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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11월 21일 토요일

[(백)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자헌 기념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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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전례

교회 전승에 따르면, 성모님의 부모는 어린 나이의 마리아를 성전에 봉헌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이를 기념하는 축일이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자헌 기념일’이다. 축일의 시작은 6세기 중엽, 로마 황제 유스티아누스가 예루살렘에 세운 ‘마리아 봉헌 기념 성당’의 봉헌식에서 비롯되었다. 1472년 식스토 4세 교황은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자헌 기념일’로 공식 선포하였다.

입당송

하례하나이다, 거룩하신 어머니. 당신은 하늘과 땅을 영원히 다스리시는 임금님을 낳으셨나이다.

본기도

주님, 지극히 거룩하신 동정 마리아를 영광스러이 기념하며 공경하오니, 저희가 그분의 전구로 주님께 풍부한 은총을 받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

말씀의 초대

안티오코스 임금은 유다인들이 예루살렘을 탈환하고 우상에게 바쳐진 제단을 철폐했다는 소문을 듣고 충격을 받는다. 이스라엘에 그리스 문화를 심으려 했던 자신의 계획이 실패한 것을 안 것이다. 다른 곳에서도 계속해서 실패했다는 소식이 들어왔다. 그는 자신의 죽음을 예감한다(제1독서). 사두가이들은 부활과 저세상을 믿지 않았다. 그들은 철저하게 현실만을 믿었고, 힘 있는 세력만을 따랐다. 그러기에 영적으로는 유치한 수준에 머물러 있었다. 엉뚱한 논리로 예수님을 반박하면서도 부끄러운 줄을 모른다(복음).

제1독서

<예루살렘에 끼친 불행 때문에 나는 큰 실망을 안고 죽어 가네.>
▥ 마카베오기 상권의 말씀입니다. 6,1-13
그 무렵, 1 안티오코스 임금은 내륙의 여러 지방을 돌아다니다가, 페르시아에 있는 엘리마이스라는 성읍이 은과 금이 많기로 유명하다는 말을 들었다. 2 그 성읍의 신전은 무척 부유하였다. 거기에는 마케도니아 임금 필리포스의 아들로서 그리스의 첫 임금이 된 알렉산드로스가 남겨 놓은 금 방패와 가슴받이 갑옷과 무기도 있었다.
3 안티오코스는 그 성읍으로 가서 그곳을 점령하고 약탈하려 하였으나, 그 계획이 성읍 주민들에게 알려지는 바람에 그렇게 할 수가 없었다. 4 그들이 그와 맞서 싸우니, 오히려 그가 달아나게 되었다. 그는 크게 실망하며 그곳을 떠나 바빌론으로 향하였다.
5 그런데 어떤 사람이 페르시아로 안티오코스를 찾아와서, 유다 땅으로 갔던 군대가 패배하였다고 보고하였다. 6 강력한 군대를 이끌고 앞장서 나아갔던 리시아스가 유다인들 앞에서 패배하여 도망치고, 유다인들이 아군을 무찌르고 빼앗은 무기와 병사와 많은 전리품으로 더욱 강력해졌다는 것이다. 7 또 유다인들이 안티오코스가 예루살렘 제단 위에 세웠던 역겨운 것을 부수어 버리고, 성소 둘레에 전처럼 높은 성벽을 쌓았으며, 그의 성읍인 벳 추르에도 그렇게 하였다는 것이다.
8 이 말을 들은 임금은 깜짝 놀라 큰 충격을 받았다. 그리고 자기가 원하던 대로 일이 되지 않아 실망한 나머지, 병이 들어 자리에 누웠다.
9 그는 계속되는 큰 실망 때문에 오랫동안 누워 있다가 마침내 죽음이 닥친 것을 느꼈다. 10 그래서 그는 자기 벗들을 모두 불러 놓고 말하였다.
“내 눈에서는 잠이 멀어지고, 마음은 근심으로 무너져 내렸다네. 11 나는 마음속으로 이런 생각坍 했네. ‘도대체 내가 이 무슨 역경에 빠졌단 말인가? 내가 이 무슨 물살에 휘말렸단 말인가? 권력을 떨칠 때에는 나도 쓸모 있고 사랑받는 사람이었는데 …….’
12 내가 예루살렘에 끼친 불행이 이제 생각나네. 그곳에 있는 금은 기물들을 다 빼앗았을뿐더러, 까닭 없이 유다 주민들을 없애 버리려고 군대를 보냈던 거야.
13 그 때문에 나에게 불행이 닥쳤음을 깨달았네. 이제 나는 큰 실망을 안고 이국땅에서 죽어 가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화답송

시편 9,2-3.4와 6.16과 19(◎ 15ㄷ)
◎ 주님, 당신의 구원에 환호하오리다.
○ 주님, 제 마음 다하여 찬송하며, 당신의 기적들을 낱낱이 전하오리다. 지극히 높으신 분, 저는 당신 안에서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당신 이름 찬미하나이다. ◎
○ 제 원수들이 뒤로 물러가고, 당신 앞에서 비틀거리며 쓰러져 갔으니, 당신은 민족들을 꾸짖으시고 악인을 없애셨으며, 그 이름을 영영 지워 버리셨나이다. ◎
○ 민족들은 자기네가 파 놓은 함정에 빠지고, 자기네가 쳐 놓은 그물에 제 발이 걸리네. 가난한 이는 영원히 잊히지 않고, 가련한 이들의 희망은 영원토록 헛되지 않으리라. ◎

복음 환호송

2티모 1,10 참조
◎ 알렐루야.
○ 우리 구원자 그리스도 예수님이 죽음을 없애시고, 복음으로 생명을 환히 보여 주셨네.
◎ 알렐루야.

복음

<하느님은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20,27-40
그때에 27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두가이 몇 사람이 예수님께 다가와 물었다. 28 “스승님, 모세는 ‘어떤 사람의 형제가 자식 없이’ 아내를 남기고 ‘죽으면, 그 사람이 죽은 이의 아내를 맞아들여 형제의 후사를 일으켜 주어야 한다.’고 저희를 위하여 기록해 놓았습니다.
29 그런데 일곱 형제가 있었습니다. 맏이가 아내를 맞아들였는데, 자식 없이 죽었습니다. 30 그래서 둘째가, 31 그다음에는 셋째가 그 여자를 맞아들였습니다. 그렇게 일곱이 모두 자식을 남기지 못하고 죽었습니다.
32 마침내 그 부인도 죽었습니다. 33 그러면 부활 때에 그 여자는 그들 가운데 누구의 아내가 되겠습니까? 일곱이 다 그 여자를 아내로 맞아들였으니 말입니다.”
34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이 세상 사람들은 장가도 들고 시집도 간다. 35 그러나 저세상에 참여하고 또 죽은 이들의 부활에 참여할 자격이 있다고 판단받는 이들은 더 이상 장가드는 일도, 시집가는 일도 없을 것이다.
36 천사들과 같아져서 더 이상 죽는 일도 없다. 그들은 또한 부활에 동참하여 하느님의 자녀가 된다.
37 그리고 죽은 이들이 되살아난다는 사실은, 모세도 떨기나무 대목에서 ‘주님은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이라는 말로 이미 밝혀 주었다. 38 그분은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다. 사실 하느님께는 모든 사람이 살아 있는 것이다.”
39 그러자 율법 학자 몇 사람이 “스승님, 잘 말씀하셨습니다.” 하였다. 40 사람들은 감히 그분께 더 이상 묻지 못하였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강론 후 잠시 묵상한다.>

예물기도

주님, 주님 백성의 기도와 희생 제물을 받으시고 성자의 어머니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전구를 들으시어, 봉헌하여 은총을 받지 못하는 사람이 없게 하시고, 청원하여 응답을 얻지 못하는 사람이 없게 하소서. 우리 주 …….
<복되신 동정 마리아 감사송: “축일에 …….” 참조>

영성체송

루카 11,27 참조
영원하신 아버지의 아들을 잉태하신 동정 마리아의 모태는 복되시나이다.

영성체 후 묵상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영성체 후 기도

인자하신 주님, 천상 성사를 받고 간절히 비오니, 저희가 동정 마리아를 본받아, 주님을 충실히 섬기며 구원의 신비에 참여하게 하소서. 우리 주 …….

오늘의 묵상

‘사두가이파’는 유다교의 사제를 배출하는 제사장 그룹입니다. 그들은 늘 현실을 중시했고, 사후 세계나 영혼 불멸은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성경도 모세 오경만 인정했고, 율법을 통한 ‘엄격한 제재’를 강조했습니다. 당연히 예수님과 충돌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들 가운데 몇 사람이 질문을 던집니다.
일곱 형제가 한 여인과 살다가 죽었다면 저세상에서는 누구의 아내가 되겠느냐고 물은 것입니다. 부활의 모순점을 지적하려고 ‘이상한 예’를 든 것입니다. 하지만 주님께서는 정확한 답변을 하십니다. 저세상의 하느님은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라는 설명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엉뚱한 논리로 ‘부활’을 폄하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부활은 이론이 아니고 ‘깨달음’입니다. ‘건전한 상식’ 위에 ‘건전한 신앙’이 있다고 했습니다. 이 세상의 ‘인연’과 ‘삶의 흔적’이 저세상에서 이어짐은 상식적인 일입니다. 받아들이고 인정하면 간단한 이 사실을 어렵게 생각합니다.
그러니 겸손해야 합니다. 부활은 겸손한 마음이 되기 전에는 받아들여지지 않습니다. 죽은 사람이 살아난다는 가르침은 ‘하늘의 힘’이 끌어 주지 않으면 영영 모르게 됩니다. 겸손은 깨달음의 전제 조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