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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세례성사] 성사, 은총의 표징: 세례성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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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주호식 [ jpatrick ] 작성일2014-09-24

[성사, 은총의 표징] 세례성사 (1)

 

 

우리는 세례성사를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죄의 사함을 받고 하느님의 자녀로 새롭게 태어나서 교회 공동체에 속하게 됩니다. 이 성사를 받음으로써 다른 성사를 받을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집니다. 그래서 세례성사는 일곱 성사들 중에서 제일 앞자리를 차지합니다. 입교 성사인 세례성사를 받기 위해서는 일정한 기간 동안 교육을 받아야 합니다. 고대 교회에서는 세례를 받기 전에 3년을 준비했지만, 현재 우리나라의 경우에는 세례 전에 대략 6개월 정도 교리교육을 받습니다. 

 

세례성사는 통상적으로 성직자, 곧 부제, 신부(사제), 주교가 집전합니다. 그러나 비상시에는, 이를테면 전쟁이나 박해로 인해 성직자가 없는 경우라든가, 성직자를 불러올 동안에 세례 받을 사람이 죽을 위험이 있을 경우에는 평신도도 세례를 줄 수 있습니다. 이를 대세(代洗), 정확하게 표현하면, 비상 세례라고 합니다. 본명을 정해 부르면서 이마에 물을 세 번 부으며 ‘나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줍니다.’라고 말하면 됩니다. 

 

세례성사를 받으면 은혜(효과)를 입게 되는데 이에 대해서는 사도행전 2장 38절에 잘 요약되어 있습니다. 베드로 사도가 다른 제자들과 함께 성령을 받고 나서 십자가에 못 박히고 부활하신 예수님이 구세주라는 것을 설교하자, 청중은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하고 묻습니다. 베드로는 다음과 같이 대답합니다. “회개하십시오. 그리고 저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아 여러분의 죄를 용서받으십시오. 그러면 성령을 선물로 받을 것입니다.” 바로 이 대답에 세례성사의 은혜가 잘 요약되어 있습니다.

 

 

세례성사를 받으면 하느님의 자녀가 됩니다

 

베드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으라고 합니다. 이는 세례를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가 된다는 것을 뜻합니다. 하느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과 하나가 되면 그분처럼 우리도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로마 8,15)로 부를 수 있습니다. 이렇게 세례성사로써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가 됩니다. 그러면 하느님 아버지로부터 무한한 사랑을 받게 되는데, 이 사랑은 우리의 영혼, 육신을 지탱해주고 성장케 합니다. 

 

저는 몇 년 전에 수도권의 어느 보육원에서 안식년을 지낸 적이 있었습니다. 거기에는 젖먹이부터 유치원생까지 100명 내외의 아이들이 있었는데, 수녀님들과 봉사자들의 따뜻한 보살핌을 받으면서 잘 자라고 있었습니다. 음식과 옷도 제가 예상했던 것보다 좋았습니다. 그런데 아이들이 이상할 정도로 자주 병치레를 해서 궁금하게 여겼습니다. 원장 수녀님의 설명을 듣고서 그 이유를 알게 되었습니다. “어린 아이들에게는 부모 사랑이 무엇보다도 중요한데, 그 사랑을 제대로 받지 못해서 자주 아파요. 그게 안쓰러워서 더 잘 먹이고 잘 입히려고 노력합니다만, 그런다고 부족한 사랑이 다 채워지겠어요?” 인간은 다른 사람의 사랑과 관심을 받아야 몸과 마음 모두 건강하게 살 수 있습니다. 보통 그런 사랑을 부모나 가족으로부터 받습니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인간의 사랑은 조건적인 경우가 많습니다. ‘말 잘 들으면 사랑해 주지만, 안 그러면 어림도 없다’는 식입니다. 

 

예수님이 보여주신 하느님의 사랑은 인간의 사랑과는 사뭇 다릅니다. 그분은 죄 많은 인간들을 위해 당신 자신을 내어주셨습니다. 심지어는 당신을 십자가에 못 박는 사람들을 용서해 달라고 성부께 기도하셨습니다(루카 23,34). 또한 부활하신 예수님은 당신을 세 번이나 배반했던 베드로를 다시 불러 목자의 직무를 맡기셨습니다(요한 21,15-19). 이렇게 예수님이 주시는 사랑은 헌신적이고 무조건적이며 변하지 않습니다.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 하느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은 사람이라면, 자신이 비록 많이 부족하고 허물이 크더라도 하느님은 결코 사랑의 눈길을 거두지 않으신다는 사실을 항상 마음에 간직하고 살아야 합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기억하고 살면 건강한 자존감을 얻을 수 있습니다. 건강한 자존감이 형성되면 자신이 못났다고 자책하거나 낙담에 빠지지 않습니다. 또 남들이 나를 못생겼다, 능력 없다, 돈이 없다, 자식이 없다, 이혼했다, 직업이 없다, 병들었다, 늙었다고 흉보더라고 자책하거나 절망하지 않습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부족하고 허물이 크더라도 결코 우리를 버리지 않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세례를 통해서 모든 죄를 용서 받습니다 

 

성령 강림 직후에 베드로 사도는 자신의 설교를 들은 청중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를 용서받으라고 권유합니다. 여기서 세례를 통해 죄의 사함이 이루어진다는 것이 드러납니다. 이런 점은 바오로의 회심을 전하는 기사에서도 분명히 나타납니다. 사도행전 22장 16절에서 하나니아스는 바오로에게 세례를 권유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일어나 그분의 이름을 받들어 부르며 세례를 받고 죄를 용서 받으십시오.”

 

세례를 통해서 원죄와 본죄 모두 사함을 받습니다. 원죄란 인류의 원조인 아담과 하와가 하느님과 같아진다는 뱀의 감언이설에 속아서 지은 죄인데(창세 3장), 그 죄는 후손들에게도 부정적인 영향을 미칩니다. 자신을 하느님으로, 절대기준으로 삼으려는 경향이 우리 인간에게 뿌리 깊게 박히고 세상에 넓고 깊게 퍼진 것입니다. 이런 잘못된 경향에 동의해서 하느님을 거스르게 되면 죄를 짓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본죄, 내 자신의 죄입니다.

 

그런데 원죄이든 본죄든 죄의 본질은 하느님을 떠나 자신에게 집착하는 이기주의입니다. 세례를 통해서 모든 죄의 사함을 받는다는 것은 하느님께서 인간이 자신만을 바라보는 이기적인 삶을 살아온 것을 불문에 부치시고 새 출발의 기회를 주신다는 것입니다. 세례성사를 받고서 그리스도와 하나가 됨으로써 죄에 물든 묵은인간을 버리고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새로운 삶으로 거듭나게 됩니다. 사도 바오로는 세례를 통해 새로운 삶으로 태어나는 것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동참하는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곧 “우리의 옛 인간이 그분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힘으로써 죄의 지배를 받는 몸이 소멸하여, 우리가 더 이상 죄의 종노릇을 하지 않게 되었습니다.”(로마 6,6)

 

세례를 받아 예수님과 함께 죽어 그분과 하나가 된 사람은 그분과 같이 다시 살아나서 새로운 삶을 살아갑니다. 새로운 삶은 세례성사의 선물인 동시에 우리의 과제이기도 합니다. “여러분의 자체를 불의의 도구로 죄에 넘기지 마십시오, 오히려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살아난 사람으로서 자신을 하느님께 바치고, 자기 지체를 의로움의 도구로 하느님께 바치십시오.”(로마 6,13) 

 

이렇게 세례를 통하여 우리는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의 운명에 참여하여 죄에 죽고 새로운 삶에로 태어납니다. 이 새로운 삶은 예수님이 가르쳐주시고 모범을 보여주신 것처럼  하느님 아버지와 이웃을 사랑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는 우리 혼자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도움으로 가능하게 됩니다.

 

 

세례는 성령을 선물로 줍니다

 

 베드로 사도가 설교한 대로 우리는 세례를 통해서 성령을 선물로 받게 됩니다. 성령은 우리 안에 머무르시면서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라는 사실을 깨닫게 해주십니다.

 

“진정 여러분이 자녀이기 때문에 하느님께서 당신 아드님의 영을 우리 마음 안에 보내 주셨습니다. 그 영께서 ‘아빠, 아버지’하고 외치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그대는 더 이상 종이 아니라 자녀입니다. 그리고 자녀라면 하느님께서 세워주신 상속자이기도 합니다.”(갈라 4,6-7) 

 

아울러 성령은 예수님의 말씀을 좀 더 잘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주십니다. 이는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에서 잘 드러납니다. “내가 너희에게 할 말이 아직도 많지만 너희가 지금은 그것을 감당하지 못한다. 그러나 그분 곧 진리의 영께서 오시면 너희를 모든 진리 안으로 이끌어 주실 것이다.”(요한 16,12-13) 성령의 도우심으로 예수님의 말씀을 진리로 깨닫고 받아들이게 된다는 뜻입니다. 또한 성령은 예수 그리스도를 담대하게 증언하게 하도록 도와주십니다. 본래 예수님의 제자들은 두려움과 겁이 많았지만, 성령을 받은 다음에는 사람들에 대한 두려움을 떨쳐버리고 용감하게 예수님을 구세주로 선포합니다(사도 2,32). 한마디로 세례성사를 통해 우리에게 오신 성령은 우리를 내적으로 변화시켜 주십니다. 곧 성령은 하느님이 무섭고 두려운 분이 아니라 자비로운 아버지이시며, 우리는 그분의 자녀라는 것, 그리스도의 말씀이 참된 진리라는 것을 깨닫고 그것을 용감하게 세상에 증거할 수 있도록 이끌어주십니다.

 

성령은 세례 받은 이들 안에 머무르시면서 당신의 목소리를 듣고 따르는 이들이 좋은 열매를 맺도록 이끌어 주십니다. “성령의 열매는 사랑, 기쁨, 평화, 인내, 호의, 선의, 성실, 온유, 절제입니다.”(갈라 5,22) 성령의 활동은 성령이 맺어주시는 열매를 통해 분명하게 드러나고, 이 열매를 통해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으로 성장하게 됩니다. [월간 레지오 마리애, 2014년 2월호, 손희송 베네딕토(신부, 서울대교구 사목국장, 서울 Se. 담당사제)]

 

 

[성사, 은총의 표징] 세례성사 (2)

 

 

세례성사로써 교회, 곧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가 됩니다

 

사도행전에 따르면 성령강림 직후에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서 3천 명이 세례를 받고 새로운 신도가 됩니다. 이들은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고 친교를 이루며 빵을 떼어 나누고 기도하는 일에 전념하였다”(사도 2,42)고 합니다. 세례를 받고서 교회공동체에 귀속되어 본격적으로 신앙생활을 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세례를 통해 교회의 일원이 되면 “빵을 나누고”, 즉 성찬례(미사)에 참여하고, 다른 신자들과 함께 기도하면서 서로 친교를 나누게 됩니다. 

 

세례성사를 받게 되면 신앙의 가족인 교회 공동체에 속하게 됩니다. 한 가정에서 자녀는 부모님의 가르침과 그분들이 마련해주시는 음식 그리고 화목한 가정 분위기 속에서 성장하듯이 교회에 속한 신자들도 그러합니다. 교회 안에서 선포되는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교회의 가르침을 따르면서, 또한 성체성사와 다른 성사들이 전해주는 은총을 받으면서 그리고 신자들 서로 간에 친교를 나눔으로써 영적으로 양육되어 신앙이 자라나고 튼튼해집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성령을 통해 교회 안에 머무르시면서 교회가 당신 구원을 전하는 도구가 될 수 있도록 이끌어주십니다.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는 교회의 머리이시고, 교회는 그분의 몸입니다. 따라서 세례를 받아 교회 공동체에 속하게 되면, 그리스도 몸의 지체가 되는 것입니다(1코린 12,12-31).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인 우리들은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그분의 축복과 구원을 세상에 전해야 합니다. 아빌라의 데레사 성녀(+1582)는 이런 점을 염두에 두고 우리에게 이렇게 촉구합니다. “그리스도는 몸이 없지만 당신은 가지고 있다. 그리스도는 손이 없지만 당신은 가지고 있다. 그리스도는 발이 없지만 당신은 가지고 있다. 당신의 눈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자비로운 눈이 세상을 바라본다. 당신의 발로 그리스도는 좋은 일을 하러 나간다. 당신의 손으로 그리스도는 축복을 준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가 많이 부족하다는 것을 잘 아시면서도 우리를 통해 당신의 구원 사업을 계속하십니다. 약하고 허물 많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손발이 된다는 것은 큰 영광이 아닐 수 없습니다.

 

 

세례를 통해서 영혼의 지워지지 않는 인호를 받습니다

 

세례성사를 받아 그리스도의 지체가 된 이들은 영혼에 지워지지 않는 인호(印號)가 새겨집니다. 지워지지 않는 인호란 취소되지 않는 하느님의 선택을 의미합니다. 하느님은 세례성사를 통해서 우리를 당신의 자녀로 선택하셨는데, 이 선택은 결코 취소되지 않습니다. “하느님의 은사와 소명은 철회될 수 없는 것”입니다(로마 11,29). 

 

성경에 따르면 하느님은 당신이 선택하신 이스라엘 백성이 잘못을 거듭해도 그들을 완전히 버리지는 않으십니다. 또한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당신이 선택하신 제자들이 수난의 시간에 당신을 저버렸음에도 불구하고 내치지 않으시고 부활 후에 다시 그들을 부르십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하느님은 세례를 통해서 당신 자녀로 선택하신 사람들을 끝까지 돌보십니다. 비록 인간이 잘못 판단하여 당신께 등을 돌리더라도 하느님은 인간에 대한 사랑의 눈길을 거두지 않는 분입니다. 인호는 바로 이런 사실을 전해주는 영적 표시입니다. 즉 지워지지 않는 인호란 세례를 통한 하느님의 선택은 결코 취소되지 않고 영원히 지속된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따라서 인호가 각인되는 세 가지 성사, 곧 세례, 견진, 성품 성사는 반복해서 받을 수 없습니다.

 

 

유아도 세례성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신약성서에서 언급되는 세례는 전부 성인(成人)세례입니다. 하지만 “온 집안사람들”(사도 16,15), “온 가족”(사도 16,33), “집안사람들”(1코린 1,16)이 세례를 받았다는 사실에서 어린 아이에게도 세례를 주었다는 것을 추론할 수 있습니다. 온 가족에는 어린아이도 포함되기 때문입니다. 2세기경의 문헌들에는 유아에게 세례를 주었다는 기록이 분명하게 나옵니다. 우리나라와 같은 전교 지역은 성인세례가 대부분입니다. 하지만 유럽은 그리스도교가 널리 전파된 천 년 대 이후로는 대부분 유아세례이고, 성인 세례는 예외에 속합니다.

 

성인세례나 유아세례의 은혜는 같습니다. 하지만 신앙의 수용과 고백에 있어서는 조금 차이가 있습니다. 유아세례에서는 어린이 자신이 직접적으로 신앙을 고백하지 못합니다. 그 대신 부모나 대부모가 어린이들 대신해서 신앙을 고백합니다. 그리고 이 고백은 아이가 신앙을 키워가도록 돕겠다는 약속이기도 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유아세례는 아이에게 신앙을 심어주고 키워가기 위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유아세례 받은 아이가 자라서 자신 스스로 신앙을 고백하게 되는 기회를 갖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견진성사입니다. 어른은 먼저 신앙고백을 하고 세례를 받지만, 아이는 부모와 대부모의 신앙고백으로 세례를 받고 나중에 스스로 신앙고백을 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유아에게 세례를 줄 것이 아니라 그 아이가 어느 정도 자란 다음에 스스로 판단해서 세례를 받게 하면 어떨까 하는 의문이 들 수 있습니다. 실상 우리 주위에서는 유아세례가 당사자의 신앙의 자유를 제한, 속박하는 것이라고 여기는 이들이 종종 있습니다. 그들은 신앙은 어린 아이가 성년이 된 후 - 부모의 강요 없이 - 스스로 선택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주장을 펼치기도 합니다. 얼핏 보면 어린이의 자유를 존중해주는, 매우 합리적인 주장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유아세례가 신앙의 자유를 빼앗는다거나 부당한 조작이라는 주장에도 사실상 부모의 가치관이 개입되어 있습니다. 신앙 교육 없이 아이를 키우는 것을 ‘자유로운’ 교육이라고 얘기하지만, 엄밀히 따지면 ‘신앙은 중요하지 않다’라는 부모의 확신이 반영된 것입니다. 부모는 학교 교육이 아이에게 꼭 필요하다고 믿기 때문에 아이들의 의사를 묻지 않고 학교 교육을 시키는데, 이를 강제적이라거나 자유를 박탈한다고 비난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인생에 관한 올바른 가치관을 제시하고 영원한 삶에로 인도하는 신앙의 문을 열어주는 유아세례를 강제적이라거나 부당한 것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문제의 핵심은 부모 자신이 그리스도교 신앙이 무엇과도 바꿀 수 없이 소중한 진리라고 확신하느냐는 데에 있습니다. 부모 스스로 신앙을 정말 귀중하고 소중하다고 여긴다면 사랑하는 자식에게 가능한 일찍 그것을 전해주려고 노력할 것입니다. 외국의 한 어머니의 고백이 이런 점을 확인해줍니다. “우리는 아이들을 부모된 입장에서 양육하며, 아이에게 (지금) 먹기를 원하는지 묻지 않는다. 학교교육, 세상에 진출하는 문제에 있어 그들에게 최상의 것을 주고자 한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아이들에게 무관심한 사람들일 것이다. 만일 내가 세례를 거부하거나 미룰 수 있다고 생각할 때, 내 마음 속에서 고통을 느낀다. 내 아이에게 제일 좋은 것을 거부한다는 것은 정말 무서운 일일 것이다(어느 그리스도인 엄마가, 1970년 4월)”(레이-메르메, 『성사 안에 드러난 신앙』, 김인영 옮김, 분도출판사, 1994, 95쪽)

 

사람은 태어나면서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다른 사람의 영향 속에 살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세상에는 하느님과 이웃을 향하기보다는 거스르게 하는 경향, 다시 말해서 인간을 죄로 유혹하는 악의 세력이 강하게 작용합니다. 이런 사실을 알고 있는 부모라면 자녀들이 죄의 세력에 저항하여 하느님의 뜻을 따라 살 수 있는 힘을 기르도록 가능한 일찍부터 도와주지 않을까요? 신앙의 소중함을 깨닫고 체험한 부모는 분명히 자녀들이 가능한 일찍 세례성사를 받아 신앙의 길을 걷도록 인도할 것입니다.

 

 

세례의 은혜는 풍요로운 것입니다

 

세례 받은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어 하느님의 자녀로 새롭게 태어나고, 원죄와 모든 본죄가 사해지며, 성령의 성전이 되고,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의 일원이 됩니다. 또한 하느님의 자녀로 선택된 것이 결코 취소되지 않기에 세례 인호를 받습니다. 세례성사의 풍요로운 은혜를 자주 되새기면서 살아가면 좋겠습니다. 

 

옛 사람들은 배 밑바닥에 ‘밑짐’이라고 부르는 일정 무게의 짐을 항상 실어두었다고 합니다. 밑짐이 든든한 배는 풍랑에 불더라도 바로 무게 중심을 잡아서 큰 흔들림 없이 앞으로 나갈 수 있습니다. 세례성사의 은총은 ‘밑짐’과 같습니다. 하느님이 나를 사랑의 눈길로 바라보고 계신다는 사실, 비록 내가 부족하고 허물이 크더라도 그 눈길을 결코 거두지 않으신다는 사실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산다면, 인생여정에서 거센 세파를 잘 극복하면서 하느님의 나라를 향해 꿋꿋하게 나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기에 세례성사는 참으로 소중한 영적 보물입니다. 그 보물을 마음속에 소중하게 간직하고 산다면 어떤 시련과 어려움 앞에서도 절망하지 않고 다시 일어설 수 있을 것입니다. 밑짐을 갖춘 배가 풍파에 흔들리다가도 다시 무게중심을 잡고 앞으로 나아가듯이 말입니다. 세례성사의 은혜를 자신의 삶에서 느끼고 체험하면서 거기서 영적인 힘을 길어내는 신자들이 많아지면 좋겠습니다. [월간 레지오 마리애, 2014년 3월호, 손희송 베네딕토(신부, 서울대교구 사목국장, 서울 Se. 담당사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