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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미사] 말씀 전례의 영적 구조
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10-08-13 조회수1,912 추천수0

말씀의 전례의 영적 구조

 

 

1. 하느님의 말씀과 교회의 말씀

 

하느님 말씀 (Verbum Dei)은 한 직무자가 선포하고 집회가 듣는다. 이 말씀은 각자가 관상하고 마음 속에 보존한다. 이 의미에서 거행은 새로운 성령강림이다. 즉 영께서는 말씀께서 거처하시는 사람들 위에 부어지신다. 사람들로 하여금 사건을 다시금 살도록 하고 “그들을 진리 전체로 인도”하는 “기억” (ricorda)이다.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성경과 하느님의 말씀은 서로 다르다는 것이다. 성경 (Bible)이라는 책에 쓰여진 글이 ‘선포’ (proclamatio)라는 전례 행위를 통해서 하느님의 말씀 (Verbum Dei)으로 바뀐다. 독서자와 주례자의 입을 통해 하느님의 말씀이 우리 가운데 현존하시게 된다 (SC 7). 그래서 우리는 복음서에 최대한의 존경의 표시로 향을 치고 절을 한다. 더 나아가 강론 역시 하느님 말씀을 선포하는 전례 행위에 포함된다. 말씀에 대한 해석이고 선포이다. 성서에 기반을 둔 강론, 성서적 강론이다. 강론은 말씀이신 그리스도께서 지금 이 시대에 육신이 되시는 수단이다. 따라서 거행은 교회의 사건으로 된 그리스도의 사건이고, 거룩하고 살아있는 전승의 순간이다: 예루살렘의 심장은 생명수의 강에 의해 비옥하게 되고, 굶주린 이들은 말씀을 그들에게 나누어주는 사도들에게서 말씀의 빵을 받는다. 이 거행을 통하여 하느님의 말씀은 몸을 취해야 한다. 즉, 하느님의 말씀은 교회의 말씀 (Verbum Ecclesiae)이 된다. 이 말씀은 집회의 구성원이나 말씀의 직무자개인의 주관적 말들이 아니라, 그분의 몸이 교회인 생명의 말씀이시다. 이 생명의 말씀 안에서 구원이 실현된다.

 

 

2. 하느님 현존의 뛰어난 순간

 

시편 118편과 성서의 다른 곳에서 그리고 전승에서 길게 해석되는 하느님 말씀의 빛나는 기능 부분에, 현존의 실존적 사건이 있다. 독서를 읽을 때 하느님은 현존하신다 (총지침 34). 

 

그러나 어떤 행위자처럼 현존하시는게 아니다. 왜냐하면 우리들 경우에는, 독서를 읽는 순간에 교회를 대표하도록 권위를 받은 독서자에 의해 봉사되는 교회를 통해서 당신의 생각과 당신의 뜻을 시작하시는 살아계시며 활동하시는 바로 하느님의 그 인격이다. 하느님 현존은 비가시적이지만 실재하신다. 또한 이 실존은 성체로 현존하시는 것과는 본성적으로 다르다(SC 7; 총지침 9 참조).

 

하느님은 인류를 포함한 세상과 당신 자신과의 관계를 드러내는 구원의 역사 위에서, 특히 육화의 신비와 구원을 이루시고자 하는 길 위에서 가르치신다. 

 

전례에서, 특히 미사에서 하느님의 메시지는 또한 외적으로는 공적이고 공식적이며 장엄한 성격을 갖는다. 적어도 전례서를 선택하는 것은 개인적인 성격이 아니다. 왜냐하면 교회의 제안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통교는 전례 밖에서 듣는 거룩한 독서 (lectio divina)보다 더 높은 가치를 갖는다.

 

다른 경우들과는 달리 전례 거행에서 성사적 내용은, 성사 예식에서 나오는 그것의 특별한 은총으로 청취자들을 신앙과 유효성의 감각으로 하느님 말씀을 받아들이도록 한다. 사실 성령께서는 전례 거행의 그 문맥에서 당신 일을 더욱 의식적으로 수행하시기 위해 거룩한 글에 영감을 주신다 (OL 9).

 

따라서 하느님 말씀 안에 계신 주님의 현존을 거행한다는 것은 듣기 위한 독서의 높은 등급을 요구한다. “강론으로 설명되는 독서를 통해서 하느님이 당신 백성에게 말씀하시고, 구원의 신비를 밝혀주시며 영신의 양식을 제공한다. 또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말씀을 들려주심으로써 신자들 가운데 현존하신다”(총지침 33).

 

이 말로 총지침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가르침을 더욱 깊이 한다: “(그리스도께서는) 당신 말씀 안에도 현존하시니, 교회에서 성경을 읽을 때 말씀하시는 이는 그리스도 자신이시다” (SC 7).... “전례에서 하느님은 당신 백성에게 말씀하시며 그리스도께서는 아직도 복음을 전하신다...” (SC 33). 이 말들은 단지 은유가 아니라 신앙의 참된 진리이다.

 

말씀의 전례의 구조는 믿음-사건과 부합한다: 하느님은 인간 구원을 홀로 하실 수 있다; 하느님 없이 우리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요한 15,5)... “... 믿음은 들음에서 비롯하고 들음은 그리스도를 전하는 말씀에서 비롯합니다” (로마 10,17). 메시지의 내용은 인류가 하느님과 화해하는 것이며, 이는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것을 위해서 단 한번 성취되었다. “이 모든 것은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를 당신과 화해하게 하시고 우리에게 화해의 봉사직을 주신 하느님께로부터 옵니다. 과연 하느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세상을 당신과 화해하게 하시고 저들에게 그 범행을 따지지 않고 우리에게는 화해의 말씀을 맡겨 주신 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를 대리하는 사절입니다. 하느님이 우리를 통해 권고하십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대리하여 여러분에게 간청합니다. 하느님과 화해하시오” (2고린 5,18-20). 믿음 안에서 이 메시지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누구나 구원될 것이다: “입으로 ‘예수는 주님’이시라 고백하고, 마음으로 하느님이 그분을 죽은 이 가운데서 일으키셨다는 것을 믿으면 그대는 구원받을 것입니다. 마음으로 믿으면 의로움에 이르고 입으로 고백하면 구원에 이릅니다” (로마 10,9-10). 그러나 “성령에 힘입지 않고는 아무도 ‘예수는 주님이시다’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1고린 12,3). 

 

말씀의 전례의 구조는 이러한 “믿음의 논리”를 따른다. “강론으로 설명되는 독서를 통해서....... 이렇게 하느님 말씀으로 힘을 얻은 교우들은 보편지향기도로써 온 교회의 필요와 전 세계의 구원을 위하여 기도를 바치는 것이다” (총지침 33). 또한 위에서 이미 인용한 이사야 예언서의 사랑스러운 이미지 (이사 55,10-11)로 다시 한번 더 그린다. 하느님 말씀은 독서의 선포에서 땅 위에 내리는 비와 같다. 하느님 말씀은 땅 위에 내리는 비처럼 사람의 마음을 꿰뚫고 흠뻑 젖게 하여, 그들이 들은 것을 생각하게 하고, 그리고 강론에서 사람들에게 열려지고 적용된다. “강론은 그것을 앞으로 나오게 하여 발아하게 하고, 씨뿌리는 이에게 씨를 주며, 먹을 이에게 빵을 준다.” 신자들은 신앙 고백에서 응답하고 온 인류와 온 세계를 위한 대표로서 기도에서 응답한다; 그리고는 신자들은 그들의 양식으로 먹는 이을 위한 빵을 받는다.

 

 

3. 가르치는 일 (교회 교도권의 수행)

 

교회는 하느님 말씀을 특히 신자들에게 접촉하도록 하고 그것을 설명함으로써, 복음화 사명과 교리를 가르치는 사명을 완수한다. 말씀의 전례는 영적인 양성과, 권고와, 회개와 성화로 이끄는 이러한 사업보다 더욱 의미있는 순간 중 하나이다. 그리스도인의 삶과 개인적 환경과 사회적 환경에서 품위에 대한 교육은 하느님 말씀으로 마치 기초와 같이 이루어진다. 그런데 모든 거행에서 이 말씀은 제시되지만 특히 미사에서 그렇다.

 

 

4. 성체성사에서 현재화되는 말씀

 

말씀의 전례는 구체적으로 성찬 전례에서 예배의 단일한 행위로 형성된다. 사실 이것은 영을 양육하는,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의 말씀, 그분의 몸과 피로 봉헌되는 단일한 식탁이다.

 

하느님 말씀은 신적인 효력으로 은혜의 선물이다. 그러나 성체는 최상의 귀중함을 가진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충만한 인성-신성 안에 계시기 때문이다. 양쪽 모두에서 그리스도께서 진실로 현존하신다. 첫 번째에서는 특히 집회와 각 사람 안에 신앙과 다른 자세를 밝히시는 가르침과 계시의 빛을 시작하시는 말씀이시다. 두 번째에서는 사제, 희생제물, 제사와, 참석자들에게 수여되는 ‘함께 생명을 가지는 실재’로 그리스도께서 현존하신다. 미사 첫 부분인 하느님 말씀은 성체에 대한 신앙과 사랑의 준비만이 아니라, 그것 안에서 그것들의 현실화될 구원 실재에 대한 전 선포이기도 하다 (OL 10,48). 독서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선포는 커다란 성체성사에서 자신의 완성을 발견한다.

 

말씀의 전례는 바뀔 수 없는 존엄성과 중요성을 가진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것은 성체성사와 긴밀한 연관성 위에 서있다. 비록 이것이 단순히 “미사의 서두 부분”이라는 가벼운 의미가 아니다. “그리스도 신자들의 공동체 안에서... 말씀의 설교는 여러 성사의 수여 그 자체를 위하여 필요하다. 성사는 모든 신앙의 성사이며, 신앙은 말씀을 들음에서 생기고 말씀으로 길러지기 때문이다. 이것은 특히 미사 중의 ‘말씀의 전례’에 들어맞는 것으로 미사에 있어서는 주님의 죽으심과 부활의 선포와, 그것을 듣는 백성의 응답과, 신약을 당신의 피로써 견고케 하신 그리스도의 봉헌이 불가분의 결합을 이루며, 이 봉헌에 신자들이 기도와 영성체로써 참여하는 것이다” (사제 직무와 생활에 관한 교령 4).

 

말씀과 성사 사이의 이러한 관계는 제2차 공의회 문헌 많은 곳에서 표현되었다. 그리고 또한 두 식탁에 대한 은유를 통하여 총지침에서 표현되었다: “하느님의 율법과 성스러운 제단의 식탁에서 양육되어...” (수도생활의 쇄신 적응에 관한 교령 6); “성서와 성체의 두 가지 식탁에서 하느님의 말씀으로 양육되는 행위이다” (사제의 직무와 생활에 관한 교령 18) 등이다. “말씀의 식탁”이라는 말은 처음에 볼 때는 이상한 것으로 보여질 수 있으나, 이 말의 기초와 전제는 육신의 양육과 하느님 말씀으로 양육되는 성서의 쌍을 대비하는 것이다: “사람이 빵으로만 살지 못하고 하느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리라” (마태 4,4; 참조 루가 4,4). 이 말씀은 신명 8,3 또는 아모스 예언자의 말에서 문자적으로 인용한 것이다 (8,11): 인간 존재는 하느님 말씀으로 그리고 하느님 말씀에서 산다: 이중의 식탁의 이미지는 교회의 문학에서 수많이 증거된다. 교부들 (힐라리우스) 시대부터 토마스 아 켐퍼스의 '준주성범' (Imitation Christi) (IV,11)에 이르기까지 말이다.

 

 

5. 정화하시는 말씀

 

복음을 읽은 후에 부제나 사제는 말한다: “이 복음의 말씀으로 저희 죄를 씻어주소서”. 이 기도문의 인칭은 복수로 되어 있는데 이는 말씀을 듣는 모든 신자를 포함하는 것이다. 따라서 미사에서 전례 중 선포되는 하느님 말씀은 성사적 정화의 가치를 지닌다.

 

[출처 : 성 베네딕도회 왜관 수도원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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