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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성경바로보기 / 떡 하나 주면 정말 안 잡아먹을까 (2) (마르13,28-37)
작성자김종업 쪽지 캡슐 작성일2021-07-06 조회수8,369 추천수0 반대(0) 신고

 

 

(공동번역성서) 2021. 7. 6. 성경바로보기

 

 떡 하나 주면 정말 안 잡아먹을까 (2)

 

(마르13,28-37)

28 '무화과나무를 보고 배워라. 가지가 연해지고 잎이 돋으면 여름이 가까와진 것을 알게 된다. 29 이와 같이 너희도 이런 일들이 일어나는 것을 보거든 사람의 아들이 문 앞에 다가 온 줄을 알아라. 30 나는 분명히 말한다. 이 세대가 지나기 전에 이 모든 일들이 일어나고야 말 것이다. 31 하늘과 땅은 사라질지라도 내 말을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32 '그러나 그 날과 그 시간은 아무도 모른다. 하늘에 있는 천사들도 모르고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이 아신다. 33 그 때가 언제 올는지 모르니 조심해서 항상 깨어 있어라. 34 그것은 마치 먼 길을 떠나는 사람이 종들에게 자기 권한을 주며 각각 일을 맡기고 특히 문지기에게는 깨어 있으라고 분부하는 것과 같다. 35 집 주인이 돌아 올 시간이 저녁일지, 한 밤중일지, 닭이 울 때일지, 혹은 이른 아침일지 알 수 없다. 그러니 깨어 있어라. 36 주인이 갑자기 돌아 와서 너희가 잠자고 있는 것을 보게 되면 큰 일이다. 37 늘 깨어 있어라. 너희에게 하는 이 말은 또한 모든 사람에게 하는 말이다.'

 

지난번에 혼인잔치에서 돌아오시는 주인을 맞기 위해 깨어 있어야 하는 성도의 삶에 대해서 살펴봤습니다. 깨어있음이란 우리의 행위를 거룩하고 깨끗하게 유지하며 종교행위에 열심을 내는 그런 류의 것이 아니라 그랬습니다. 그런 의 것이 아니라 오직 우리의 신랑만이 우리의 구원의 주체이심을 확실하게 깨닫고 모든 관심을 우리의 신랑에게 돌리며 그에게만 영광과 가치를 돌리는 삶을 깨어 있는 삶이라고 한다. 그랬죠. 그래서 슬기로운 다섯 처녀가 자신들의 그 일상의 풍요에 도움이 될만한 그 기름을 언제 올지도 모르는 신랑을 기다리는 데에 쏟아 부었던 것이죠.

왜냐하면 하느님을 알지 못하는 모든 인간의 일상은 인간의 가능성 과시의 장이잖아요. 일상은 그렇게 인간의 가능성 과시의 장이기 때문에 그 인간의 가능성을 차압당한 이들에게는 일상보다 하느님과 하느님 나라에 더 관심이 가게 되기 때문이에요. 오늘 본문의 병행구절이라 할 수 있는 루가복음 12장으로 가면 주님은 제자들의 일상을 다 차압해 버리시는 그런 장면이 나와요.

 

(루가12,36) 36 마치 혼인잔치에서 돌아 는 주인이 문을 두드리면 곧 열어 주려고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처럼 되어라.

 

여러분 종()들은 다른 할 일이 많은 사람들입니다. 집안일도 해야 되고, 밭에 나가서 밭일도 해야 되고, 가족이 있으면 가족도 챙겨야 하고 할 일이 아주 많아요. 화장실도 가야죠. 밥도 먹어야 되고, 그런데 주님은 문 앞에 서서 주인이 문을 두드리면 곧 문을 열어줄 수 있는 자리에서 대기하라고 하시는 거예요.

이건 억지죠? 언제 올지도 모르는 주인을 그것도 종들이 할 일 많은 종들이 문을 곧 열어줄 수 있는 자리에서 기다려야 한다는 건 주인의 억지란 말입니다. 다른 일하다가 주인을 기다리게 해서는 안된단 이야기예요. ‘이라는 그 단어는요.

그러니까 주님을 기다리는 하느님 나라 백성들은 다른 일상에 한눈을 팔아서는 안된다라는 말을 에둘러 표현한 거란 말입니다. 오직 주님이 오시기만을 오매불망 바라면서 자신들의 일상이 자신들을 존재케하고 행복하게 할 수 있다는 모든 기대와 희망을 내려놓고 곧 주인만이 나의 생존의 근거가 되시고, 그 주인만이 나의 행복의 근원이심을 공고히 붙들라는 거예요.

그들의 행위가 어떻든 그건 상관없어요. 그 주인에게만 관심의 초점을 다 두라는 그런 뜻이에요. 그래서 그 슬기로운 다섯 처녀가 어리석은 다섯 처녀와 함께 자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행위는 힘의 원리, 세상의 세계관과 치관으로 봤을 때 슬기로운 자의 행위가 아니었잖아요. 같이 자고 있었다니깐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의 일상에 쓸 수 있었던 유용하게 쓸 수 있었던 기름을 그 신랑을 기다리는 데에 사용하여 바보같이 쓰고 있었다라는 그것 때문에 '하느님에 의해 신랑에 의해 선택을 받은 자들은 바로 요런 자세로 사는 거구나'라는 것을 보여주고, 그리고 하느님에 의해 자고 있었는데 걔네들만 깨워서 문안으로 싹 끌어당긴 다음에 문을 잠궈버린 거예요.

그 나머지 다섯 처녀도 얼른 달려가서 기름을 사가지고 왔다니깐요. 그럼에도 하느님이 문 안 열어 줬단 말입니다. 자 그렇게 주님이 오실 때에 그 주님을 반겨 맞을 수 있는 고 자리에 서 있는, 바로 그 자들이 그 주님의 섬김 즉 십자가 은혜를 받은 자들이고 현실 속에서도 주님과 관계를 맺고 사는 그런 참 聖徒라는 거예요.

주님이 일단 선택하여 주님이 관계를 맺기 시작한 자들은 바로 고 자리로 끌려 내려간다란 뜻이에요. 우리가 예수를 믿게 되면 계속해서 그러한 삶을 산다라는거 아니에요? 그러면 여기 있는 사람 다 지옥 가게요? 저부터 시작해가지고...

우리 그렇게 못 살잖아요. 우리가 예수님이 오면 언제든지 그 문을 열어 주는 고 자리에 서서 살고 있습니까? 아니죠. 고게 바로 우리의 목표지점인 거예요.

 

(루가12,37) 37 주인이 돌아 왔을 때 깨어 있다가 주인을 맞이하는 종들은 행복하다. 그 주인은 띠를 띠고 그들을 식탁에 앉히고 곁에 와서 시중을 들어 줄 것이다.

 

주인이 왔을 때 머뭇거리지 않고 얼른 문을 열어 준 그런 종을 주인이 띠를 띠고 종들을 앉힌 후에 수종을 든다 그래요. 주님은 다른 곳에서는 종은 밭에 가서 죽어라고 일하고 와서 주인 밥상 차리고 주인이 밥 다 먹으면 그거 다 치우고도 '저 보상해 주세요' 이런 말할 수 있는 존재 아니다라고 말씀했어요.

그런데 여기서는 종이 그까짓 문 열어 줬다고 주인이 띠를 띠고 앉아 종들을 앉혀 놓고 수종을 든대요. 섬긴대요. 이게 무슨 말일까요? 여러분 이 비유에는 무슨 메시지가 들어있단 말입니다. 무슨 이야기일까요? 이런 그림 요한복음 13장에서 봤죠.

요한복음 13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잡히시던 날 밤에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는 장면이 나와요. 띠를 띠고 수건을 두르고 앉아서 제자들을 앉혀 놓고 수종을 든다 말입니다. 고 그림인 거예요. 그렇게 주님께서 제자들의 수종을 들려고 하자 베드로가 뭐라 그러죠? '어찌 주님께서 저희의 발을 씻기시게 놔둘 수 있습니까'라고 만류를 하죠.

그랬더니 예수님이 뭐라 그래요? '내가 니 발 안 씻기면 너와 나와 관계가 없다' 그래요. 그러니 주님이 종들의 발을 씻기시는 고 그림은 어떤 그림인 거예요? 주님과 종들의 관계성에 관한 그림이에요.

 

(요한13,8-10) 8 베드로가 '안 됩니다. 제 발만은 결코 씻지 못하십니다' 하고 사양하자 예수께서는 '내가 너를 씻어 주지 않으면 너는 이제 나와 아무 상관도 없게 된다' 하셨다. 9 그러자 시몬 베드로는 '주님, 그러면 발뿐 아니라 손과 머리까지도 씻어 주십시오' 하고 간청하였다. 10 예수께서는 '목욕을 한 사람은 온 몸이 깨끗하니 발만 씻으면 그만이다. 너희도 그처럼 깨끗하다. 그러나 모두가 다 깨끗한 것은 아니다' 하고 말씀하셨다.

 

이 말은 너희는 목욕해서 다 깨끗한데 발만 더러우니까 내가 발을 닦아줄게 이 말이 아니라, 너희는 깨끗하나 다는 아니다라는 다 깨끗한데 유다 요놈만 아니다란 뜻이에요. 바로 고 다음 구절에 나오잖아요.

자 주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면서 너희는 이미 목욕을 한 자들이므로 온몸이 깨끗하다고 선언을 하세요. 그 온몸에는 발이 들어가 있죠. 그럼 발도 깨끗한거란 말입니다. 그런데 그 깨끗한 발을 왜 닦아주냐 말이에요. 주님은 지금 그들의 온몸이 어떻게 해서 깨끗하게 되어진 것인지를 몸소 보여주는 거예요.

그들의 온 몸이 깨끗하게 되어서 거룩하게 구별이 된 것은 그들의 행위와 공로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들의 노력과 열심에 의한 것이 아니라 주님의 발 씻기심 주님이 종이 되어서 그들의 발을 씻기신 십자가에 의해서 그렇게 된 것임을 보여주는 거예요. 미리...

아직 십자가를 지시기 전이지만 제자들은 유다 빼놓고 제자들은 하느님의 선택 안에 들어있는 사람들이죠. 그 선택은 중도에 실패될 수 없어요. 포기될 수도 없습니다.

그러니까 이제 십자가를 지게 되면 주님에 의해 택해진 자들이 어떻게 될 것인지를 주님이 지금 그림으로 보여주는 거예요. 예고하시는 거예요.

그런데 제자들이 같이 자기의 발을 닦는 것도 아니고, 주님의 발을 서로 씻겨주는 것도 아니고, 그들은 앉아있고 주님이 종이 되어서 그들의 발을 씻기는 것으로 그들이 온몸이 깨끗하게 된 것이다. 구원받게 된 것이다. 용서받게 된 것이다. 이걸 보여주는 거예요. 십자가의 현실.

너희들은 나와의 관계성에 의해 구원을 받는 것이지 내가 너희들의 발을 못 씻기게 하는 그 상관이 없는 관계성에서 멀어질 때 너희는 구원과 관계없는 자들이 되는 거란 뜻이에요.

너희들의 수고와 열심과 노력에 의해 너희가 깨끗해지는 게 아니라 나와의 관계성. 예수님과의 관계성에 의해서 우리가 구원받는다. 라는 거예요. 이걸 여러분이 잘 이해해야 돼요.

하느님과 하느님의 백성은 지금 관계성으로 현재에 연결되어 있는 것이지 본질이 지금 변한게 아니에요. 그걸 관계성에 의해 관계성이라는 통로를 타고 예수의 능력이 부어져서 잠시 우리의 삶에서 살아있는 자의 삶이 나올 뿐이지 본질이 변해서 지금 향상되어지고 있고 발전되어지고 있는게 아니란 말입니다.

향상되어지고 발전되어진 거라면 여러분이 수시로 그렇게 넘어지면 안돼요. 그 능력이 여러분에게 사유화된 거라면 여러분이 이렇게 수시로 넘어지면 안 된다니깐요. 아니란 말입니다. 여겨지는 거예요. 그리고 내 안에서 나오는 선한 행위 착한 행위는 하느님이 잠깐잠깐 내 안에 사시는 하느님이 진짜 계시다라는걸 증명하는 것일 뿐입니다.

그래서 나중에 이 껍데기를 바꿔주는 거예요. 이게 불가능하니까... 그렇게 제자들의 열심, 공로, 자격, 업적 등은 그들의 깨끗함에 조금도 기여를 할 수가 없는 것임을 지금 예수님이 보여주는 거예요. 그걸 본을 보여주셨다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시길 너희도 서로의 발을 씻겨줘라그래요. 여기에서 많이들 오해들 하는데... 그래서 洗足式도 하고 난리 블루스들을 치죠. 그럼 또 감동해가지고 왜 아무도 발을 닦아줘 본 적이 없으니까 그리고는 다음날 잊어버리죠. 누가 닦아줬는지도... 오늘날 그리스도교가 그렇게 유치해졌다니깐요.

발을 씻겨주라 이게 무슨 말이겠어요? 예수님처럼 서로를 위해 죽어주라는 말인가요? 그건 불가능한 일이잖아요. 내 몸 조금 피곤하면 그 사랑스러운 아이들도 귀찮아 지는게 우리인데... 그렇잖아요.

남자들 밖에 가서 일하고 들어와서 애들하고 잘 놀아주던가요? 지 몸 불편하면 자식새끼도 필요 없어요. 그런데 누굴 위해서 죽어요? 우리가... 거짓말들 하지 마세요. 불가능입니다 그건요. 그 대목에서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할 아주 중요한 어구가 있어요.

 

(요한13,14-15) 14 그런데 스승이며 주인 내가 너희의 발을 씻어 주었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어야 한다. 15 내가 너희에게 한 일을 너희도 그대로 하라고 본을 보여 준 것이다.

 

이게 중요한 단어에요. ‘본을 보였다.’ 내가 주체가 되어 너희들의 발을 씼겼다. 그게 어떤 본인데 그 본이 뭔지를 보자 말이에요. 예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는 본을 보이시고 그대로 하라고 하셨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보인 본이 뭐예요? 그거부터 한번 생각해 보자고요.

이 뭐예요? 성도의 거룩 성도의 깨끗함은 쌍방간의 협력사역에 의해 성취되는게 아니라, 예수님의 일방적 희생인 씻기심에 의해 성취되는 것임을 보여주신게 발씻기심이죠. 그게 본이란 말이에요.

씻기시는 이가 오히려 씻김을 받는 이보다 낮아져서 이게 하느님 나라의 삶의 원리입니다. 하느님의 속성이기도 하고요. 낮아져서 일방적으로 씻김을 받는 자에게 은혜가 부어지는 거예요. '예수님 오른쪽만 닦으세요 내가 왼쪽 닦을께요' 이게 아니라니깐요. '가만있어 내가 닦을거야' 아니라니깐요.

'아니야 그러면 너와 나는 상관없어' 이게 구원이에요. 그런데 자꾸 우리는 거길 도와주겠다는 거예요. 그러면 발톱의 때는 제가 좀 닦으면 안될까요? 안 된다니깐요. 아버지가 다 닦아줘야 돼요. 그래서 예수님과 제자들이 서로 발을 씻기지 않고, 예수님이 일방적으로 제자들의 발만 씻긴 거예요.

그렇다면 성도가 서로의 발을 씻어줘야 한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본을 보여주신 것처럼 우리는 예수님의 일방적 공로에 의해서 깨끗함을 입은 사람들이다라는걸 드러내는 거예요. 나는 이렇게 모르는 사람의 발도 닦아 줄 수 있는 사람이야를 드러내는게 아니라, '나는 모르는 사람이 아니라 우리 아버지 발도 진심으로 닦아줄 수 없는 자예요'가 들켜지는게 발을 닦아주는 거란 말입니다.

'예수님의 은혜가 아니면 나는 한시도 존재할 수가 없는 자입니다' 그게 바로 발을 딖아주신 예수님이 보이신 본이란 말이에요. '나는 예수님의 은혜가 아니면 절대로 깨끗함을 입을 수 없는 그런 존재입니다' 이걸 인정하는 그 자리로 내려가는게 바로 상대의 발을 씻기는 거예요.

 

그렇게 나라는 존재의 무용함과 불가능함이 진정으로 고백이 되는 사람 안에서는 누구만 드러나게 될까요? 예수님만 드러나게 되죠. 예수님의 가치와 영광만이 드러나게 되잖아요. 그분이 나를 살리셨고, 그분이 나를 지금 살게 하신다. 그분이 나를 완성하실 것이다.

그러면 그에게 있어서 관심의 대상이 누구예요? 예수 밖에 없어요. 예수의 영광과 예수의 가치. 그걸 자기부인이라고 그래요. ? 예수의 하는 일에 내가 끼어들 틈이 없으니까 자기가 부인되는 거란 말입니다.

세상은 그런 사람들을 보고 뭐라 그러겠어요? 부인되어진 사람보고 바보라고 그러죠. 천치라고 그러죠. 줏대 없는 놈. 연약한 자. 그럴 거 아닙니까? ? 나의 무력함과 불가능함을 인정해 버리는 자니까요.

'난 이런 사람인데 예수님이 이런 나도 구원하셨대요' 이걸 보여주는게 발을 씻는 자거든요. 이게 바울로의 고백이잖아요. ‘스테파노를 때려죽였는데, 교회를 핍박했는데 이런 나를 구원해 주셨대요. 나의 나 된 것은 모든 것이 하느님의 은혜다라고 고백하잖아요.

그러면서 '왜 하느님이 날 구원하셨냐면 이런 나도 구원했으니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이걸 보여주려고 나 구원했다라고 바울로가 이야기했단 말입니다. 그런데 그 사도바울로는 율법에 의하면 점도 없고 흠도 없는 자라 그랬어요. 나는 완벽하게 살았다 그랬거든요. 그런데 사도 바울로가 자기 인식은 어떻게 하냐 하면 이런 나도 구원하셨으니 하물며 당신들을 향한 사랑은 얼마나 크겠느냐 이걸 보여주기 위해 날 구원했다 그랬단 말입니다.

 

그러니까 하느님에 의해 구원받은 자는 바로 그 자리로 밀려 내려가더라는 거예요. 도덕적 윤리적 사회법적 양심적 그런 범위 안에서는 죄라는 걸 하나도 지어보지 않은 그 사람이 내가 죄인 중의 죄인입니다라는 고백을 하는 자리로 밀려 내려가더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당연히 세상은 그런 사람들을 보고 없인 여김과 모멸과 천대를 부어댈 거죠. 연약하니까... 내가 죄인이에요. 내가 제일 못난 자에요. 내가 죄인 중의 죄인입니다. 그러면 세상은 '어이구 그러세요 참 겸손하시네요' 이게 아니라, '그래 그럼 너는 마음껏 밟아도 되겠구나' 이렇게 된다니깐요. 그런데 그렇게 상대방의 발을 씻기는 자를 보고 주님을 맞이(영접)하는 변태들이 있대요.

 

(요한13,20) 20 정말 잘 들어 두어라. 내가 보내는 사람을 받아들이는(영접) 사람은 나를 보내신 분을 받아 들인다.'

 

너희들 서로 나가서 발씻겨 그랬거든요. 내가 너희들에게 보여준대로 발을 씻겨. 그건 뭐라 그랬어요? 낮아지라는 거예요. 너희들의 무력함과 불가능함 없음 낫싱임을 인정하라는 거였거든요. 그러면 세상은 세상의 세계관과 가치관으로는 도저히 그들을 영접(迎接) 안하는게 옳은 거예요.

세상의 세계관과 가치관은 발을 씻기는 자들을 거들떠보지도 않아요. 그런데 그러한 이들을 맞는 변태들이 있으니 그들이 바로 성도라는 거예요. 그러니 聖徒는 하늘의 눈과 귀를 선물 받은 세상 속 변종(變種)들인 거죠.

 

그렇게 오직 주님의 은혜만이 나의 생존과 존재의 근거입니다라는 고백을 하는 이들이 서로를 어떻게 대하겠어요. 그들이 만났어요. 서로 '내가 죄인 중의 죄인입니다' '아니에요 내가 죄인 중의 죄인이에요'

이 자리에 사도 바울로가 오셨다고 한번 생각해 보세요. 사도바울로가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고백으로 뭐라고 고백을 할까요? '내가 죄인 중의 죄인입니다'라는 고백 하신다니깐요. 그분이요.

우리가 그 자리로 밀려 내려가는 거예요. 그때 우리가 진짜 하느님이 이루어 가시는 성화의 길에 있는 사람이라면 우리가 어떤 고백을 하겠어요? '아니에요 내가 죄인 중의 죄인이죠' 진심에서 우러나서, 그래놓고 속으로는 이런 내가 멋있지 이거 말고, 진짜로 내가 죄인 중의 죄인이라는 그 자리로 내려가는게 聖化에요.

진짜 성화. 지금 개혁주의 교회가 말하는 그 성화는 가짜고, 이 성화가 진짜 성화란 말입니다. 자기 자신이 이 세상에서 가장 낮은 자요. 죄인이요. 못난 자라는 진심어린 고백을 하는 이들이 무엇에 희망을 두겠어요? 세상은 지금 나를 계속 바보라 천치라 줏대 없는 자라 연약한 자라 멸시하고 있어요. 그리고 그 세상에 두었던 나의 가치관도 많이 달라졌어. '아 그런 가치있는 곳이 아니구나' 그러면 그가 눈을 들어 누구를 바라보겠습니까?

내 발을 씻겨 주신 그 신랑을 바라볼 거 아니에요. '나는 이런 자인데 내 신랑이 도대체 내 발을 왜 닦아 준거야? 왜 나를 목욕시킨 것이지? 왜 나를 자기에 신부로 심아주신 것일까?' 그분만을 바라보며 그분만을 기다리게 되겠죠.

자들이 바로 신랑이 선택한 자들이다라는 뜻이에요. 신랑이 선택한 자들이 비록 잠은 자고 있었지만 자기의 일상을 무관심의 영역으로 밀어내고 그 일상에 쓸 수 있는 기름을 신랑을 맞는데 들고 있었잖아요. 그거란 말입니다. 그 자리로 가는 거예요.

 

우리가 행동은 조금 실수도 할 수 있고, 실패도 할 수 있고, 아니 안 믿는 사람들보다 다른 종교인들보다 덜착하게 살 수도 있어요. ? 착함이라는 것의 개념은 정의는 세상 사람들이 합의해 놓고 정의해 놓은 그 착함과는 다르거든요. 하느님 나라에서의 착함()이라는건 그거 아니거든요. 그게 바로 깨어 있는 자의삶인 거예요. 그리고 바로 그들이 어린 양의 신부들인 거예요. 깨어 있음은 이 세상에서 주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하면서 언제 주님이 오셔도 기쁜 일을 싹 내밀 수 있는 삶을 사는게 아니라 그랬습니다. 슬기로운 다섯 처녀 보고 깨어 있는 자라고 이야기하셨잖아요. 자고 있었는데...

그러니까 행위에 관계없이 깨어 있음은 예수님이 말씀하신 깨어 있음은 다른 거라 말이에요. 예수님의 오심만 기다리는 자로 그의 일상이 무관심의 영역으로 밀려나는 상태인 거예요. 그게 바로 깨어 있음이란 말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당신의 제자들을 떠나서 하늘로 올라가시면서 제자들에게 무엇을 하라고 하셨는지에서 부터 한번 시작해 보자고요. 그게 오늘 본문이잖아요. 주인이 멀리 떠나면서 종들에게 뭘 하라고 시켰고 난 돌아올 거야 그러니 돌아올 때까지 뭐 하고 있어. 이게 오늘 비유의 내용이잖아요.

그러니까 우리 주님이 하늘로 떠나시면서 제자들에게 뭐하고 있으라고 이야기했는지 거기서부터 출발해서 추적을 해보면 오늘의 비유의 내용이 이해가 갈 거 아닙니까. 그 이야기이니까...

 

(사도1,6-11) 6 사도들은 다 같이 모인 자리에서 예수께 이렇게 물었다. '주님, 주님께서 이스라엘 왕국을 다시 세워 주실 때가 바로 지금입니까?' 7 예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셨다. '그 때와 시기는 아버지께서 당신의 권능으로 결정하셨으니 너희가 알 바 아니다. 8 그러나 성령이 너희에게 오시면 너희는 힘을 받아 예루살렘과 온 유다와 사마리아뿐만 아니라 땅 끝에 이르기까지 어디에서나 나의 증인이 될 것이다.' 9 예수께서는 이 말씀을 하시고 사도들이 보는 앞에서 승천하셨는데 마침내 구름에 싸여 그 모습이 보이지 않게 되셨다. 10 예수께서 하늘로 올라 가시는 동안 그들은 하늘만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 때 흰 옷을 입은 사람 둘이 갑자기 그들 앞에 나타나서 11 이렇게 말했다. '갈릴래아 사람들아, 왜 너희는 여기에 서서 하늘만 쳐다보고 있느냐? 너희 곁을 떠나 승천하신 저 예수께서는 너희가 보는 앞에서 하늘로 올라 가시던 그 모양으로 다시 오실 것이다.' 절 보세요.

이 이야기란 말이에요. 이 그름을 잘 보세요. 종들이 주인님 언제 오십니까? 하고 물었어요. 언제 완료됩니까?는 언제 오십니까에요. 그랬더니 내가 언제 올지는 하느님만 아신다라고 말씀하세요. 그리고는 주인이 종들에게 무언가를 명령하시고 멀리 떠나세요. 그리고 그렇게 다시 오실 거래요.

오늘 본문의 비유에서는 깨어 있으라 내가 돌아오거든 곧 문을 열어줄 채비를 하고 있어라 하고 비유적으로 표현이 되어 있지만, 여기서는 구체적으로 그 내용이 명시가 되어있어요. 뭐예요? '땅 끝까지 내 증인이 되라'에요. 그게 깨어 있는 거래요. 그게 주인을 기다리는 거래요.

그리고 그걸 요한복음의 표현으로 바꾸면 내가 너희에게 본을 보인대로 서로의 발을 씻겨라에요. 그런데 그렇게 발을 씻기면 누군가가 너희들의 발 씻기는 삶을 보고 나를 영접할 거야. 그게 뭡니까? 증인의 삶이잖아요. 그게 연결이 되는 거라 말입니다.

 

그런데 지금 읽은 사도행전 1장에 의하면 그 일이 주인이 명령하고 가신 그 일이 종들의 능력으로 이룰 수 없는 거라 그래요. ‘성령이 임하실 때까지 기다리라함부로 나다니지 말고 기다리라 그래요. 예수님이 그러니 제자들의 명령 수행은 성령의 힘으로 되어지는 거예요.

따라서 깨어있음의 삶은 우리의 열심과 노력으로 되어지는게 아니라 성령의 역사로 이루어지는 거예요. 성령의 역사에 의해 그들이 어린 양의 신부임이 드러나는 거고 그래서 그렇게 깨어 있는 자들이 발견될 때 예수님의 발 씻기심에 은혜가 그 자리에서 드러나게 되는 거예요.

'이자들이 바로 예수님의 발 씻기심의 은혜 십자가의 은혜에 의해서 구원받은 자들이구나' 라고 이렇게 드러나는 거란 말입니다. 그들이 증인이고 그들이 신부인 거예요. 그들이 깨어 있는 자인 거예요. 그런데 그들은 수시로 잠들어 있어요. 그런데 어떻게 깨어 있는 자 ,증인의 삶, 신부의 삶을 사느냐? 하느님이 그리로 끌고 내러 가시는 과정 중에 하느님이 잠깐씩 그 삶을 우리의 삶 속에서 드러내시는 것일 뿐이란 말입니다.

아울러 그렇게 깨어 있는 삶 우리 자신의 자격과 열심과 업적과 공로를 다 비워 버리고 우리의 발을 씻기신 예수님만이 드러나게 되는 그 삶이 통로가 되어서 그 예수님을 주님으로 맞이할 자들이 있다 그랬어요.

그러면 지금 증인이고 신부이고 깨어 있는 자라 그랬으니까. 그리고 이 자리로 이 삶을 통하여 누군가가 들어온다 했으니까 이들이 또 증인. 신부. 이제 신부로 대답을 한번 몰아가보자 말이에요. 신부.

그러면 이 증인의 삶은 주님께 지금 신부를 소개하는 삶이죠. 그러면 다른 말로 요 삶을 뭐라 그럴 수 있어요? 중매쟁이의 삶. 그건 제 말이 아니에요. 바울로의 이야기에요. 한번 보고 갈까요.

 

(2고린11,2) 2 하느님께서 여러분을 염려하시는 것처럼 나도 염려하는 나머지 마음이 놓이지 않습니다. 그것은 내가 순결한 처녀인 여러분을 오직 한 남편 그리스도에게 바치려고 정혼을 시켰기(중매) 때문입니다.

 

성경은 이렇게 빈틈이 없습니다. 바울로는 그렇게 서로의 발을 씻기는 삶, 자기부인의 삶이 다른 이들을 주님의 신부로 중매하는 삶이라고 표현해요. 주님의 공로만을 의지하여 자기 자신의 모든 육적 행위와 공로를 배설물로 여기게 되는 자들이 바로 주님의 신부고 그들이 신랑의 도래만을 오매불망 기다리는 깨어 있는 자라는 말이 되는 거예요. 그리고 그런 주님의 신부들에 의해 다른 신부들이 지금 중매되고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전교라는 건 우리의 가치나 인기나 명성 등을 사용하여 사람들을 유혹해 교회로 데리고 오는게 아니죠. 증인의 삶 신부의 삶 깨어 있는 자의 삶 중매쟁이의 삶이 뭐라 그랬어요?

예수님의 발 씻기는 그 본을 보고 자기도 발을 씻기는 자의 삶을 살아서 신부를 예수님께 중매하는 거였는데, 그게 뭐였냐 하면 '나는 예수님의 발 씻김에 의해서만 존재하고 또 행복해질 수 있고 완료될 수 있는 그런 자입니다'라는 자기부인의 상태라 그랬잖아요. 그 상태에서 이걸 알아보고 세상은 전부 배격하는데, 하느님의 은혜를 입은 누군가가, 선택을 입은 누군가가 변태처럼 이걸 알아보고 '그래 나도 그길로 좀 가볼까' 하고 온다 말이에요.

힘의 원리 속의 세계관과 가치관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한 거잖아요. 힘의 원리 속에서는 강한 자, 많이 가진 자가 이긴 거 아니에요? 그게 승리 아닙니까? 그런데 누가 패배의 자리로 오겠어요. 그런데 그리로 오는 자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거 하느님이 하시는 거예요. 그래서 전교는 미련한 것이라고 이야기한 거예요. 사도바울로가 고린도전서에서 전도에 미련한 것. 누가 그걸 보고 쫓아오겠냐는 거예요. 그런데 오는 이가 있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이 전도하시는 거죠.

그러니까 고지 꼭대기에 올라가서 또 높은 벼슬을 하여 내가 가진 소유와 명성과 인기와 재산으로 사람들을 주님께로 끌고 오겠다. 그러니 나에게 힘을 주세요. 이건 사기죠. 안되는 거예요. 그런 전도는 없다 그러잖아요. 그런데 전부 그렇게 해달라는 거예요. 그렇게 만들어 주면 내가 전도하겠다는 것이죠.

전도는 하느님이 하시는 거라 말입니다. 결론적으로 깨어 있는 성도는 성령의 이끄심에 의해서 내가 쌓아놓은 나라는 존재의 가치와 명성과 인기와 소유를 조금씩 털리면서 결국에는 몽땅 다 털리고 예수님이 모든 것이고 나는 없음입니다. 낫띵입니다라는 고백을 하게 되는 자리로 끌려 내려가게 되는 거예요.

그게 발을 씻기는 삶이 되고 다른 이들을 예수께로 중매하는 삶이 되는 거예요. 그런데 그 삶 속에서도 영광은 하느님만 챙겨갖는 거예요. 우리가 한건 아무것도 없게 되는 그 상태. 그게 진짜 전도고 진짜 신앙생활인 거예요. 다시말씀드립니다. 성도는 자기 자신을 개발하고 성숙시키고 발전시키고 업그레이드해서 하느님을 기쁘게 해드리는 자가 아니라, '저는 죄인 중의 죄인입니다 주여 저를 떠나소서'라는 통한의 고백을 하는 자로 낮아져야 하는 거예요.

하느님은 그 자를 안 떠나요. '하느님 나 잘했죠' 요 자를 떠납니다. 중요한건 그러한 삶이 우리의 열심과 노력과 실력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일하심에 의해서만 나온다는 거예요. 쉬운 말로 우리의 실력으로는 죽었다 깨어나도 할 수 없는 일이 내 안에 홀로 살아계신 우리 하느님의 일하심에 의해 밖으로 언뜻언뜻 드러나게 되는 거예요.

그래서 깨어 있는 자, 사람들을 주님께 중매하는 자, 땅끝까지 이르러 주님의 증인이 되는 자들의 발을 주님이 홀로 씻기는 거란 말입니다. 서로 같이 안 씻어 준다니깐요. 주님께서 발을 씻기신 자들 그 주님과의 올바른 관계성 속에서 계속해서 은혜를 받고 있는 자들에게서 그러한 하느님의 열심이 격발되는 거예요.

그래서 성숙한 모습이 보여지는 성도들이 있잖아요. 저를 비롯하여 몇 명 있잖아요. 세 명 정도 있잖아요. 우리 교회에 이름은 대지 않겠지만 그건 그 사람 안에 사유되어 있는게 아니라 그 사람 안에 있는 예수가 문득문득 드러나는 거란 말입니다.

 

조금만 인내심을 갖고 한번 보세요. 이렇게 성도는 예수님의 용서 안에서 자신의 존재가치와 의를 찾아야 하는 자들이지 나라는 존재를 중심에 두고 용서를 사유화한 형태로 자신을 이해해서는 안되는 거예요.

나를 중심으로 나의 역사가 마구마구 배태되고 출산이 되어서 내 둘레를 감싸죠. 나의 역사에요. 그죠? 나라는 존재가 있으면 나의 역사가 날 때부터 죽을 때까지 나의 역사가 나를 둘러싼다 말입니다. 요게 나의 역사에요. 요 나의 역사에 의해서 심판을 받으면 다 죽습니다.

백 개 착한 일 하나 천개 착한 일 하나 만개 착한 일 하나 그러다가 하나 어기면 다 어긴거다 그랬어요. 야고보서에 나오죠. 그런데 하나라도 안 어기고 완벽하게 하느님의 요구를 충족시킬 수 있는 인간은 없으니까. 요 나의 역사로 심판을 받게 되면 다 죽어요.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임하지 않은 자는 한 일로 갚음을 받아요. 그게 요한묵시록이에요. 너희들이 행한 대로 갚아 주리라’. 행한 대로 갚아 줘요. 그러면 다 죽어요. 그런데 성도는 나와 나를 둘러싸고 있는 내 역사 둘레로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 예수 그리스도의 삶이 덮여 버리는 거예요. 그게 덮으심의 은혜에요.

내 본질이 변하는게 아니라 내가 어떤 구조속으로 들어가는 거예요. 어떤 구조 하느님의 용서의 구조 속으로 내가 들어가는 거예요 이 몸 그대로. 그게 성전의 구조라 그랬어요.

성전은 항상 법궤 위 시은좌 속죄소 밑에 속죄소에서 죄가 속해지는데 속죄소 밑에 아론의 싹 난 지팡이, 십계명 돌판, 맛나 항아리 이게 뭐예요? 인간의 실패. 인간이 하나님에 대해 반항한 증거물들이잖아요. 요 인간의 죄인됨이 속죄소 밑에 그대로 있고, 그리고 그 위에 속죄소 위에 그 뚜껑에 예수님의 피가 확 뿌려지는 거죠.

점도 흠도 없는 제물. 그건 뭐냐면 하느님은 인간들의 죄를 보는게 아니라 그 위에 뿌려진 예수님의 피만 보겠다는 거예요. 그 말은 밑에 있는 인간들의 행위는 안 보겠다는 뜻이에요. 투명한 피 없잖아요. 피가 뿌려지면 안에 있는게 안 보이게 되어 있어요. 나는 너희들의 피만 볼거야가 성전의 구조에요. 그게 하느님 나라에 구조란 말입니다.

 

하느님은 항상 용서하는 자리에 계시고, 인간은 항상 용서받는 자리에 있는 거예요. 피조물은 항상 피조물의 자리에서 하느님의 생명력과 바라크() 그 은혜를 받는자로 있어야 되고, 그리고 하느님은 항상 용서하시는 분 생명력을 쏟아 붓는 분. 복과 은혜를 쏟아 붓는 분으로 존재해야 돼요. 이게 하느님 나라예요. 요 상태가 싸바스 안식이라 그랬잖아요. 이게 안식이에요.

그래서 인간의 안식은 피조물의 자리에 내려가서 '아임 낫띵' 이게 안식이고, 하느님의 안식은 하느님 자리에 앉아서 피조물들로부터 하느님 대우를 받는 거예요. 그게 안식이에요. 싸바스에요. 이게 창세기 2장의 이야기란 말입니다.

자 이렇게 우리는 그 용서의 구조 하느님 나라의 구조 안으로 들어가서 거저 갚없이 구원받는 거예요. 우리가 그걸 알 때 우리 안에서 감사와 기쁨이 터져 나오지 않겠습니까? 그러니 그걸 아는 자로 자꾸 밀려 내려가게 되면 항상 기뻐할 수 있고, 범사에 감사할 수 있죠. 갈라디아서에서 이게 뭐라 그래요? 이게 너희를 향한 하느님의 뜻이라 그러잖아요.

하느님의 뜻은 인간들이 하느님께 늘 감사하고 그리고 하느님이 나에게 행하신 일 때문에 기뻐서 어쩔 줄을 모르는 그 상태로 하느님 나라를 완성하는 거. 이게 하느님의 뜻이란 말입니다.

그러면 그 자리로 내려가려면 우리 안에 있는 죄성과 죄인됨이 나에게 하느님에게 그리고 다른 이들에게 이게 드러나야 돼요. 밝히! 그리고 내가 수긍이 되어져야 되고 인정을 해야 돼요. 내가 그런데 그것들을 전부 근사하게 다 감추고 있다 말입니다.

지금 이 시대는요 감추어서 어떻게 하겠다는 거예요. 나는 너보다 나은 존재다 라는 것을 가치를 챙겨 갖겠다는 거죠. 그 영광 내가 챙겨갖겠다는 거 아닙니까? 아니라는 거예요. 내가 죄인 중의 죄인입니다 그 자리로 하느님은 나를 밀어 내리는 거라 말입니다.

하느님은 바로 그러한 찬송을 찬미 찬양을 받기 위해 우리를 창조한 거지, '너 깨끗하고 순결하고 내가 기뻐할만한 일들 많이 해서 제발 내 비유 좀 맞춰줘. 나 좀 기쁘게 해줘.' 이런 의도로 우리 창조하지 않았단 말입니다.

그런데 인본주의자들은 어떻게 성경을 곡해(曲解)하냐면 우리 인간은 그만큼 능력도 있고 가치가 있는 존재이기 때문에 하느님을 얼마든지 기쁘게 해드릴 수 있는 일을 할 수 있다고 믿고 있는 거예요. 그러니 그거 하자는 거죠. 자꾸요. 사도 바울로의 이야기에요.

 

(에페1,11-14) 11 모든 것을 뜻하신 대로 이루시는 하느님께서 당신의 계획을 따라 우리를 미리 정하시고 택하셔서 그리스도를 믿게 하셨습니다. 12 그러므로 맨 먼저 그리스도께 희망을 둔 우리는 하느님의 영광을 찬양할 수밖에 없습니다. 13 여러분도 그리스도를 통하여 여러분에게 구원을 가져다주는 복음 곧 진리의 말씀을 듣고 믿어서 하느님의 백성이 되었습니다. 14 성령께서는 우리가 받을 상속을 보증해 주시고 하느님의 백성인 우리에게 완전한 자유를 누리게 하여 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느님의 영광을 찬양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착하고 선한 일을 열심히 살아내어서 당신을 기쁘게 하려고 우리를 부르신 게 아니라, 하느님만이 우리의 존재의 기반이고 하느님만이 우리의 구원이시다 라는 철저한 자기절망과 자기부인 아래에서의 찬송을 듣고 싶으셔서 우리를 창조하신 거란 말입니다.

우리는 아무리 우리가 착한 일을 한다고 할지라도 그 속에 반드시 숨은 의도를 품고 있는 존재들이에요. 그 숨은 의도는 뭐냐하면 나의 영광과, 나의 만족과, 나의 인기. 그거 없이 착한 일이 되나 한번 해보세요. 그런데 하느님이 그런 교활한 의도가 숨어 있는 착한 일을 기뻐하시면서 찬양해 주겠습니까?

우리가 하는 선함과 착함이 뭐 그렇게 대단해요? 결국은 다 내 자랑으로 쌓이는 거 하느님은 그거 원하는 게 아니에요. 하느님 찬양 해달라는 거예요. 내가 너에게 무엇을 행했는지 그리고 너는 어떤 자리에서 어떤 자리로 옮겨 갔는지 그거 알아먹고 나의 영광을 좀 찬양하라는 거예요.

 

(이사43,7) 7 그들은 내 백성이라고 불리는 것들, 나의 영광을 빛내려고 창조한 내 백성, 내 손으로 빚어 만든 나의 백성이다.

 

하느님의 백성은 왜 창조됐어요? 하느님의 영광 찬양하라고요. 그런데 우리는 이 우주와 역사의 중심을 내가 차지하고 앉아서 하느님을 주변인으로 밀어버리는 거죠. 그분이 나를 위해 존재하는 겁니다. 그래서 선을 행하는 것도 주체가 나고, 칭찬받는 것도 나고, 영광 받는 것도 나여야 돼요. 그래서 구원받는 것도 나여야 되고 하느님은 그냥 계속 주변 인물로 나를 도와주는 분이야 그게 가짜 그리스도교입니다. 여러분 그게 진짜 무서운 거예요.

우리가 '하느님 도대체 저는 이런 존재인데 어떻게 하느님의 은혜가 나 같은 존재에게도 부어졌죠'라고 하느님을 찬송하게 될 때 거기에서 영광을 받으신다 그래요. 우리가 피조물의 자리로 내려앉아서 하느님의 위대하심을 오롯이 드러내는 바로 그 자리에서 영광을 받으신다 말이에요. 그러면 우리는 낮아지고 하느님만 높아지는 거죠.

그때 성도에게서 하느님의 속성인 낮아짐의 승리가 나오는 거잖아요. 이 세상의 삶의 원리 속에서는 높아져야 승리인데, 하느님 나라의 삶의 원리 속에서는 낮아져야 승리란 말이에요. 그런데 그러한 성도의 낮아짐 속에서 바로 낮아짐의 승리 하느님의 속성, 하느님 나라의 삶의 원리가 터져 나온다 말이에요. 하느님의 것이 가시적으로 드러난 상태를 헬라어로 '독사' 그게 영광이란 말이에요.

그러니까 하느님께 영광을 돌리는 건 골대에 한골 넣고서 '야 하느님께 영광' 이거 아니에요. 그건 자기에게 영광이에요. 그게 어떻게 하느님께 영광입니까? 골대에 골을 넣은 나를 좀 봐달라는 거죠. 하느님께 영광은 열 경기 다 나와 골대에 한 골도 못 넣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이 이런 나를 구원하시다니 이게 하느님께 영광이에요. 착각하지 마세요. 에페소서로 가면 우리가 하느님께 드려야 하는 찬미의 내용이 뭔가가 조금 더 구체적으로 나와 있어요. 한번 볼게요.

 

(에페1,3-6) 3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느님께 찬양을 드립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늘의 온갖 영적 축복을 우리에게 베풀어 주셨습니다. 4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게 하시려고 천지창조 이전에 이미 우리를 뽑아 주시고 당신의 사랑으로 우리를 거룩하고 흠없는 자가 되게 하셔서 당신 앞에 설 수 있게 하셨습니다. 5 하느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를 당신의 자녀로 삼으시기로 미리 정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하느님께서 뜻하시고 기뻐하시는 일이었습니다. 6 사랑하시는 아드님을 통하여 우리에게 거저 주신 이 영광스러운 은총에 대하여 우리는 하느님을 찬양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를 창세전에 예정하시고 선택하셔서 당신의 아들들이 되게 하신 것은 다 완료에요. 하신 것은 우리를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렇게 했대요. 그러면 우리는 거룩하지 않고 흠이 있는 존재다가 전제가 되는 거죠. 그걸 거룩하고 흠이 없게 만들려고 선택하고 예정했는데 그 방법이 사랑 안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게 계속 반복되어 나오고 있는 거예요.

우리의 열심과 노력으로가 아니에요. 하느님이 구원해 놓으면 우리가 거기에서 우리의 열심과 노력을 보태서 거룩하고 흠이 없는 자가 되는게 아니라 이미 아들들이 되게 하셨다 완료에서 출발하잖아요. 이미 거룩하고 흠이 없는 자가 된거죠 사랑 안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전부 시작부터 끝까지가 다 그리스도에요.

그리고 안에서라는 단어가 바로 우리는 구조 속에 들어가서 구원을 받는다라는 것을 보여주는 거예요. 그래서 바울로 서신에 보면 그리스도 안에서, 주안에서,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계속 나오는 거예요. 제일 많이 나오는 단어에요. 그리스도 안에서 에요. 그게 여김을 받는다라는 단어의 의미라니깐요.

그것을 사도 바로가이 은혜라고 하고 그 은혜는 거저 주는 바라고 이야기하죠. 거저 주는 것. 내가 거기다가 조금 보태면 거저 받는 거 아니잖아요. 거저라는 건 내가 아무것도 보태지 않았는데 그냥 우발적으로 나에게 잉여로 던져져 버리는 거예요. 고걸 깨달은 사람들이 '아 하느님 저는 저만을 위해서 사는 자가 아니군요' 하고 밑바닥으로 끌려 내러가는 거예요. 하느님에 의해 그의 삶 속에서 나만을 위한 삶이 아닌 삶이 나오는 거예요. 고걸 진짜 선이라고 하는 거예요.

 

그런데 그리로 끌려 내려가는 과정 속에서 우리는 수많은 시행착오와 범죄와 실수와 실패를 해요. 그래야 내가 하느님 앞에서 낫띵이라는게 진심으로 내 마음속에 각인이 되거든요. 그런데 전부 성자 흉내들을 내고 있으니까 사람들이 서로 교회에 와서도 쑈하는 거예요. 연극하는 거예요.

'너는 그 정도야 아이 나는 잘하고 있는데' 잘하긴 뭘 잘해요. 죽는 날까지 가야 하는 길이라니깐요. 여러분 그게 성경을 그냥 문자로만 보는 사람들의 오류예요. 성경은 문자로 쓰여 있지만 언어로 되어 있지만 문자 층에서만 이해해서는 안 되는 책이에요.

성경 이해의 구조들을 한번 보면 성경은 요렇게 위에 문자층이 있고 고 밑에 이 문자가 담고 있는 묵시 메시지가 담겨 있어요. 그런데 많은 이들이 이 문자로 성경을 보죠.

루소도 그렇고 간디도 그렇고 루소는 100번을 정독한 사람이죠 그리고 '나는 왜 그리스도인이 아닌가'라는 책을 썼으니까 문자로 본 거죠. 간디도 문자로 보고 그걸 지켰다 말입니다. 산상수훈을 간디가 지키며 살았어요. 아침에 일어나서 제일 먼저 한게 성경 읽은 거였어요. 간디는요 힌두교인인데 문자로 보는 거죠.

도올 김용옥 그분의 성경 강해서 한번 읽어 보세요. 성경을 얼마나 많이 읽었는지 여기저기서 그가 끄집어내는 성경 구절들이 가히 놀라워요. 그분의 책을 저는 아니다라는 걸 밝히기 위해서 가끔 읽는데 깜짝깜짝 놀라요. 천재입니다. 그런데 성경을 문자로 밖에 못 봐요.

하느님의 백성은 이 문자 층에서 그 밑에 담겨 있는 메시지 묵시 속으로 뚫고 내려와요.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 문자 밑에 문자 성경은 창세기부터 묵시록까지 태초에 하느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이거 다 다른 문자잖아요. ‘주 예수여 오소서.’ 다 다른 문자인데 전부 나에 대해서 기록되어 있다 그래요. 예수에 대해서 기록되어 있다 그러죠. 성경이...

그러니까 문자 층에서 그 밑으로 뚫고 내려간 사람들은 그 문자를 통하여 예수를 읽어 낸다 말입니다. 그런데 그냥 문자 위에서 머물러서 그걸 문자로만 해석하는 사람들은 이거 하면 복받고, 이거 하면은 저주 받고, 이거 하면은 잘 살고 이거 하면 못살고 이런 그냥 법으로만 읽게 된다 말이에요.

성경이 전부 그 얘기하잖아요. 특히 구약 이거 해 아니면 저주 받어 이거 하지 마 하면 내가 상줄께이런 거잖아요. 다 문자로 읽으면 성경을 그냥 문자 층에서만 읽으면 성경은 다 법이 되어 버리는 거예요.

그렇게 성경을 법으로만 보는 사람들이 눈과 귀가 막혔다 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읽긴 읽어요 다 이해해 그리고 예수에 대해서 설명도 해요. 그런데 다 법이에요. 그게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예언자들을 보내시면서 왜 이스라엘에게 가서 그들의 눈과 귀를 막아라라고 말씀을 하셨겠어요? 눈과 귀를 열어라가 아니죠.

예언자들을 보내시면서 이스라엘의 눈과 귀를 막으래요. 그게 인간들은 세상의 힘의 원리 속에 있는 인간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들으면 그걸 문자 층으로만 해석하기 때문에 그것 자체가 눈과 귀가 막힌거다라고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그게 눈과 귀를 막아라에요.

하느님의 계시를 문자로만 알아듣는 자들은 다 죽여버리겠다는 거예요. 하느님의 말씀 속에서 하느님의 은혜와 사랑 예수와 십자가를 듣지 못하고 안 지키면 죽인다라는 표독스러운 폭군의 음성을 듣는 자들은 하느님의 은혜 밖에 있는 자들이라는 것을 드러내시고 그들은 반드시 지옥에 쳐넣어 버리겠다라는 하느님의 의지의 표명인 것입니다.

하느님은 전 역사를 아우르시면서 하느님의 말씀으로 당신을 택한 백성들과 유기된 백성들을 구별해 내세요. 그냥 밖에서 예수 안 믿는 사람 이런 사람들 말고. 그 사람들은 아예 생각도 마세요. 그냥 안 믿는 사람들이니까... 그런데 어디서 구별이 일어나냐면 교회 안에서 구별이 일어나게 되는데, 하느님의 말씀이 던져지면 이걸 법으로 받아들여서 '그래 하자' 이들이 귀가 눈과 막힌 자로 분류가 되는 거예요.

그런데 거기에서 '하느님 저는 죄인이로소이다 저를 떠나소서' 이들이 눈과 귀가 열린 거예요. ? 거기에서 비로소 예수가 드러날 수 있거든요. 그들에게는 예수만 필요하잖아요. 성당(예배당) 안에서 그렇게 갈린다 말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아담이 하느님의 말씀을 그냥 문자적인 법으로 생각했을 때 '선악과 먹지 말아라' 이게 법이 잖아요. 율법이 던져진 거죠. 그걸 그냥 문자로 법으로 생각했을 때 아담이 하느님을 떠납니다. 법이니까. 그러니 지옥은 하느님이 보내시는게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을 문자로 해석하는 이들이 알아서 스스로 가는 데에요. 면목없어서 절대 하느님과 함께 못한다니깐요. 그들은요.

여러분 선악과를 먹지 말라는 하느님의 명령은 먹으면 죽이겠다에 초점이 있던게 아니라, 비록 너희는 내 명령을 지킬 수 없다 할지라도 나의 용서와 은혜가 너희에게 임하여 너희가 살게 될 것이다. 그게 바로 거저 주어지는 생명나무란다. 이게 바로 선악과와 생명나무가 담고 있는 메시지였어요. 그리고 그렇게 됐잖아요.

아담과 하와는 선악과를 먹을 수밖에 없는 존재였는데 하느님이 거저 덮어줘 버렸잖아요. 거저 덮으심으로 말미암아 혼인잔치가 이뤄진거죠. 고게 선악과와 생명나무가 담고 있는 메시지였어요.

그런데 이걸 법으로 해석을 하면 먹지 말아라 하는 것을 문자로 그냥 법으로 해석하면 '어이구 나는 어겼으니까 하느님 못보겠네요. 부끄러워서 숨었나이다' 하고 하느님을 떠나는 거예요. 스스로 법으로 생각하면 그렇게 되는 거예요.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에게 구약성경을 주었어요. 구약성경 그걸 성경은 율법이라고도 이야기하고, 성경이라고도 이야기하고, 말씀이라고도 이야기해요.

구약성경을 주셨어요. 율법을 주셨어요. 그 속에는 수많은 하라, 하지말라라는 명령이 가득 들어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지키지 않을 때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는 무서운 경고가 항상 따라 붙어요.

그러나 율법과 제사가, 구약성경이 인간에게 지키라고 주어졌던 겁니까? 바울로의 서신서에 '그것 지키라고 준거 아니야. 그거 지킬라고 할 때 너희들은 반드시 죽어' 이게 사도 바울로의 중심 메시지죠. 지키라고 준거 아니야 그랬어요. 그럼 왜 준거에요? 그게 선악과와 생명나무에요. 율법이 선악과죠.

지켜, 안지키면 죽여 그랬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못 지켜요. 모든 인간은 못지켜요. 그때 어떻게 하겠다는 거예요? 예수 그리스도가 제물로 드려져서 너희들의 모든 죄를 다 짊어지고 대신 제사를 지냄으로 말미암아 너희들은 살아나게 된다.

이 생명나무 열매는 그렇게 거저 먹혀지는 거야. 이게 율법과 제사잖아요. 이게 선악과와 생명나무죠. 그런데 이스라엘이 율법과 제사, 구약성경을 문자로 받아드렸죠. 문자로 받아들여서 그걸 지키려고 했을 때 주님이 하도 답답해서 육신의 몸을 입고 내려왔어요.

'얘들아 그거 내가 지키라고 준거 아니잖아. 율법과 제사 너희들 지금 잘지킨다고 나한테까지 자랑하고 있는데 그거 지키라고 준거 아니잖아. 그거 통해서 나에게 오라고 준거잖아. 예수를 믿어라. 회개하라'라고 율법과 제사 구약성경을 주신 그분이 가르치러 내려왔더니 그걸 가르치는 도중에 때려 죽이더라니깐요.

'나 잘 지키고 있는데 니가 왜 초쳐' 이게 인본주의라는 거예요. 이게 유대주의라는 거예요. 성경을 문자로 보게 되면 반드시 그런 일이 일어나게 되어 있어요.

 

진짜 두려워해야 할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십자가가 빠진 개혁주의의 성화론입니다. 여러분 교회에서 이렇게 삽시다. 저렇게 삽시다. 깨끗하게 삽시다. 거룩하고 순결하고 깨끗한 삶을 하느님께 올려 드립시다. 울먹이며 그 설교 와중에 예수님의 십자가와 보혈의 피 예수님의 은혜에 대한 설교를 몇 편이나 들어보셨어요?

깨끗하게 삽시다. 건전하게 삽시다. 착한 일 많이 합시다. 거룩한 삶을 삽시다. 그 설교 와중에 예수님의 십자가의 의미와 우리의 죄인됨과 티끌됨 은혜 보혈에 대한 설교를 진지한 설교를 몇 편이나 들어보셨어요?

그러면 지금 십자가가 빠져 버린 거룩한 성화론이 된 것인데 성경이 그게 마귀다. 그랬잖아요. 예수님이 바리새인들에게 율법 열심히 지켰던 그 착한 바리새인들에게 예수님도 인정했던 착한 사람들이잖아요. 예수님이 바리새인보다 착한 사람 있으면 나와보라그랬잖아요. '바리새인의 보다 더 낫지 못하면 너희들 천국 못 가' 이게 이 세상에서 지금 가장 착한 자들 성화의 절정 최고봉이 바리새인이라는 뜻이에요.

그런데 예수님이 바리새인 보고 뭐라 그랬어요? '니 아비는 마귀다' 그랬죠. 마귀란 뜻이에요. 바리새인이 예수님보고 뭐라 그랬어요? '너 바알세불이다' 그랬어요. 그럼 둘다 지금 서로를 가리켜 마귀다 그랬는데 누가 마귀에요? 예수님은 마귀 아니잖아요. 바리새인 마귀입니다.

마귀새끼들이 십자가 앞에서 뭐라 그랬어요? '예수님 내려와 보세요' 그랬어요. 예수님 내려오면 그 십자가는 어떤 십자가? 빈 십자가. 그럼 그 빈 십자가의 여백에 나의 행위를 채우겠다는 것입니다. 이게 마귀새끼예요. 그런데 십자가가 빠져버린 예수의 죽음 보혈이 빠져버린 그 십자가 가짜 십자가. 이게 오늘날 개혁주의 성화론이 되어 버렸단 말입니다. 은혜에 대한 충분한 설명과 이해도 없이 착하게 잘삽시다. 건강하고 건전하게 삽시다. 이게 건강한 그리스도교가 되어 버렸다니깐요. 그들이 예수님 죽였단 말입니다. 잊지 마세요. 그들이 예수님 죽였단 말입니다.

 

여러분 구약의 열두지파 이스라엘이 오늘날 영적 이스라엘 교회 존재들을 모형화하고 있었던 거예요. 그들에게 똑같이 성경이 주어졌습니다. 그 성경을 바리새인들처럼 문자적으로 보는 사람들이 그 성경을 법으로 봅니다. 그 안에서 어떻게 해야 내가 가치있는 존재가 되고, 어떻게 해야 내가 훌륭한 사람이 될까를 찾아내기 시작해요. 그런데 그들은 반드시 예수님이 다시 오시면 예수님의 손과 발에 못 박을 자들입니다.

성경을 법으로, 문자로 보게 되면 성경은 여러분에게 자유를 주는 책이 아니라 짐을 얹는 책이 되고 말아요.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예수께로 나가는 거지, 우리의 열심과 노력을 발휘해서 하느님도 감동하실 결과물을 만들어 내는게 아닙니다. 그게 성경에 의해 오히려 눈과 귀가 막히게 된 불쌍한 사람들인 거예요.

예언자들이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면서 안지키면 저주받는다고 했을 때 '그래 지켜야지' 하고 나선 사람들이 눈과 귀가 막힌 사람들이었다 라는 거 절대 잊지 마세요. 그들이 예수님 죽였단 말입니다. 구약의 예언자들을 그렇게 존경했던 이스라엘이 예수님 죽였단 말입니다.

성령받지 못한 자들이 왜 성경을 법으로만 보게 되냐하면 인간의 언어라는거 자체가 법 그 옳고 그름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그래요. 인간의 언어 자체가 옳고 그름 그 법을 이미 내포하고 있어요.

 

예를 들어 볼까요. 가끔 남자화장실에 이런 글귀가 붙어 있죠. '남자가 흘리지 말아야 할 것은 눈물만이 아니다' 무슨 말이에요? 소변기 앞에 이런 글귀가 붙어 있다는건 '너 절대 바닥에 흘리면 안돼' 라는 법이 그속에 들어가 있는 거죠. 그리고 그 안에는 흘리면 악이요 안흘리는 게 선이다 라는 판단이 이미 들어가 있어요. 더 가까이 오는게 선. 안 가까이 와서 흘리는 놈 악. 인간의 언어 안에는 판단이 들어가 있단 말입니다.

모든 인간의 언어 안에 인간의 옳고 그름이 다 들어가 있어요. 그런데 그렇게 그게 판단이 되기 위해서는 인간들의 그 사회적 합의가 필요하죠. 나만 나혼자 우기면 안돼요. 온 세상이 전부 멀리 떨어져서 흘리는게 선 그러는데 나혼자 가까이 서서 안흘리는게 선 이러면 안되잖아요. 사회적 합의가 필요하죠. 그 법에는... 사회적 합의가 필요해요.

인간들이 역사를 통하여 합의해 놓은 것에 의해서 어떤 행위가 선으로 판단이 되기도 하고, 어떤 행위가 악으로 규정이 되기도 하는데 그런데 그러한 인간들의 사회적 합의의 그 배경에는 어떤 것을 우리가 합의하기 위해서는 그걸 합의하기 위한 개별적 행위들이 있어야 되잖아요.

인간들의 행위 관습 패턴 이게 있어야 되잖아요. 그 행위 관습 패턴의 대다수의 합의를 얻어내어 법이 되고, 그 법이 언어에 담기는 거란 말입니다. 그런데 이 인간의 행위와 관습과 패턴은 어디서 나와요? 욕망하는 인간의 마음에서 나와요. 선악과를 따먹고 하느님처럼 되겠다라는 모든 죄인들의 그 마음. 느님은 이 세상에서 가장 뎌러운 게 인간의 마음이다 그랬어요.

하느님처럼 되겠다라고 하는 인간의 욕망하는 인간의 마음에서 나오는게 인간의 행위에요. 관습이고 패턴이에요. 나만을 위해서 사는 인간들의 행위에는 패턴이 생긴다 말입니다. 관습이 생기고, 그 행위가 이제 다들 나만을 위해서, 하느님처럼 되고 싶어하는 자들만 모여 있으니까...

이 세상에는 의인은 없으니하나도 없으니까 그게 자동적으로 합의가 되겠죠. 인간의 가치와 위상을 높이는 쪽으로 합의가 될거 아니에요. 그 합의가 이제 법이 되는 거예요. 인간들이 이건 옳은 거고, 요건 그른 거야. ? 우리는 하느님처럼 된 존재니까.

이정도 자존심은 지켜주자. 길거리에 쓰레기 버리지 마. 살인하지 마. 도둑질 하지 마. 자 요런 거 우리가 이걸 함으로써 얼마나 인간이 가치있어지고 뽀다구가 나니.’ 자 그게 행위와 관습과 패턴으로 굳어지죠. 고걸 법으로 만드는 거예요.

 

그러니까 인간의 법은 우리의 행위를 올바르게 하기 위해 만들어 지는게 아니라 인간 행위에 하느님 처럼 되겠다는 인간 행위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법이 도출이 되는 거예요. 이게 인간의 사악함이라니깐요. 인간은 올바른 행위를 하기 위해 법을 만드는게 아니라 하느님처럼 되고자 하는 그 인간의 행위의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법을 만들어 내요. 그리고는 이거 하는 놈 잘난 놈, 못하는 놈 나쁜 놈. 이렇게 되는 거예요. 그 법이 언어에 다 들어가 있다니깐요. 인간의 그 옳고 그름의 판단이... 그러니 성경을 언어로 문자로만 보는 사람들은 그 성경 안에서 뭘 끄집어 내겠어요? 인간행위의 정당성. 인간의 가치. 인간의 가능성. 이런 것만 끄집어 내는 거예요. 그래서 그 안에서 존경할 사람도 찾아내고, 그 안에서 착한 일 많이 한 사람도 찾아내고, 본받자 이렇게 되는 거예요.

누굴 본 받아요? 어떤 사람 본 받을 거예요? 여러분 얘기좀 해주세요. 그게 어떤 사람인지 제가 확실히 다 설명해 드릴게요. 그 사람 본받으면 진짜 하느님 앞에서 칭찬받는 사람 될 수 있는 거예요? 누굴 본받겠다는 것입니까? 어떤 롤모델이 필요하세요? 여러분 그게 성경을 문자로 보는 사람들이에요. 인간의 인식이라는건 한계성이 있어요. 시간적 한계성. 공간적 한계성 안에 인간의 인식은 갇혀 있어요.

여러분 간디가 여섯살 생일날 뭐했는지 아세요? 모르죠? 이게 시간적 한계성이죠. 인간의 인식의 한계거든요. 네팔에 사는 아홉살짜리 더만이라는 애. 지금 뭐하는지 아세요? 지금 뭐합니까? 걔가 공간적 한계성입니다. 그죠? 인간 인식은 겨우 이정도에요.

시간적 공간적 한계성을 갖고 있는 이 인식 안에서 우리가 하느님의 묵시를 해석하겠다는 것입니까? 천지 만물을 주관하시는 그분이 창조 때부터 끝날 까지 기록해 놓은 그 시간과 공간을 넘나들며 우리에게 뭔가를 던지고 있는 그 성경을 우리의 이 인식으로 이 이성으로 이해를 하겠다는 거예요?

어떻게 성경이 문자로 이해가 가능합니까? 불가능하다 말입니다. 묵시는 인간에게 이 제한된 이 인식의 한계를 갖고 있는 인간에게 포착되거나 이해되어질 수 있는게 아니에요. 묵시가 인간을 해석하는 거라니깐요 죄인으로. 자 이렇게 인식의 한계를 갖고 있는 우리가 그 성경 안에서 어떻게 예수를 찾아낼 수 있어요? 성령의 도우심이 아니면 안 된단 말입니다.

 

그런데 그 성령의 도우심에 의해 성경이 뭐로 쪼개지냐하면 , , 審判. 이 세개로 쪼개진다 그랬어요.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너희들에게 가르치리라 그랬잖아요. 성령이 오셔서. 성령은 그렇게 우리의 죄가 무엇이며, 그들이 어떻게 의롭게 되는 것이며, 그렇게 의에 도달하지 못했을때 인간은 어떤 심판을 받게 되는가? 이거 밖에 없는 거죠. 그런데 그 안에서 뭘 하면 복 받고, 뭘 안 하면 저주받고 이게 뭐냐 말이에요. 도대체가.

왜 성경을 초등학교 도덕책 수준으로 끌어 내리냐 말이에요. 성경은 전체가 예수에 관해서만 기록되어 있어요. 십자가에 대해서만 기록되어 있어요. 그런데 모든 인간들이 눈과 귀가 막혀서 예수와 십자가를 이야기하면 화를 내죠. ? 그 속에 왜 나는 없냐는 거죠. 인간은 이렇게 끝까지 나를 챙겨요. '왜 그 속에 나는 없어?'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렇게 원래 하느님의 구속사의 과정 가운데 인간이 비집고 들어갈 틈은 없어요. 처음부터 끝까지 하느님의 작품이에요. 그래서 주님은 이 세상에 남아있는 당신의 백성들에게 이렇게 기도를 가르쳐 주시는 거예요.

 

(마태6,12-13) 12 우리가 우리에게 잘못한 이를 용서하듯이 우리의 잘못을 용서하시고 13 우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악에서 구하소서. (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영원토록 아버지의 것입니다. 아멘. )

 

여러분이 잘 아시는 주님의 기도문입니다. 주님의기도문은 信者가 하는 기도입니다. 그런데 신자는 이미 죄를 다 용서받은 사람 아닙니까? 그렇죠 조금 남았어요? 다 용서 받았죠. 런데 왜 이런 기도를 하라 그러실까요?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용서하여 준 것같이 우리의 죄를 용서하여 주시고이거 신자가 해야 할 기도에요? 이거 불신자가 하는 기도 아니에요? 이거...

그리고 우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악에서 구하소서. 우리 유혹에서 이미 건져진거지고, 악에서 건져졌잖아요. 그런데 왜 예수님이 신자들에게 이 기도를 하라 그래요? 우리 하루에도 열두번 이상 할 때 있어요. 이 기도. 시작할 때 하고, 끝날 때 하고 무슨 뜻인지 알고나 하는지 모르겠는데 하여튼 왜 신자에게 이런 기도를 하라 그래요?

헬라어에는 부정 과거 시제라는게 있어요. 에오리스트 그 부정과거 시제가 임페러티브 명령형으로 쓰여 버리면 이게 과거 현재 미래의 시제를 다 아우르게 돼요. 그러니 나라가 오시며이렇게 기도를 하면 하느님 나라는 이미 오셨고 과거, 오사고 있고, 오실 것입니다 라는 세 시제가 다 들어가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주의기도문 안에는 이 세 시제가 다 들어가 있어요. 그러면 우리의 죄를 용서하여 주시고라고 기도를 할 때 그 안에는 어떤 의미가 들어있을까요? 우리의 죄는 이미 다 (용서)해졌고, 해지고 있고, 완전히 다 해질 것입니다 라는 의미가 들어있어요. 그러면 다 (용서)해진거면 해진거지 지금 해지고 있다는건 뭐예요?

그 말은 성도가 이 기도를 해야 된다라는 것은 우리의 죄가 어떻게 용서해 졌는지 예수님이 어떻게 우리의 발을 씻어서 우리의 죄를 용서하셨는지를 우리의 인생 속에서 계속해서 우리가 용서 받아야 할 자로 폭로되면서 경험한다는 뜻이에요.

 

이미 죄는 다 용서()해졌어요. 그거는 변개되어질 수 없어요. 그러나 현실 속에서 우리는 그 하느님 나라의 구조 속에서 용서 받아야 할 자의 자리에 들어가서 법궤 안으로 들어가서 속죄소 위에서 일어나는 일을 찬양하는 자로 그 삶을 경험하게 된다는 뜻이에요.

그래서 에오리스트 임페러티브가 같이 붙어있는 시제가 주의기도문에 등장하는 거죠. '나는 하느님에게 용서 받아야 할 존재입니다. 하느님이 나 용서 안 해주면 난 큰일 날 존재입니다.' 이게 우리의 죄를 용서하여 주시고예요.

그런데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자를 용서하여 준거같이 우리의 죄를 용서하여 주시고 우리가 언제 누구를 용서해 줬어요? 그것처럼 용서해주면 하느님은 지금도 우리를 벼르고 계셔야 되죠. 우리가 누구를 완전하게 용서할 수 있어요? 안되잖아요.

그런데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용서하여 준 것 같이 고렇게 용서해주세요. 그러면 우리의 수준으로 용서해 달란 말이에요? 그러면 우린 다 죽어요. 언제 또 삐져가지고 우리를 해꼬지 할지 모르니까... 그러면 그게 무슨 말이에요? 예수님이 지금 이 기도문을 던졌을 때는 구약시대입니다. 예수님이 아직 십자가 지기 전이니까...

구약시대에는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용서해 주면 율법을 어기는 거예요. 살인한 자는 돌로 때려 죽여라 그랬는데 내가 용서해주면 율법 어기는 거예요. 이 사람이 죽어야 돼요.

그런데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용서하여 줄 수 있는 시대가 예수님이 오시므로 말미암아 용서의 시대가 왔다니깐요. 율법이 깨지고 이제 나에게 어떤 죄를 진 자를 벌하지 않고 용서해 줄 수 있는 시대가 왔단 말이에요. 그게 신약시대에요.

그렇게 상대방이 한 행위에 의해서 내가 벌을 주고 상을 주고 하지 않을 수 있는 그런 시대. 그렇게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용서하여 줄 수 있는 그런 시대에 적용된 그 방법으로 하느님이 나를 용서해주셨군요. 이거에요.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는 반드시 때려 죽여야 되는데 신약시대가 옴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용서해 줄 수 있는 시대가 되었네요. 아 하느님은 나의 행위를 근거로 하여 벌하지 않는 그 방법으로 나를 용서해 주셨군요. 감사합니다.' 이게 완료된 용서고, 요 용서의 현실이 우리의 삶 속에서 계속 경험되어져 가는 거예요.

그래서 에오리스트 부정과거와 임페러티브 명령형이 같이 붙어서 나오는 거죠. 우리의 인생 속에서 복음이 십자가가 실제화 되어 재현 된다는 뜻입니다.

 

여러분은 예수를 믿고 사는 신앙생활 속에서도 '하느님 저는 오늘도 하느님이 지옥 보내시면 아무 할 말 없이 그것으로 가야 하는 죄인일 뿐이군요' 이 자리로 내려가야 되는 거예요. '하느님 나 이만하면 잘했죠?' 어디서 이런 말이 나옵니까? 그 안에 숨어 있는 의도까지 낱낱이 하느님께 다 드릴 수 있나 한번 생각해 보세요. 그래도 하느님이 기뻐하실까 한번 생각해 보란 말입니다.

성도는 이 세상에서 티끌의 자리로 계속 내려가는 거예요. 그리고 그 티끌 위로 덮인 하느님의 은혜가 얼마나 엄청난 것인지를 그냥 찬송해 버리는 거예요. 그리고 기뻐하고 감사하면 돼요. 그게 너희를 향하신 하느님의 뜻이니라. 다른게 뭐가 있어요?

자 그러한 용서의 기도 바로 뒤에 시험에 들지 말게 하시고가 있어요. 그러면 우리가 수시로 빠지는 유혹이 뭐예요? 하느님이 다 용서해 주셨다 그래서 우리는 이제 감사하고 기뻐하면 된다 이게 아니라, 그래도 조금 뭐 보태야지 요게 시험(유혹)이란 말입니다. 그래서 용서의 청원 다음에 유혹(시험)이 붙어 있는 거예요.

하느님은 우리를 그 유혹에도 이미 다 건졌어요. 그러나 우리는 계속해서 실패하죠. ? 나의 가치를 챙겨야 되거든요. '내가 무슨 병신이야 왜 아무것도 안 해야돼?' 아무것도 하지 말란 말 아니에요. 열심히 뭔가 해야 돼요.

'왜 나는 이렇게 손발 묶인 자처럼 이렇게 구원에 있어서 무용지물이 되야 돼' 기분 나쁘잖아요. 그러니까 자꾸 뭔가를 챙기려고 한다구요. 만족과 인기와 평판을 챙기려는 시도들을 하는데 그게 유혹(시험)이에요.

그리고 그 유혹에 빠져 있는 상태를 악이라고 해요. 그게 죄잖아요. 하느님 절대 의존적 존재가 하느님 이외의 다른 것에 마음을 두고 사는게 죄니까... 그게 악이란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용서해 준 것같이 우리의 죄를 용서하여 주시고, 유혹에 들게 하지 마시고, 악에서 구하소서. 요게 명령형 부정과거가 붙어 있는 시제로 우리에게 주어지는 거예요. 니네 삶 속에서 그게 계속해서 일어난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그 유혹(시험)은 지금 하느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거예요? 그 시험을 통하여 하느님이 우리를 어떻게 만들려고 하시는 것일까요? 전도서에 나옵니다. 한번 가볼까요.

 

(전도3,18) 18 사람이란 본디가 짐승과 조금도 다를 것이 없다는 것을 하느님께서 밝히 보여 주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니까 우리가 이 인생의 유혹(시험)들을 통과하면서 '아 나는 왜 이렇게 하느님의 전적인 용서를 왜 이렇게 감사함으로 다 받아들이지 못하지? 왜 나는 이렇게 끊임없이 인본주의로 복음을 이해 할려고 하지? 왜 인간의 가능성을 이렇게 놓치 못하지? 아 난 참 정말 짐승이구나' 요게 자기부인이죠.

고렇게 나는 짐승이구나 티끌이구나 낫띵이구나 죽은 흙이구나 요걸 인식하는 자리. 그리고 그 죽은 흙을 덮은 하느님의 은헤는 이렇게 큰거구나. 요거를 이해할 수 있는 자리. 그리고 감사와 찬양을 터트려 버리는 고 자리로 우리를 밀고 내려가는 거죠. 그게 우리의 삶 속에 전 영역에 걸쳐서 우리에게 부어지는 유혹, 시험이에요.

우리는 어디로 내려가는 거예요. 그래서 짐승으로 내려가는 거예요. 고지 꼭대기에 올라 앉는 게 아니라 굉장히 훌륭하고 멋진 사람으로 변화되어지는게 아니라 짐승의 자리로 내려가는 거라니깐요. 그러니 이 중에 나는 짐승이에요. 하느님 앞에서 내가 무슨 뭘 한다 그래요. 제가 하는 행위는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 속에 들어있어서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로 편입되어져서 내가 선한 자가 되는 거지. 예수의역사가 이걸 확 벗겨 버리면 내 행위는 전부 악입니다. 그러니 나는 짐승입니다.

이고백을 진심에서 우러나와서 하는 이들이 몇 명이나 있냐구요. 한번 발을 들어 보세요. 허허허 손 들으라고 그러면 또 누가 번쩍 들까봐... 진짜 진심으로 그 고백을 하는 사람 있어요? 죽는 날까지 가는 길이란 말입니다. 우리는 그거 하다가 가면 돼요.

그리고 나중에 완전히 두손 바짝 들고 '하느님 제 안에서는 죄만 쏟아져 나오네요' 그렇지 않아요? 죄가 뭐예요? 하느님 절대적으로 의존하지 않고 그분께 완전히 나를 의뢰하지 않고 내가 다른 것에서 어떤 가능성을 찾는게 죄, 그리고 하느님을 위해서가 아닌 나를 위해서 사는거 그게 죄잖아요. 하느나님처럼 되겠다 그런데 우리는 죽는 날까지 나를 위한 선택만 한다 말입니다. 언제 우리가 하느님을 위한 선택을 해요? 아니잖아요. 우리 거짓말 하지 말자구요. 죽는 날까지 나를 위한 선택만 하잖아요. 그러니까 짐승이지 뭐예요. 그게.

 

그런데 하느님이 그 자리로 일부러 밀어 내리신다니깐요. 넌 짐승이야. 그러면 어떡하죠? 그러니 십자가 붙들어 니 안에선 죄밖에 안나오잖아.’ 아 왜 죄인이에요 제가? 이렇게 착한 일 많이 하는데... 아니 내가 몇번이나 얘기해야 알어? 천개 만개 착한 일 하다가 하나 어기면 다 어긴거라 그랬잖아. 무슨 테트리스도 아니고 그냥 맞춰지면 없어지고 맞춰지면 없어지고 우린 하나 어기면 또 다시 원점으로 내려가는 거라니깐요.

그러면 다 내려갔다가 그냥 몇개 이렇게 딱 지켰을 때 그냥 확 죽어 버려야 돼요. 아니 어기기 전에 확 죽어버리자 됩니까? 그게 안 되잖아요. 그러니까 우린 죽는 날까지 그냥 죄인이라고 생각하시면 돼요.

그런데 그걸 용서하시는 어떤 존재가 있다는걸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거예요. 그런데 그게 믿어져 어떻게 된게. 아니 여기 박사들도 많고 변호사들도 많고 의사들도 많고 이거 법대 졸업생 뭐 형사 별사람 다 있는데 아니 어떻게 그걸 다 믿고 여길 앉아 있냐구요. 그 똑똑한 분들이 그 바보같은 이야기를 어떻게 믿고 앉아 계시냐구요. 여기에... 여러분 안에 성령이 있는 거예요. 우리는 구원받아도 우리의 본질이 변하는 거 아니에요.

로마서 1장에 죄인들 안에서 쏟아져 나오는 많은 것들이 있죠. 뭐 악독, 분냄, 시기, 질투 본질이 변한 거라면 구원받은 자의 본질이 변한거라면 그게 다시는 나와선 안되죠? 본질이 변했으니까... 그런데 안 나옵니까? 어떨 땐 더 나오죠? 그러면 본질은 변한 건 아니에요.

그런데 본질이 안변했는데 어떻게 우리의 구원을 완료로 표현할 수 있죠? 하느님과의 관계성이라니깐요. 여겨주시는 거예요. 내 안에 계신 성령이 나를 산 자로 만드는 거예요. 나는 살았어요. 맞아요. 죄와 허물로 죽었다가 살았어요. 그런데 어떻게 산 존재가 되었냐 하면 하느님에 의해 산 존재가 된 거예요. 내가 산게 아니에요. 갈라디아서 220절 내 안에 계신 하느님이 사시는 거예요.

여러분 생각해 보세요. 탕자의 이야기 한번 떠올려 보세요. 탕자 그 나쁜놈 아버지가 살아있는데 유산 달라는건 고대시대 땐 아버지 빨리 죽어요 이런 거였거든요. 빨리 죽어줘요 제발 이런 말과 똑같은 거였어요. 그들은 동네사람들이 아버지의 허락 안 받고 돌로 때려 죽일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아버지가 사람들한테 안알리고 그냥 줬어요. 아버지는 이 아이가 이 돈 갖고 나가면 어떻게 살다가 어떻게 돌아올지를 뻔히 알고 계셨어요. 그가 가서 창녀들하고 돈 다 탕진하고 창녀들하고요. 그리고 돼지우리 속에 들어가서 돼지들 하고 쥐엄열매 다툼을 하는 처지가 됐네요. 그리고는 먹을게 없으니까 아버지께 엉금엉금 기어왔어요. 아버지가요 그걸 아는 아버지가 자식이 그걸 경험하는게 나쁜거라고 생각했으면 돌로 패서라도 보내지 말았어야죠. 그런데 아버지가 돈 줘서 보냈다니깐요.

그리고 보내는 즉시 버선발로 문 앞에 나와서 기다렸어요. 그때부터... 뭐하라구요? 나가서 네 아버지가 얼마나 고마운 존재이고 니 아버지 집이 얼마나 행복한 곳이고 편안한 곳인지를 배우고 오라는 것입니다. 실제로 갔어요. 다 썼습니다. 이 세상의 힘을 사용하여 쾌락이란 쾌락을 다 경험해 봤어요.

그런데 결국 그가 추구했던 쾌락이 다 뭐였다는 거예요? 돼지우리 속에서 돼지들하고 쥐엄열매 다투는 거였다라는걸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거예요. 이 세상의 모든 인간들이 추구하는게 다 그거에요. 여러분이 지금 직장에서 경쟁하고 있는 그거 다 돼지들하고 경쟁하는 거예요. 그리고 거기서 얻어내려고 하는거 돼지 쥐엄 열매에요.

그리고 여러분들이 사는 곳은 다 돼지우리입니다. 그걸 아는냐구요? 그걸 알아먹고 아버지 한테 돌아오라고 아버지가 여기에 보냈는데, 돼지우리를 청소하고 앉아 있어. 돼지우리에다가 금 몇개 둘르고 가구사다가 설치하고 이러고 앉아 있다니깐요. 이 쥐엄열매는 어떻게 요리해먹어야 더 맛있을까? 뭐 이런것들 연구하고 있어요. 세상에서... 그거 아니니까 아버지한테 돌아오라고 보냈더니...

그런데 맏아들은 아버지의 말을 단 한번도 어긴적이 없는 사람이에요. 너무 착한 사람이죠. 밭에 나가서 일해라 그러면 일하고, 나가지 마 그러면 안나가고 그런데 그 맏아들이 그렇게 착하게 지켜낸 그 자기의행위를 자기의 의와 자랑으로 쌓고 있었죠.

그리고는 결국 그걸로 어떻게 하죠? 아버지를 탄핵한다 말입니다. 아버지 일 똑바로 하세요. 왜 아버지 재산 갖고 나가서 창녀와 먹어버린 저놈한테는 잔치를 벌여주고, 이렇게 착하게 산 나는 왜 이런 대우를 해주세요? 아버지 똑바로 하세요’. 아버지를 가르친다니깐요. 아버지를 탄핵해요. 그게 아버지의 은혜를 알지 못하고 깨끗하게 산 자들의 말로인 것입니다. 고게 바리새인인 거예요. 아버지 똑바로 하세요.

 

한번 보십시다. 오늘날 교회가 탕자를 양산하고 있습니까? 맏아들을 양산하고 있습니까? 맏아들 되자는 거죠. 전부. 예수님의 은혜와 십자가 보혈의 의미. 그리고 나라는 존재의 이 실체. 여기에 대해서는 너무 일천한 그런 이해밖에 없어요. 전부 내용이 뭐냐면 깨끗하게 삽시다, 건전하게 삽시다, 도덕과 윤리를 잘 지킵시다, 사회를 개혁합시다, 불쌍한 사람들을 열심히 도웁시다.’(미사 때 신자들의 기도문) 그렇게 해서 인간들이 그들의 행위를 한 다음에 그걸 자기의 것으로 땡겨서 자기의 자랑으로 끌어 당겨 사유하지 않을 수 있는 인간은 이 세상에 단 한사람도 없어요.

 

은혜를 알지 못하고 그런 행위를 한 이후에 '아 나 참 대견하다'라는 이런 자기만족과 자기 가치 챙기기, 자기 영광 챙기기로 안 들어 갈 수 있는 사람이 단 한사람도 없어요. 그 사람들이 어떻게 해요? 결국 하느님을 가르칩니다. 하느님을 탄핵해요. 촛불 들고 모여서 하느님 세상을 이렇게 놔두면 안 되잖아요. 와서 고쳐주세요.’ 하느님을 탄핵하는 것입니다. 그들이요. 당신 일을 왜 이 따위로 하냐는 거죠. 왜 세상이 이렇게 불공평하냐는 거예요. 왜 부자는 계속 부자로 살아야 되고, 왜 가난한 사람은 계속 가난하게 살아야 되냐는 거예요. 아버지는 그런 거 개의치 말고 너는 나한테만 오면 된다고 하는데... 지들이 세상을 바꿔서 다른 사람들을 다 살기 좋은 자리로 인도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시대의 개혁주의 교회가 하느님을 가르치고 있다니깐요. 다시한번 말씀드리지만 오늘날 교회가 두려워야 할 것은 신비주의 기복주의 번영신학 이런거 아니에요. 그런건 이미 물 건너 갔어요. 정말 조심해야 할건 十字架가 빠진 聖化에요.

 

(로마6,1-3) 1 그러면 '은총을 풍성히 받기 위하여 계속해서 죄를 짓자' 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2 절대로 그럴 수 없습니다. 우리가 이미 죽어서 죄의 권세에서 벗어난 이상 어떻게 그대로 죄를 지으며 살 수 있겠습니까? 3 세례를 받고 그리스도 예수와 하나가 된 우리는 이미 예수와 함께 죽었다는 것을 모르십니까?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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