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성체성사] 성체성사의 삶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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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주호식 [ jpatrick ] | 작성일2009-07-25 | |||
[경향 돋보기] 올해는 성체성사의 해 성체성사의 삶
20여 년 전 고해성사를 전화로 볼 수 없는지, 또는 전화로 상담을 하고선 이것을 고해성사로 대체하면 되지 않겠는지 하는 질문을 가끔 받곤 하였다. 각종 통신매체들이 발달한 요즘에도 화상매체를 통한 갖가지 종교의식들에 대해 궁금해 하는 사람이 적지 않다.
편리한 매체를 이용하면 될 텐데 교회의 예배형태는 현대인의 생활형태에 도무지 맞추려 하지 않는다고 불평도 할 것이다. 인터넷을 활용하면 순식간에 온갖 정보를 검색해 내어 생활에 활용할 수 있는데, 교회에선 소공동체니 거룩한 독서니 하면서 자꾸만 옛사람들의 생활형태를 얘기하니, 이래서야 현대인에게 도무지 무엇을 줄 수 있겠는지 한탄하기도 할 것이다. 검은 천을 뒤집어쓰고 “여기를 보세요. 하나. 둘. 셋!” 하며 사진을 찍던 시절에는 사진이 귀했으나, 이젠 디지털 카메라가 널리 보급되어 무조건 찍고 본다.
우리의 생활환경이 이렇게 변했다. 디지털 시대를 살아가는 현대인에게 고리타분한 옛날이야기를 늘어놓으면 무슨 재미가 있을까마는 그래도 수천 년 전부터 오늘날까지 변하지 않고 내려오는 성체성사에 대한 얘기를 해야겠다. 왜냐하면 성체성사의 삶이야말로 우리 삶의 의미를 밝혀주고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깨우쳐준다고 확신하기 때문이다. 더구나 이러한 점을 강조하시려고 교황 성하께서 지난해 10월 멕시코 과달라하라에서 개최된 세계성체대회를 시작으로 올 10월까지 한 해 동안을 ‘성체성사의 해’로 선포하셨지 않은가.
성체성사는 생명의 신비
성체성사의 핵심적인 내용은 ‘너를 살리기 위해 나는 죽는다.’는 생명의 신비이다. 예수님께서는 돌아가시기 전날 제자들과 마지막 만찬을 가지시는 자리에서 성체성사를 세우시면서, 당신이 떼어주는 빵과 돌려 마시도록 건네는 포도주가 죽음에 붙여진 자신의 몸과 피임을 분명히 밝히신다. “받아먹어라. 이것은 내 몸이다. 모두 돌려 마셔라. 죄를 용서해 주려고 많은 사람을 위해 쏟는 내 계약의 피다“(마태 26,26-29; 마르 14,22-26; 루가 22,15-20; 1고린 11,23-26 참조).
모든 생명체는 한 생명체의 죽음에서 태어난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누릴 것이다.”(요한 6,54). 우리가 먹는 음식들은 생명체들이 우리의 먹이가 된 것이다. 그렇듯이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고자 우리의 먹이가 되신 것이다.
따라서 성체성사의 또 다른 핵심적인 내용은, 예수님을 먹이로 먹는 사람은 예수님과 하나가 된다는 것이다. 우리는 요한 복음사가가 전해주는 하느님의 엄청난 신비를 깨닫지 못하고 살아가기가 일쑤이다. 하느님께서 인간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오셨고, 인간이 되신 하느님께서 성체성사로 이제 우리 안에 머무신다(요한 1,14; 6,56 참조).
성체를 먹는 사람은 예수님이 된다
우리가 받아먹는 성체는 그래서 예수님의 현존 그 자체이다. 예수님께서는 동정녀에게서 태어나시어 세례를 받으시고, 40일 단식하시고 광야에서 유혹을 받으셨으며,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시는 가운데 병자를 치유하시고 제자들을 뽑아 가르치셨다. 또한 하느님을 모독한 불경한 죄인으로 몰려 체포되시어 사형선고를 받으시고, 십자가를 지시고 골고타 산상에 올라 처형되시어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바로 그 예수님께서 지금 우리와 함께 계시는 현존이 성체이다.
교회는 “나를 기억하여 이 예를 행하여라.”(루가 22,19; 1고린 11,24.25)는 예수님의 말씀에 따라 성실하게 성체성사를 거행하고 있다. 교회가 어떤 역경과 박해 속에서도 수천 년 동안 성체성사를 중단 없이 거행해 오고 있는 이유는 성체성사만큼 더 확실히 예수님의 기억을 재현하는 의식이 없기 때문이다. 기억의 성서적 의미는 한마디로 현존이다.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이를 행하는 행위 자체가 당신의 현존임을 의미한다.
결론은 어떻게 되는가?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살과 피를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의 음식과 음료로 주셨고, 그 음식과 음료는 그분의 현존을 지금 이 자리에서 이루는 성체성사이며, 성체를 받아먹는 사람 안에 예수님께서 현존하신다는 것이다. 결국 성체를 먹는 사람이 예수님의 현존이 된다는 것이므로 논리적으로는 성체를 먹는 사람은 예수님이 된다는 것이다.
우리는 과연 예수님의 현존인가
성체를 먹는 우리가 과연 예수님의 현존인지 우리의 모습을 바라보면 ‘이건 아닌데….’ 하는 생각이 많이 든다. 우리의 모습은 ‘웰빙’이다 뭐다 하는 갑남을녀 가운데 하나이고, 내적인 완성보다는 외적인 화려함에 편승한 모습이다. 갖가지 고통을 겪고 있는 이들이 주위에 지천으로 있음에도 나의 이익에는 눈을 부릅뜨면서 그들에겐 눈을 감고 마는 이기적이고 이해타산적인 모습이 우리이다. 사랑하기보다 사랑받으려 하고, 이해하기보다 이해받으려는 모습이 우리의 현재 모습이 아닐까. 이런 모습은 예수님의 현존의 모습이 아니라, 오히려 예수님의 현존을 파괴하고 방해하는 모습이다.
벗을 위해 자신을 전적으로 봉헌하신 예수님을 먹는 우리는 예수님으로 살아야 한다. 최후만찬 때에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신 예수님께서는 “내가 너희에게 한 일을 너희도 그대로 하라고 본을 보여주신 것이다.”(요한 13,15)라고 말씀하셨다. 이 최후만찬에서 성체성사를 세우신 예수님께서 이젠 당신의 몸과 피를 먹고 마시는 이는 성체성사가 되도록 당신께서 본을 보이셨다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보이신 본은 이웃을 섬기고자 자신의 목숨을 바치는 봉사의 본이다. 이러한 섬김의 죽음이 성체성사의 의미의 본질을 이루고 있다.
“벗을 위하여 제 목숨을 바치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요한 15,13). 예수님의 성체를 먹는 사람은 예수님과 하나가 되어 예수님의 삶을 살아야 한다. 예수님은 영원한 생명의 양식이 되고자 한 덩어리의 빵이 되셨다. ‘먹이로 너에게 건네진 나의 존재’가 되셨다. 성체를 먹는 사람도 예수님처럼 제대 위에 올려진 한 덩어리의 빵, 먹이로 너에게 건네진 존재가 되어야 한다. 사귐과 섬김과 나눔의 삶이 곧 성체성사의 결실이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성사, 곧 ‘지금 여기에’ 예수 그리스도를 현존시키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현존이 교회의 존재 이유이고 목적이다. 그래서 교회가 있는 곳에 성체성사가 있고, 성체성사가 있는 곳에 교회가 있다. 이 모든 것은 예수님의 성체를 먹는 우리가 예수님의 현존으로 변화될 때 가능한 것이다. 예수님과 사귐을 이루고 그분의 섬김과 나눔의 삶이 우리의 일상이 될 때만이 가능하다.
예수님이 세상을 위해 한 덩어리의 빵으로 자신을 건네셨듯이, 이제 예수님의 현존인 우리가 세상을 위한 한 덩어리의 빵으로 우리 자신을 건네야겠다.
* 하성호 사도 요한 - 대구대교구 신부로 현재 대구 가톨릭 대학교 대신학원 원장을 맡고 있다.
[경향잡지, 2005년 3월호, 하성호 사도 요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