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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3월 10일 토요일

[(자) 사순 제2주간 토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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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뉴스 추천 성가

굿뉴스 추천 성가
입당 성가 443번 자애로우신 주님 영성체 성가 506번 사랑으로 오신 주여
예물준비 성가 219번 주여 몸과 맘 다 바치오니 504번 우리와 함께 주여
파견 성가 446번 우리는 주의 사랑을

입당송

시편 145(144),8-9
주님은 너그러우시고 자비하신 분, 분노에 더디시고 자애가 크신 분. 주님은 모두에게 좋으신 분, 그 자비 당신의 모든 조물 위에 미치도다.

본기도

주님, 성사를 통하여 저희에게 천상 것을 미리 맛보게 하시니, 현세의 삶을 인도하시어, 주님의 찬란한 빛 속으로 저희를 이끌어 주소서. 성부와 성령과…….

말씀의 초대

미카 예언자는 허물을 모르는 체하시는 하느님께 백성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간절히 기도한다. 하느님의 자비는 당신의 은총을 받을 자격이 없는 백성에게도 분명히 미칠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너그러우시고 자비로우신 분이시기 때문이다(제1독서). ‘되찾은 아들’의 비유는 하느님께서 인간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그리고 그 사랑은 죄의 깊이와는 상관이 없음을 알려 준다. 하느님께서는 그 어떤 죄인도 당신 품으로 돌아오기를 기다리시는 사랑 깊으신 아버지이시다(복음).

제1독서

<저희의 모든 죄악을 바다 깊은 곳으로 던져 주십시오.>
▥ 미카 예언서의 말씀입니다. 7,14-15.18-20
주님, 14 과수원 한가운데 숲 속에 홀로 살아가는 당신 백성을, 당신 소유의 양 떼를 당신의 지팡이로 보살펴 주십시오. 옛날처럼 바산과 길앗에서 그들을 보살펴 주십시오. 15 당신께서 이집트 땅에서 나오실 때처럼 저희에게 놀라운 일들을 보여 주십시오.
18 당신의 소유인 남은 자들, 그들의 허물을 용서해 주시고 죄를 못 본 체해 주시는 당신 같으신 하느님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분은 분노를 영원히 품지 않으시고, 오히려 기꺼이 자애를 베푸시는 분이시다.
19 그분께서는 다시 우리를 가엾이 여기시고, 우리의 허물들을 모르는 체해 주시리라.
당신께서 저희의 모든 죄악을 바다 깊은 곳으로 던져 주십시오. 20 먼 옛날 당신께서 저희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대로 야곱을 성실히 대하시고, 아브라함에게 자애를 베풀어 주십시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화답송

시편 103(102),1-2.3-4.9-10.11-12(◎ 8ㄱ)
◎ 주님께서는 자비하시고 너그러우시도다.
○ 내 영혼아, 주님을 찬미하여라. 내 안의 모든 것들아, 주님의 거룩하신 이름을 찬미하여라. 내 영혼아, 주님을 찬미하여라. 주님께서 해 주신 일 하나도 잊지 마라. ◎
○ 주님은 네 모든 잘못을 용서하시고, 네 모든 아픔을 낫게 하시는 분. 네 목숨을 구렁에서 구해 내시고, 자애와 자비로 관을 씌워 주시는 분이시로다. ◎
○ 주님께서는 끝까지 따지지 않으시고, 끝끝내 화를 품지 않으시며, 우리의 죄대로 우리를 다루지 않으시고, 우리의 잘못대로 우리에게 갚지 않으시도다. ◎
○ 하늘이 땅 위에 드높은 것처럼, 주님의 자애는 당신을 경외하는 이들 위에 굳세도다. 주님께서는 해 뜨는 데가 해 지는 데서 먼 것처럼, 우리의 허물들을 우리에게서 멀리하시도다. ◎

복음 환호송

루카 15,18
◎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그리스도님, 찬미받으소서.
○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말하리라. 아버지, 제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나이다.
◎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그리스도님, 찬미받으소서.

복음

<너의 아우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5,1-3.11ㄴ-32
그때에 1 세리들과 죄인들이 모두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가까이 모여들고 있었다. 2 그러자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이, “저 사람은 죄인들을 받아들이고 또 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군.” 하고 투덜거렸다.
3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 비유를 말씀하셨다.
11 “어떤 사람에게 아들이 둘 있었다. 12 그런데 작은아들이, ‘아버지, 재산 가운데에서 저에게 돌아올 몫을 주십시오.’ 하고 아버지에게 말하였다. 그래서 아버지는 아들들에게 가산을 나누어 주었다. 13 며칠 뒤에 작은아들은 자기 것을 모두 챙겨서 먼 고장으로 떠났다. 그러고는 그곳에서 방종한 생활을 하며 자기 재산을 허비하였다.
14 모든 것을 탕진하였을 즈음 그 고장에 심한 기근이 들어, 그가 곤궁에 허덕이기 시작하였다. 15 그래서 그 고장 주민을 찾아가서 매달렸다. 그 주민은 그를 자기 소유의 들로 보내어 돼지를 치게 하였다. 16 그는 돼지들이 먹는 열매 꼬투리로라도 배를 채우기를 간절히 바랐지만, 아무도 주지 않았다.
17 그제야 제정신이 든 그는 이렇게 말하였다. ‘내 아버지의 그 많은 품팔이꾼들은 먹을 것이 남아도는데, 나는 여기에서 굶어 죽는구나. 18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렇게 말씀드려야지. ′아버지, 제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 19 저는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습니다. 저를 아버지의 품팔이꾼 가운데 하나로 삼아 주십시오.′’ 20 그리하여 그는 일어나 아버지에게로 갔다.
그가 아직도 멀리 떨어져 있을 때에 아버지가 그를 보고 가엾은 마음이 들었다. 그리고 달려가 아들의 목을 껴안고 입을 맞추었다. 21 아들이 아버지에게 말하였다. ‘아버지, 제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 저는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습니다.’ 22 그러나 아버지는 종들에게 일렀다. ‘어서 가장 좋은 옷을 가져다 입히고 손에 반지를 끼우고 발에 신발을 신겨 주어라. 23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아라. 먹고 즐기자. 24 나의 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도로 찾았다.’ 그리하여 그들은 즐거운 잔치를 벌이기 시작하였다.
25 그때에 큰아들은 들에 나가 있었다. 그가 집에 가까이 이르러 노래하며 춤추는 소리를 들었다. 26 그래서 하인 하나를 불러 무슨 일이냐고 묻자, 27 하인이 그에게 말하였다.
‘아우님이 오셨습니다. 아우님이 몸성히 돌아오셨다고 하여 아버님이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습니다.’ 28 큰아들은 화가 나서 들어가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 아버지가 나와 그를 타이르자, 29 그가 아버지에게 대답하였다.
‘보십시오, 저는 여러 해 동안 종처럼 아버지를 섬기며 아버지의 명을 한 번도 어기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저에게 아버지는 친구들과 즐기라고 염소 한 마리 주신 적이 없습니다. 30 그런데 창녀들과 어울려 아버지의 가산을 들어먹은 저 아들이 오니까, 살진 송아지를 잡아 주시는군요.’
31 그러자 아버지가 그에게 일렀다. ‘얘야, 너는 늘 나와 함께 있고 내 것이 다 네 것이다. 32 너의 저 아우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되찾았다. 그러니 즐기고 기뻐해야 한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예물기도

주님, 이 거룩한 제사로 저희에게 힘을 주시어, 저희가 언제나 죄악에서 다시 일어나 구원의 길로 나아가게 하소서. 우리 주…….

영성체송

루카 15,32 참조
아들아, 네 아우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되찾았으니, 즐기고 기뻐해야 하지 않느냐.

영성체 후 묵상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영성체 후 기도

주님, 영원한 생명의 빵을 받아 모시고 비오니, 저희가 그 은혜를 마음 깊이 간직하여 사랑의 열매를 맺게 하소서. 우리 주…….

오늘의 묵상

오스카 쉰들러(1908-1974년)는 독일인 사업가로,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하자 나치에 협력해 돈을 많이 벌었으나 그 재산으로 이른바 ‘쉰들러 리스트’를 작성하여 천이백여 명의 유다인들을 구해 낸 인물입니다. 그의 이러한 선행이 전설과도 같이 입으로 전해졌지만 그 진위를 의심하는 사람이 적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가 사망한 뒤 그로 말미암아 생명을 구제받은 유다인들의 명단 원본이 발견되자, 오스카의 일생은 단번에 영웅적인 이야기로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이 이야기를 감동적으로 만든 영화 ‘쉰들러 리스트’에서는 주인공 오스카 쉰들러와 독일의 유다인 수용소 소장의 술좌석 대화 장면이 나옵니다. 오스카가 “선의 극치는 용서입니다.” 하고 수용소 소장에게 말하자, 그는 처음에는 이 말을 비웃었습니다. 그러나 ‘정말 그러할 수 있을까?’ 하는 마음에 유다인들을 죽이는 일을 그만두고 용서를 실천해 봅니다.
그러나 이러한 실험은 오래가지 않았습니다. 용서를 통하여 선을 체험해 보고 싶었던 소장은 이내 다시 자신의 본능을 이기지 못하고 예전처럼 유다인들을 거리낌 없이 죽이고 맙니다.
수용소 소장이 용서를 끝까지 실천할 수 없었던 것은 용서에 대한 체험, 곧 자신이 용서받았다는 느낌을 가지고 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누구도 자신이 받지 않은 것을 남에게 줄 수 없다.”는 라틴 말 속담처럼, 스스로 용서를 체험하지 못한 사람은 남을 용서할 수도 없습니다. 방탕한 생활을 접고 돌아온 작은아들을 따뜻이 맞아들이는 아버지의 마음은, 아들이 나중에 다른 사람을 진정으로 용서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힘을 가질 수 있도록 배려하는 아버지의 진정한 사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