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미사

우리들의 묵상/체험

제목 연중 제9주간 금요일
작성자조재형 쪽지 캡슐 작성일2021-06-03 조회수8,145 추천수10 반대(0)

시간이 되면 자전거를 타고 있습니다. 조금 익숙해져서 편하게 다니고 있습니다. 자전거 도로가 잘 되어있고, 20분만 가면 경치가 좋은 바닷가를 보면서 안전하게 자전거를 탈 수 있습니다. 자전거는 달릴 때는 균형을 잡기가 쉽습니다. 그러나 멈추면서 균형을 잡으려면 발을 땅에 내려놓아야 합니다. 집에 다 와서 긴장이 풀렸는지 실수해서 넘어지고 말았습니다. 집에 다 왔다는 안도감과 순간의 방심으로 균형을 잃어버렸습니다. 두 바퀴로 가는 자전거는 달리지 않으면 넘어지기 마련입니다. 외줄을 타는 곡예사도 줄을 건너면서 중심을 잡습니다. 줄 위에 서 있으면 중심을 잡기가 더 어렵습니다. 우리 신앙의 여정도 비슷합니다. 하느님 품에서 쉬기까지 우리는 신앙의 폐달을 밟아야 합니다. 아우구스티누스 성인은 그 여정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우리의 심장은 당신 가운데 쉼을 얻을 때까지 편하지 않습니다. 주여! 저에게 앎과 헤아림을 주소서!(고백록 11)”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더러운 영이 사람에게서 나가면, 쉴 데를 찾아 물 없는 곳을 돌아다니지만 찾지 못한다. 그때에 그는 내가 나온 집으로 돌아가야지.’ 하고 말한다. 그러고는 가서 그 집이 말끔히 치워지고 정돈되어 있는 것을 보게 된다. 그러면 다시 나와, 자기보다 더 악한 영 일곱을 데리고 그 집에 들어가 자리를 잡는다. 그리하여 그 사람의 끝이 처음보다 더 나빠진다.(루카 11, 24-26)” 체중 조절에 실패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예전보다 체중이 늘어나기도 합니다. 금연에 실패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예전보다 많이 피기도 합니다. ‘요요 현상, 금단 현상이 있기 때문입니다. 화려한 경력과 업적을 가진 사람들이 정상에서 넘어지는 경우를 봅니다. 영적으로 메말랐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내면을 돌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청중의 박수와 화려한 불빛은 무대의 조명이 꺼지면 어둠만 남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늘 깨어 있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율법학자와 바리사이파 사람은 가문, 혈통, 율법, 안식일, 계명이라는 에 갇혀있습니다. 그것은 진리를 가리키는 손가락일 뿐입니다. 그러나 그 손가락만 바라보면서 참된 진리를 외면하고 있습니다. 진리를 찾으려는 사람들까지도 손가락이라는 안에 가두어 두려고 합니다. 그들에게는 손가락이 권력이 되었고, 손가락이 기득권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진리 자체이신 예수님을 율법이라는 작은 틀에 맞추려고 합니다. 하느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을 다윗이라는 혈통에 맞추려고 합니다. 작년에는 흑인에게도 생명이 있다.’라는 말을 하였습니다. 흑인이라는 이유로 차별받고 고통 받는 일이 없어져야 한다고 말하였습니다. 올해는 아시안을 미워하지 말라.’는 말을 하고 있습니다. 아시안이라는 이유로 미워하는 일이 없어져야 한다고 이야기합니다. 이민자의 나라인 미국에서 이민자라는 이유로, 피부색이 다르다는 이유로 차별을 한다면 이 또한 기득권이라는 손가락에 갇혀있는 것입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토빗은 많은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자선을 베풀고, 가난한 사람을 도와주었지만 눈이 멀었습니다. 그러나 신앙의 여정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토빗은 하느님을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주님의 자비를 믿었고, 하느님을 찬양하였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런 토빗을 보시고 축복을 내려 주셨습니다. 헤어졌던 아들을 다시 만났고, 며느리도 얻었으며 잃어버렸던 시력도 되찾았습니다. 하느님을 찬미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율법학자들은 자신들의 눈앞에 계신 메시아를 알아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율법이라는 에 갇혀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마음을 열고 세상을 바라보면 찬미와 감사를 드릴 일들이 많습니다. 그런 중에 주님을 만날 수도 있습니다. 오늘 아침 하루를 시작하면서 마음을 열어 찬미와 감사를 드릴 일들을 찾아보시기 바랍니다. 꽃이 피어나서 좋은 것은 보는 이들에게 아름다움을 전하기 때문이고, 우리가 태어나서 좋은 것은 다른 이들에게 사랑을 전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새로운 기준을 제시합니다. 구약에서 이야기하는 다윗도, 구약의 권위도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삶보다 더 권위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아들이시고, 하느님과 직접 소통하시기 때문입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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