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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위령] 전례사적 맥락에서 본 장례 예식의 본질적 의미
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04-10-29 조회수2,618 추천수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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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례사적 맥락에서 살펴본 장례 예식의 본질적 의미

 

 

1. 들어가는 말

 

모든 종교는 인간이 살아가면서 필연적으로 경험하게 되는 생로병사에 깊은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그 중에서도 죽음은 그가 갖는 체험 불가능성과 그 때문에 초래되는 불확실성으로 인간에게 두려움과 경외의 대상이 되고 있다. 모든 종교는 이러한 죽음을 넘어서 펼쳐져 있는 피안의 세계를 제시하면서 인간 앞에 어둠의 장막을 드리운 채 놓여 있는 죽음을 뛰어넘는 신비적인 전망을 제시한다. 그리스도교 역시 구세사를 완결하는 결정적 계시로서 예수님의 강생과 죽음과 부활의 신비를 통해서 모든 인간이 죄와 죽음에서 해방되어 영원한 삶을 하느님에게서 선물로 받았음을 선포한다. 그러므로 죽음은 삶의 폐막이 아니라 새로운 세계로 옮아감이며1) 운명이 끝나는 날이 아니라 새로 태어나는 날(dies natalis)이라는 것이다. 초기 교부들은 한결같이 이러한 죽음의 파스카적인 성격을 강조하였다. 모든 그리스도교 신자들은 장례식에서 슬픔과 설움을 표시하지 않아야 하며, 오히려 주님께 감사 드리고 기뻐하며 즐거워하여야 한다고 140년경의 교부 아리스티데스(Aristides)는 가르쳤다. 왜냐하면 세상을 떠난 그 형제가 이 세상에서의 마지막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고 복된 영원한 생명으로 나아갔기 때문이라는 것이다.2) 이러한 의미에서 그리스도교 장례 예식은 이승에서 저승으로, 죽음에서 생명으로 건너가는 파스카적 성격을 띨 수밖에 없다.

 

가톨릭 교회가 하느님께 봉헌하는 최고의 제사는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기념하는 파스카의 잔치인 미사 성제이다. 사도 시대 이래 예수님의 파스카 사건의 재현이라는 단순한 형태로 거행되던 이 미사는 교회가 내적 외적으로 성장하면서 서서히 그 틀을 완성시켜 나갔다. 교회가 여러 가지 전례 예식을 발전시켜 나감에 따라서 미사 성제 안에는 다양한 내용이 포함되게 되었고 이로써 여러 성사 미사와 기원 미사, 신심 미사가 발전하게 되었다.3)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장례 예식은 죽은 이의 이승에서 저승으로의 여정을 기원하는 파스카적 성격을 띠므로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의 여정으로 파스카의 잔치라고 규정할 수 있는 미사 성제와는 매우 일찍부터 결합될 수 있었다. 미사 성제가 예수님의 파스카라면 장례 예식은 망자의 파스카를 위한 기원이기 때문이다. 본고에서는 먼저 위령 미사를 포함한 그리스도교 장례 예식의 역사를 간략하게 살펴보고 그 역사 안에서 드러나는 장례 예식과 위령 미사가 내포하고 있는 전례적이며 신학적인 의미는 무엇인가에 대하여 살피고자 한다.

 

 

2. 초대 교회 - 그리스도교 장례 예식의 성립

 

초대 교회의 장례 관습을 살필 수 있는 예식서는 발견되지 않았다. 그러므로 초대 교회의 장례 예절을 살펴보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그리스도교 전례 형성에 영향을 끼친 두 가지 관습에 대한 신중한 연구가 선행되어야 할 것이다. 초대 그리스도교 장례 예절의 첫 번째 뿌리는 유다이즘이다. 초대 그리스도교 신자들의 대다수가 히브리인이었으므로 그리스도교 신자들의 장례 예절은 히브리적 관습을 그대로 유지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하겠다. 그러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서 그리스도교 신자들의 수효가 점차 늘어나게 되었고, 처음에는 유다인 거주 지역(diaspora)을 중심으로 발전하다가 이방인의 지역까지 그 영역을 넓히게 되었다. 이는 유다이즘 이외의 다양한 지역 문화와 만남을 의미하며, 따라서 초기 그리스도교 신자들의 장례 예절은 유다이즘 이외에도 이방인들의 다양한 문화와 관습에서도 영향을 받게 되었다.

 

1) 히브리적 전통의 승계

 

히브리적 관습에 대한 연구는 초대 교회 장례 연구에서 시금석이 된다. 유다인들에게 시신을 다루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일이었다.4) 성서에서 어떻게 히브리인들이 죽은 이의 시신을 처리했는지 볼 수 있는데, 그들은 먼저 눈을 감기고, 몸을 가지런히 하고 수의를 완전하게 입혔다.5) 초대 교회 그리스도교 신자들은 이와 같은 유다 관습을 그대로 받아들였는데 그 관습에 육신의 부활이라는 새로운 그리스도교 신앙을 덧붙여 거행하였다. 따라서 시신의 처리를 그리스도교 신자들은 더욱 정성껏 하였다.6) 또한 히브리인들의 관습에서 죽은 이의 가족과 장례식에 참석한 이들은 자신들의 아픔을 외적으로 표현하였는데 그 방법은 공적인 재앙이 닥쳤을 때, 또는 참회의 시기에 행하던 관습을 따랐다.7) 또한 죽은 이의 가족은 단식을 하기도 하였고8) 커다란 고통을 표시하기 위해 반복적으로 곡을 하였다.9) 그리고 망자의 친지와 친척들은 위로의 빵과 위로의 잔을 가져 와서 상을 당한 가족들을 위로하였다.10) 이상에서 살펴 본 바와 같이 히브리인들의 장례 관습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슬픔의 표명과 위로였던 것으로 보인다. 반면에 초기 그리스도교 신자들은 부활에 대한 희망을 가지고 있었기에 장례식에서 슬픔을 겉으로 드러내려 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은 기쁨을 드러내려고 애썼고 파스카에 관련된 시편과 감사의 찬가를 불렀다. 이렇듯이 초기 그리스도교 신자들은 장례의 형식과 찬가와 기도문 등을 유다이즘에서 차용하였으나 그 정신에서는 완전히 다른 파스카적 예식을 거행하였다.

 

2) 이교 장례 관습의 영향

 

초기 그리스도교 신자들은 중세 초기까지 자신들이 속해 있고 자라온 문화적 관습 위에 그리스도교적 부활 신앙을 결합하여 지역별로 다양하게 장례 예식을 거행하였다. 특히 장례 문화는 지역별로 독특한 것이었기에 매우 다양한 형태의 이교적 관습이 전례 안으로 들어오게 되었다. 토인비(J.M.C. Toynbee)에 따르면 고대 로마에서는 임종하는 사람이 자신의 가족들을 불러모아 죽기 전에 마지막 인사를 나누는 관습이 있었다고 한다.11) 이러한 관습은 초대 교회에 행해졌던 임종자를 위한 밤샘 기도를 연상하게 한다. 아리스티데스는 그의 [호교론]에서 초대 교회 신자들이 임종자에게 줄 노자 성체(Viaticum)를 위한 성찬례를 집전하면서 임종자를 위해서 기도했다고 증언하고 있다.12)

 

사람이 죽으면 로마인들은 시신을 정리하였는데 우선 눈을 감기고 죽은 이의 이름을 부르고, 수의를 입히며 입안에 동전을 넣어 주었다고 한다.13) 죽은 이의 집에서 묘지까지의 장례 행렬은 로마인들의 관습에서 매우 중요한 것이었다. 실제로 장례식을 일컫는 라틴어 'Exsequiae', 'Prosequi'는 이와 같은 행렬을 "뒤따른다"는 말에서 유래했을 정도였다. 로마 관습에 따르면 시신을 매장한 후에 'Silicernium'이라고 불리는 장례 후 음식 나눔을 거행하였다.14) 이 이교 관습은 정해진 날에 음복의 형태로 거행되었다.15) 이 이교 관습이 그리스도교로 전승되게 되는데 'Refrigerium'이라고 불리게 되는 초대 교회의 음복 관습이 그것이다.16) 이 관습은 망자를 기념하는 날에 거행되었고 처음에는 순교자의 경우에 장엄한 성찬례와 함께 거행되었으며 후에 모든 죽은 이에게까지 적용되었다. 이 'Refrigerium'의 관습이 위령 미사로 발전하게 되었고 2세기부터 미사가 봉헌되었다는 흔적을 아리스티데스의 [호교론]과 외경인 요한 행전 등에서 확인할 수 있다.17) 3세기경에 테르툴리아누스도 죽은 이를 위한 기일 미사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다.18)

 

 

3. 중세의 장례 예식

 

초대 교회 교부들은 장례 예식 안에 자리한 이교적인 관습을 제거하는 데 힘을 기울였고 그리스도인의 죽음에 담겨진 파스카적 기쁨을 강조하였다.19) 초기 그리스도교 신자들은 장례식에서 슬픔을 감춘 채 찬미가와 시편을 노래하며 행렬하였다고 성 예로니모는 증언하고 있다.20) 요한 크리소스토모는 장례 예절 중에 큰소리로 우는 것을 금지하였고 천사들에게 호위받으며 영원한 왕국에 입성하는 망자에 대한 환호의 상징으로 찬가와 시편을 노래하라고 권고하고 있다.21) 성 아우구스티노(Augustinus)는 로마 근교 오스티아에서 있었던 그의 모친 모니카의 장례식에서 어머니를 묻은 후에 바로 구원의 제사를 봉헌하였다고 전한다.22) 또한 4세기 중반까지 소급할 수 있는 문헌인 [사도들의 가르침]에서도 묘지에서 행해지는 위령 미사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다.23) 그러므로 음복의 관습과 무덤에서의 미사가 처음에는 함께 행해지다가 서서히 음복이 사라지고 위령 미사만 남게 되었다고 결론지을 수 있겠다. 위령 미사를 위한 기도문은 이미 6세기 이전에 만들어졌으며 [베로나 성사집](Sacramentarium Veronense)24)에 6개, [젤라시오 성사집](Sacramentarium Gelasianum)25)에 13개가 수록되어 있다.

 

1) 중세 초기 장례 예식

 

시리아 전승 중에서 위(僞)디오니시오(Pseudo-Dionysius Areopagita)의 작품으로 알려진 [교계 제도론](De Ecclesiastica Hierarchia)은 장례식과 관련된 중요한 정보를 제공한다.26) 이 책의 제7장은 망자가 성인들의 품에 안기는 기쁨에 대한 긴 묘사로 시작된다. 임종의 순간이 오면, 임종자의 가족과 친지들은 그의 이 세상에서의 승리를 경축하기 위해서 모인다. 그들은 찬미가와 감사 기도를 노래하며 임종자의 영원한 생명을 위해 기도한다. 임종을 한 후에 주교는 망자가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의 품안으로, 고통도 슬픔도 다시는 없는 영원한 빛 안으로 들어가도록 하기 위해 망자의 죄의 용서를 청하며 장례 예식을 주도한다. 이때 주교는 감사 기도를 드렸고 참석자들과 함께 시편을 노래하였으며 영원한 생명을 약속하는 성서의 말씀을 읽었다. 이러한 예절을 마친 다음에 주교와 모든 장례식 참석자들은 망자에게 평화의 입맞춤을 한다. 입맞춤이 끝나면 주교는 망자에게 도유를 하는데 이 도유는 병자에게 하는 도유의 성격을 띤 것이 아니라 세례로 다시 태어남의 의미를 띤 것이라고 하겠다. 위(僞) 디오니시오에 따르면 세례 때의 도유가 이 세상에서의 거룩한 전투에 참여하기 위한 것이라면 이 마지막 도유는 망자가 그 전투에서 승리했음을 선포하는 것이라는 것이다. 그에 따르면 세례는 파스카로 새로 태어나는 시작에 불과한 것이며 이에 비해 죽음은 세례의 완성이 된다. 이러한 도유는 동방 전례뿐만 아니라 서방 전례에서도 발견되는데 7세기의 캔터베리의 테오도로의 참회 예식서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 도유는 현재까지 희랍 전례에 그 형태가 남아 있다.27)

 

중세 초기의 장례 미사에 관한 가장 오래된 기도문은 초기 성사집(Sacramentarium) 안에서 발견된다. 지금까지 발견된 최초의 성사집으로 여겨지는 베로나 성사집에서 죽은 이를 위한 기도인 "Super Defunctos"를 찾아볼 수 있다. 이 성사집에는 6개의 위령 미사 기도문이 들어 있는데 속죄와 참회의 기도28)와 함께 파스카의 내용을 상기시키는 기도문, 예를 들어 영원한 생명으로 떠나는 여행이라든지, 빛에 관한 언급들이 들어 있다.29)

 

[젤라시오 성사집]은 중세 초기 교회의 위령 미사 기도문을 다양하게 전해준다. [젤라시오 성사집]의 3권 91부는 망자를 위한 기도(Orationes post obitum hominis)로 꾸며져 있다. 여기에는 여러 가지 상황에 따라 다양한 미사 기도문들이 수록되어 있는데 크게 5종류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첫 번째가 임종 후에 바치는 기도(Orationes post obitum hominis, 1607-1614년)이고 두 번째가 묘지까지 이동하는 동안의 기도(Item orationes antequam ad sepulcrum deferatur, 1616-1619년), 세 번째는 시신을 매장하기 전에 하는 기도(Item orationes ad sepulcrum, priusquam seperiatur, 1620-1622년), 네 번째는 매장을 한 후에 하는 기도(Item orationes post sepulturam, 1623-1625년), 마지막으로 다섯 번째가 고별식 곧 영혼을 맡기는 기도(Commendatio animae, 1626-1627년)이다.

 

Ordines Romani30)가 수록하고 있는 Ordo 49번은 지금까지 보존되어 있는 장례 예식서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이다. 현재 보존되어 있는 예식서 원본이 비록 11세기의 필사본이라고 할지라도 이 예식의 사용 시기는 7세기 이전까지 소급될 수 있을 것이다. 이 예식서는 예절 지시문(Rubrica)을 중심으로 쓰여졌는데 이 예절 지시문에서 장례 예식의 구조와 성격을 살펴볼 수 있다.31) 이 예식서에 나타나는 두 개의 행렬이 예식의 성격을 명확하게 밝혀 준다. 행렬은 망자의 집에서부터 성당까지 그리고 성당에서 미사를 거행한 후 묘지까지의 행렬이다. 이 행렬 중에 참석자들은 시편과 후렴을 노래한다. 이 시편에는 파스카의 시편32)이 들어 있는데 이는 하느님께서 약속하신 땅으로 무리를 지어 나아가는 이스라엘 민족을 연상시킨다.

 

2) 중세 중기와 후기의 장례 예식

 

아우구스티노가 죽은 이들을 위한 기도를 강조했던 것처럼33) 대 그레고리오 교황도 망자가 살아 있을 때 지은 죄의 용서를 위해 죽은 이를 위한 기도는 꼭 필요한 것이라는, 죽음에서의 속죄와 참회의 측면을 강조하였다.34) 이와 같은 가르침은 교회에 속죄와 참회의 신학을 발달시켰고 장례 예식의 변천 과정에 큰 영향을 끼쳤다. 장례 예식은 하느님의 심판 때에 징벌을 피하기 위해 하느님의 자비에 호소하는 쪽으로 그 집전의 중심이 옮겨지게 되었다. 그럼으로써 망자의 영혼을 위한 속죄의 표시로서의 위령 미사가 집전되기 시작하였고, 장례 예식 안에서도 파스카의 기쁨은 망자의 영혼의 죄를 씻는 속죄적인 성격으로 대체되고 말았다. 속죄의 정신은 죄 때문에 받게 될 심판에 대한 두려움을 낳았고, 마침내 죽음 앞에서 파스카적인 기쁨보다는 심판에 대한 공포와 두려움을 느껴야 하는 중대한 변화를 초래하게 되었다.

 

이러한 파스카적 요소의 감소에 따라 [그레고리오 성사집]과 그 동시대의 장례 기도문에는 속죄와 심판의 내용이 중심을 이룬다. 살아 있을 때 범한 죄에 대한 근심에서 기인하는 사죄경의 성격을 띤 기도문이 등장하였고, 죽음은 더 이상 저 세상을 향하는 통과의 기쁨이 아니라 두려운 심판으로 여겨지게 되었다.35) 그리하여 장례 예식에서 구원의 기쁨을 노래하고 주님을 찬미하는 기도는 사라져 갔다. 그 대신 아직 심판 중에 있는 망자의 영혼이 심판의 형벌을 피하기 위해서 하느님의 자비를 청하는 속죄와 탄원의 기도가 요청되었다. 미사 성제는 이러한 기도 가운데 가장 효과 있는 것으로 여겨져 장례 미사뿐만 아니라 위령 미사도 매우 빈번하게 봉헌되었다.

 

멘데의 주교였던 G, Durandus(1230-1296년)는 클뤼니 수도회의 장례 예식에 대해서 언급하였다.36) 이 자료에서 우리는 임종 직전에서부터 매장 때까지의 장례 예절을 살펴볼 수 있다. 이에 따르면 먼저 임종이 가까이 온 것을 느낀 수도자는 아빠스나 원장 신부를 불러 자신의 임종에 대해서 알린다. 이어서 공적인 죄의 고백과 병자의 도유, 노자 성체가 시편을 노래하는 가운데 집전된다. 임종의 순간이 오면 임종자에게 재를 뿌린다. 그리고 성인 호칭 기도를 바치는데 후렴은 "그를 위하여 빌어 주소서"(Ora pro eo)라고 변형하였다. 임종 후에 곧바로 위령 성무 일도가 성당에서 거행된다. 성무 일도는 저녁 기도에서 아침 기도까지 계속되는데 이 성무 일도가 끝나면 장례 미사가 이어지고 미사 후에 곧바로 묘지까지 행렬하여 시신을 묻는다.

 

이 예식에서 볼 수 있듯이, 죄를 고백하고 재를 뿌리며 망자를 위한 호칭 기도를 바치는 것은 망자의 속죄와 죽은 후의 심판과 형벌에 대한 두려움이 강조되었기에 생겨난 전례 형태로 보인다. 여기서 재를 뿌리는 부분은 구약성서의 재앙에 대한 기사들을 떠올리게 하는데 죽음이 파스카의 여행이 아니라 재앙의 성격으로 이해되기 시작한 것이다. 또한 이때 바쳐지는 위령 성무 일도가 성삼일의 성무일도와 비슷한 구조로 이루어졌다고 하더라도 이 성무일도 역시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속죄를 중심 내용으로 삼고 있으므로 파스카적인 기쁨의 내용은 거의 포함하고 있지 않았다. 이 수도원 전승의 장례 예절은 1614년 [로마 예식서]의 장례 예절에 그 골격이 수용된다. 결론적으로 이 시대의 장례 예절에서 하느님의 자비에 대한 행복한 회상은 심판과 속죄라는 커다란 불안으로 뒤바뀌게 되었다.

 

 

4. 1614년 [로마 예식서]의 장례 예식(트리엔트 공의회 장례 예식)

 

17세기 초까지 지역별로 여러 수도원의 전승에서 비롯한 다양한 장례와 매장 예절이 로마 교회 안에 존속했었다. 그리고 그때까지 전 교회적인 차원에서 공식적으로 선포된 장례 예절은 없었다. 교황 바오로 5세는 1614년에 세계 교회를 향하여 통일된 예식서의 사용을 선포하는데 이를 [로마 예식서]라고 부른다.37)

 

1614년 예식서는 죽음을 둘러싼 예식들을 여러 개 수록하고 있다. 노자 성체 예식은 성체성사 예식의 끝 부분에 수록되어 있으며 또 임종자를 위한 예식38)은 따로 "Ordo commendationis animae" 부분에 수록되어 병자의 집에서 거행될 수 있도록 되어 있다. 그리고 병자 방문과 병자성사 예식은 따로 구별되어 "De visitatione et cura infirmorum"(또는 In Expiratione) 부분에 수록되어 있다. 1614년 로마 예식서에서 본연의 장례 예식 부분은 앞에서 언급한 예식들에 이어서 "De Exsequiis"라는 이름으로 수록되어 있으며 위령 성무일도(Officium defunctorum)가 뒤따른다.

 

장례 예절은 모두 세 부분으로 나누어진다. 곧 망자의 집에서 성당으로의 행렬을 중심으로 하는 첫 번째 예절과 성당 안에서 하는 예절(위령 성무일도, 미사, 사죄 예절), 그리고 마지막으로 묘지로 향하는 행렬을 포함한 묘지에서 하는 예절로 구분되는 것이다. 이 예식서는 망자의 집에서 행해지는 수시와 입관 등의 예절은 생략하고 있다. 또한 1614년 예식서는 많은 기도문들과 시편, 후렴 구절을 생략하고 있는데 특히 미사와 매장 중에 바치던 후렴과 기도들이 생략되었기에 매우 단순한 장례 예식만을 제공하고 있다.

 

따라서 1614년 로마 장례 예식의 성격을 규정하면서 가장 먼저 지적할 수 있는 것은 예식이 매우 간소화되었다는 것이다. 이 예식은 이전 예식들이 지니고 있던 많은 시편들을 생략하였고(시편 113; 24; 114; 131; 41 등), 중세까지 남아 있었던 많은 파스카적 성격을 띠는 기도문들의 숫자를 줄여 놓았다.39) 반면에 1614년 예식서는 "Dies irae"나 "Libera me"처럼 속죄의 성격을 띤 기도문, 시편, 후렴 등을 충실하게 보존하고 있다. 또 초대 교회의 장례의 색깔이 부활을 상징하는 흰색이었음에도 1614년 예식서는 검정색을 장례 예식을 상징하는 색으로 규정하여 검정색 제의와 제구를 사용하도록 하였다. 또 이 예식서는 사죄 예식(Absolutio)을 장례 예식의 중심에 놓았다. 이로써 결국 1614년 예식서가 파스카적인 성격을 결정적으로 잃어버리게 되었다. 사죄 예식은 죄와 심판에 대한 두려움과 구원에 대한 불안 때문에 생겨난 예식이므로 구원을 확신하는 파스카적 표현이 이 예식의 출현으로 사라지게 된 것이다.

 

 

5.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의 장례 예식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전례헌장"에서 장례 예식의 개정에 대하여 "장례 예식은 그리스도인의 죽음의 파스카적인 성격을 더욱 명백히 표시할 수 있도록 개정되어야 한다."40)라고 선언한다. 이러한 공의회의 지침에 입각하여 개정된 새 장례 예식서는 공의회 이후 출간된 다른 예식서들처럼 지침과 해설(Praenotanda)을 예식서의 서두에 수록하고 있다. 이 지침과 해설은 공의회가 강조한 파스카의 의미와 그리스도인의 죽음을 연결시키면서 장례 예식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41) 이 지침과 해설은 또한 지역 풍습을 매우 포괄적으로 고려하여 예식을 집전할 수 있도록 지역 주교회의에 많은 권한을 위임하고 있다.

 

새 예식서는 초상 직후부터 무덤에서의 하관 예식까지 장례 절차를 3가지 유형의 예식으로 제시함으로써 지역 교회가 각국의 관행에 맞는 예식을 채택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곧 제1양식(이탈리아, 프랑스 유형)은 세 장소에서 거행되는 장례 예식으로서 망자의 집, 성당, 묘지에서 각각 예절을 집전할 수 있도록 하였으며, 제2양식(독일어권)은 두 장소, 곧 무덤 경당과 묘지에서, 제3양식(아프리카, 유럽 지역)은 망자의 집 한 곳에서 모든 예식을 집전할 수 있게 하였다.42) 또한 새 예식서는 미사 중에 사순 시기가 아니라면 알렐루야를 노래할 수 있도록 하였고 미사 후에 거행하는 1614년 예식서의 죽은 이를 위한 사죄 예절(Ritus Absolutionis)을 고별식(Ultima Commendatio et Valedictio)으로 대체하였다. 고별식은 더 이상 영혼의 정화를 위한 예식이 아니라 죽은 이와 마지막 인사를 나누며 하느님께 죽은 이의 영원한 생명을 청하는 기도로 꾸며진 예식이다.43) 새 예식서는 장례 미사와 장례 예식 안에서 성서 말씀을 풍부하게 사용할 수 있도록 배려하고 있는데 성서가 드러내는 파스카적인 의미를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새 예식서는 지역적 풍습에 따라서 신자들도 화장을 할 수 있도록 허용하고 있고 장례 예절을 집전하는 데 사목자의 사목적 배려를 매우 강조하고 있다.44)

 

 

6. 장례 예식과 위령 미사 신학

 

지금까지 살펴본 장례 예식의 변천사에서 우리는 장례 예식과 위령 미사에 관한 극명하게 대조되는 두 가지 서로 다른 신학적 경향을 살펴볼 수 있었다. 초기 그리스도교 신자들은 비록 통일된 장례 예식서를 가지고 있지 못하였지만 어떻게 하는 것이 가장 그리스도교적이며 파스카적인 장례의 집전인가를 알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들은 시편과 찬가를 노래하면서 장례 예절 안에서 파스카의 기쁨을 표현하였고, 인간적인 슬픔과 고통을 참아 내면서 죽음은 끝이 아니라 시작이라는 그리스도교적 희망을 고백했던 것이다. 당대의 교부들과 순교자들은 삶의 중심을 부활 신앙으로 채웠으며, 이 부활 신앙의 중심이 파스카, 곧 죽음에서 부활로 넘어가는 구원이라고 규정한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신앙을 고백했던 것과 똑같은 방법으로 장례 예절을 거행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초대 교회의 장례 예식은 파스카 신앙의 구현이었다고 결론지을 수 있을 것이다.

 

중세에 이르러 연옥(Purgatorium)에 대한 교의적 개념이 발전하게 되었다.45) 이 신학에 따르면 이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은 모두 죄인이다. 하느님 나라는 순결한 성인들의 나라이므로 죄인인 채로는 아무도 그곳에 들어갈 수가 없다. 그러므로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죄를 씻을 곳이 필요했고 이곳이 연옥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신학은 중세 이후 장례 예식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다. 결국 10세기 이후의 장례 예식 안에는 심판에 대한 두려움을 표현하는 언어가 늘기 시작하였고 장례 예식은 참회와 속죄의 예절로 발전하였다. 따라서 중세의 장례 예식의 신학은 속죄의 신학으로 변질되었다. 이러한 이유로 장례 미사와 위령 미사는 파스카적인 성격이 훼손된 채 집전되었다. 특히 위령 미사는 중세 때에 일어난 몇 가지 전례적 신학적 사조와 만나면서 비약적으로 발전하였다. 첫째, 신심 미사(Missa votiva)의 등장이다. 미사는 파스카의 재현이라는 초대 교회 이래의 미사에 관한 전통적인 생각이 점차 흐려지고 라틴어를 모르는 대중들이 미사 집전에서 소외되면서 미사에 대하여 미신적이며 주술적인 이해가 생겨났다. 결국 위령 미사가 죽은 이들의 구원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받아들여지면서 크게 성행하였다. 둘째, 연옥에 대한 교리가 널리 퍼져 나가면서 연옥에서 고통받는 영혼을 위한 미사의 효험이 강조되기 시작하였고 이는 위령 미사의 빈번한 봉헌을 부추겼다. 셋째, 대사(Indulgentia)에 대한 교회의 교리가 확정됨으로써 연옥 영혼을 위한 미사, 위령 기도, 자선 행위 등이 강조되어 급기야 미사가 지닌 공동체 모두를 위한 구원의 잔치라는 본래의 의미가 결정적으로 훼손되기에 이른다. 살아 있는 사람이 위령 미사를 한 대 봉헌함으로써 대사를 받고 그 대사만큼 죽은 이가 연옥에서의 징벌을 경감받는다는 식으로 대사의 효력이 그릇되게 사용되었다. 결국 이러한 중세의 사조는 장례 예식을 초대 교회의 파스카적 형식에서 속죄의 형식으로 바꾸는 데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7. 맺는 말

 

지금까지 장례 예식의 역사를 살펴보았고 장례 예식에 담겨진 신학을 시대적 배경에 따라서 개진해 보았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전례의 올바른 쇄신을 위한 원칙을 선포하였고 이러한 정신에 입각하여 장례 예식의 본질은 명백하게 파스카적인 성격으로 정향되어야 한다고 천명하였다. 특히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전례헌장"은 신앙 생활의 중심이 전례이어야 한다고 가르치면서 전례는 다름아닌 파스카 신비에의 참여임을 선포하고 있다.46) 파스카가 인류 구세사의 생생한 과정이며 하느님께서 인간을 향한 구원의 손을 건네시는 것이라면 여기에 참여하는 것은 바로 구원의 성취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파스카라는 말 자체가 의미하듯이 피안에서 차안으로 "건너감"을 뜻하며 파스카적인 전례란 파스카를 담아 내는 전례를 뜻한다. 피안에서 차안으로 건너가는 파스카의 결정적인 순간이 죽음이라면 가장 확실한 파스카의 전례적 표징은 장례 예절 안에 들어 있어야 할 것이다.

 

초대 교회의 문헌 중에 하나인 "사도헌장"은 장례식을 파스카와 연결시켜 주는 다양한 요소를 우리에게 보여 주는데 무엇보다도 장례 행렬을 'Exodus'라는 말로 표현함으로써 장례 예식이 하나의 또 다른 출애굽이라는 것을 드러낸다. 중세 초기의 로마 장례 예식(Ordines Romani 49번)은 장례 행렬을 위한 8개의 시편을 제시하는데 그 가운데 하나가 시편 113편이다. "이스라엘이 이집트를 떠나서 올 제, 야만족을 야곱 집안이 떠나서 올 제"로 시작되는 이 시편은 산들은 숫양처럼 뛰놀고 언덕들이 춤추며 바다가 도망치고 요르단이 거슬러 흐르는 '통과 과정(Pascha)'이 바로 장례 예식이라고 선포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렇게 초기 예식서들이 증언하듯이 장례 예식은 죽음의 불확실성과 이별의 고통을 뛰어넘어 이 세상에서 저 세상으로 나아가는 파스카 여정의 완성이며 그리스도교적 희망의 마지막 표징이라고 결론지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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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위령 미사 감사송 1 참조. 

 

2) C. Vona, L'apologia di Aristide, Introduzione, Versione dal siriaco e Commento, Roma, 1950년, 117면. 

 

3) 미사의 역사적 발전 과정에 관해서는, 쯔찌야 요시마사, [미사 그 의미와 역사], 최석우 옮김, 성바오로, 1990년; R. Cabie, "L'Eucharistie", A. G. Martimort 편, L'eglise en priere II, Desclee, paris, 1983년 참조. 

 

4) 유다이즘의 시신 처리와 장례 예식 관습에 관해서는, 이완희, "로마 장례 예식 안에서의 파스카", [누리와 말씀] 7호(2000년), 인천가톨릭대학교 출판부, 273-276면. 

 

5) 시신 처리[收屍]에 대한 언급은 창세 46,4; 50,1; 1사무 28,14 등을 참조. 이스라엘에서 향유나 관은 사용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창세기의 야곱과 요셉의 장례 기사(창세 50,2-3)에서 관의 사용은 이집트 문화에서 유래된 것으로 보인다. R. De Vaux, Les institution de l'Ancien Testament, 1권, Paris, 1958년, 94면. 

 

6) G. Rowell, The Liturgy of Christian Burial, London, 1977년, 19-20면. 

 

7) 상이나 재난을 당했거나 참회를 행할 때 히브리인들은 옷을 찢고 굵은 베옷을 걸치거나(창세 37,34; 2사무 3,31 등), 맨 발로 다니거나(2사무 15,30; 에제 24,17), 머리 두건 없이 다니거나 얼굴을 천으로 가렸다(2사무 19,5; 에제 24,17.23). 그리고 땅에 얼굴을 대고 엎드리기도 하고 먼지를 머리 위에 뿌리기도 하였다(여호 7,6; 1사무 4,12; 느헤 9,1). 또 먼지 속에서 뒹굴기도 하였으며(미가 1,10), 자루 옷을 입고 재를 뿌리기도 했다(에스 4,3; 이사 58,5; 에제 27,30). 그리고 드물게는 머리와 수염을 밀어 버리거나 몸에 상처를 내기도 하였다(욥기 1,20; 예레 16,6; 에제 7,18; 아모 8,18). 그러나 이런 행위는 레위기(19,27-28)와 신명기(14,1)에서 금지된 것들이었다. 

 

8) 2사무 1,12; 3,35 참조. 통상 단식 기간은 7일이었던 것으로 보인다(창세 50,10; 유딧 16,24; 1사무 31,13). 

 

9) 창세 23,2; 50,10; 1열왕 13,30; 1사무 25,1; 2사무 19,1; 11,26; 아모 5,16; 8,10; 예레 22,18; 즈가 12,10; 사도 8,2 등 참조. 이러한 통곡은 독특한 리듬을 가진 곡(哭)으로 발전된다(2사무 1,17; 1,19-27; 3,33-34; 2역대 35,25; 아모 5,16; 8,10 등 참조). 예언서에서는 이와 같은 곡과 관련된 노래 원문들을 찾아볼 수 있다(예레 9,9-11; 에제 19,1-14; 아모 5,1-2 등). 

 

10) 예레 17,7; 에제 24,17 참조. 이는 죽은 이의 집에서 준비한 음식은 부정한 것으로 여겼던 유다의 율법 규정(호세 9,4) 때문이었을 것이다. 한편 죽은 이들에게 제물을 바친다는 바룩서(6,26)의 기록은 죽은 이들을 경배하기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단순한 가나안 지방의 풍습으로 보인다(성서는 70인역 집회 30,18; 신명 26,14); R. De Vaux, 앞의 책, 98면 참조. 

 

11) 토인비, Death and Burial in the Roman World, New York, 1971년, 41-64면 참조. 이교 관습에 따라서 가족들은 임종자에게 마지막 입맞춤을 하였고, 이는 임종자의 영혼이 죽은 후에도 그들의 집에 머물 수 있게 하는 이교적 의식으로부터 기인했다고 한다. 

 

12) J. Milne, "A New Fragment of the Apology of Aristides", The Journal of Theological Studies 25(1924년), 77면; M. Righetti, Manuale di storia liturgica, 2권, Milano, 1946년, 330-336면. 

 

13) 이 동전의 이름은 Caronte(Sharon) 삯이라고 불렸다. 그리스 신화에 따르면 죽은 이는 이 삯을 사공에게 지불해야만 Styx라고 불리는 저승의 강을 건널 수 있다고 한다. 이 강은 이 세상과 저승(hades)을 가로지르는 강이라고 한다. 초대 그리스도교 신자들은 로마인들의 관습에서처럼 죽은 이의 입에 즉시 축성된 빵을 넣어 주었는데 이도 역시 이러한 로마 관습에서 유래된 것이 아닌가 추정된다. 이러한 관습은 후에 교회에서 단죄되었다(힙포 교회회의 393년, 카르타고 교회회의 419년). 그러나 이러한 관습은 쉬이 없어지지 않았고 결국 노자 성체의 전승으로 변화되어 남게 되는 것이다. G. Grabka, "Christian Viaticum:a study of its cultural background", Traditio 9(1953년), 1-43면; G. Rowell, 앞의 책, 9면. 

 

14) 고대 로마의 민간 신앙에서는 죽은 이에게는 죽은 후의 긴 여행을 떠나기 전에 식사가 필요하다고 여겼다. 이런 이유로 매장 후에는 이와 같은 식사의 잔치가 거행되었는데 때로는 이 잔치가 난잡하게 거행되거나 술 주정으로 망쳐지기도 했다. 그리스도교화 이후에는 많은 교부들이 이와 같은 잔치를 금하였고 그 대신 가난한 이들을 위한 자선을 행하라고 가르쳤다. 그러나 이런 관습은 쉽게 없어지지 않았고 결국 이를 척결하기 위해서 죽은 후에 장례 미사를 봉헌하는 전통이 생겨나게 되는 것이다. 테르툴리아누스, "호교론"(13,7), CL, 1권, 111면; "Constitutiones Apostolorum"(8,42-44), SCh 336, 259-263면. 

 

15) 이러한 기일을 지키는 관습은 처음에는 그리스에서 시작되었고 로마를 거쳐 전 그리스도 교회에 전파되었다. 이들은 시신을 매장한 후 3일째, 9일째(또는 7일째), 40일째(또는 30일째)되는 날을 기일로 삼아 Silicernium을 거행하였다. G. Rowell, 앞의 책, 10-13면. 

 

16) 4세기경에는 Refrigerium이란 말이 두 가지 뜻을 지니게 되는데 첫째는 안식의 장소를, 둘째는 장례 음복을 의미하게 된다. Refrigerium과 기일 성찬례에 대해서는 C. Vogel, "L'environnement cultuel du defunt durant la periode paleochretienne", La maladie et la mort du Chretien dans la liturgie, Roma, 1975년, 392-413면. 

 

17) J. Milne, 앞의 책, 75면. 

 

18) 테르툴리아누스, "De Corona", PL, 2권, 79항; "De Castitate"(11), PL, 2권, 926항. 

 

19) 이완희, 앞의 책, 279-233면. 

 

20) 예로니모, "Epistula"(77,11), CSEL 55, 48면; "Epistula"(27,2-3), CSEL 54, 225-226면 참조. 

 

21) 요한 크리소스토모는 장례 예절에 시편 22; 31; 114 등과 같이 파스카적인 시편들이 사용되었음을 증언한다. 이에 대해서는 요한 크리소스토모, "Homiliae in Epistolam ad Hebraeos"(4,5), PG, 63권, 42-44면; "Homiliae in Johannem"(62), PG, 59권, 341-350면 참조. 

 

22) 아우구스티노, [고백록]`(9,12). 

 

23) [사도들의 가르침](F.X.Funk 판), 1권, 276면. 

 

24) "Sacramentarium Veronense", L. C. Mohlberg·L. Eizenhofer & P. Siffrin 편, RED Series Maior Fontes I, Roma, 19783년, 144-146면. 

 

25) "Liber Sacramentorum Romane Aeclesiae Ordinis Anni Circuli (Sacramentarium Gelasianum)", L. C. Mohlberg·L. Einzenhofer & P. Siffirin 편, RED Series Maior Fontes IV, Roma, 1981년, 234-246면. 

 

26) 이는 저자와 저술 연대 미상의 작품이다. 시리아 지방에서 5세기 말 이후에 저술되었을 것이라고 추정될 뿐이다. "De Ecclesiastica Hierarchia"(7), PG, 3권, 551D-584D; T. Campbell, Dionysius the pseudo Areopagite:The ecclesiastical Hierarchy, Maryland, 1981년, 79-91면; S. Lilla, "Dionigi Areopagita(Pseudo)", DPAC, 1권, 971-980면 참조. 

 

27) G. Rowell, 앞의 책, 30면; 118면(각주 46-48 참조); R. Rutherford·T. Barr, The Death of a Christian:The Order of Christian Funerals(Revised edition), Collegeville, 1990년, 22-23면 참조. 

 

28) [베로나 성사집], 1138.1144.1145항 참조. 

 

29) 위의 책, 1140.1149.1156항 참조. 

 

30) 이는 중세까지의 전례 예식을 집대성해 놓은 책으로서 M. Andieu가 최종 편집하였다. 이 가운데 제4권의 49번째 Ordo가 장례 예식이다. M.Andrieu(ed.), Les Ordines Romani du Haut Moyen Age, Tom.IV Louvain, 1985년, 529-530면. 

 

31) 로마 예식 49권에 대해서는 P. Rouillard, "I riti dei funerali", I Sacramentali e le Benedizioni(Anamnesis 7권), Genova, 1989년, 204-205면; D. Sicard, "Le rituel des funerailles dans la tradition", LMD 101(1970년), 33-38면. 

 

32) 시편 113; 117 외 6개의 시편이 이 행렬 중에 노래되었다. 

 

33) 아우구스티노, "De Civitate Dei"(21,24), CCL 48, 790면. 

 

34) 대 그레고리오, "Dialigorum Liber"(4,38-60), PL 77, 389C-429A. 

 

35) [그레고리오 성사집], 1400.1401항 참조. 

 

36) G. Rowell, 앞의 책, 65-67면. 

 

37) Rituale Romanum Pauli V Pontificis Maximi Jussu Editum, Romae, 1614년. 이 예식서에 대해서는; P. M. Gy, "Les funereilles d'apres le rituel de 1614", LMD 44(1955년), 70-82면; P. Rouillard, 앞의 책, 208-209면; 물론 1614년 이전에도 예식서는 존재하였다. 예를 들면, Alberto Castellani의 Liber sacerdotalis(1531년), Santori 추기경의 Rituale 등이 그것이며 특히 Santori의 예식서는 1614년 로마 예식서의 모델이 되었다. 이에 대해서는 P. M. Gy, 같은 책, 71면 참조. 

 

38) [로마-게르만 주교 예식서](PRG)에서는 이때 임종자를 위하여 성인 호칭 기도, 수난 복음 낭독, 사제의 기도 등의 예절을 행하였다. 

 

39) PRG에서는 위령 성무 일도를 제외하고도 12개의 시편을 예식에 수록하고 있으며, 파스카적인 요소들이 남아 있는 기도문들을 보존하고 있었다(예를 들면 73.83항 등). 

 

40) 전례헌장, 81항. 

 

41) [장례 예식서], 1-2항. 장례 예식서 해설은 최윤환, "새 장례 예식서 해설", [사목] 70호(1980년), 40-48면. 

 

42) [장례 예식서], 4-9항 참조, 이에 대해서는 P. Rouillard, 앞의 책, 220-227면. 

 

43) [장례 예식서], 10항. 

 

44) 위의 책, 23-25항. 

 

45) 이에 대해서는 J. Le Goff, "Le Purgatoire entre l'enfer et le paradis", LMD 144(1980년), 102-137면; H. Vorgrimler, Mysterium Salutis, 10권(이태리어 판), Brescia, 1978년, 546-552면 참조. 

 

46)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전례헌장"의 첫 두 장은 파스카를 향해야 하는 전례의 본질에 대한 설명과 또한 이러한 파스카적 전례에 능동적인 참여를 촉구하기 위하여 쓰여졌다(전례헌장, 1-20항).

 

[사목, 2001년 11월호, 이완희(인천가톨릭대학교 교수, 신부, 전례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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