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고해성사] 보속의 변천과 종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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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주호식 [ jpatrick ] | 작성일2004-10-30 | |||
보속의 변천과 종류
우리는 지금까지 보속이 단순히 죄를 징계하는 의미만 있는 것이 아니라, 죄로 입은 영혼의 상처를 고치는 치료적인 의미도 있는 것을 보았다. 죄를 지은 사람에게 그 죄와 반대되는 선행을 명함으로써 보속을 통해 또 다른 죄에 떨어지는 것을 예방하는 효과도 있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고해성사를 통해 사제가 주는 보속에 대하여 때로는 “내가 보속을 실천함으로써 참으로 나의 죄를 다 용서받으며 나아가서 죄에 대한 악습을 고치는 데 도움이 될 것인가?” 하며 의심하기도 한다. 이런 생각을 갖게 되는 것은 요즘의 보속이 너무 가벼운 데에도 원인이 있다고 하겠다. 보속은 언제나 지금처럼 가벼운 것이었는가? 보속의 변천사를 살펴보는 것도 보속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으로 여겨진다. 그리고 보속의 종류에는 어떤 것이 있는지도 살펴보고자 한다.
1. 초대 교회의 죄 용서와 보속
야고보 서간에 죄를 고백하는 일에 대한 기록이 있다. “여러분은 서로 죄를 고백하고 서로 남을 위하여 기도하십시오. 그러면 모두 온전해질 것입니다”(야고 5,16). 뿐만 아니라, 기원 후 100년경의 것으로 알려진 [열두 사도들의 가르침](Didache)에도 “교회에서 네 범법(犯法)들을 고백하며, 언짢은 양심으로 너의 기도 모임에 나가지 마라. 이것이 생명의 길이니라.”(4,14) 하였다. 또한 다음과 같은 말씀도 있다. “주님의 날(주일)마다 여러분들은 모여서 빵을 나누고 감사 드리십시오. 그러나 그 전에 여러분의 범법들을 고백하며 여러분의 제사가 깨끗하게 되도록 하십시오. 자기 동료와 더불어 분쟁 거리를 가진 모든 이가 화해할 때까지는, 여러분의 제사가 더럽혀지지 않도록, 여러분의 모임에 함께 하지 말아야 합니다”(14,1-2). 이 말씀은 죄를 고백하여, 죄 의식에 사로잡힌 마음으로 기도 모임에 참석하지 않도록 하라1)는 뜻으로 알아들을 수 있다. 이는 또한 초대 교회 때부터 양심의 가책 없이 기도 모임에 참석하기 위하여 자신의 죄를 먼저 고백하고 죄의 용서를 받았다는 것을 말해 주는 것이다. “범법을 고백하여 여러분의 제사2)가 깨끗하게 되도록 하시오.”(14,1)라는 부분은 성찬의 제사에 앞서 하느님과 화해하라는 말씀으로 알아들을 수 있다. 또한 성찬식 직전에 교우들이 죄를 고백하며 합당한 준비로 성찬식(제사)에 참여하라는 뜻이기도 하다.
그러면 초대 교회 공동체에서 성찬식 전에 하던 죄의 고백은 어떤 형식이었을까? 이것은 초대 교회의 공동 고백으로서 몇 가지로 설명해 볼 수 있다.
첫째는 신자 개개인이 교회 공동체 앞에서 자신의 죄를 고백한 형식이고, 둘째는 교회의 지도자들(사도, 예언자, 감독, 봉사자 등) 앞에서 죄를 고백한 형식이며, 셋째는 교우들이 함께 공동으로 고백했을 수도 있다.
이런 형식들 가운데서 일반적으로 셋째의 공동 고백이 가장 유력한 방법으로 볼 수 있다.3)
이와 같이 형제들과 화해하기 전에는 성찬의 제사에 함께 하지 말라는 말씀은 마태오 복음 5장 23-24절의 “제단에 예물을 드리려 할 때에 너에게 원한을 품고 있는 형제가 생각나거든 그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그를 찾아가 화해하고 나서 돌아와 예물을 드려라.” 하는 말씀과 같은 내용이기도 하다. 이는 형제들과의 화해를 강조하는 부분이다.
여기서 초대 교회의 성찬례 전 공동 고백과 관련하여 한 가지 언급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현재 미사 중에 하는 ‘참회 예절’4)이 개별 고백이 없던 초대 교회에서 하던 공동 고백의 흔적으로서, 우리 교회의 고해성사의 원형이라는 점이다. 그러면 현재 미사 중에 하는 ‘참회 예절’은 실제로 죄를 용서해 주는 예절인가 아니면 죄의 용서와 상관없이 단순히 자신을 반성해 보는 것인가 하는 점이다.
일반적으로 죄는 ‘대죄’, ‘소죄’ 또는 ‘미죄’(微罪) 등으로 구분한다. 그런데 대죄가 있을 경우에는 반드시 개별 고백을 하고 영성체를 할 수 있지만, 소죄나 미죄가 있을 경우에는 참회 예절로 죄의 용서를 얻을 수 있다. 이 경우에 개별 고백 없이도 영성체를 할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어떤 죄가 개별 고백을 해야 할 대죄이고, 어떤 죄가 미사 때 참회 예절을 통해 죄를 용서받을 수 있는 소죄인가 하는 점이 문제가 될 수도 있다. 이것은 윤리 신학적인 또 다른 문제이긴 하지만, 신자들이 신앙 생활을 하기 위한 일반적인 지침으로 말하자면, 십계명를 알고도 정면으로 어겼을 경우에는 개별 고백을 보아야 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지금까지 [열두 사도들의 가르침]에서 살펴보았듯이 초대 교회에서는 성찬례 전에 '죄의 고백'을 자주 했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이보다 좀 후대의 것이지만 이와 다른 사료도 있다. 헤르마스(Hermas, 140년)에 따르면 영세 후 죄의 용서는 단 한 번밖에 없었고, 이는 항상 죄의 보속을 전제한 것이었다고 한다.5) 세례성사로 죄의 용서를 받고 새로 태어난다는 것을 혁명적인 사건으로 보았고, 초세기 교회는 고해성사를 통한 죄의 용서를 제2의 세례라고 할 만큼 엄하게 다루었다고 한다. 그러므로 잦은 고해성사는 생각할 수 없었던 것이고, 6세기까지는 대죄를 범한 사람은 고해성사를 일생에 한 번만 받을 수 있었다.6)
2. 과중한 보속과 문제점
1) 대죄를 용서하는 절차
3세기에 와서 두 가지 문제가 생겼는데, 하나는 박해 때 배교한 사람들을 어떻게 처리하느냐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교회가 너무 쉽게 죄의 용서를 베풂으로써 신자들을 죄짓게 한다고 주장하면서 잦은 고해성사를 반대한 ‘몬타니스트’(Montanism) 이단의 출현이었다. 이들은 특별히 우상 숭배, 배교, 살인, 간음 등을 용서할 수 없는 죄로 여겼다.7) 이러한 대죄를 용서하여 주는 당시의 참회 예절(절차)을 보면, 첫째, 통회자는 주교에게 개인적으로 죄를 고백한 뒤에 통회자 명단에 등록된다. 그 다음 통회자는 특별한 옷을 입거나 머리를 깎거나 하여 보속자임을 공적으로 드러낸다. 물론 성체성사에서 제외되었지만 회중과 분리되지는 않았다. 둘째, 주교는 통회의 보속 기간과 방법을 정해 주었다. 보속의 종류는 대개 일정 기간 동안 육식의 금지, 고복(古服)을 입고 재를 바름, 사순 시기 동안 매일 주교의 안수를 받음, 장례식 때의 상여 운반, 때로는 일생 동안 성생활 금지, 직장에서의 사임 등 가혹한 보속도 있었다. 셋째, 보속 기간이 끝난 다음에 화해의 예절을 공동체 앞에서 하였는데, 이때 죄의 선언과 화해의 필요성이 설명되었다. 물론 이때 죄의 고백을 공적으로 큰소리로 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리고 주교는 죄를 용서하는 뜻으로 안수를 하였다고 한다. 이러한 예절은 주로 성목요일에 행해졌다.8)
현재는 죄의 용서를 받은 다음에 보속을 하지만, 이때는 보속이 다 채워지고 난 후에 사죄가 이루어졌다는 점이 특이하다. 이러한 엄격한 절차가 소죄에 대해서도 적용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리고 오늘날과 같은 개별 고백이 있었는지 확실하지 않으나, 일반적으로 개별 고백은 7세기 이후에 도입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7세기 말까지 최종 화해를 하기 전에 보속이 항상 행해졌다는 것이다.9) 초대 교회에서 행해졌던 그 밖의 무거운 보속에 대한 예는 많다.
2) 3-4세기 소아시아 교회의 보속 과업(課業) 수행자 분류
보속을 수행하는 자는 다음과 같이 구분하였다.
첫째, 청강자(聽講者)로서 이들은 미사 때 성당 입구에 서서 말씀의 전례에만 참례하고 돌아가야 하였다. 둘째, 부복자(俯伏者)로서 이들은 성당 안에 들어오기는 하나 엎드려서 미사에 참례하였다. 물론 영성체도 금지되었다. 셋째, 공참자(公參者)로서 이들은 다른 신자들과 함께 미사에 참례하기는 하나 영성체는 금지되었다. 넷째, 체읍자(涕泣者)로서 이들은 고복(古服)을 입고 성당 입구에 서서 신자들에게 자신을 위하여 기도해 달라고 애걸하였다.
그 밖의 보속 행위로는 대재(大齎)인 금식, 고복 착용, 삭발, 희사(喜捨), 성당 참배, 기도 등이 있었다. 초대 교회에는 죄의 종류에 따라 그 죄에 해당하는 보속을 명기해 놓은 [보속서](Libri poenitentiales)가 있었는데, 특히 테오도르의 [보속서]에는 여러 가지 죄의 항목이 있고 그에 해당하는 보속도 엄하고 기간도 길었다. 살인죄는 7년, 손발을 자른 죄는 1년, 상처를 입힌 죄는 40일, 거짓 맹세를 하거나 하도록 유인한 죄는 7년, 도둑질은 훔친 물건에 따라 3년, 2년, 1년, 20일, 간음죄는 7년, 사음(邪淫) 죄는 2년 등 엄한 보속을 명했다.10)
초대 교회에서 보속은 점점 더 엄해졌고, 많은 이들이 통회자 명단에 등록되는 것을 꺼리게 되었다.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은 차라리 죽기 전에 한 번 교회와 화해할 방법을 찾았으며, 자연히 영성체 하는 사람들은 점차 줄어들었다.11)
3. 고해성사와 보속의 변화 과정
이렇게 과중한 보속 때문에 고해성사를 회피하고 영성체 하는 신자가 급격히 줄어드는 것은 또 하나의 새로운 문제로 부각되었다. 그리하여 4-5세기에는 엄격한 분위기 속에서도 하느님의 자비를 강조하는 경향이 점차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설상가상으로 아리아니즘(Arianism)과 같은 여러 이단의 발생과 크고 작은 박해로 많은 사람이 유혹에 빠져 배교자와 죄인들이 속출하였으나, 교회와 화해하는 것은 아득한 실정이 되었는데 통회와 보속의 절차가 너무나 엄격하여 이를 실천하는 사람이 드물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결과로 6세기부터는 교회의 공적인 통회와 보속의 절차에 대한 반발이 일어 새로운 형태의 참회 예절이 생기기 시작하였다. 이때 아일랜드 수사들의 ‘신심의 고백’(confessio devotionis)이 인기를 끌기 시작하였다. 이는 신자들이 사제를 찾아가 죄를 고백하면 고해 신부는 죄에 해당하는 보속을 고백자에게 주었는데, 옛 예절과 다른 점은 고백자가 원할 때마다 다시 고해성사를 받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9세기에는 이러한 개별 고해성사와 가벼운 보속에 대한 반발이 일어나 초세기의 엄한 공적 보속을 다시 도입하려고 하였으나 실패하고 말았다. 그리고 여러 가지 보속 방법도 생겨나서 한동안 두 가지 방법이 병존할 수밖에 없었다. 사람들은 여러 가지 보속 방법 중 자연히 쉽고 편한 방법을 선호하게 되었다. 이때 사적인 죄는 사적인 보속을, 공적인 죄는 공적인 보속을 필요로 한다는 이론도 생겨났다.12)
또한 그 당시는 죄의 보속이 끝나야 죄의 용서를 받을 수 있었지만 11세기부터는 보속을 다 실천하기 전이라도 죄를 뉘우치고 고백하면 바로 죄를 용서해 주기 시작하였다. 그러므로 보속이 끝나기 전이라도 고해성사를 보았으면 바로 영성체 할 수 있었다.
사실 고해성사에 대한 신학적인 발전은 12세기에 와서 이루어졌다고 하겠다. 고해성사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가 ‘내적 통회’라는 점을 강조하게 되었고, “통회로써 죄가 사해진다면 사제에게 고백하는 것이 필요한 일인가?” 하는 문제도 생기게 되었다. 만일 통회로써 죄가 사하여진다면, 사제의 사죄경(赦罪經)은 필요 없는 것이 아닌가? 사죄경은 다만 통회로써 사해진 죄를 용서하는 선언에 불과한 것인가? 그러면 지금까지 강조해 온 보속은 필요 없는 것인가? 이런 수많은 의문이 쏟아졌다.
이런 모든 문제에 대해서 1551년 트리엔트 공의회에서 다음과 같이 교회의 고해성사에 대한 가르침을 정리하였다.
- 고해성사는 참된 성사이며, - 사죄경은 단순한 선언이 아니며, - 완전한 통회(상등 통회)와 불완전한 통회(하등 통회)를 구분하며, - 대죄는 반드시 개별 고백을 해야 하며, - 죄의 고백은 필요하고 이는 하느님께서 정하신 것이며, - 주교와 사제만이 사죄권을 가지며, - 죄를 용서하였어도, 잠벌(暫罰)은 남아 있으므로 보속을 주어야 한다.13)
이상과 같이 우리는 고해성사와 보속의 역사적 변천과 엄하고 과중한 보속의 문제점을 고찰해 보았다. 그렇다면 가벼운 보속일수록 좋은 것인가? 결코 그렇지 않다. 가벼운 보속은 죄에 대한 경각심을 무디게 할 뿐 아니라, 죄를 피하고 새로운 삶을 시작할 영적 성장과 의지를 진작시키는 데에 문제가 된다. 그렇다고 엄한 보속일수록 좋다는 것은 더욱 아니다. 과연 효과적이고 적당한 보속은 어떤 것인가? 이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사목적으로 중요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4. 보속의 종류
1) 기절벌(棄絶罰)이란 무엇인가?
필자는 어릴 때 주일 미사에 가면, 성당에 들어가지 않고 출입문 입구에 멍석을 깔아 놓고 미사에 참례하는 신자를 본 일이 있다. 추운 날씨에 왜 저 사람이 성당 안에 들어가지 않고 문 밖에 멍석을 깔고 미사를 하는지 어머니께 여쭈어 보았다. 어머니께서는 그 사람이 큰 죄를 지어 기절벌을 받기 때문이라고 하셨다. 그 때 나는 막연하게 “그 사람은 무슨 큰 죄를 지었을까? 이렇게 가혹한 ‘기절벌’이라는 벌도 있는가?” 하는 생각을 했고, 한편으로는 성당 안에 들어오지도 못하고 영성체도 못하는 벌을 받으면서도 미사에 꼬박꼬박 나오는 그 사람의 믿음이 대단해 보이기도 하였다.
기절벌이란 요즘 말로 하면 파문에 해당하는 벌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교회사에서 교리적으로 이단을 주장한 사람이 파문을 당한 것을 잘 알고 있다. 파문이란 “세례 받은 신자가 교리나 윤리상 잘못을 저질렀을 때 그를 신자 공동체로부터 제외시키는 처벌”14)을 뜻한다.
신약성서에도 어떤 신자가 교회에 커다란 물의를 일으키거나 교회를 욕되게 했을 때 교회에서 축출되는 예를 볼 수 있다. 바오로 사도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어떤 사람이 교인이라고 하면서도 음행을 일삼거나 탐욕을 부리거나 우상을 숭배하거나 남을 중상하거나 술 취하거나 약탈하거나 한다면 그런 자와는 상종하지도 말고 음식을 함께 먹지도 말라는 것입니다. … 여러분은 여러분 안에 있는 그 악한 자를 쫓아내십시오”(1고린 5,11-13). 또 마태오 복음서에도 이런 말씀이 있다. “어떤 형제가 너에게 잘못한 일이 있거든 단 둘이 만나서 그의 잘못을 타일러 주어라. … 그러나 듣지 않거든 한 사람이나 두 사람을 더 데리고 가라. … 그래도 그들의 말을 듣지 않거든 교회에 알리고, 교회의 말조차 듣지 않거든 그를 이방인이나 세리처럼 여겨라”(마태 18,15-17).
이상의 성서 말씀들은 모두 초대 교회의 관행들을 우리에게 알려 준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항상 명심해야 할 것은 교회가 맨 것은 교회가 풀 수도 있다는 사실이다.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도 매여 있을 것이요. 땅에서 풀면 하늘에도 풀려 있을 것이다.”(마태 18,18) 하셨다.
파문의 벌은 항상 교리나 윤리적으로 교회의 권위로 가르치는 바에 대한 항명(抗命)이 있을 때 내려졌다. 파문으로 박탈되는 것은 성사를 받는 권리, 대사를 받는 권리, 교회식으로 장례를 지낼 수 있는 권리, 교회의 재판권, 어떤 직무에 대한 선거권과 피선거권 등이었다. 이 가운데서 신자에게 가장 큰 고통은 성사 길이 막히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세례나 성품 등 이미 받은 성사를 무효화하는 것이 아니며 더 이상 하느님의 은총을 받을 수 없다는 말도 아니다. 파문 받은 자가 정한 벌을 감수하고 회개하여 항명을 거두면 교회는 파문을 풀어 주고 용서해 주었다.15)
보속이 죄에 대한 벌이요, 동시에 회개를 완전하게 하는 것이라면 기절벌이라고 불렀던 파문은 어떤 사람을 교회 공동체에서 제외시키려는 것이 아니라, 회개를 강하게 촉구하는 크고 특별한 보속이라고 할 수 있다.
2) 교회의 전통적 세 가지 보속
교회는 전통적으로 기도와 고행(단식)과 희사(자선)를 보속의 방법으로 여겨 왔다. 일찍이 성 베드로 크리솔로고 주교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형제들이여, 믿음을 견고히 세워 주고 신심을 변함없이 유지해 주며, 덕행을 지속시켜 주는 것이 세 가지 있습니다. 기도와 단식과 자선이 바로 그것입니다. 기도는 문을 두드리고, 단식은 청하며, 자선은 받습니다. 기도, 단식 그리고 자선, 이 세 가지는 한 묶음이고 서로 서로가 의지하고 있습니다.”16)
일반적으로 고해성사 때 고해 사제가 보속으로서 어떤 기도를 하라고 명하는 것은 신자들이 그 기도를 하면서 하느님을 가깝게 느끼고, 또 자신을 되돌아보며, 하느님께 찬미와 영광을 드림으로써 우리 죄로 상심(傷心)하신 주님을 위로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기도는 가장 일반적인 보속이라고 할 수 있다.
다음으로 단식(고행)도 아주 오래된 보속의 한 방법이다. 우리 교회의 가장 오래된 교리서라고 할 수 있는 [열두 사도들의 가르침]에도 “세례 전에 부세자(세례를 주는 사람)와 수세자는 미리 단식하시오. 그리고 다른 이들도 할 수 있으면 미리 단식하시오. 당신은 수세자에게 하루나 이틀 전에 단식하라고 명하시오.”(7,4)17) 하고 세례 전에 반드시 단식을 하였음을 알려 준다. 사실 단식이나 고행은 ‘쉽고 편한 것은 다 좋은 것이고, 힘들고 어려운 것은 무조건 다 나쁜 것인 양’ 생각하는 현대인들에게 무절제한 감정을 억제하고 또 악습을 고치고 끊는 데 절대적으로 필요한 영약이라고 할 수 있다.
[열두 사도들의 가르침]에는 희사에 대해서도 “네 손으로 벌이한 것이 있으면, 네 죄를 속량키 위해 주어라.”(4,6)라고 말한다. 뿐만 아니라 집회서의 저자는 “물은 뜨거운 불을 끄고, 자선은 죄를 없앤다.”(3,30)라고 하였다. 희사에 대한 토비트서의 말씀을 들어보자. “자선은 자선을 베푸는 사람을 죽음에서 건져내고 암흑에 빠지지 않게 해 주는 것이다. 누구든지 자선을 베풀면 그 자선은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께 바치는 좋은 예물이 된다(4,10). 자선은 사람을 죽음에서 건져내고 모든 죄를 깨끗이 없애 버립니다. 자선을 행하는 사람은 장수하게 될 것입니다”(12,9).
이렇게 기도와 단식(고행)과 희사가 교회가 전통적으로 해 온 보속의 방법임은 분명하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 더 알아야 할 것은 이 세 가지가 서로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다는 점이다. 이 세 가지의 관계에 대하여 “단식은 기도의 영혼이고 자선은 단식의 생명입니다. 이 세 가지는 서로 떨어져서는 제대로 작용할 수 없으므로 분리되어서는 안 됩니다. 어떤 사람이 이 세 가지 중 한 가지만 있고 다른 두 가지는 갖고 있지 않다면 한 가지도 갖고 있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따라서 기도하는 이는 단식도 해야 하며, 단식하는 이는 역시 자선도 베풀어야 합니다.”18) 이렇게 기도와 단식(고행)과 희사가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다는 것이다. 단식을 단순히 속죄를 위한 고행으로만 할 것이 아니라, 그 단식으로 마련한(절약한) 것을 이웃에게 베풀 때 그 단식은 완성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속죄하는 마음으로 단식하는 것 자체가 가장 좋은 기도가 아니겠는가? 참으로 죄를 뉘우치는 통회가 있다면, 우리는 사제가 정해 준 보속뿐 아니라, 일상 생활에서 당하는 정신적, 육체적 모든 고통을 죄의 보속을 위한 희생 제물로 바칠 수 있을 것이다.
1) [열두 사도들의 가르침], 정양모 옮김, 교부 문헌 총서 7권, 분도 출판사, 1993년, 47면 각주 ㉥2) 참조. 2) 이는 성찬례를 ‘제사’라고 표현한 최초의 문헌이다. 3) [열두 사도들의 가르침], 93면, 각주 ㉥1) 4) 미사 때의 참회 예절을 보면, “우리 죄를 반성합시다.” 하고 먼저 죄를 반성하고, 그 죄를 뉘우치며, ‘고백의 기도’로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사제가 “전능하신 하느님, 저희에게 자비를 베푸시어 죄를 용서하시고 영원한 생명으로 이끌어 주소서.” 하며 사죄경을 바치고, “주님, 자비를 베푸소서.” 하며 자비송을 바친다. 여기에는 사실상 고해성사의 요소가 포함되어 있다. 5) 배문한, “보속의 의미와 실천 방향”, [사목] 54호(1977. 11.), 37면 참조. 6) “파문”, 한국 교회사 연구소 편, [한국 가톨릭 대사전], 1985년, 1194면 참조. 7) 배문한, 앞의 책, 37면. 8) 위의 책, 40면 참조. 9) Leonard Foly, “Whats happening to Confession”, 87면:배문한, 위의 책, 40면에서 재인용. 10) James Cardianl Gibbons, [교부들의 신앙], 장면 옮김, 가톨릭 출판사, 1997년(10판), 393-394면 참조. 11) 배문한, 앞의 책, 40면 참조. 12) 위와 같음. 13) Dz, 893-928. 14) 한국 교회사 연구소 편, 앞의 책, 1194면. 15) 위의 글 참조. 16) “강론 43”, [성무일도] 2권, 사순 제3주간 화요일 제2독서의 기도. 17) 세례를 베푸는 자와 세례를 받는 자는 받드시 세례 전에 단식을 했다. 그리고 신자들도 함께 단식했다.(유스티노, [호교론] 1,61,2; 가(假) 클레멘스, [설교] 13,12,1; [재회] 7,37,1 등). 그러나 이 관행은 곧 사라지고, 세례를 받는 사람만 단식하는 관행으로 바뀌게 되었다(히폴리토, [사도 전승] 20, 사히드 역본; 테르툴리아누스, [세례론] 20, 1):[열두 사도들의 가르침], 57면에서 재인용. 18) 성 베드로 크리솔로고, 앞의 책 참조.
[사목, 1999년 11월호, 유영봉(마산교구 해운동 천주교회 주임 신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