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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8월 14일 목요일

[(홍) 성 막시밀리아노 마리아 콜베 사제 순교자 기념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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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전례

콜베 성인은 1894년 폴란드에서 태어나 14세에 꼰벤뚜알 프란치스코회에 입회하였으며, 1918년 사제가 되었다. 성모 신심에 대한 특별한 열정을 지니고 평생을 선교사로 산 그는 신심 단체인 ‘성모의 기사회’를 설립하였다. 일본에서 선교사로 활동하다가 고국에 돌아갔을 때,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갇혀 무수한 고통을 당하였으며, 탈옥자를 대신하여 아사 감방을 자원하였고, 결국 그 감방에서 운명하였다. 1941년 8월 14일이었다. 콜베 사제는 나치 희생자 가운데에서 최초로, 1982년에 시성되었다.

입당송

마태 25,34.40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내 아버지께 복을 받은 이들아, 오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

본기도

하느님, 성 막시밀리아노 마리아 콜베 사제 순교자에게 원죄 없으신 동정녀를 열렬히 사랑하게 하시고, 영혼들에 대한 열성과 이웃 사랑으로 그의 마음을 가득 채워 주셨으니, 그의 전구를 들으시고, 저희가 주님의 영광을 위하여 이웃에게 변함없이 봉사함으로써 죽기까지 성자를 닮을 수 있게 해 주소서. 성자께서는 성부와…….

말씀의 초대

이스라엘의 멸망은 주님에 대한 반항의 결과다. 주님께 순종하지 않으면 유배를 당할 것이다. 에제키엘 예언자는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유배를 대비한 짐을 꾸린다. 주님의 분노가 다가왔음을 알리려는 시도다(제1독서). 용서는 쉽지 않다. 그러기에 끊임없이 반복해야 한다. 용서 역시 훈련인 것이다. 용서가 어려울 때에는 주님께서 베푸신 자비를 기억해야 한다. 종은 엄청난 빚을 탕감받고서도 동료의 작은 빚에는 인색하였다. 용서받을 자격이 부족한 사람이다(복음).

제1독서

<대낮에 그들이 보는 앞에서 유배를 가거라.>
▥ 에제키엘 예언서의 말씀입니다. 12,1-12
1 주님의 말씀이 나에게 내렸다.
2 “사람의 아들아, 너는 반항의 집안 한가운데에서 살고 있다. 그들은 볼 눈이 있어도 보지 않고, 들을 귀가 있어도 듣지 않는다. 그들이 반항의 집안이기 때문이다.
3 그러니 너 사람의 아들아, 유배 짐을 꾸려 대낮에 그들이 보는 앞에서 유배를 가거라. 그들이 보는 앞에서 네가 사는 곳을 떠나 다른 곳으로 유배를 가거라. 행여 자기들이 반항의 집안임을 그들이 깨달을지도 모른다. 4 너는 짐을 유배 짐처럼 싸서 대낮에 그들이 보는 앞에서 내어 놓았다가, 저녁에 그들이 보는 앞에서 유배를 떠나듯이 떠나라.
5 그들이 보는 앞에서 벽을 뚫고 나가라. 6 너는 어두울 때에 그들이 보는 앞에서 짐을 어깨에 메고 나가는데, 얼굴을 가리고 땅을 보지 마라. 나는 너를 이스라엘 집안을 위한 예표로 삼았다.”
7 나는 명령을 받은 대로 하였다. 짐을 유배 짐처럼 싸서 대낮에 내어 놓았다가, 저녁에 손으로 벽을 뚫고, 어두울 때에 그들이 보는 앞에서 짐을 어깨에 메고 나갔다.
8 이튿날 아침에 주님의 말씀이 나에게 내렸다. 9 “사람의 아들아, 저 반항의 집안인 이스라엘 집안이, ‘지금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하고 너에게 묻지 않았느냐? 10 그들에게 말하여라. ‘주 하느님이 이렇게 말한다. 이 신탁은 예루살렘에 있는 수장과 그 안에 있는 온 이스라엘 집안에 관한 것이다.’
11 너는 또 말하여라. ‘나는 여러분을 위한 예표입니다. 내가 한 것과 똑같은 일이 그들에게 일어날 것입니다. 그들은 유배를 당해 끌려갈 것입니다.’ 12 그들 가운데에 있는 수장은 어두울 때에 짐을 어깨에 메고, 사람들이 그를 내보내려고 벽에 뚫어 놓은 구멍으로 나갈 것이다. 그는 자기 눈으로 그 땅을 보지 않으려고 얼굴을 가릴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화답송

시편 78(77),56-57.58-59.61-62(◎ 7ㄴ 참조)
◎ 너희는 주님의 업적을 잊지 마라.
○ 백성들은 지극히 높으신 주 하느님을 시험하고, 주님께 반항하며 그분의 법을 지키지 않았도다. 그들의 조상들처럼 배신하고 배반하여, 뒤틀린 활처럼 되어 버렸도다. ◎
○ 백성들은 자기네 산당으로 주님을 언짢으시게 하고, 자기네 우상으로 주님을 진노하시게 하였도다. 하느님께서는 들으시고 격노하시어, 이스라엘을 아주 버리셨도다. ◎
○ 주님께서는 당신의 힘을 적에게 사로잡히게 하시고, 당신의 영광을 적의 손에 내주셨도다. 당신 백성을 칼에 넘기시고, 당신 소유에게 격노하셨도다. ◎

복음 환호송

시편 119(118),135
◎ 알렐루야.
○ 주님의 얼굴이 주님 종 위에 빛나게 하시고, 주님의 법령을 저에게 가르쳐 주소서.
◎ 알렐루야.

복음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8,21―19,1
21 그때에 베드로가 예수님께 다가와, “주님, 제 형제가 저에게 죄를 지으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까지 해야 합니까?” 하고 물었다. 22 예수님께서 그에게 대답하셨다.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
23 그러므로 하늘 나라는 자기 종들과 셈을 하려는 어떤 임금에게 비길 수 있다. 24 임금이 셈을 하기 시작하자 만 탈렌트를 빚진 사람 하나가 끌려왔다.
25 그런데 그가 빚을 갚을 길이 없으므로, 주인은 그 종에게 자신과 아내와 자식과 그 밖에 가진 것을 다 팔아서 갚으라고 명령하였다.
26 그러자 그 종이 엎드려 절하며, ‘제발 참아 주십시오. 제가 다 갚겠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27 그 종의 주인은 가엾은 마음이 들어, 그를 놓아주고 부채도 탕감해 주었다.
28 그런데 그 종이 나가서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을 빚진 동료 하나를 만났다. 그러자 그를 붙들어 멱살을 잡고 ‘빚진 것을 갚아라.’ 하고 말하였다.
29 그의 동료는 엎드려서, ‘제발 참아 주게. 내가 갚겠네.’ 하고 청하였다. 30 그러나 그는 들어주려고 하지 않았다. 그리고 가서 그 동료가 빚진 것을 다 갚을 때까지 감옥에 가두었다.
31 동료들이 그렇게 벌어진 일을 보고 너무 안타까운 나머지, 주인에게 가서 그 일을 죄다 일렀다.
32 그러자 주인이 그 종을 불러들여 말하였다. ‘이 악한 종아, 네가 청하기에 나는 너에게 빚을 다 탕감해 주었다. 33 내가 너에게 자비를 베푼 것처럼 너도 네 동료에게 자비를 베풀었어야 하지 않느냐?’ 34 그러고 나서 화가 난 주인은 그를 고문 형리에게 넘겨 빚진 것을 다 갚게 하였다.
35 너희가 저마다 자기 형제를 마음으로부터 용서하지 않으면, 하늘의 내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그와 같이 하실 것이다.”
19,1 예수님께서는 이 말씀들을 마치시고 갈릴래아를 떠나, 요르단 건너편 유다 지방으로 가셨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강론 후 잠시 묵상한다.>

예물기도

주님, 이 예물을 바치며 간절히 바라오니, 저희가 성 막시밀리아노 마리아를 본받아, 저희 삶을 주님께 봉헌할 줄 알게 하여 주소서. 우리 주…….

영성체송

요한 15,13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

영성체 후 묵상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영성체 후 기도

주님, 주님의 살과 피를 받아 모시고 비오니, 성 막시밀리아노 마리아가 형제를 위하여 목숨을 바친 그 사랑의 불꽃이, 저희 안에서도 타오르게 하여 주소서. 우리 주…….

오늘의 묵상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가 용서하오니, 저희 죄를 용서하시고…….” 우리는 늘 이렇게 ‘주님의 기도’를 바칩니다. 그러나 이 기도에 어울리는 행동은 얼마나 실천하며 사는지 생각해 볼 일입니다. 자연은 결코 용서하지 않습니다. 동물의 세계도 그렇습니다. 우리 인간만이 용서의 개념을 알고 있습니다.
그것은 인간 안에 하느님의 모습이 존재하기 때문이라 하였습니다. 그러기에 그분을 닮으려면 자꾸만 용서를 베풀어야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베드로는 예수님께 질문합니다. ‘형제의 잘못을 몇 번이나 용서하면 될는지요? 일곱 번이면 되겠습니까?’ 주님께서는 이에 대한 답으로 끝없는 용서를 말씀하십니다. 용서에는 숫자가 없음을 강조하신 겁니다.
현대인들은 숫자를 참으로 좋아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숫자에 매여 살지 말 것을 당부하십니다. 어쩌면 정작 우리가 베풀어야 할 용서는 단 한 번일지도 모릅니다. 아니, 일생 닦아야 할 용서의 덕은 단 한 사람을 향한 마음일지 모릅니다.
그러한 용서일수록 더욱 어렵습니다. 그러한 용서일수록 순간에 생긴 미움이 아닙니다. 쌓이고 쌓인 미움입니다. 한순간에 용서될 일이 아닙니다. 그건 욕심일 뿐이지요. 그러니 미움이 생긴 만큼의 세월을 기다려야 합니다. 끝없는 용서의 길을 가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