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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전례] 전례의 단계적 토착화
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10-08-13 조회수1,756 추천수0

전례의 단계적 토착화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전에는 예식서에 나와 있는 그대로 전례를 거행해야만 했습니다. 만일 예식서가 지시하는 것과 다르게 할 때에는 아주 큰일이 나는 줄로 알았습니다. 따라서 사제들은 예식서에 빨간 글씨로 적혀 있는 지침 사항을 글자 그대로 이행하는 데 온 신경을 써야 했습니다. 이 지침 사항이 빨간 글씨로 되어 있다고 해서 홍주(紅註)라고 하며, 이렇게 홍주를 중시하는 풍조를 "홍주주의"(紅註主義)라 하여, 주위 상황을 무시한 예식중심주의를 일컫는 말이 되었습니다.

 

로마에서 공부할 때 교수 신부님으로부터 들은 이야기입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전에는 미사중 감사기도문을 라틴어로 바쳤는데, 이때 발음이 하나라도 잘못될 경우 처음부터 다시 감사기도문을 읊어야 할 정도였다고 합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에 나온 예식서들은 더 이상 이러한 홍주주의에 매이지 않고 민족과 문화에 따라 예식을 어느 정도 변경시킬 수 있는 자유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이때문에 바티칸에서 펴낸 라틴어 예식서들은 한결같이 "editio typica"라는 말을 달고 있는데, 이는 이 예식서가 다른 나라의 예식서들을 펴낼 때 참고가 되는 모범판, 표준판이라는 뜻입니다. 아쉽게도 우리나라는 라틴어판을 그대로 번역하고 있으나 언젠가는 우리 실정에 맞는 예식서가 출판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날을 위해 우리는 예식서 자체에서 출발하여 토착화의 가능성을 구체적으로 살펴보고 그것을 실행에 옮길 수 있어야 합니다.

 

이제 구체적으로 어떻게 토착화 작업을 해나가야 할 것인지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1단계: 전례를 거행하는 공동체 차원의 토착화

 

여기서 말하는 1단계 토착화란 교도권의 특별한 허락을 받지 않고도 전례를 드리는 공동체 차원에서 실행할 수 있는 것을 말합니다. 이러한 토착화 가운데 먼저 전례 주례자인 사제가 능동적으로 할 수 있는 것들을 들 수 있습니다. 전례 개혁 이후에 나온 예식서들의 특징 가운데 하나는, 예식을 거행할 때 주례자가 주위 환경이나 모인 사람들의 특성에 맞게 예식의 형태를 어느 정도 변형시킬 수 있는 유연성을 부여하였다는 점입니다. 예를 들어 성찬례(미사)의 입당 예절중, 사제가 신자들에게 인사하는 방식이 여러 가지 제시되어 있고, 사제는 이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여 사용할 수 있는데, 이때 사제는 미사경본에 제시된 양식 외에도 다른 방식으로 신자들에게 인사를 할 수 있습니다. 모인 신자들이 주로 청년일 때와 어린이일 때 그리고 노인 위주의 모임일 때 주례자가 상황에 따라 조금 다르게 하는 것은 전례의 활성화를 위해서 바람직하다 하겠습니다.

 

사제가 개인적으로 주도권을 가지고 하는 것 외에도 주례자인 사제가 제멋대로 한다는 인상을 피하고, 또 신자들이 전례 거행의 공동 참여자임을 인식시키기 위해서 신자들과의 대화를 통해 좀더 나은 방식의 예절들을 찾아내는 방식의 토착화도 있습니다. 본당 공동체 차원에서 주례자가 신자들과 더불어 임의로 예절을 바꿀 수 있는 자유는 예상외로 많습니다. 성찬례 안에서만 보아도, 참회 예절의 방식, 제물을 바치는 방식, 평화의 인사를 나누는 방식, 영성체하는 방식 등등.

 

미사곡을 선택할 때도 각 본당에 맞는 것들을 고를 수 있을 것입니다. 공동체 구성원에 따라 그 관심사도 다를 것이기에 각 본당은 자기네 실정에 맞는 신심을 도입할 수 있습니다. 성당 건축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획일적인 내부 구조에서 탈피하여 각 공동체 특성에 맞는 구조를 만들 수 있을 것이고, 제대와 감실, 독서대의 배치에 있어서도 우리 멋이 우러나올 수 있는 방식을 찾아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외에 미사나 세례성사, 혼인성사, 장례미사 등에 있어서 우리 식으로 표현할 수 있는 방법은 많이 있을 것입니다.

 

새 성가를 만들어 보급하는 것과 같이 먼저 주교회의의 허락을 얻어 시도하는 토착화도 있습니다. 이 경우에도 전례를 드리기 위해 모인 공동체는 주교회의의 허락을 얻기 전 어느 정도까지는 자기네 공동체 안에서 나름대로 시도할 수 있습니다.

 

 

2단계: 로마 예식에 각 지방의 문화적 요소를 삽입

 

로마 예식은 그 자체로 로마 교회에서 로마 문화를 이용하여 파스카 신비를 표현한 결과의 총체입니다. 따라서 로마 예식 안에는 파스카 신비에 관한 핵심적인 내용도 들어 있지만, 다른 한편 이 신비를 그들 나름대로 표현한 요소들도 들어 있습니다. 이 문화적 요소들 가운데 우리 민족 문화와 일치하지 않거나 부자연스러운 것, 또는 우리 것으로 하면 더 잘 그 의미가 드러날 수 있는 것들이 있게 마련입니다.

 

세례성사 때 흰옷을 입는 예식을 생각해 봅시다(지금은 흰보자기를 머리에 씌우는 것으로 대치되고 있습니다). 여기서 흰색은 예수님의 부활과 그의 승리를, 그리스도인으로서의 품위를 상징하는 색입니다. 그런데 색에 대한 각 문화의 해석은 다르게 마련입니다. 동방 정교회에서는 그리스도의 품위를 드러내는 색은 자색입니다. 우리나라에서는 흰색이 순결도 뜻하지만 장례 때 흰옷을 입는 데서 볼 수 있듯이 죽음도 의미합니다. 반면 왕족은 노란색으로 자신들의 품위를 드러냈습니다. 이런 문화적 배경을 가지고 있는 우리로서는 세례 때 노란색 옷을 입음으로써 본래의 의미를 더 잘 드러낼 수 있을 것입니다.

 

혼인의 경우에도 우리 전통 혼례의 요소를 도입할 때, 좀 더 우리 정서에 맞는 전례를 이룰 수 있을 것입니다. 전례주년의 경우, 우리 민족의 큰 명절인 설과 한가위를 대축일로 정하여 지낼 때 하느님이 우리 민족과 함께해 왔다는 것을 더 잘 보여줄 수 있을 것입니다.

 

이처럼 로마 예식의 큰 틀은 그대로 유지하면서도 그 예식을 이루는 요소들 가운데 우리 것으로 그 의미하는 바를 더 잘 표현할 수 있는 것은 우리 것으로 바꿀 수 있습니다. 이것은 본격적인 토착화를 위한 전단계에 해당되는 것이지만, 로마 전례를 알고 또 우리 것을 알아야 한다는 점에서 토착화를 위해 꼭 거쳐야 되는 중요한 단계라 하겠습니다.

 

 

3단계: 로마 예식을 우리 전통 예식으로 대치함

 

혼인성사의 경우 중요한 핵심 요소는 신랑. 신부의 동의와 그들에 대한 축복입니다.「혼인예식서」17항은 이 두 요소만 채운다면 각 나라에서 고유 혼인예식서를 만들 수 있음을 밝히고 있습니다. 입교성사를 이루는 세례와 견진의 경우에도, 어느 단체나 집단에 들어가기 전 거쳐야 하는 입문 예식을 우리 문화 안에서 찾을 수 있다면 그것으로 대치하여 새 예식서를 만들 수 있습니다. 이처럼 로마 예식 가운데 핵심적인 부분을 유지하는 조건으로 로마 예식 자체를 그 나라의 전통적 문화 안에 있는 예식으로 바꾸어 새 예식서를 만드는 것은 토착화의 최종 단계이자 진정한 의미의 토착화라 하겠습니다.

 

위에서 설명한 2단계, 3단계 토착화는 주교회의 차원에서 이루어지고 최종 승인은 교황청에서 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또 각 민족의 요소들이 부분적으로 또는 전체적으로 예식 안에 들어오기 전 그리스도교적 관점에서 재해석하는 작업이 먼저 이루어져야 합니다. 이러한 과정이 어렵고 까다로워서 많은 노력과 시간이 필요한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우리 문화로 하느님을 찬미할 때, 하느님은 유럽이나 이스라엘만의 하느님이 아니라 우리 민족과 함께하셨고 지금도 그러하시는 하느님이심을, 가톨릭 교회가 유럽의 종교 가운데 하나가 아니라 우리 민족에 뿌리 깊숙히 들어와 계신 하느님을 찬미하는 종교임을 보여줄 수 있을 것입니다.

 

[출처 : 성 베네딕도회 왜관 수도원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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