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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사제 피정을 다녀와서
작성자황인찬 쪽지 캡슐 작성일2000-09-02 조회수3,618 추천수32 반대(0) 신고

사제피정을 다녀와서

태풍이 불어서 재산 피해가 극심했다는 것도 모르는데 지난 5일간 피정을 다녀왔다. 교구 사제들이 사목일선에서 잠시 물러나 몸과 마음을 정리하며 하느님과의 사랑을 확인하는 연피정이었다. 교구장 주교님의 강력한 의지로 대침묵을 지키면서 피정을 시작하였다. 지난 여름 수많은 손님들을 맞이하느라고 몸과 마음이 지칠대로 지친 나는 오랜만에 마음껏 기도하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신학교를 떠난 다음 오랜만에 아침 기도부터 저녁 끝기도까지 정해진 시간에 성무일도를 바치며 두봉 주교님의 강의를 경청하는 은총의 피정이었다. 이번 피정을 통해서 어느새 하느님의 뜻보다는 내 뜻을 이루려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고 하느님의 능력에 힘입어서 사제생활을 하지 않고 내 힘으로 무엇을 해보겠다는 나의 사제생활을 정리할 수 있었다. 나는 하느님의 도구에 불과하다는 겸손한 마음을 깨우칠 수 있어서 더욱 감사하다. 지난 4년 6개월 동안 내가 받은 하느님의 축복과 은총에 다시 감사하면서 정말 하느님의 섭리에 모든 삶을 맡기겠다고 결심하면서 피정을 마쳤다. 사제피정을 위래서 기도해 주신 모든 교우님께 깊은 감사의 마음을 전해드린다.

 

이번 피정 중에 잊혀지지 않은 강론이 있어서 함께 나누고 싶다. 첫날 미사 주례를 맡으신 김태원 신부님은 "사제들은 길거리의 이정표와 같다"고 강론하였다. 사제들은 남들에게 어떻게 해야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길인지 가르쳐 주면서 자신들은 실제로 행하지 않는다는 비판이었다. 맞는 말이다. 세상에 가장 똑똑하다고 자만하는 사람들이 사제들이다. 모든 것을 다 알고 있고 다 할 수 있다는 자의식이 가장 강한 사람들이 사제들이다. 신학교 교육과 본당신부로 살아가면서 자신도 모르게 젖어들게 된다. 그래서 신자들에게 자신들이 알고 있는 것들을 가르치는 스승으로 살아간다. 그런데 막상 나 자신의 삶을 뒤돌아볼 때 실제로 가르친 바를 실천하는 경우가 거의 없다. 이웃에 불쌍하고 가난한 사람에게 자선을 베풀고 돌보아 주는 것이 예수님이 가장 칭찬하신 착한 사마리아 사람이라고 하면서도 성당 담 밖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무관심하게 지내온다. 성당에 땅을 파신 이웃집 할아버지가 시세보다 턱없이 비싸게 팔았다고 인사도 하지 않고 지낸다. 신자들에게 본당의 활성화를 위해서 묵주기도를 바치라고 하면서도 매일 하지도 않는다. 그러니 이정표에 불과하다는 신부님의 강론이 피정동안 내마음을 얼마나 괴롭혔는지 모른다.

 

그런데 피정을 마치면서 파견미사 때 주교님의 강론은 더욱 충격을 던져주었다. 현재 사제들은 이정표의 역할도 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어떻게 천국으로 갈 수 있는 이정표라고 제대로 하고 있다면 정말 좋겠다는 주교님의 강론은 일종의 경고였다. 신자들을 천국으로 인도하는 이정표의 역할은 고사하고 천국으로 가려는 사람들까지 못가게 막는다는 것이다. 한 마디로 사제들의 삶과 내용이 형편없다는 말씀이었다. 예수님이 바리사이들에게 비난한 말씀이 바로 우리들에게 하는 내용이었다. "너희는 전통을 지킨다는 구실로 교묘하게 하느님의 계명을 어기고 있다"(마르 7,9)라고 하신 비난을 우리들은 받아 마땅하다. 성직자라고 신자들에게 대접만 받으려고 하고 손 하나 까딱하지 않고 살아가는 것이 사제들일 수 있다. 80세 되신 할아버지 할머니가 성당에 와서 청소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하면서 젊은 사제인 나 자신은 제대로 청소도 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렇게 살다가는 정말 천국의 근처도 못가보도 지옥으로 직행할 것이 뻔하다. 그렇다고 살아계신 부모님께도 효도도 제대로 못하고 친형제들이 여러 가지고 어려워 해도 나는 집을 떠났으니 남의 일로 생각하는 교묘한 위선을 갖고 있는 것이다.

 

본당에서는 신자들에게 좋은 목자로서 표양을 보이지 못하고 이정표의 역할도 하지 못하고 가정에서는 이방인처럼 살아가는 나의 사제생활은 주교님의 말씀대로 정말 이정표의 역할도 제대로 못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처절한 자기반성의 시간이었다.

 

이런 좋은 피정을 할 수 있었던 것은 피정의 원칙을 지켰기 때문이다. 최소한 피정에 있어서는 나는 이정표를 넘어서고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이번 피정을 시작하면서 큰 욕심을 갖지 않았다. 연피정은 사제들의 의무이기 때문에 참석했다고 하는 편이 나을 것이다. 그러면서 피정은 마음의 움직임을 자 살피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주어진 시간을 철저히 지키력 노력하다 보면 어느새 마음이 하느님께로 향하게 되고 자신도 모르게 많은 은총을 체험한 것이다. 억지로 기도만 많이 한다고 해서 피정을 잘 하는 것이 아닌 것 같다. 몸을 잘 다스리면서 올바른 자세를 취하고 기도를 하다 보면 온갖 잡념들이 사라지고 마음이 고요해지고 하느님과 진솔한 대화를 할 수 있게 되었다. 많은 피정을 다녀보았지만 피정은 반드시 대침묵이 전제되어야 한다는 것을 체험할 수 있었다. 그래서 나는 피정에 있어서만은 최소한 이정표의 역할을 할 수 있을 것 같다. 참으로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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