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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28월요일(홍)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사도 대축일 전야 미사
작성자김대군 쪽지 캡슐 작성일2021-06-28 조회수8,402 추천수0 반대(0) 신고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사도 대축일

베드로 사도는,이스라엘 갈릴래아 호수에 인접한 벳사이다 출신으로 본이름은 시몬이다. 동생 안드레아와 함께 어부 생활을 하다가 주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예수님께서는 그의 이름을 베드로(반석)로 바꾸시고, 그를 사도단의 으뜸으로 삼으셨다. 복음서에 소개되는 베드로 사도의 모습은 소박하고 단순하다. 예수님을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라고 고백하여 칭찬받기도 하고, 예수님의 수난을 반대하다가 심한 꾸중을 듣기도 하였다. 로마 교회의 첫 주교로서 첫 번째 교황이기도 한 베드로 사도는 67년 무렵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순교하였다.

 

바오로 사도는 열두 제자와는 달리, 비교적 늦게 주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그는 그리스도교를 열성적으로 박해하던 사람이었다. 그리스도인들을 잡아 가두려고 다마스쿠스로 가던 그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체험한 뒤 유다교에서 개종하여 그리스도의 사도가 되었다. 바오로 사도는 이방인들이 사는 여러 지역에 교회를 세웠다. 그 공동체들에 보낸 많은 서간이 오늘날 <성경>의 일부를 이루고 있다. 전승에 따르면,그는 67년 무렵 로마에서 참수되었다.

 

 

 

28월요일()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사도 대축일 전야 미사

1독서<내가 가진 것을 당신에게 주겠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말합니다. 일어나 걸으시오.>

사도행전의 말씀입니다. 3,1-10

그 무렵

1 베드로와 요한이 오후 세 시 기도 시간에 성전으로 올라가는데,

2 모태에서부터 불구자였던 사람 하나가 들려 왔다. 성전에 들어가는 이들에게 자선을 청할 수 있도록, 사람들이 그를 날마다 아름다운 문이라고 하는 성전 문 곁에 들어다 놓았던 것이다.

3 그가 성전에 들어가려는 베드로와 요한을 보고 자선을 청하였다.

4 베드로는 요한과 함께 그를 유심히 바라보고 나서,“우리를 보시오.” 하고 말하였다.

5 그가 무엇인가를 얻으리라고 기대하며 그들을 처다보는데,

6 베드로가 말하였다,

나는 은도 금도 없습니다. 그러나 내가 가진 것을 당신에게 주겠습니다. 나자넷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말합니다. 일어나 걸으시오.”

7 그러면서 그의 오른손을 잡아 일으켰다.

그러나 그가 즉시 발과 발목이 튼튼해져서

8 벌떡 일어나 걸었다. 그리고 그들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가면서, 걷기도 하고 껑충껑충 뛰기도 하고 하느님을 찬미하기도 하였다.

9 온 백성은 그가 걷기도 하고 하느님 찬미하기도 하는 것을 보고,

10 또 그가 성전의 아름다운 문곁에 앉아 자선을 청하던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그에게 일어난 일로 경탄하고 경악하였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1독서 주해(해제,역주 정태현 신부님)

31

유다인 시간 계산법에 따르면 낮을 열둘로 나누고 해 뜬 뒤 한 시간이 지난 때를 첫째 시라고 불렀다. 원문의 아홉쩨 시는 우리 시간으로 오후 세 시. 성전에서는 매일 아침과 오후에 정기적인 제사를 드렸는데 오후 제사는 세 시경에 드렸다.

 

2

아름다운 문의 위치는 정확히 밝힐 수 없다. 그런 문 이름이 여기말고도 전해오지 않기 때문이다. 흔히 아름다운 문은 니카노르 문과 같다고 본다. 그런데 니카노르 문의 위치 또한 불분명하다. 이 문은 여자들이 뜰과 남자들의 뜰 사이에 있다는 것이 일반적 견해이나 솔로문 행각에서 여자들이 뜰로 들어가는 문이라는 주장도 있다.

 

자선은 마태 6.2.3.4말고는 신약성서를 통틀어 오직 루카만이 열 번 사용하는 낱말이다. 루카는 자선을 매우 강조했다.

 

6

은과 금은 은화와 금화. 곧 돈을 가리킨다. 사도들은 앉은뱅이에게 돈을 주는 대신 나자렛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곧 부활하여 현존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힘으로 치유의 은혜를 베풀었다. 부활하신 예수께 대한 믿음이야말로 초대 그리스도교 공동체가 사유재산 대신 공유하고 있던 절대적 가치였다.

 

꺾쇠괄호 안에 든 <일어나>는 알렉사드리아 사본에는 있으나 시나이,바티칸, 베자 사본에는 없다. 원전 평가위원회는 이 낱말의 원전 삽입 여부를 결정하지 않은 채 꺾쇠괄호에 묶어 남겨 두엇다. 질좋은 사본들이 각각 없는 쪽과 있는 쪽을 다같이 지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2독서<하느님께서는 어머니 배 속에 있을 때부터 나를 따로 뽑으셨습니다.>

사도 바오로의 갈라티아서 말씀입니다. 1,11-20

11 형제 여러분, 여러분에게 분명히 밝혀 둡니다. 내가 전한 복음은 사람에게서 비롯된 것이 아닙니다.

12 그 복음은 내가 어떤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고 배운 것도 아닙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를 통하여 받은 것입니다.

13 내가 한때 유다교에 있을 적에 나의 행실이 어떠하였는지 여러분은 이미 들었습니다. 나는 하느님의 교회를 몹시 박해하며 아예 없애 버리려고 하였습니다.

14 유다교를 신봉하는 일에서도 동족인 내 또래의 많은 사람들보다 앞에 서 있었고, 내 조상들의 전통을 지키는 일에도 훨씬 더 열심이었습니다.

15 그러나 어머니 배 속에 있을 때부터 나를 따로 뽑으시어 당신의 은총으로 부르신 하느님께서 기꺼이 마음을 정하시어,

16 내가 당신의 아드님을 다른 민족들에게 전할 수 있도록 그분을 내안에 계시해 주셨습니다. 그때에 나는 어떠한 사람과도 바로 상의하지 않았습니다.

17 나보다 먼져 사도가 된 이들을 찾아 예루살렘에 올라가지도 않았습니다. 그냥 아라비아로 갔다가 다시 다마스쿠스로 돌아갔습니다.

18 그러고 나서 삼 년 뒤에 나는 케파를 만나려고 예루살렘에 올라가, 보름 동안 그와 함께 지냈습니다.

19 그러나 다른 사도는 아무도 만나 보지 않았습니다. 주님의 형제 야고보만 보았을 뿐입니다.

20 내가 여러분에게 쓰는 이 글은 하느님 앞에서 말합니다만 거짓이 아닙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2독서 주해(해제.역주 이성근 신부님)

11

다음에 올 내용이 중요함을 암시하는 장엄한 도입구다. 독자들이 이미 그 내용을 듣고 잘 알았지만 더는 받아들이지 않거나 잊어버리게 되었음을 시사한다.

바오로 자신이 전한 복음은 그 기원이 인간적인 것 이상임을 주장한다.

 

12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에서 속격은 목적격적 속죄일 수도 있고 주격적 속격일 수도 있다.이는 바오로가 다마스쿠스로 가는 도중에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만난 사건을 지칭한다.

 

13

회개하기 전에 바오로는 바리사이로서 모세 율법과 조상 전통에 반대되는 것을 열렬히 배척했다. 갈라디아인들이 이미 들어 아는 이 사실을 상기시킴으로써 바오로는 자기 과거 삶의 방식이 그리스도의 복음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는 것을 말하고자 한다.

 

복음서에는 에클레시아(교회)라는 단어가 드물지만 바오로의 편지에서는 많이 발견된다. 칠십인역에서 이 용어는 히브리어 카힐을 번역한 단어인데. 광야에서 방황하는 이스라엘의 회중을 가리키는 말이었고 특히 하느님 백성의 제의적 모임을 지칭하기도 했다. 바오로에게 있어 하느님의 교회는 구약의 예배적 모임을 상징하는 예루살렘과 유다의 유다계 그리스도교 공동체를 지칭할 뿐 아니라 동시에 그리스도께 대한 신앙으로 하나가 된 유다인과 이방인들의 유대와 일치를 표현한다.

 

15

칠십인역의 표현으로서 구약의 예언자나 야훼의 종의 소명사화에 뿌리가 있다.

 

16

인지나 이해를 뜻하는 동사와 함께 쓰이는 전치사 엔은 여격과 함께 단순히 간접목적어를 지칭할 수 있으며 이 경우에는 단순히 나에게로 번역된다. 다르게는 나를 통하여로도 번역될 수 있지만 다음에 오는 문장 때문에 중복처럼 보인다. 또한 일반적인 해석으로서 내 안에로 번역될 수 있는데, 이 때는 바오로에게 주어진 계시의 결과로 얻어진 내적 이해와 변화를 강조하는 의미가 된다.

 

바오로는 자신의 사도직을 그리스도의 계시와 연관시키지만 자신의 소명이 이미 모태에서부터 시작되었다고 진술하므로, 사도직 위임과 계시가 시간적으로 일치하지 않는다. 어쨌든 여기서는 자신의 회개 사건보다는 소명사실에 초점을 맞춘다.

 

기꺼이 작정하시다라는 표현은 하느님의 절대적 자유의지로써 바오로를 불셨음을 강조한다.

어떤 사람은 직역하면 살과 피”. 1고린 15.50에도 나오는 우갹의 표현으로서 덧없는 혹은 약한 피조물인 인간을 뜻한다.

 

17

바오로는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들의 소명과 권위를 충분히 인정하면서도 한편 자신을 그들과 동일한 차원에 놓는다. 바오로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지 않았다고 말하는 이유는 자기보다 먼저 사도가 된 이들에게서 복음을 받은 것이 아님을 입증하려는 것이다.

아라비아는 아마도 아레다 4세 필로파트리스가 다스리던 나바테아 왕국을 지칭할 것이다. 분명히 밝히지는 않지만 그가 아라비아로 간 것은 선교 목적에서였을 것이다. 그러나 아라비아에서의 그의 활동에 대해 알려진 바는 없으며, 사도행전에는 그가 아라비아에 갔다가 다마스쿠스로 돌아왔다는 이야기 자체가 없다.

 

18

바오로 사도의 연대기를 추정하는 데 중요한 진술이지만, 어느 시점부터 3년 후인지 분명치 않다. 가능성은 두 가지.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만나고부터 아니면 다마스쿠스로 돌아오고부터 3년 후다.

 

그리스어 부정법 히스토레사이의 의미에 대해 논란이 있어 왔다. 직역하면 문의하다. 조회하다라는 뜻이다. 고대 그리스와 라틴 주석가들은 보다, 만나다로 이해하여, 사교적 목적의 방문이라고 해석했다. 현대 학자 일부는 바오로가 게파로부터 예수의 가르침과 직무에 대한 정보를 얻기 위해 방문했다고 주장하지만. 이는 바오로가 자신의 복음이 사람에게서 기인한 것이 아님을 주장하는 맥락에 부합할 수 없다. 다른 학자들은 전통적 해석을 따라 게파를 개인적으로 알기 위한 목적의 첫 만남을 지칭한다고 주장한다.

 

19

고정 그리스어와 헬레니즘 그리스어에서 형제피를 나눈 형제를 의미한다. 하지만 칠십인역에서는 친족이라는 의미로 사용될 때도 같은 단어로 번역됨을 볼수 있다. 이집트의 그리스어 파피루스에서도 이 단어는 친척이라는 넓은 의미를 갖고 있다. 여기서도 친척.친족이라는 의미에서 사용된 단어다.

 

19절의 문장상으로는 야고보가 사도들에 포함될 수도 있고 제외될 수도 있는데, 전자의 경우 바오로가 사도라는 명칭을 열두 사도에게뿐 아니라 폭넓게 사용한다는데 근거하며 후자의 경우 아고보의 특별한 위치를 강조한다고 하겠다. 어쨌든 그는 제베대오의 아들 야고보나 열두 사도에 속하는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와는 다름 사랍니다. 바오로는 그를 주님의 형제라고 부르는데, 에우세비우스에 의하면 그는 예루살렘의 첫 번째 주교로 알려져 있다.

 

20

바오로는 자신의 복음이 인간에게서 기인한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 받은 것이며 예루살렘의 사도로부터 받은 것이 아님을 맹세 형식으로 주장한다. 적대자들의 비난을 염두에 두었기 때문일 것이다.

 

 

복음<내 어린양들을 돌보아라. 내 양들을 돌보아라.>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21,15-19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시어 그들과 함께 아침을 드신 다음,

15 시몬 베드로에게 물으셨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너는 이들이 나를 사랑하는 것보다 더 나를 사랑하느냐?”

베드로가 , 주님!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십니다.”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내 어린양들을 돌보아라.”

16 예수님께서 다시 두 번째로 베드로에게 물으셨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베드로가 , 주님!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십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내 양들을 돌보아라.”

17 예수님께서 세 번째로 베드로에게 물으셨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세 번이나 나를 사랑하느냐?“하고 물으시므로 슬퍼하며 대답하였다.

주님, 주님께서는 모든 것을 아십니다.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는 알고 계십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말씀하셨다. ”내 양들을 돌보아라.

18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네가 젊었을 때에는 스스로 허리띠를 매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다. 그러나 늙어서는 네가 두 팔을 벌리면 다른 이들이 너에게 허리띠를 매어주고서, 네가 원하지 않는 곳으로 데려갈 것이다.“

19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시어,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느님을 영광스럽게 할 것인지 가리키신 것이다.

이렇게 이르신 다음에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말씀하셨다. ”나를 따라라.“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복음서 주해 (해제,역주 이영헌 신부님)

15

12-13절과 연결하는 편집자의 묘사다.

부활한 예수와 시몬 베드로의 이른바 특별대담이다. 부활한 예수가 제자들 가운데 먼저 베드로에게 발현했다는 전승과 관련된 듯하다.

요한의 아들은 일부 사본에는 "요나의 아들"로 되어 있다. 아마도 마태오복음의 영향을 받은 듯하다. 하지만 요한의 아들은 요한복음의 고유한 표기다.

 

 

예수와 베드로의 관계가 특별히 큰 사랑의 관계라야함을 전제하고서 그런 사랑의 준비태세를 묻는다. 요한복음에 따르면 베드로만이 예수를 위해 복숨까지 내놓고 따르겠다고 장담한다. 바로 그런 베드로의 태도를 상기시킨 듯하다. 두 번째와 세 번째 물음에는 비교급 없이 표혀된 점에 유의해 볼 만하다.

 

예수의 물음에 대한 긍정적 대답을 신뢰에 가득 찬 겸허한 자세로 표현한다.

 

베드로의 사목권이 목자와 양들비유의 표현으로 부여된다. 그런데 첫 번째 와 세 번째 위임에서는 먹여 기르시오, 표현되지만 내용상 차이는 없고 표현을 달리함으로써 오히려 목자가 해야 할 일을 총체적으로 가리킨다고 할 수 있다. "어린양들"양들이란 표현도 마찬가지다. 예수에게 속한 모든 사람을 총칭한다. 부활한 예수는 자기에게 속한 신앙공동체를 돌보도록 시몬 베드로에게 위임한다. 시몬 베드로는 그들을 구원(생명)의 길로 인도하고 예수와의 결속관계 안에서 지키며 보호해야 한다.

 

사도 20.28: 1제드 5.2: 에페 4.11 참조. 그리스도 여전히 목자들의 으뜸이고 목자의 역할은 양들을 보호하는 데 있다. 이런 의미에서 목자는 양들을 지키고 돌보며 이끈다.

 

부활한 예수가 베드로에게 세 차례나 묻는 것은 우선 베드로가 예수를 세 번이나 무인한 것을 상기시키고 또한 베드로를 의심하는 것으로 시사된다. 베드로가 슬픔에 빠져있었다는 것은 베드로의 부끄러움과 슬픔을 가리키며 회개를 뜻한다.

 

모든 것이란 표현은 베드로가 모든 자기확신을 포기햇다는 것을 시사한다. 즉 부활한 예수에게 전적으로 신뢰하며 자기 자신을 내맡기는 베드로의 겸허한 자세가 표현된다.

 

베드로는 세 번 예수에 대한 사랑을 다짐받으면서 그때마다 부활한 예수의 양떼를 돌보도록 위임받는다. , 예수를 세 번이나 부인했던 것을 모두 용서받고 예수의 제자로서 받아들여진다. 베드로에게 부여된 임무는 이 사실을 입증한다. 그는 목자들의 으뜸으로서 또한 지상에서 그리스도를 대리하는 자로서 이 임무를 수행하게 됩니다. 베드로의 임무는 그리스도의 양떼전체의 사목에 역점이 있다. 그러나 베드로의 수위권이 시사된 마태오복음과는 뉘앙스의 차이가 있다. 베드로의 선교 임무나 다른 제자들에 대한 우위권이 명시되지는 않기 때문이다. 이 구절은 교황직에 관련하여 가톨릭과 개신교 사이에 많은 논쟁이 되어 왔고,또한 교회일치 차원에서도 그 논쟁은 계속되고 있다.

 

18

일종의 비유로서 60년대 중반의 베드로 순교를 시사한다 이른바 사후예언이다. 문맥상 나를 따르시오라는 촉구와 함께 베드로가 지상에서 예수를 대신하여 양떼를 돌보듯이 예수의 십자가상 죽음에도 동참하리라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다. 부활한 예수는 이제 베드로의 확고한 자세를 받아들인 셈이다.

 

19

베드로의 순교, 곧 십자가상 죽음을 가리킨다.

13,31-332: 15.8:17.4 참조. 초대 그리스도인들이 순교 때 주로 사용한 말이다.

12.33 참조. 여기서는 예수에 대한 베드로의 추종을 더욱 명료하게 하기 위해 언급된다.

 

고별 때 예수와 베드로가 나눈 대화를 상기시킨다. 당시 상황과는 달리 부활한 예수는 이제 베드로에게 추종을 촉구한다. 이 추종은 예수의 운명에까지 동참하는 죽음의 추종이다. 이런 추종 가운데 이루어지는 베드로의 순교가 강조된다. 베드로는 목자로서 양들을 위해 양들을 위한 죽음이라기보다 오히려 그리스도에게 순종하는 봉사로서의 죽음이다. 바로 여기에도 베드로 사목권의 특성이 시사되어 있다. 오로지 예수 그리스도만이 양들을 위해 자유럽게 자신의 목숨을 아버지께 바쳤다.

 

 

 

 

 

200주년 신약성서 주해/분도출판사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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