은 하늘로서 내려온 빵이니 조상들이 먹고도 죽은 그것과 같지 아니하여 만나에요 만나는 먹고 죽었단 말이에요. 금방 배고픈게 만나지만 이 빵을 먹는자는 영원히 살리라 그러니까 그 만나는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했던 것이지 인간들에게 하느님이 생명을 주게 내린 그런 참빵은 아니였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이 오병이어의 기적은 예수님게서 잡히시던 날 밤에 제자들과 함께 나누셨던 최후의 만찬으로 이어져요 같은 이야기인 거에요 하느님의 백성들에게 영생을 가져다 주는 그 생명의 빵은 예수 그리스도의 그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으로 다른 말로 예수님이 찟기고 그가 쏟아 부은 피에 의해서 하느님 백성들에게 주어지게 된다라는 것을 보여줘요 그래서 이 오병이어의 사건이 그대로 최후의 만찬으로 요렇게 옮겨지는 것입니다

 

마르코복음 1422절 보세요 22 그들이 음식을 먹고 있을 때에 예수님께서 빵을 들고 찬미를 드리신 다음, 그것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말씀하셨다. “받아라. 이는 내 몸이다.” 23 또 잔을 들어 감사를 드리신 다음 제자들에게 주시니 모두 그것을 마셨다. 24 그때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이는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내 계약의 피다.

예수의 피를 마셔야 우리가 산다라고 하는데 하느님은 레위기에서도 그렇게 율법에서도 그렇고 짐승을 피째 먹지 말라고 하죠? 피는 생명이니까 그것은 우리생명에 값으로 예수의 피가 흘려져야 된다라는 뜻도 있지만 피는 생명이기 때문에 너희들이 생명을 얻기 위해 이 세상에 빵인 오직 예수님에 피 그 계약의 피만이 너희들에게 영생을 줄 수 있는 것이니까 이 세상에 피를 마셔서 너희들의 생명을 유지하거나 확산할려고 하지말라는 의미가 그 속에 들어있는 거라 말이에요 이 구절은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바로 전날 밤에 예수님께서 붙잡히시던 날 밤에 제자들에게 하신 예수님의 말씀이에요 예수님은 자신의 십자가의 죽으심을 이렇게 최후의 만찬이라는 그림으로 이렇게 설명을 해준 거에요 바로 이 그림이 미리 오병이어의 기적으로 예표되고 있는 거에요

 

마태복음 1419군중에게 풀밭에 자리를 잡으라고 지시하셨다. 그리고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손에 들고 하늘을 우러러 찬미를 드리신 다음 빵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니, 제자들이 그것을 군중에게 나누어 주었다. 후의 만찬에 그 단어들과 동일한 단어들이 등장하잖아요 같은 그림이라는 것입니다 보세요 최후의 만찬이 언제 있었떤 일이에요 유월절이잖아요 오병이어의 배경은 어디에요 역시유월절이죠 그러니까 유월절은 첫 유월절인 출애굽을 기념하고 종말에 그 유월절에 구원에 재현을 기대하는 절기가 유월절이죠

 

유대인들이 유월절을 왜 지켜요 첫 출애굽이 유월절이잖아요 그 첫 출애굽을 기념하고 요러한 출애굽이 종말에 이제 완성이 될 것이다를 그 종말에 출애굽을 기대한게 유월절이란 말이죠 그러니까 최후의 만찬과 오병이어의 기적이 그러한 유월절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라는 것은 최후의 만찬과 오병이어의 사건이 다른 말로 그 사건들이 내용으로 담고 있었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이 진정한 출애굽 구원에 종말론적 성취라는 것을 보여주는 거에요 그 오병이어의 사건과 최후의 만찬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하심 에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죽으심을 상징적으로 담고 있었던 거잖아요 그게 바로 유월절에 종말론적 성취 첫 유월절에 종말론적 성취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두 사건이 유월절에 일어나는 것입니다

  오병이어 교회, 타브가 (갈릴리)

예수님은 최후의 만찬과 오병이어의 기적의 현장에서 빵을 떼고 그 빵을 부순다라는 뜻이거든요 빵을 부수고 포도주를 붓는 것을 통해서 자신이 얼마나 잔인하게 죽임을 당할 것임을 보여주는 거에요 빵을 찟어 버리는 것입니다 또 포도주를 붓는 거에요 그분의 피가 쏟아질 것을 그러므로 말미암아 당신의 백성들에게 생명 영생이 주어질 것임을 보여주는 거에요 그 사실은 이미 예언이 되어 있던 거죠

이사야서 53장이잖아요 그래서 4절 이하 쭉 보시면 10절만 한번 같이 볼까요 10 그러나 그를 으스러뜨리고자 하신 것은 주님의 뜻이었고 그분께서 그를 병고에 시달리게 하셨다. 그가 자신을 속죄 제물로 내놓으면 그는 후손을 보며 오래 살고 그를 통하여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리라.

예수님이 재물로 들여짐으로 말미암아 죄인들이 살아나는 이 사건이 바로 오병이어의 기적과 최후의 만찬에서 그림으로 그렇게 그려진거고 그게 십자가로 나타난거에요 이 땅에서 이렇게 이러한 구원의 현실이 최후의 만찬이라는 상징적 드라마를 통해서 표현된 거고 오병이어의 기적이라는 극적인 사건을 통해서 미리 예표가 된거죠 그렇게 하느님의 아들의 죽으심을 통해서 우리에게 허락된 생명을 영생이라고 부르는 거에요 성경에서 영생이라는 단어는 자주 생명이라는 단어와 상호교환되어 사용되요

 

요한복음 524절 보세요 그 뒤에 예수님께서 그 사람을 성전에서 만나시자 그에게 이르셨다. “, 너는 건강하게 되었다. 더 나쁜 일이 너에게 일어나지 않도록 다시는 죄를 짓지 마라.”

자 보다시피 영생은 죄와 허물로 죽어 있던 자들이 다시 살아난 상태를 말하는 거에요 그래서 성경은 종종 영생을 그냥 생명이라는 단어와 상호교환해서 쓰기도 하는 거에요 왜 성경이 영생을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빵이라고 부르는지를 부연해 드리기 위해서 말씀 드리는 거에요 우리에게 있어서 지금 생명을 유지시켜 주는게 밥이에요 유대인들에게는 빵이에요 그러면 하늘에 생명을 유지시켜 주는게하늘의 빵이여야 된다 말입니다 자 그런 의미에서 예수님을 하늘의빵 이라고 부르는 거에요 시간적으로 긴생명이 영생이면 지옥에서도 영생을 사는 거에요 거기도 영원히 삽니다

 

일단 이땅에 태어나면 중간에 소멸되는거 없어요 무조건 이땅에 태어나면 영원히 살아야 돼요 지옥에서 천국에서 두군데서 다 그런데 그 둘다 또 성령과 함께 살아요 그런데 그 성령이 지옥에서는 불타는 지옥불로 성령의 불 불타는 지옥불로 나타나는 거고 천국에서는 하느님의 영광의 광채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다른 거죠 영원히 하느님과 함께 살아요 어떤 존재든지 모두 다 영생은 문자적으로는 세상의 삶이라는 뜻이에요 원래 이 영생이라는 단어 조에라는 단어는 히브리어를 헬라어로 번역한 단어거든요 그런데 그 히브리어 원어의 뜻은 오는 세상의 삶이라는 뜻이에요 긴 삶이라는 뜻이 아니라 오는 세상의 삶 영생에 원래 문자적인 뜻이라는 거에요 이 개념은 원래 헬라의 공간적 이원론이 아닌 히브리적 시간적 이원론을 전제하는 개념이에요 그러한 시간적 이원론 하에서 이세상 다음에 오는 세상이라는게 어떤 세상을 말하는 걸까요 새하늘과 새땅을 말하는거죠 따라서 영생은 새하늘과 새땅에서 하느님에 처소로서 사랑으로 대표되는 하느님에 영광을 그대로 담아내는 삶을 영생이라고 하는 거에요 새 하늘과 새땅의 삶 오는 세상의 삶 그렇게 오는 세상의 삶이라는 히브리적 표현을 그대로 헬라어로 옮긴게 조에 영생 헬라어인거에요


그런데 중요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이후에 오는 세대가 이 세대를 뚫고 들어와 버렸어요 그런데 이 땅에 지금 하느님의 백성이 생기고 하느님의 나라가 이땅에 왔다라고 성경이 이야기 하지 않습니까? 우리는 이 세대에 살고 있잖아요 오는 세대가 역사속으로 뚫고 들어온 거에요 십자가는 종말의 사건이 역사속으로 뚫고 들어온거죠 왜 종말에 일어날 심판이 십자가에서 다 이루어지고 여기 예수안에서 심판받을 자들이 자유롭게 풀려났으니까 종말이 역사속으로 뚫고 들어온게 십자가듯이 오는 세상이 이 세상에 뚫고 들어와 버렸단 말이에요 그래서 정직한 시간적 이원론으로는 구원을 다 설명할 수 없어요 왜냐면은 오는 세상이 이 세상에 뚫고 들어와 버렸기 때문에 그냥 히브리적 이원론으로는 그 구원을 다 설명할 수가 없단 말이에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이후에 이 세대 안으로 오는 세대가 뚫고 들어와서 이제 두 세대가 공존하는 상태가 된거에요 이 세대를 살아가는 죄인들 사이에 오는 세대에 사람들인 하느님의 백성들이 지금 이땅에 공존하게 되어 버린 것입니다

 

따라서 이 세대와 오는 세대를 구분하는 정상적인 시간적 이원론에 의하면 자칫 구원과 하느님 나라는 그냥 먼 미래 내세에만 존재하는 것으로 오해할 수가 있어요 성경은 이땅에 분명히 천국이 와있다라고 이야기한다 말입니다 하느님 나라가 천국이거든요 그런데 하느님 나라가 너희 가운데 와 있다라고 이야기한다 말이에요 그런데 오늘날에도 천국은 언젠가 우리가 죽으면 먼훗날 가야할 저 먼곳에 있는 우주 저편에 있는 좋은 곳이라고 생각한다 말이죠 그게 공간적 이원론인거에요 성경은 분명 이땅에 하느님 나라가 와 있고 하느님의 나라를 이땅에서 살 수 있다 맛볼수있다라고 이야기한다 말입니다 그럼 공간적 이원론은 아닌거에요 게다가 존재론적인 이원론이라는게 있어요 영과 육을 완전히 구별해 버리는 거죠 그걸 영지주의라 그래요 그래서 구원이라는 것은 영적인 것에만 국한되는거 이렇게 생각을 해요 그래서 육적으로는 막살아도되 그게 영지주의자들의 오류였거든요 그 무율법주의가 거기서 나온 거에요 이 육은 어차피 소멸될거고 악한거기때문에 마음대로 살아도 되요 만 선한 것이기 때문에 영만 구원받으면 된다라고 생각하는게 이 존재론적 이원론이라는거에요 아니에요 이 세가지 다 틀린 것입니다 우리는 하느님 나라에서도 새하늘과 새땅에서도 새 몸을 입고 그 육신과 함께 영생을 누리게 되는 거에요 마찬가지로 이땅에서 육신을 입고 있는 우리도 이 영과 육신을 통해 그 구원과 영생을 맛봐야 되는 거에요

 

천국이 구름위에 손오공이 타는 그냥 구름위에, 선녀들이 풍성한 음식을 갖고 전하 드시옵소서, 이런걸 보면서 아 저런대는 한번 가보고 싶다 이정도로 천국이 그냥 관념화 되어 버린 거에요 천국은 그런곳이 아닙니다 천국은 공간적인 장소적인 개념이 아니에요 하느님 나라라는 것은 통치의 개념이라니깐요 국가의 3요소가 뭐라 그랬어요 국민 주권 영토라 그랬잖아요 그중에 가장 중요한게 주권이라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나라를 뺏기면 주권을 뺏겼다 그런다구요 백성을 뺏겼다 그러지 않고 그렇잖아요 그러니까 주권 하느님의 통치가 회복된 그 관계 하느님에 말을 지지리도 안듣던 이 죄인들, 하느님의 그 통치를 떠나 자기가 스스로 하느님이 되어 보겠다고 떠난 자들이 하느님의 통치 안으로 들어와서 순종하는삶을 살아낼때 그때 하느님 나라가 보여지는 거에요. 그래서 하느님의 말씀에 온전히 순종했던 예수님이 너희들 가운데 이미 하느님 나라가 와 있다라고 한것은 온전히 하느님께 순종하는 자기를 가리켜 한 말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이 문득 하느님께 순종할 수 있을때 그때 하느님 나라가 여러분 안에서 경험되는 것이고 거기에서 느끼는 희열 같은것들 행복 같은 것들 기쁨 같은 것들이 분명히 있는 거에요 그걸 이땅에서 우리가 맛 볼수있다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육신을 입고 있는 우리가 구원과 그로 인한 영생을 이 땅에서 체험할 수 있고 이땅에서 천국을 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맛본자 만이 하느님이 이런게 영생이고 이런게 구원이라면 이렇게 나의 육신에 나약함과 나에 죄성으로 인해서 이런 것들이 가끔 나오는 이런 세상 말고 이게 영원히 지속되는 그 나라 빨리 오게 해주세요가 하느님 나라에 대한 희망인 것이지 거기는 먹을 것도 마음대로 먹고 나를 왕대접해주는 그런 편안한 곳이기 때문에 나는 가고싶다는 그걸 기복신앙이라 하는 것입니다 기복신앙은 단순히 복주세요가 아니라 하느님이 나에게 배풀어 줄 어떤 것을 기대하고 메달리는 걸 기복신앙이라고 하는 거에요

 

하느님이 가지고 있는 어떤 것, 어떤 힘을 우리가 그게 탐이나서 그분을 섬기는게 아니라 그 분이 너무 좋아서요 그 사랑이 너무 좋아서 그리고 그분께 순종하는 삶이 참 행복과 기쁨을 우리에게 가져다준다라는 것을 우리가 알기에 순종하는 거에요 그분이 주시는 어떤 것이 탐나서 그분을 기다리는게 아닌 것입니다 신부가 신랑이 갖고 있는 재산이라든지 그에 능력이라든지 요런게 탐이나갖고 그 신랑을 기대하고 그 신랑 옆에 이렇게 꼭 붙어 있는 거라면 얼마나 추잡한 거에요? 그거 그 신랑이 만약에 그런 능력 없어지면 언제든지 떠나는 것이죠 그거는 정상적인 부부관계가 아닌 거에요 사랑으로 맺어진 참 사랑으로 맺어진 부부관계 아니듯이 그냥 이 사람이 무얼 갖고 있던 능력이 아주 미미하고 사소하던 이 사람이 좋아 그를 기대하는 거에요 우리가 하나님을 그렇게 기대하고 소망해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도 마찬가지인 거에요

로마서 623절에 보면 죄가 주는 품삯은 죽음이지만, 하느님의 은사는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받는 영원한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최초의 죄는 아담이 하느님의 말을 안듣고 떠나버린 거에요 그러니까 死亡이라는 것은 인간이 하느님을 떠나 범죄함으로 인간이 처해지게 되는 상황, 하느님에 말씀을 순종해야 되는 인간이 하느님을 떠나서 완전히 단절이 되어 버린 그 상황을 사망이라고 해요 그 말은 인간에게 지속적으로 풍성하게 부어져야 할 하느님에 생명력이 단절된 상태를 말하는 거요 그렇게 해서 인간들은 스스로를 자신안에 있는 그 제한된 자원속에 가두어 버렸고 왜냐면 인간은 하느님의 형상으로 만들어 졌기 때문에 그 영광 생명력이 풍성하게 지속적으로 가득 부어져야 만족하고 행복할 수 있는데 그 안에 내재해 놓은 자원속에 자기를 스스로 가둬 버렸기 때문에 모든 인간은 늘 결핍을 느끼게 되어 있다 말이에요 그래서 사랑의 결핍으로 전쟁과 다툼을 하게 되는 것이고 지혜의 결핍으로 미래에 대한 불안감에 떠는 것이고 시간속에 갇힘으로 말미암아 늙게 되고 썩어지는 것이죠 그리고 공간속에 갖혀지는 고통을 겪게 되는 거에요 그걸 사망이라 그럽니다 그 사망에서 벗어난 것을 우리가 생명 영생이라 그러는 거에요

 

탕자에 비유를 한번 생각해 보자구요 그 둘째 아들은 하느님을 떠나버린 죄인들이 갖고 있는 제한적 자원을 상징하는 그 아버지 재산의 일부인 그 유산을 받아들고 자기 마음대로 이 세상의 쾌락을 얻어 보겠다고 떠나버린 자죠? 그게 아담인 거에요 에덴동산에 아담 내가 내 마음대로 살아보겠다고 나에게 영원히 풍성하게 부어질 하느님의 생명력 그걸 단절시키고 내 안에 이게 존재할 수 있을 만큼만 내재된 이거 갖고 내가 하느님 되어 살게 하겠다고 떠난게 그 둘째 아들의 모습으로 여기서 그려지는 거라 말입니다 그가 아버지 곁에 있었더라면 그 무한한 아버지의 재산이 모두 자기것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 상태가 성경이 말하는 의에 상태인 거에요 그러니까 아버지와 아들이 올바른 관계 속에서 아버지가 갖고 있는 모든 것들이 이 아들에게 그대로 전가되어 누려지는 그 상태가 의인 거에요 제가 짜다크를 뭐라 그랬죠 단순히 도덕적으로 윤리적으로 깨끗하게 다르게 사는 삶을 의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네페시가 관계와 관계를 맺고 있는 그 네페시가 그 관계가 요구하는 것을 서로 충실하게 해내고 있는 상태를 의라고 한다 그랬어요 이게 어그러진걸 不義라고 한다 그랬습니다 그걸 불의라고 하는데 그러한 의로운 상태에서는 아버지와 자녀가 서로의 처소가 되어서 아버지가 누리는 모든 것을 자녀가 누리게 되는 상태인 거에요 그게 궁극적으로 우리가 도달해야될 목적지인 것입니다 히브리 사람들에게 있어서 아버지와 아들은 종속관계나 주종관계가 아니라 동등한 관계라 그랬어요 히브리 사람들에게 있어서 아들이라는 개념은 동등한 거에요 아버지가 갖고 있는 것을 아들이 그대로다 누릴 수 있는 거에요 히브리 사람들에게 있어서 夫子관계는 아버자의것이 내것이라는 것이죠

 

루가복음 1531그러자 아버지가 그에게 일렀다. ‘얘야, 너는 늘 나와 함께 있고 내 것이 다 네 것이다. 나와 함께 있으면 내것이 다 네것이다

이게 의로운 상태인 거에요 그러니까 둘째 아들은 제한된 자원인 아버지의 유산을 달랑 받아들고 아버지를 떠나지 않았다면 그 아버지에 것이 모두 그 둘째 아들에 것이 되어서 풍성한 삶을 오래도록 살 수 있었다 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둘째 아들은 어리석게도 그 아버지에게서 제한된 자원을 받아들고 그 아버지를 떠나죠 결국 그는 제한된 자원인 재산을 모두 탕진하고 돼지와 함께 쥐엄 열매를 나누어 먹는 신세가 되어 버렸어요 그걸 사망이라고 하는 거에요 그래서 죄의 삯이 사망이라는 거에요 반대로 영생은 아버지를 떠나서 제한된 자원속에서 고통을 받고 있으며 결국 영원한 고통속으로 떨어지게 될 자들이 다시 아버지 품으로 돌려보내져서 아버지의 풍성한 자원을 자기 것으로 쓸 수 있게 되는 상태를 말하는 거에요

 

탕자의 비유 - 눅15:1-3, 11-32

루가복음 1524절 보세요 나의 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도로 찾았다.’ 그리하여 그들은 즐거운 잔치를 벌이기 시작하였다.

그 제한된 자원을 들고 떠나갔던 아들이 아버지께로 다시 돌아와서 아버지의 반지를 받아서 아버지의 반지를 받았다라는 것은 다시 상속자가 되었다 라는거에요 그 상속자가 되는 것을 가리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것 요한복음 524절의 언어로 바꾸면 영생 생명이라고 이야기 한단 말이에요 영생이라는 것은 우리 성도들이 원래의 창조의 목적대로 하느님과 화목하게 되고 그 결과로 하느님과 연합하여 하느님에 성품과 인격과 그분에 생명에 참여하며 그러한 하늘의 것들을 발산해 내는 것을 말하는 거에요 우리는 이땅에서 주님께서 명령하신 혼신을 다하여 하느님을 사랑하고 네 몸처럼 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사랑에 이중계명을 열심히 쫓아 사는 것으로 이땅에서 영생을 경험할 수 있는 것이고 영생을 세상에 보여줄 수 있는 거에요 바로 그러한 영생이 완성이 되는 것이 진정한 해갈이고 진정한 배부름이며 그 일은 예수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먹는 것으로만 가능하다라는 것이 바로 오병이어의 기적이 담고 있는 메시지인거에요

 

오병이어의 기적을 불신자들에게 주는 매시지라고 생각하시면 안되요 성경의 수신자는 항상 성도입니다 그러니까 교회에게 우리들이 진정으로 추구할 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구원은 영생은 무엇인지를 친절하게 설명해 주고 계시는 거에요 그렇게 자기 자신만이 아닌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에 다툼과 전쟁과 불안과 불평등에 고통이 있을 수 있을까요 그러한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은 사랑으로 하나가 되어서 평등과 정의와 풍요가 넘치는 곳이 될 거에요 그런 것들은 그러한 우리에게 주어지는 모든 기쁨들은 바로 사랑에서 나오는 거거든요 그게 하느님의 성품 하느님에게서 나오는게 바로 나중에 천국에서 이루어질 정말 행복한 상태들이 다 사랑을 근거로 해서 나오는 거에요 그게 진정한 만족이며 진정한 행복이며 진정한 안식인 거에요 그래서 그러한 배부름을 당신에 백성들에게 허락하시기 위해 하느님께서 당신에 아들을 이땅에 보내셔서 십자가에서 빵을 찟듯 갈기갈기 찟으셨다가가 오병이어의 기적인 것입니다

 

사회를 개혁하여 이땅을 지상천국으로 한번 만들어 보자라는 민중신학이나 해방신학은 비 성경적인 것이죠 그렇게 사회개혁을 해서 이 땅에 지상낙원으로 절대 바뀌지 않아요 왜? 그 하느님의 사랑을 근거로 그러한 지상낙원은 오는 것인데 하느님의 사랑을 할 수 있는 백성은 소수거든요 세상은 그 하느님의 사랑을 이용해요 오히려 밟아 버린다니깐요 내가 용서해주고 섬겨주고 사랑해주면 사람들은 나를 밟아 자신의 유익을 챙긴다구요 그게 세상이란 말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은 절대 소수의 그리스도인들의 노력으로 그런 지상천국의 모습으로 보여지지 않아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도는 그 자리에서 그렇게 당하면서 계속 살아가는 삶을 살아야 하는게 성도의 현실인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믿는게 힘든 거에요

 

오병이어의 기적을 구체적으로 살펴보잔 말이에요 기적이 일어난 곳이 어디죠? 61절 보세요 그 뒤에 예수님께서 갈릴레아호수 곧 티베리아스호수 건너편으로 가셨는데, 예수님께서 오병이어의 기적을 배푸신 곳은 갈릴레아 바다 동편이에요 여기서는 그냥 갈릴레아 바다 건너편으로 되어 있지만 다른 공간 복음서에서는 외딴곳(빈들)이라고 표기를 한다 말이에요 보세요 마태복음 1413이 말을 들으신 예수님께서는 거기에서 배를 타시고 따로 외딴 곳으로 물러가셨다. 그러나 여러 고을에서 그 소문을 듣고 군중이 육로로 그분을 따라나섰다. 마르코복음 635절 보세요 어느덧 늦은 시간이 되자 제자들이 예수님께 다가와 말하였다. “여기는 외딴곳이고 시간도 이미 늦었습니다. 루가복음 912 날이 저물기 시작하자 열두 제자가 예수님께 다가와 말하였다. “군중을 돌려보내시어, 주변 마을이나 촌락으로 가서 잠자리와 음식을 구하게 하십시오. 우리가 있는 이곳은 황량한 곳입니다.

 

여기서 외딴곳 이라고 번역이 된 단어 헬라어 에레모스가 광야라는 뜻이거든요 그러니까 이스라엘의 지도를 한번 생각해 보세요 이스라엘의 지도는 요르단강을 축으로 해서 동과 서로 갈라져 있는데 동쪽이 광야 서쪽이 가나안이에요 그 요단강 위에 갈릴레아 바다가 있고 요르단강 아래에 사해 바다가 있다 말입니다 그런데 요단강 건너편에 이들이 모여 있는데 거기가 광야라는 것은 요르단 동편이라는 얘기죠 일부러 그런 배경이 지금 설정이 되어 있는 거에요 오병이어의 사건을 이 출애굽 광야사건과 비교하여 뭔가를 설명할려고 하는 거에요 복음서는 오병이어의 사건을 바로 출애굽기의 광야 만나사건과 연결시키기 위해 광야라는 무대장치를 두고 있는거에요

 

마르코복음 639절 보세요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명령하시어, 모두 푸른 풀밭에 한 무리씩 어울려 자리 잡게 하셨다.그래서 사람들은 백 명씩 또는 쉰 명씩 떼를 지어 자리를 잡았다.

광야에 있는 유대인들이 50100씩 모여 앉았다구요 사실 이런말은 별로 필요없는말 같지 않아요 이스라엘이 출애굽 광야에서 50부장과 100부장 밑에서 50100씩 모여다녔다는거 아시죠? 요런 배경들은 지금 광야사건과 요렇게 일부러 연결을 시키고 있다라는 것을 우리가 힌트로 얻을 수 있는 거에요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만나로 시험을 받은 것과 마찬가지로 이 오병이어에 사건에서도 시험을 받는 사람이 있어요 본문 5절 보세요 예수님께서는 눈을 드시어 많은 군중이 당신께 오는 것을 보시고 필립보에게, “저 사람들이 먹을 빵을 우리가 어디에서 살 수 있겠느냐?” 하고 물으셨다. 예수님께서 빌립에게 우리가 어디서 빵을 사서 사람들로 먹게 하겠느냐 하고 물으세요 주어가 우리에요 이거 아주 중요한 거에요 그 말은 예수님께서 필립보와 함께 그 문제의 해결에 나서고 계심을 보여주는 거에요 주님은 우리라는 단어 안에서 지금 당면한 결핍의 문제를 풀려고 하세요 그런데 필립보는 하느님이신 예수님이 지금 당면한 문제를 우리가 되어 함께 푸시겠다고 하시는데도 여전히 돈이 모자라는 것에 대한 걱정을 하고 있는 거에요 그게 시험인 것입니다 성도는 이 세상에 자원으로 생존하는 사람들이 아닌 거에요 하느님에 약속과 말씀에 근거하여 이땅에 존재하는 사람들이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 말은 다른 말로 성도는 세상에 떡이 부족하다고 해서 낙심하지 않는 자들이고 세상에 떡이 많다고 해서 기고 만장하는 그런 사람들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그분에 은혜를 받는 것에서 행복과 만족과 해갈과 배부름을 느껴아 하는 이들이라는 뜻인 거에요 그런데 필립보는 예수님이 우리라고 자기와 함께 있다라는 그 사실을 각인시키는데도 걱정속에 빠저 있는 것입니다

 

본문5절을 보시면 예수님께서는 눈을 드시어 많은 군중이 당신께 오는 것을 보시고 필립보에게, “저 사람들이 먹을 빵을 우리가 어디에서 살 수 있겠느냐?” 하고 물으셨다.

예수님께서 어떻게 라고 묻지 않으시고 어디서라고 물으시잖아요? 이 말은 어떻게 빵을 살것인가는 걱정하지 말라는 뜻이에요 그 말속에는 이미 너희 배를 채울 빵을 살 능력이 나에게 있다라는 것을 전제하고 물으시는 거에요 그러니까 문제는 그 빵이 어디서 오는가가 중요하다는 것이죠 그래서 어디서 그 빵을 살 것인가 세상이냐 하늘이냐를 물으시는 거에요 그런데 필립보는 그러한 예수님의 속내를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여전히 걱정이 태산이에요 이 필립보는 베지타 사람이에요 그렇기 때문에 빵을 어디서 살수 있는지는이미 자기는 알고 있다라고 생각하는 거에요 이 지역사람이기 때문에, 그러니까 그 사람의 걱정은 돈 문제인 거에요 지금 필리보는 예수님의 시험에서 그런 면에서 낙방한 거에요

바로 이 시험은 광야에서 이스라엘이 받은 시험과 동일한 시험이였어요 신명기 82절 보세요 2 너희는 이 사십 년 동안 광야에서 주 너희 하느님께서 너희를 인도하신 모든 길을 기억하여라. 그것은 너희를 낮추시고, 너희가 당신의 계명을 지키는지 지키지 않는지 너희 마음속을 알아보시려고 너희를 시험하신 것이다. 3 그분께서는 너희를 낮추시고 굶주리게 하신 다음, 너희도 모르고 너희 조상들도 몰랐던 만나를 먹게 해 주셨다. 그것은 사람이 빵만으로 살지 않고, 주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는 것을 너희가 알게 하시려는 것이었다.

 

여기 보시면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만나를 주신 것이 사람이 빵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으로 사는 것을 깨닫게 하시기 위한 시험이였다라 하지요 그 말을 잘새겨보면 시험에 대상자는 만나를 먹은 모든 이스라엘 사람들이죠 따라서 오늘 본문에서 시험을 받은 사람은 필립보뿐만아니라 그곳에서 오병이어의 빵과 물고기를 먹은 모든 사람들인 거에요 따라서 필립보는 지금 그곳에서 오병이어에 빵과 물고기를 먹게 될 모든 유대인들에 대표로 서서 시험을 받는 거에요 필립보가 낙방한건 거기에 있는 사람이 전체가 낙방했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사람이 빵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사는거야라는 답을 기대하고 기대한 것은 아니지만 그들이 떨어질줄 아셨죠 그 답을 원하시면서 그 모든 인파를 대표하는 필립보에게 시험을 던졌는데 빵이라니깐요 라는 엉뚱한 대답을 했다란 말이에요

 

세상사람들은 세상의 빵을 원하기 때문에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것이 보잘것없고 형편없고 모자랄때 부끄러워하기도 하고 고통스러워하기도 하죠 그때에 에굽에 고기와 부추와 마늘과 같은 만족스럽고 풍성하고 화려한 것들이 주게 되면 사람들은 아주 만족케 하고 기뻐하고 행복해 해요 그러나 만나와 같은 보잘것없는 것이 주어지면 이거 뭐야 아무것도 아니네 이게 만나란 말이에요 그게 만나가 갖고 있는 상징이란 말이죠 그런 보잘것없는 것이 주어지면 처음에는 잠시 자신들에 굶주림을 해결해주는 만나가 고맙다가도 그 초라함과 모자람에 근방 낙심하고 절망하게 된다 말이에요 그렇다고 인간들에게 그들이 좋아할 만한 부추와 마늘과 고기를 준다고 해도 인간들은 절대 그것들로 만족할 수 없다라는 것을 보여주는 시험이 출애굽 광야에서의 만나 사건인 거에요

인간에 뻥뚤린 공허한 가슴은 이 세상에 어떤 좋은 것으로도 안채워진다니깐요. 그래서 만나가 아니라 부추와 고기와 마늘을 갖다 줘도 인간들은 금방 또 다른 더 좋은 것을 찾게 된다 말입니다 그게 만나의 시험인 거에요 그거는 절대 너희들을 만족 시켜줄 수 없어 행복하게 해줄수 없어 그러니까 하느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만 너희들은 행복할 수 있어를 우리에게 깨닫게 해주는 시험이 바로 만나의 시험이였단 말입니다 하느님께서 만나를 어떤 상황에서 주셨죠?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굶주려서 하느님과 모세를 원망하며 애굽을 그리워할때 만나를 주셨어요 그 속에는 너희가 정말 배만 부르면 나를 원망하지 않고 나에 말에 순종할 수 있겠느냐는 하느님의 질문이 담겨 있는 거에요 만나를 먹고 배가 불렀어요 감사했죠 그런데 금방 또 불평이 나왔어요 고기줘, 물줘, 그게 만나의 시험인 것입니다 인간은 절대 육신의 배고픈 것이 해결된다고 해서 만족할 수 있거나 행복해지는 존재가 아닌거에요 따라서 인간은 하느님의 말씀을 쫓아서 하느님께 순종하며 하느님의 것을 충만히 받아 누릴때에만 만족하며 행복할 수 있습니다 그게 만나 시험에 정답이였던 거에요

 

그런데 그러한 순종에 삶은 인간에 힘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한 것이기에 어떠한 방법을 간구해야된다 밖으로 부터 하느님의 은혜가 부어져야 된다 이게 복음이잖아요 마찬가지로 오병이어의 기적에 동원된 보리빵과 물고기 2토막은 두마리가 아니에요 원래 원어는 두 토막이에요 요만한거 멸치같은거 두토막, 보리빵과 물고기 두토막은 그러한 보잘것없는 세상 것에 상징으로 주어진 거에요 여러분 보리는 그 당시에도 짐승이나 가축에 먹이로 쓰던 것입니다 아주 보잘것 없는 거에요

뿐만 아니라 보리는 간음한 여인이 죄 사함을 받기 위해서 성전에 가서 제사를 드릴때 제물로 드리던 거에요 그 말은 간음한 여인은 짐승같은 인간이기 때문에 짐승이 먹는 보리로 하느님 앞에 제물을 드립니다 라는 의미가 들어있는 거에요 그만큼 보리는 아주 보잘것없고 형편없는 짐승들에 음식이였단 말이에요 신약에 만나인 것입니다 그게 그 보리빵이 예수님손에 들려졌어요 그리고는 제자들에게 주어 졌습니다 그리고 그 제자들이 빵을 나누어 주었어요 족히 2만명이 넘는 사람들이 그 보리빵을먹었어요 여기서 중요한건 보리빵이 예수님의 손에 들려지자 무슨 카스테라나 단팟빵이 된게 아니라 그대로 보리빵이였다라는게 중요한 것입니다 그냥 보잘것 없는게 주어진 거에요 이왕이면 더 좋은 음식으로 바꿔 주시지 그렇게 바꿀거면 왜 그냥 보리빵을 주었을까요? 님은 이스라엘의 광야에서의 그 만나시험과 동일한 시험을 그들에게 주고 계신 거에요 주님은 구약의 만나사건과 연결하여 보잘것없는 세상 것들로 만족하지 못하고 부끄러워하며 절망하는 인간의 실존을 폭로함과 동시에 이 세상의 것들로는 그 어떤 것으로도 인간들에 만족과 행복을 채워줄 수 없음을 그 오병이어의 시험에서 보여주시는 거에요

 

유대인들이 굶주려 있을때 보리빵과 물고기를 먹고는 예수님께 열광하며 찾아왔어요 그런데 만일 예수님께서 출애굽 광야시대 때처럼 계속해서 보리빵만 맨날 만들어 줬으면 어땠을까요 이들이 분명히 보리빵과 물고기를 먹고 예수님을 찾아 왔는데 예수님이 기특해 갖고 그래 내가 매일 줄께 그래놓고 계속 보리빵만 주었어요 그러면 이들이 계속 예수님을 쫓아 다녔을까요? 짐승먹이 보리빵 그만주고 고기좀 한번 만들어 줘요 그랬을거 아닙니까 그게 출애굽 광야에서 이스라엘의 불평 아니였어요? 따라서 예수님은 인간의 만족은 이땅의 빵이 아닌 하늘의 빵인 예수에 의해서만 주어질 수 있다는 것을 敎會에게 깨닫게 하시기 위해서 오병이어의 기적을 배푸신거에요 우리는 절대 이땅의 것으로 만족할 수 없는 하느님의 형상으로 지어진 사람입니다 그래서 하늘의 빵인 예수가 우리와 연합하여 함께 하시게 될때 다른 말로 우리 안에 하늘의 것이 가득 채워질때에 우리는 진정한 행복을 누릴 수가 있는 거에요 그래서 주님은 필립보에게 우리가 라고 말씀하셨던 것이고 우매한 세상사람들 대표하는 필립보는 세상의 빵이 없으므로 걱정을 하고 있는 모습으로 등장하는 거에요 영적인 것에는 관심이 없고 다만 이 세상에서 자기에 육신에 배를 불리는 것에만 관심을 가졌던 자가 창세기에도 나오죠? 에사오의 팟죽이 바로 이 만나와 같은 것이였어요 에사오는 자기 배를 채울 팟죽과 하느님의 축복의 계승이라는 장자권을 바꾸어 버리죠 영적인 것 보다는 당장 자기 배를 채울 팟죽이 더 좋은 거에요 그게 죄인들의 모습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죄인의 상징으로 등장하는 에사오의 팟죽과 광야의 만나와 신광야의 오병이어는 모두 그것으로는 절대 인간들에게 만족을 줄 수 없는 부질없는 이 세상의 것들을 상징하는 거에요

 

출애굽 광야에서는 그 시험에 낙방한 사람들이 모두다 광야에서 죽었어요 장정 60만이 일세대가 다 죽잖아요 그 시험에 낙방해서 죽은 것입니다 그런데 이 신약의 광야에서는 필립보안에서 모든 사람들이 다 낙방했잖아요 그 낙방한 사실을 어떻게 알 수 있어요 나중에 예수님이 세상의 빵 아니야 그러니까 다 도망갔잖아요 그러니까 낙방한 거란 말이죠 그런데 왜 그들은 안 죽었죠? 그 사실은 어떤 것을 상징으로 담고 있는 걸까요 하느님이 구약시대때 보다 더 착해지셔서? 公義의 하느님이세요 반드시 누군가가 처벌을 받아야 되요 그렇다면 그 모든 이들을 대표할 수 있는 어떤 자격있는분이 대표로 그 시험을 받았다는 말이 되잖아요? 루가복음 222828 “너희는 내가 여러 가지 시련을 겪는 동안에 나와 함께 있어 준 사람들이다. 자 주님은 우리 성도들이 받아야 할 모든 시험을 우리를 품에 안고 다 받아 내셨다라는 말이에요 나의 모든 시험 중에 항상 내가 너희와 함께 있었다 우리가 받은 시험을 예수님이 다 받아 내시고 다 완성해 내신 거에요 그분이 그 광야의 만나의 시험을 예수님께서 역시 광야에서 받으셨다라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41절 보세요 1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성령의 인도로 광야에 나가시어, 악마에게 유혹을 받으셨다. 2 그분께서는 사십 일을 밤낮으로 단식하신 뒤라 시장하셨다. 3 그런데 유혹자가 그분께 다가와,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이 돌들에게 빵이 되라고 해 보시오.” 하고 말하였다. 4 예수님께서 대답하셨다.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 ‘사람은 빵만으로 살지 않고 하느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

 

정답이 드디에 나왔죠? 하느님이 이 대답을 듣기 위해 출애굽 광야에서 이스라엘을 시험하셨고 광야에서 오병이어의 기적으로 필립보와 이스라엘의 시험하신거 아니에요 그런데 예수님이 그들은 다 오답을 냈는데 예수님이 정답을 말씀하신거에요 그렇게 해서 신약의 광야에서 시험에 실패한 자들이 버젓이 살아있게 된거에요 예수님이 시험을 이겨내시고 그들을 품에 앉아 버리신 것입니다 하느님은 그 일을 예수 그리스도의 살을 찟고 피를 퍼내어서 아직 원수들이였던 당신의 백성들에게 먹이고 마시게 하신 거에요 이렇게 광야에 만나와 신광야의 보리빵과 물고기는 그렇게 세상것으로 일희일비하는 세상사람들의 모습을 폭로하는 그러한 세상에 빵에 덧없음을 상징하는 소품이였을 뿐만이 아니라 정말 보잘것없는 보리빵 같은 모습으로 이땅에 오셨으나 그 보잘것없는 모습에 하늘에 빵이 굶주린 당신에 백성들에게 참 생명을 주는 것임을 이중적으로 보여주는 소품인거에요 이 땅에 이 세상에 관점으로 물질적인 관점에서 그 만나나 오병이어의 빵을 보면 그거는 인간을 절대 만족시킬 수 없고 행복하게 할 수 없는 인간에게 생명을 줄 수 없는 그런 보잘것없는 빵이고 영적인 관점에서 그 만나와 오병이어를 보면 그렇게 보잘것없어 보이는 보리빵같은 모습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참 생명이 주어진다라는 요런 이중적인 상징이 그 안에 들어있는 거라 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세상 사람들에게는 실패의 십자가요 패배의 보리빵처럼 보잘것없어 보이는 것이지만 오직 그 예수만이 우리를 충만하게 채워줄 수 있고 우리를 만족시켜줄 수 있다라는 것을 우리에게 확실히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열두 광주리가 남은 것입니다 부족함 없이 꽉 채워준다는 거에요 이 세상에 그 어떤 것으로도 우리 안을 가득채울 수 없어요 그런데 보리빵 같은 그 예수로만 차고 넘치게 우리 안이 채워진다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열두광주리가 남은 거에요. 오병이어의 기적은 이미 열왕기 하에서 모형으로 나타났던 거에요

열왕기하 442절 보세요 42 어떤 사람이 바알 살리사에서 왔다. 그는 맏물로 만든 보리 빵 스무 개와 햇곡식 이삭을 자루에 담아, 하느님의 사람에게 가져왔다. 엘리사는 이 군중이 먹도록 나누어 주어라.” 하고 일렀다. 43 그러나 그의 시종은 이것을 어떻게 백 명이나 되는 사람들 앞에 내놓을 수 있겠습니까?” 하고 물었다. 엘리사가 다시 말하였다. “이 군중이 먹도록 나누어 주어라. 주님께서 이들이 먹고도 남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44 그리하여 그것을 사람들에게 내놓으니, 과연 주님의 말씀대로 그들이 먹고도 남았다

 

여기는 보리빵 20개지만 여기서도 다 먹고 남았어요 역시 보리빵같이 보잘것없어 보이는 예수님에 의해 풍성한 하늘에 생명이 당신에 백성들에게 채워지는 모양인 거에요 이렇게 보잘것없어 보이는 예수 그리스도와 십자가에 의해서 우리는 진정한 결핍이 채워지는 그림을 아주 잘 그려놓은 것을 알죠 시편 23편 볼까요 1절 주님은 나의 목자, 나는 아쉬울 것 없어라. 2 푸른 풀밭에 나를 쉬게 하시고 잔잔한 물가로 나를 이끄시어 3 내 영혼에 생기를 돋우어 주시고 바른길로 나를 끌어 주시니 당신의 이름 때문이어라. 4 제가 비록 어둠의 골짜기를 간다 하여도 재앙을 두려워하지 않으리니 당신께서 저와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당신의 막대와 지팡이가 저에게 위안을 줍니다. 5 당신께서 저의 원수들 앞에서 저에게 상을 차려 주시고 제 머리에 향유를 발라 주시니 저의 술잔도 가득합니다. 6 저의 한평생 모든 날에 호의와 자애만이 저를 따르리니 저는 일생토록 주님의 집에 사오리다

 

이 모습과 오늘 본문 요한 610-13절을 비교해 보세요 10 그러자 예수님께서 사람들을 자리 잡게 하여라.” 하고 이르셨다. 그곳에는 풀이 많았다. 그리하여 사람들이 자리를 잡았는데, 장정만도 그 수가 오천 명쯤 되었다. 11 예수님께서는 빵을 손에 들고 감사를 드리신 다음, 자리를 잡은 이들에게 나누어 주셨다. 물고기도 그렇게 하시어 사람들이 원하는 대로 주셨다. 12 그들이 배불리 먹은 다음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버려지는 것이 없도록 남은 조각을 모아라.” 하고 말씀하셨다. 13 그래서 그들이 모았더니, 사람들이 보리빵 다섯 개를 먹고 남긴 조각으로 열두 광주리가 가득 찼다.

10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시켜서 사람들을 앉게 하라 하시죠 그 말은 사람들이 다 서있었다 라는 말이 아니라 유대인들이 식사 자세를 이야기 하는 거에요 유대인들은 이렇게 앉아서 옆으로 비스듬히 누워서 식사를 하지 않았습니까? 걱정하는 제자들에게 내가 그들을 먹일 것이 있으니까 그들에게 식사 자세를 취하라고 이야기 하신 거에요 오직 하느님에게서만 참된 양식이 우리에게 올 수 있다라는 것이죠 바로 그 뒤에 보면 그곳에 잔디가 많다 그래요 뭐에요 푸른풀밭입니다 주님은 받아먹는 사람들이 원하는 데로 다 주셨어요 거기에 참된 만족이 있음을 보여주는 거에요 그리고 먹고 남은 조각이 열두 광주리에 가득찼어요 내 잔이 넘치나이다 내 잔이 넘치도록 풍성한 행복과 만족과 기쁨과 안식이 우리에게 주어지는 모형으로 보여주는 거라 말입니다 바로 그러한 구원을 우리가 받아 누리고 있는 거에요

 

그런데 우리에 현실을 보면 전혀 잔이 안 넘치는 것 같죠? 개떡같지 않습니까? 우리의 인생이 이거 뭐 넘치기는 쥐뿔이나 뭐가 넘쳐요? 전혀 안넘쳐. 보리빵 같은 인생이 맞는 거에요 이 세상에서 보리빵처럼 보여야 우리의 잔이 넘치는 것입니다 어떻게 뭘로 넘쳐요 예수의 성품 사랑과 용서와 인내와 온유와 절제 이런 예수의 성품으로 흘러 넘치는 거에요. 이 세상에 빵이 흘러 넘치는게 아니라니깐요 우리 안에서 예수가 흘러넘치는 거에요 물론 지금은 그거 조차도 흘러 넘치는거 같지 않지만 영적 현실은 그게 흘러넘치는 우리들이에요 그리고 그렇게 흘러넘치는 자로 우리가 완성 되는 것입니다 그게 출애굽에 종말론적 완성인 거에요 그것이 우리에 구원이 바로 그러한 모습인 것입니다

그때 그렇게 우리 안에서 하느님에 것이 물씬 풍겨나오는, 흘러넘치는 그 상태가 진정한 해갈이고 진정한 배부름인 거에요 그걸 만들어 주기 위해 그 선물을 주기 위해 예수가 이땅에 오셔서 빵처럼 찟긴 것입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은 그 이야기 하고 있는 거에요 그래서 성경은 돌아온 탕자들이 아버지의 상속자가 되어 이제 아버지의 모든 것을 발산해 내며 그 아버지의 모든 것을 누리는 그때를 가리켜 다시는 주리지도 않고 목마르지 않는 때라고 이야기 하는 거에요

 

요한묵시록 714절 보세요원로님, 원로님께서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하고 내가 대답하였더니, 그가 나에게 말하였습니다. “저 사람들은 큰 환난을 겪어 낸 사람들이다. 저들은 어린양의 피로 자기들의 긴 겉옷을 깨끗이 빨아 희게 하였다. (큰 환란에서 나오는 자들 보리빵 같은 자들인데 라는 뜻이잖아요) 15 그래서 그들은 하느님의 어좌 앞에 있고 그분의 성전에서 밤낮으로 그분을 섬기고 있다. 어좌에 앉아 계신 분께서 그들을 덮는 천막이 되어 주실 것이다. 16 그들이 다시는 주리지도 목마르지도 않을 것이며 해도 그 어떠한 열기도 그들에게 내리쬐지 않을 것이다. 17 어좌 한가운데에 계신 어린양이 목자처럼 그들을 돌보시고 생명의 샘으로 그들을 이끌어 주실 것이며 하느님께서는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닦아 주실 것이다.”

 

바로 이 요한묵시록의 결론이 오늘 본문인 오병이어의 기적속에 담겨 있는 메시지인 거에요 우리 성도의 양식은 이 세상에 빵이 아니에요 우리를 진정 만족하게 하고 배부르게 하는것은 하느님에 말씀이여야 됩니다 그 하느님의 계약만이 우리를 희망으로 이끌 수 있고 우리는 그 희망을 품고 이 광야같은 땅에서 진정한 만족과 기쁨과 안식과 행복을 맞볼수 있는 거에요 하느님의 그 말씀 그계약이 없으면 이 보리빵 같은 인생에 무슨 희망이 있어요? 그말씀 때문에 우리는 힘을 얻어 이 보리빵같은 인생이지만 행복과 기쁨과 만족속에 살수 있는 거에요

그래서 인간은 빵이 아닌 하느님의 말씀으로 사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백성은 이렇게 오병이어의 기적은 복음을 설명하는 표적이지 우리가 가진 작은 것을 하느님께 바치면 풍성하게 튀겨서 되돌려 주신다라는 그런 동화같은 이야기가 아닌 것입니다 아니 여기 그 오병이어 받친 그 소년이 무슨 상받았다는 애기 있어요? 그런데 뭘 근거로 도대체 오병이어의 작은 것을 바치면 하느님이 몇배로 튀겨주신다라는 말이 도대체 어디서 나오는 거에요 자 오병이어의 기적과 동일한 기적이 또 있었죠? 칠병이어의 기적이 있었잖아요 그때도 빵 일곱개와 물고기 두마리로 4천명이 먹고 일곱 광주리가 남았어요 그것을 五餠二漁 사건에 오병이어와 오천명과 남은 음식 열두광주리와 한번 비교해 보세요

 

유대인들은 숫자에 아주 중요한 메시지들을 담고 있는다라고 제가 말씀 드렸죠? 유대인들에 있어서 보리빵 다섯개와 오천명에 나오는 이 오라는 숫자가 뭘 의미할까요 퍼뜩 드는 생각 모세 오경인 거에요 유대인을 상징하는 모세 오경 남은 열두광주리 열둘이라는 숫자는 열두지파 칠병이어에서 이 칠이라는 숫자 요 오병이어와 비교해서 가나안 일곱족속 방위를 상징하는 이방전체를 상징하는 거죠 그러니까 예수님이 빵과 고기로 풍성하게 튀겨서 다른 이들에게 먹인 사건은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의 구별없이 하느님의 그 영생의 구원이 동일하게 이제 적용이 될 것이다라는 사건을 거기서 보여주는 거지 절대 어떤 기적으로 하느님의 백성들에게는 기적으로 그들이 필요한 것들을 다 채워주실 것이라는 이러한 이야기는 아닙니다. 이렇게 예수님의 標的은 모두 예수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죄인들의 영생의 복을 받게 되는 요나의 표적이였단 말이에요 전체 문맥상으로 보더라도 이 오병이어의 기적은 복음을 설명하는 이야기일 수 밖에 없어요

 

요한복음 1장에서 빛이 오셔서 천지 창조의 그 순서대로 빛이 오시고 둘째날 세례를 받으시고 셋째날 제자들과 함께 거하심으로 물과 뭍으로 상징되는 새하늘과 새땅을 보여주시고 그리고 사흘 후에 사흘 동안은 제자들을 모으시고 넷째날 다섯째날 여섯째날에 그 체험을 채우시는 거죠 그리고 일곱째날 사흘째 되던날 안식 가나의 혼인잔치 이게 창세기 이야기를 그대로 가지고 오지요.

 

2장에 뭐가 되죠 가나의 혼인잔치에서 물로 포도주를 만드시는 사건이 나오는 거죠 그래서 하느님과 하느님 백성에 혼인잔치는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 그 피로 말미암아 완성이 된다라는 것을 거기서 딱 보여주시고

3장에서 니고데모를 등장시켜서 그 구원은 인간측에 어떤 자격이나 열심이나 노력같은 것으로 절대 주어질 수 없는 거야를 보여주시는거에요 그 니고데모 유대관원을 통해서

4장에서 그러면 누가 받어 예수님이 찾아가는 자들은 남편이 다섯있는 여자 가장 추악한 죄인을 상징하는거에요 그런 사람도 예수님이 찾아가시면 하느님이 찾아가시면 어떠한 사람들도 거기에서 건져 나갈 수 있다라는 것을 사마리아 여인에게서 보여주는 거죠 그리고 그 현실을

5장에38년된 병자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병자가 예수님이 찾아가셔서 일으키시는 사건으로 구원은 이런거야 라고 설명해 주시는 거에요 그리고 그 구원이 어떻게 일어날 것인가를

6장에서 예수님의 살과 예수님의 피가 십자가에서 찟기고 쏟아 부어짐으로 그 구원은 일어나는 거야가 이 오병이어라 말입니다 그러니까 오병이어의 사건은 구원의 사건을 이야기 하는 거에요 영생의 사건 이야기 해주는 거에요 그러니까 엉뚱하게 건축헌금 얼마내면은 하느님이 튀겨서 우리에게 저 건물을 주실줄 믿습니다 이 얘기는 못들은 걸로 해주세요 우리는 그렇게 예수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심으로 구원을 받은 수지 맞은 사람들이에요

따라서 광야의 유대인들처럼 세상의 빵에 관심을 가지시면 안되는 거에요 여러분 구원받은 거에요 여기서는 세상에 빵을 여전히 쫓아다니고 이거는 있을 수가 없다란 말입니다 자 하늘의빵 예수 안에서만 참 해갈과 배부름이 있어요 그러니까 세상의빵이 아닌 하늘의 빵으로 여러분들의 배를 채우십시오 하늘의 빵을 이 땅에서 우리가 먹을 수 있는 유일한 길, 사람이 빵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사는 거니까 이땅에서 여러분이 여러분의 에너지 힘삼아 살 수 있는 것은 하느님의 말씀입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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