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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사순부활] 파스카 성삼일
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10-08-13 조회수5,085 추천수0

파스카 성삼일

 

 

성주간과 부활시기를 통하여 가장 큰 날은 바로 파스카 성삼일이다. 성목요일, 성금요일, 성토요일, 파스카 성야와 부활 주일이다. 이 성삼일에 우리는 모든 구원역사의 최고 절정이고 완성인 주님의 파스카 신비, 곧 그분의 수난과 죽음과 부활을 경축한다. 

 

원래 파스카(과월절)는 중동 목축업자들의 축제였다. 파스카는 가정 축제였다. 춘분이 지난 보름 밤, 유배 이후 니산 (Nisan)이라 부르는 달 14일, 양들을 축복해 주시기를 신께 기원하기 위해서 거행되었다. 이때 1년 된 어린 짐승 (양, 염소로서 수컷)을 신께 봉헌하였다. 

 

그런데 출애굽 사건이 이 축제에 결정적 의미를 부여했다. 즉 목축업자의 파스카가 히브리인의 파스카가 된 것이다. 에집트의 노예 생활에서 야훼 하느님께서 모세를 통하여 해방하셨다. 이 밤에 히브리인들은 어린양을 잡아 그 피를 문설주에 발랐고 허리에 띠를 띠고 서서 쓴 나물과 누룩 안든 빵을 급히 먹었다. 이들은 그 밤에 불기둥과 구름 기둥으로 인도하시는 하느님의 힘으로 홍해를 건넜다. 이 ‘건너감’에서 파스카 (Pasca)라는 말이 나왔다. 더 나아가 이스라엘은 시나이 산에서 계약을 맺어 하느님 백성이 되었다. 파스카는 개인적 의식이 아니다. 백성은 전체로 구원되었다. 그래서 이스라엘인은 계속해서 이 밤을 지금까지도 기념하고 있다.

 

구약의 파스카는 신약의 파스카를 위한 준비였다. 우리는 하느님의 새로운 백성이다. 신약의 하느님 백성인 그리스도인들에게 참된 어린양은 바로 십자가에 처형되신 예수이시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상의 죽음과 부활로 인해 우리는 죽음에서 생명으로 건너가게 되었다. 이것이 새로운 파스카이다. 삼일에 걸쳐 새로운 건너감이 성취되었다. 우리는 성삼일을 하나의 사건으로 봐야 한다. 서로 떨어진 것이 아니라 각 날이 내적으로 하나를 이루고 있음을 말이다. 그래서 교회는 ‘파스카 성삼일’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파스카 축일은 보편 공의회였던 니체아 공의회 (325년)에서 결정하기를, 춘분 후의 보름 다음에 오는 주일에 지내도록 명시했다. 주님의 수난과 부활의 파스카 성삼일은 성목요일 저녁 주님 만찬 저녁 미사로 시작하여 파스카 성야에서 그것의 최고를 가지고, 부활 주일 저녁기도로 끝난다.

 

성삼일의 전체 구도와 각 날이 담고 있는 주제와 전례예식을 간단히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성목요일(파스카 성삼일의 개막)

 

예수의 역사적 사건: 최후 만찬

주 제: 유대인들의 파스카 축제 전통에 따라 예수께서 새롭게 해석하여 행하신 파스카 예식

교회의 전례예식: 주님 만찬 미사

 

2) 성금요일(진정한 성삼일: 성금요일, 성토요일, 파스카성야부터 시작되는 부활주일)

 

예수의 역사적 사건: 십자가 처형 

주제: 그리스도의 희생 

교회의 전례예식: 수난 거행(오후 3시경)

 

3) 성토요일

 

예수의 역사적 사건: 예수의 무덤 

주제: 그리스도의 안식 

교회의 전례예식: 기도 (성체조배), 유일하게 미사(영성체)가 없는 날

 

4) 파스카 밤 

 

예수의 역사적 사건: 빈 무덤 

주제: 그리스도의 부활 

교회의 전례예식: 파스카 성야 미사

 

 

성목요일: 주님 만찬 미사

 

가. 전례거행

 

시작 예식

본기도: “하느님, 성자께서는 죽음을 앞두시고, 이 거룩한 만찬으로 새로운 제사와 당신 사랑의 잔치를 교회에 남겨주셨으니, 이 만찬에 참석하는 저희에게 넘치는 사랑과 생명을 주소서.”

 

말씀의 전례

제1독서: 출애굽기 (에집트 탈출 날 밤에 어린양을 잡는 이야기)

제2독서: 1고린 11,23-26: (주님의 최후만찬 기사)

복음: 요한 13,1-15 (예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심)

 

발씻김 예식

주례자는 신자들 가운데 몇 명의 발을 손수 씻어준다.

 

성찬의 전례

성체를 다른 곳으로 모시는 예식

영성체 후 기도가 끝나면 성체를 감실에서 수난 감실로 옮긴다.

* 예전에는 수난 감실을 무덤 제대라고 했는데 이는 틀린 말이다. 왜냐하면 예수께서는 아직 돌아가시지 않으셨기 때문이다.

 

제대보 벗김

 

주례자는 제대보를 벗기고 십자가를 가린다.

 

나. 전례 거행의 의미

 

성체성사: 최후만찬의 기념이며 형제애의 신비

 

우리는 성목요일 저녁에는 주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바라보면서 주님께서 행하신 만찬의 신비를 기념한다. 사실 예수께서는 당신께서 이루실 일, 즉 십자가 상의 제사를 미리 내다보시면서 제자들과 함께 만찬을 드셨다. 단순한 일상 식사나 고별 식사가 아니었다. 사람들에게 하느님 말씀을 전하시고 세상의 구원을 위해 일하시다가 죽으실 때가 이르자 당신 사업을 제자들에게 계속 기억할 수 있도록 기념물을 남겨 놓고자 하셨다. 이 기념물이 바로 ‘최후만찬’이었다. 예수께서는 잔을 드시고 “여러분을 위해 흘릴 계약의 피”라고 하셨고, 빵을 드시고 “내어주는 당신 몸”이라고 하셨다. 이는 모든 사람을 위해 당신 자신을 제물로 바치시는 십자가상의 제사를 뜻한다. 그리고 만찬 끝에 예수께서는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라”고 하셨다. 따라서 파스카 만찬은 최후만찬의 재현이 아니라 그것의 기념인 것이다.

 

예수께서는 새 계약의 성사인 성체성사를 제정하신다 (2독서). 교회는 이 날 복음을 공관복음의 최후만찬 기사가 아닌, 예수께서 본을 보이시고자 손수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시는 내용을 담고 있는 요한 13,1-15을 선택한다. “그 동안 세상에서 사랑해 온 사람들을 끝까지 사랑하신” (요한 13,1) 예수께서는 “내가 너희의 발을 씻겨 주었다” (요한 13,1-5)고 하시면서 제자들에게 본을 보여주신 것이다. 발을 씻기는 장면은 성체성사가 뜻하는 바를 드러낸다. 즉, 성체성사는 서로 받아드림, 서로 나눔, 형제적 친교와 봉사를 뜻하는 것이다. 가장 미천하고도 힘든 봉사를 하면서 사람을 존중하는 것, 이것이 스스로 우리의 음식을 제공하신 그리스도, “많은 이들을 위해 흘리신 피와 선사하신 몸”인 그리스도를 우리 안에서 살게 하는 것이다. 그래서 초대 교회 당시 미사의 이름은 “빵을 나눔”이었다. 이 표현은 예수께서 일상 행하셨던 그분 특유의 동작을 기념하고 있다. 바로 용서와 나눔이다.

 

 

성금요일: 수난 거행

 

가. 전례 거행

 

입당 

침묵기도와 본기도: 참회의 표시인 침묵과 무릎 꿇음 (또는 엎드림).

 

제1부 말씀 전례

1. 말씀선포

제1독서: 이사 52,13-53,12 (야훼의 종)

제2독서: 히브 4,14-16; 5,7-9 (하늘에 계신 대제관)

수난 복음: 요한 18,1-19,42 (게세마니 동산에서부터 십자가 처형과 무덤 안치까지)

2. 보편지향기도 10가지 

교회, 교황, 성직자와 수도자와 신자, 예비신자, 그리스도인의 일치, 유대인,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이들, 하느님을 믿지 않는 이들, 위정자, 고통 받는 이들.

 

제2부 십자가 경배 

1. 십자가를 보여주는 예식: “보라, 십자 나무, 여기 세상 구원이 달렸네.”

2. 주례자와 신자들의 십자가 경배

 

제3부 영성체 

1. 주님의 기도

2. 영성체

3. 영성체 후 기도, 백성을 위한 기도, 퇴장

 

나. 전례 거행의 의미

 

요한 복음에 따르면 (18,28)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실 시각에 예루살렘 성전에서 어린양을 잡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바로 이 시간에 참된 파스카의 어린양이신 예수께서 십자가상에서 고통과 죽음을 당하신 때이다. 사실 겉으로만 보면 십자가의 신비는 철저히 감쳐있다. 로마 역사에서 볼 때 십자가형은 오직 대역죄인에게만 행해진 처형 방법이다. 

 

그러나 우리에게 십자가는 주님의 자기 비움의 극치다. 잉태 때 말씀께서는 어머니 마리아에게서 인간 조건을 받고, 십자가의 시간에 말씀께서는 모든 인간에게서 그들의 죄와 죽음의 무게를 받아들이신다. 예수께서는 우리 인간성과 완전히 혼인하셨다. 하느님 아들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는 십자가의 때에 부인 (요한 2,4과 19,26), 새 화와, 전체적 그리스도의 어머니로 바뀐다: “부인, 보십시오, 부인의 아들입니다” (요한 19,26). 

 

성금요일 복음으로, 항상 사도 요한이 전하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기를 듣는다. 공관복음과는 달리 요한 복음에서 예수께서는 스스로 장엄하게 죽음을 대하시고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신 분, 하느님으로 드러난다. 요한 복음은 죽음에 놀라지 않으며 숙명처럼 죽음을 만나지 않는 유일한 인간 존재로서의 예수를 소개한다. 예수께서는 죽음에서 도망치려 하지도 않을 뿐더러, 죽음을 늦추기 위해 우리가 본능적으로 하는 것처럼 싸우지도 않으신다. 죽음을 공포에 떨게 하는 자신의 인간적이고 신적인 생명력으로 예수는 자유롭고 위대하게 죽음을 대면하신다. 그분께서는 아드님의 모든 원의 (의지)와 형제들을 위한 모든 사랑으로 그것을 원하신다. 오직 모든 이를 위한 단 하나의 전투로 죽음에 들어가시고 죽음에 대면하신다: “아무도 내 목숨을 빼앗지 못합니다. 내가 스스로 목숨을 내놓습니다” (요한 10,18). 예수께서 체포되실 때 싸우기를 거부하신다. 베드로를 위시한 제자들은 그분 육신의 경호원이 아니다. 그분이 조롱 당하고 채찍질 당하고 사형언도를 받고 십자가에 처형될 때, 사형집행인을 용서한 바처럼 그분 말씀들에 나타난 무력을 사용하지 않는다는 명확성을 알 수 있다. 예수께서는 폭력에 저항하지 않으신다. 이것이 또 다른 하나의 죽음의 힘이다. 그분께서는 죄인들의 죽음을 원하지 않으신다! 반대로 그들이 살기를 원하신다. 이것을 통하여 예수께서는 인간으로 죽음을 스스로 취하는 것이 아니라 죄수인 인간의 죽음으로 죽음을 스스로 취하신다. 그분의 비폭력은 약함도 그것을 알기를 거부하는 것도 아니라 사랑의 힘이다. 인간들은 “나무가 싱싱할 때 찍어 버리자. 인간 세상에서 없애 버리자” (예레 11,19)고 원하지만, 생명나무가 세워질 때 그 잎은 인간들을 치료한다 (묵시 22,2). 사랑의 비폭력은 전능하다. 생명의 창조자를 죽음에 “내놓는다”고 인간이 믿는 그 순간, 죽음의 노예인 인간들에게 생명을 주기 위해 그분은 “스스로 내놓는다.”

 

그래서 말씀 전례 가운데 제1독서에서 이사야 예언자는 모든 이를 위해 고통을 당한 ‘야훼의 종’을 이야기하고 있다: “실상 그는 우리가 앓을 병을 앓아 주었으며, 우리가 받을 고통을 겪어 주었구나. 그 몸에 채찍을 맞음으로 우리를 성하게 해 주었고, 그 몸에 상처를 입음으로 우리의 병을 고쳐 주었구나.” 그리고 화답송으로 “아버지, 제 영혼을 당신의 손에 맡기나이다” (루가 23,46)라고 응답한다. 제2독서인 히브리서에서 말하기를, 이제 이분은 십자가의 죽음을 통하여 하느님과 인간을 중재하시는 대제관이 되신다고 한다: “예수께서는 인간으로 이 세상에 계실 때에 당신을 죽음에서 구해주실 수 있는 분에게 큰 소리와 눈물로 기도하고 그 간구를 들어주셨습니다.” 더 나아가 이제 교회는 십자가에 처형되신 주님처럼 모든 계층의 사람들을 위해서 장엄하게 기도한다. 이것이 보편 지향 기도이다. 

 

우리는 십자가 경배 예식을 거행한다. 사실 십자가는 가장 어리석은 것이다. “우리는 십자가에 처형되신 그리스도를 선포합니다. 이 그리스도께서 유대인에게는 걸림돌이요 이방인에게는 어리석음이지만 부름받은 이에는 유대인이나 그리스도인을 막론하고 하느님의 능력이며 하느님의 지혜이십니다” (1고린 1,23 이하). 십자가는 우리 구원의 도구이다. 예수님의 십자가 신비에서 나왔으며 교회 교부 시대를 거치면서 교회는 이를 신학적으로 훌륭히 기초하였다. 즉, 모든 구원은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하여 왔다고 교부들은 갈파했다.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신 주님의 옆구리 상처에서 피와 물이 나왔는데 (요한 19,34), 피는 성체성사를, 물은 성령의 은총을 통한 세례성사를 상징한다. 그래서 십자가는 교회의 근원적인 성사들인 세례와 성체성사가 흘러나오는 근원인 것이다. 그래서 십자가 경배 때 사제는 십자가를 들고 오면서 말한다: “보라, 십자 나무, 여기 세상 구원이 달렸네.” 그리고 신자들은 응답한다: “모두 와서 경배하세.” 이제 십자가는 죄인의 형틀에서 구원의 표지로 그 의미가 바뀐다. 우리는 일상에서 기도하기 전에 또는 식사를 하기 전에 십자성호를 긋는다.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의 자기 비움 (케노시스)는 캄캄한 어둠 속에서 빛나는 은총의 광채다. 낮이 시작될 때 무엇이 도래하는가? 밤은 해제된다. 밤은 없음 뿐이었고, 자기 스스로는 존재하지 않았다; 밤은 아무것도 생산하지 않는다. 밤이 있을 때에도 인간을 위해서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고, 인간들도 인식되지 않는다. 이처럼, 밤은 의미가 텅 빈 것이고 의미 있는 모든 것을 빼앗는다. 모든 인간적 도래의 한가운데, 인간 마음의 심연 밑바닥 거기에는 하나의 밤, 다시 말해서 죽음과 단절, 무의미와 부재의 밤이 있다. 인간 밖에 있는 것 그 어느 것도 거기에 빛을 퍼뜨릴 수 없다. 그러나 사람이시며 하느님이신 이분만이 죽음의 가장 캄캄한 곳까지 들어갈 수 있다: 

 

그때, 정오가 되어 “해가 사라지고 어둠이 온 땅을 덮더니 오후 세시까지 계속되었다” (루가 23,44). 빛이 암흑 가운데 잠겼을 때 무엇이 도래했는가? 이제 오후 세시, “어둠의 때” (루가 22,53), 죽음은 자신의 전리품을 획득한다. 사실 밤과 죽음은 자매지간이다. 죄의 어두운 세력, 사탄, 악의 표상이다. 그러나 죽음은 자신이 삼켰다고 여긴 그분으로 말미암아 질식할 것이고 두려움에 사로잡혔다. 죽음에 들어가신 그분은 죽을 운명에 계신 분이 아니다. 죄의 유혹에 떨어지지 않으셨기 때문이다. 그때 죽음은 사기를 당하고 그의 거짓은 자신에 거역하여 되돌아온다. 진리가 번쩍일 때 거짓은 혼란에 빠지고 떠오르는 낮 앞에 밤처럼 산산이 흩어진다. 죽음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살아 계신 아드님이 당신의 죽음 자체로 죽음을 으깨어버리셨다. 이는 파스카 성야 미사에서 잘 드러날 것이다.

 

에제리아 여행기 (약 4세기 말)에 따르면 예루살렘에서 신도들은 성금요일에 최후만찬이 있었던 다락방에서 (여기서는 예수께서 채찍질 당하실 때 매였던 기둥을 경배한다) 골고타로 옮겨가며 기도했다. 주교는 백성이 경배할 수 있도록 십자가 나무를 보여준다. 로마에서는 8세기 경 교황은 라테란 대성당에서 십자가 유물이 보관되어 있는 예루살렘의 성 십자가 대성당으로 행렬하여, 부제가 십자가 유물을 들고 가면 교황은 향로를 들고 그 뒤를 따른다고 한다. 대성당에 도착하면 십자가 나무에 대한 경배를 하고 말씀의 전례를 거행한다. 영성체는 없었다. 오늘날 로마에서는 성금요일 밤에 교황이 콜로세움에서 십자가 길과 십자가 경배를 거행한다.

 

 

성토요일

 

성토요일 이 날은 유대인의 안식일이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려 처형되신 곳에 동산이 있었고, 그 동산에 아직 아무도 장사지낸 적이 없는 새 무덤이 있었다” (요한 19,41). 그 무덤에 예수를 모셨다. 이 날은 파스카를 준비하는 큰 날인 안식일 (토요일)이다. 

 

이제 땅은 자신의 주님이며 아드님이신 분을 모신다. 깊은 침묵 가운데 마지막 “준비” (요한 19,42)다. 세상 창조의 7일째인 안식일에 하느님께서는 모든 일을 쉬시면서 당신 창조 사업을 즐기셨다. 그러나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이 안식일에 최우선의 일인 당신 사랑의 사업의 끝맺음을 하시려고 일하신다: “아버지께서는 일하고 계십니다” (요한 5,17). 아버지께서는, 모든 이의 죄를 지고 그들의 죽음을 취하신 당신 아드님의 몸을 당신 숨으로 꿰뚫으며 그 몸을 살아있고 썩지 않게 하시리라. 안식일은 다음날인 새 창조의 날 (곧 주일)을 위해 존재한다.

 

성토요일은 유일하게 미사가 없는 날이다. 완전한 단식의 날이다. 주님께서 무덤에 계심을 공경하는 날이다. 침묵과 적막이 흐르는 날이다. 이날 예수께서 무덤 안에서 쉬심과 저승에 내려가심과 베드로 사도의 가르침대로 (1베드 3,19-20; 4,6) 천국의 문이 열리기를 기다렸던 모든 이들과의 신비로운 만남 (특히 아담과의 만남)을 기린다. 

 

특히 시간전례 거행에서 이러한 주제가 잘 드러난다. 우리는 독서의 기도의 성경독서에서 “성토요일에 관한 옛 강론”을 듣는다. “주님은 마치 목자가 잃어버린 양을 찾아 나서듯 우리 원조를 찾아가십니다. 주님은 죽음의 그늘 밑에 앉아 있던 이들을 만나기 원하십니다. 하느님의 아들이신 동시에 화와의 아들이 되신 그분은 아담과 화와를 고통과 감옥에서 해방시키시고자 찾아가십니다... (주님은 아담에게) ‘나는 네 하느님이면서도 너를 위해서 네 아들이 되어 네 종의 모습을 취했다. 하늘 위에 있는 나는 너를 위해서 세상에 내려왔고 땅속까지 내려왔다. 그리고 너를 위해 사람이 되었고 아무도 도와주지 않는 버림받은 인간이 되었다. 나는 동산에서 쫓겨난 너를 위해 동산에서 유대인들 손에 넘겨졌고 또 동산에서 십자가에 못 박혔다…” 이처럼 저자를 알 수 없는 성토요일 옛 강론은 창조사업과 구속사업을 서로 연결시킨다.

 

 

파스카 성야

 

가. 전례 거행

 

제1부 빛의 예식

1. 불 축복과 부활 초 점화 

2. 행렬과 신자들의 초 점화 

3. 부활 찬송(Exultet)

 

제2부 말씀의 전례

1.구약독서 7개 독서 가운데 제3독서(출애 14장: 홍해를 건넘)는 생략하면 안된다. 창세기에서 출발하여 전 구원역사의 중요한 사건들을 들려준다.

2. 대영광송

3. 본기도

4. 서간과 복음

 

제3부 세례 예식과 갱신

1. 세례수 축복

2. 세례식 또는 세례 서약 갱신

 

제4부 성찬의 전례

 

나. 전례 거행의 의미

 

파스카 성야: 밖으로 드러난 사건, 빛나는 밤, 낮으로 바뀐 밤, 새 창조의 날, 새 해방의 날

 

주기적으로 반복되는, 죽을 운명에 놓인 우리들의 시간과 날에 대한 상징인 “안식일이 지나자” (마르 16,1), 여인들은 향료를 가지고 “아침 일찍” (루가 24,1) 무덤으로 갔다. 죽음에서 자유롭게 된 창조의 날, 곧 저녁을 모르는 그 날이 이미 밝았다. “왜 살아 계신 분을 죽은 이 가운데서 찾고 있소?” (루가 24,5). 그리스도께서는 부활하셨다. 참으로 부활하셨도다! 생명이 무덤에서 터져 나왔다. 무덤은 말씀께서 우리 살과 혼인했다는 마지막 사랑의 표지로 남지만, 더 이상 그분 몸이 있는 자리가 아니다. 그래서 “그분은 여기 있지 않다”고 공관복음은 강조한다. 부활하신 그리스도 안에서 육화하신 말씀은 살아 있는 사람이시며 모든 사람은 그분 안에서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다. 

 

그래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 밤에 모인다. 이 날은 모든 밤 가운데 가장 위대하고 고귀한 밤이다. 우리 구원이 확증되고 완성된 날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 대로 죽은 이들 가운데서 부활하셨기 때문이다. 부활의 날 그리스도의 몸에서 하느님의 힘과 인간의 힘이 하나로 결합되었기 때문에, 이 날 최고의 절정인 영원한 시작에 이른다. 

 

“죽은 이 가운데서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다시는 죽지 않으십니다” (로마 6,9). 나자로나 자이로의 딸이나 나인에 사는 과부의 아들처럼 소생한 것이 아니다. 이들은 죽을 운명에 놓인 존재로 다시 시작하였으며 끝에는 되돌아오지 못하고 죽었다. 처음으로 예수 그리스도 그분에게만이 부활은 죽음을 넘어서는 지나감이고, 그분의 통합적인 인간성 안에서 죽음의 저편으로 건너감이다. 그래서 그분께서는 죽음의 장벽과 죽어야만 하는 시간의 장벽을 뛰어넘으셨다. 그분에게 밤이 뜻하는 모든 죽음의 장벽은 무너졌고 생명의 빛이 솟아났다. 

 

이제 주님은 모든 시간의 주인이시다. 그래서 빛의 예식에서 주례자는 부활초에 그 해의 연도를 표시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리스도께서는 어제도 오늘도 (십자가 종선), 시작이요 마침이요 (십자가의 횡선), 알파요, 오메가이시며, 시대도 (올해의 첫 숫자), 세기도 주님의 것이오니 (둘째 숫자), 영광과 권능이, (셋째 숫자) 영원토록 주님께 있나이다. 아멘 (마지막 숫자). 

 

이 날, 빛이 어둠을 이겼다. 그래서 부활초를 들고 세 번 외친다: “그리스도 우리의 빛” (Lumen Christi). 그리고 부활초 앞에서 부제는 기쁨에 넘쳐 “부활 찬송”을 노래한다.

 

이제 공동체는 이 밤에 하느님께서 계획하시고 이루신 구원 역사를 듣고 마음에 새긴다. 이것이 말씀의 전례의 의미이다. 특히 이 날은 새 창조의 날이다. 그래서 구약독서 중 제1독서로 창세기를 선택한다. 그리고 새로운 해방의 날이다. 새로운 건너감 (파스카)의 날이다. 그래서 말씀의 전례의 구약독서 중 제3독서로 홍해바다를 건너는 이야기를 듣는다. 이스라엘은 홍해를 건널 때 홍해 물로 세례를 받았다. 신약의 백성 역시 세례를 받는다. 성령이 현존하시는 물로써 세례를 받는다. 세례는 새 생명을 뜻한다. 

 

그래서 이 밤, 주님께서 다시 살아나신 날, 전통적으로 교회는 세례식을 거행한다. 물 속에서 물 밖으로 나올 때, 죄에서 은총으로, 죽음에서 생명으로, 낡은 인간성에서 새 인간성으로 태어난다. 이것이 바로 부활을 사는 것이다. 그래서 세례수 축성 기도문은 말하기를, “주님 비오니, 당신 아들을 통하여 (per Filium tuum) 이 물에 성령의 힘 (virtus Spiritus Sancti)을 풍부히 부어주시어, 세례로 그리스도와 함께 죽음 속에 묻힌 모든 이로 하여금 또한 그리스도와 함께 새 생명으로 부활하게 하소서.” 이미 세례를 받은 신자들은 세례 때 받은 은혜를 되새기면서 세례를 갱신한다. 왜냐하면 세례는 단 한번으로 끝나는 외적 예식이 아니라, 하느님의 자녀임을 나날이 되새기는 시작이고 출발이며 다짐이고 구체적 삶을 뜻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세례의 삶이 성체성사를 통하여 완성된다. 그래서 공동체는 이 밤 성체성사를 모심으로써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체험한다.

 

[출처 : 성 베네딕도회 왜관 수도원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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