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미사

우리들의 묵상/체험

제목 연중 제17 주간 목요일
작성자조재형 쪽지 캡슐 작성일2022-07-27 조회수1,906 추천수8 반대(0)

신학교 2학년 때입니다. 중세철학사 시험을 보았습니다. 과목의 범위가 많았고, 공부할 내용도 많았습니다. 시험지를 받아들고 종이에 이렇게 글을 적었습니다. “정신일도하사불성((精神一到何事不成),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시험을 보자, 최선을 다했으면 결과는 하늘에 맡기자는 뜻이었습니다. 교수님은 제가 조금 이상한 행동을 했는지 제 자리에 오셔서 시험지 아래에 무엇이 있는지 물어보았습니다. 혹시 제가 부정한 행위를 했을지 모른다고 생각하셨던 것 같습니다. 제가 쓴 글을 보시고 웃으시며 열심히 하라고 하였습니다. 그 뒤로 잠언에서 비슷한 이야기를 읽었습니다. “제비는 옷 폭에 던져지지만 결정은 온전히 주님에게서만 온다.” 시편은 또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주님께서 집을 지어 주지 않으시면 그 짓는 이들의 수고가 헛되리라. 주님께서 성읍을 지켜 주지 않으시면 그 지키는 이의 파수가 헛되리라.” 아무리 노력해도 알 수 없었는데 순간 영감이 떠올랐을 때 아르키메데스는 유레카라고 외쳤다고 합니다. 다행히 중세철학사 시험은 무사히 통과했습니다.

 

거절을 잘 못하는 성격인데다가, 맡은 일은 잘 하려고 하다 보니 일이 엉키고 복잡할 때가 종종 있습니다. 사면초가라는 말처럼 혼자 힘으로는 해결하기 힘든 일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가끔씩 주님께서 일을 말끔하게 해결 주곤 하셨습니다. 팬데믹으로 모든 일정이 취소된 경우도 있었습니다. 코로나가 확진되어서 일정이 연기된 경우도 있었습니다. 하려고 하면 못 할 것은 없지만 몸도 마음도 피곤했을 일들도 하느님께서는 제가 할 수 있는 만큼만 기회를 주셨습니다. 지금은 거의 볼 수 없지만 어렸을 때는 소달구지를 종종 보았습니다. 덩치가 큰 소가 주인의 손에 이끌려 얌전히 따르는 것은 코뚜레가 있기 때문입니다. 소에게는 멍에가 될 수 있지만 주인에게는 소를 다스리는 도구가 됩니다. 소는 주인을 위해서 일을 하지만 주인은 소에게 여물을 주고, 안전한 집을 마련해 줍니다. 코뚜레는 주인과 소를 이어주는 안전핀과 같습니다. 연이 자유롭게 하늘을 날 수 있는 것도 이 있기 때문입니다. 줄이 끊어지면 연은 이내 땅으로 떨어지기 마련입니다.

 

오늘 제1독서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이스라엘 집안아, 주님의 말씀이다. 내가 이 옹기장이처럼 너희에게 할 수 없을 것 같으냐? 이스라엘 집안아, 옹기장이 손에 있는 진흙처럼 너희도 내 손에 있다.” 맞습니다. 저는 시간과 공간을 스스로 결정해서 태어나지 않았습니다. 예전에 많이 들었던 소위 ‘386’세대로 태어났습니다. 저는 부모를 결정하지 않았고, 저의 성도 결정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한양 조씨 집안에서 태어났고, 남자로 태어났습니다. 고등학교까지는 제가 선택해서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소위 뺑뺑이세대였습니다. 마치 옹기장이가 진흙으로 그릇을 만들 듯이 하느님께서는 저를 오늘까지 인도해 주셨습니다. 제가 태어난 시대, 제가 태어난 집안, 제가 남자로 태어난 것을 스스로 결정하지는 않았지만 오늘까지 감사드리면서 지내고 있습니다. 불평과 불만으로 해결 할 수 없는 일이라면 감사드리면서 받아들이는 것도 삶의 지혜입니다. 그래서 이런 말을 좋아합니다. ‘주님 제가 할 수 있는 것은 하도록 용기를 주시고, 할 수 없는 것은 받아들이는 겸손을 주시고,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을 식별하는 지혜를 주소서.”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나라를 이야기하셨습니다. 여러분은 하느님 나라를 어떻게 설명하시겠는지요? 하느님 나라는 내가 원하는 것이 모두 이루어지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나 혼자 영원히 사는 것도 아닐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하늘을 날 수 있고, 물속에서도 숨을 쉴 수 있는 능력이 생기는 것도 아닐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어느 특정한 공간과 시간으로 가는 것도 아닐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곳에서 시작합니다. 하느님 나라는 하느님의 의가 드러나는 곳입니다. ‘세상에는 높고 귀한 사람이 많다. 그러나 하느님은 당신의 오묘함을 겸손한 사람에게만 드러내신다.’(집회 3, 20) 저는 이 말을 이렇게 생각하고 싶습니다. 하느님의 뜻과 하느님의 의는 겸손한 이들에게서 드러납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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