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고해성사] 효과적인 보속은 어떤 것인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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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주호식 [ jpatrick ] | 작성일2004-10-30 | |||
효과적인 보속은 어떤 것인가?
우리는 지금까지 보속의 필요성과 보속의 역사 그리고 보속의 종류 등을 살펴본 셈이다. 이제 보속을 면제시켜 주는 대사(大赦)에 대해서 언급하고, 우리의 실제 성사 생활에서 구체적으로 어떤 때에 어떤 보속을 줄 것인지, 그리고 보속의 개인적 그리고 사회적 차원, 일상 생활 속의 보속 등을 살펴보고자 한다.
1. 보속을 면제하여 주는 대사
가톨릭 교회의 교리 중, 이 대사에 관한 교리만큼 오해와 비방을 많이 받은 교리도 없을 것이다. “대사란 사람이 죄를 지었다가 회개하고, 그 죄를 고백하여 죄와 그 죄로 인한 영벌을 면하게 된 후, 그 죄에 대한 잠벌(暫罰)의 일부나 전부를 예수 그리스도의 무한하신 공로에 의지하여 면제하여 주는 은전(恩典)을 말하는 것이다.”1)
죄와 그 죄에 대한 잠벌을 비교해 보면, 하느님과 이루는 관계에서 죄가 크고 무거운 장애라면 그 죄에 대한 잠벌은 훨씬 가벼운 장애라 할 수 있다. 그러므로 교회가 그리스도의 공로에 의지하여 죄를 용서해 줄 수 있음을 인정한다면, 잠벌을 면해 주는 것은 훨씬 당연한 일이라 할 수 있다.
일찍이 고린토 교회에 친족상간(親族相姦)의 죄를 범한 사람이 있었다. 사도 바오로는 그를 ‘모임에서 제거되어야 할 사람’이라고 주 예수의 이름으로 단죄하였다(1고린 5,4-5 참조). 그러나 그가 진심으로 뉘우치고 회개하자 그의 벌을 면제하여 주었다. “그 사람은 이미 여러분 대다수의 사람에게서 상당한 벌을 받았으니, 이제는 여러분도 그를 용서하시고 위로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는 지나친 슬픔에 빠져들지도 모릅니다. 그러니 여러분은 부디 그에게 사랑을 다시 베풀어 주십시오. … 내가 무엇이든 용서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보시는 앞에서 여러분을 위해서 용서해 준 것입니다”(2고린 2,6-10).
이렇게 교회는 사도들과 사도들의 후계자인 주교들을 통해 잠벌에 대한 보속 의무를 면제하는 대사권을 행사하여 왔다. 일반적으로 처벌권을 가진 사람은 으레 감면권(減免權)도 갖는다. 그리스도에게서 맺고 풀 권한을 모두 받은 교회가 처벌권과 함께 감면권을 갖는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교회사 안에서 테르툴리아노와 치프리아노의 저서를 보면, 처벌 중에 회개하는 빛이 뚜렷한 사람에게는 (특히 순교하는 사람의 간청이 있는 경우에는) 이미 선언한 벌을 감면하여 주었다. 325년 니케아 공의회 법규 제12조에도 주교들이 회개자들의 실정을 감안하여 보속의 기간을 연장하거나 널리 사면하여 용서할 권한을 가진다고 선언하였다.2) 보속의 감면이 곧 대사의 은전이다. 주교의 대사 선언은 교회와 하느님 앞에 항상 유효한 것으로 인정받아 왔다.3)
대사의 은전을 베푸는 데는 무엇보다 먼저 진정한 회개와 고백을 통한 죄 의 용서가 있어야 한다. 회개와 죄의 용서가 없는 이에게 대사를 줄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항상 대사를 받기 위해서는 정한 기도, 자선, 고행 또는 순례 등의 조건을 진심으로 실행하는 것이 전제된다. 대사에는 잠벌에 대한 모든 보속을 면제하여 주는 전대사(全大赦)와 일부분을 면제하여 주는 한대사(限大赦)가 있다.
프로테스탄트 신자들이 대사라는 말조차 듣기 싫어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영국 성공회에서는 이를 법으로 명기한 바가 있다.4) 대사를 받기 위한 회개와 사죄 그리고 여러 가지 조건 등을 알지 못하는 듯 프로테스탄트 신자들은 아직도 ‘대사=면죄부’라는 인식을 갖고 있다. 물론 16세기에 교회가 대사의 은전을 남용한 것을 우리 교회도 인정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죄 사함의 권한을 받은 교회가 뉘우쳐 회개하고 그 죄를 고백함으로써 죄 사함을 받은 이에게 죄의 잠벌을 면하여 주는 보속을 덜어 주는 대사를 줄 수 있는 권한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너무나 자명한 것이라 하겠다. 이는 국가의 죄인에 대한 사면을 보아도 쉽게 이해되는 것이다.
2. 보속에 대한 일반적인 원칙
우리는 앞에서 보속을 면해 주는 대사에 대하여 잠깐 언급하였다. 이제 실제로 고해성사에서 어떤 보속을 주는 것이 영적 생활에 유익한 것인지 살펴보려 한다.
요즘 우리 교회에서는 공동 참회 예절을 강조하면서 개별 고백이나 보속의 필요성을 부인하려는 경향이 없지 않다. 초대 교회의 과중한 보속에서 해방된 현대의 신자들은 상징적으로 남아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요즘의 가벼운 보속마저 회피하려고 할 뿐 아니라, 죄의 개별 고백까지도 회피하려 한다. 이렇게 된 데에는 죄의 고백과 보속이 너무 기계화된 것도 하나의 이유일 것이다. 어떻게 보면, 현대인에게는 겸손을 요구하는 ‘죄의 고백’ 그 자체가 하나의 보속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고백의 의식은 심리적으로 도움이 되지 못하고, 많은 경우에 해로울 수 있다. 지금의 고해성사와 보속은 영적 성장을 가져오지 못할 뿐 아니라, … 죄의 단순한 기계적인 고발과 죄의 용서와, 흔히 아무런 관련성도 없는 보속은 영성적이고 도의적으로 성장하기를 무척 갈망하는 많은 신자들에게 받아들여질 수 없는 것이다.”5)라고 한다. 그러면 영적 성장을 도모하고 유익을 주는 보속은 어떤 것인가? 이제 합당한 보속을 위한 몇 가지 조건을 살펴보고자 한다.
1) 보속은 죄의 경중에 따라 주어야 한다6)
큰 죄에는 무거운 보속을 주고 소죄나 미죄에 대해서는 가벼운 보속을 주는 것은 상식적인 일이다. 그러나 남의 물건을 훔치는 버릇이 있는 어린이에게 작은 물건을 훔치는 버릇, 곧 도벽(盜癖)을 근절시키기 위해서는 엄하게 다루어야 할 필요도 있을 것이다. 이렇게 대죄와 소죄를 구별하는 것도 사안에 따라 신중해야 할 것이다.
2) 고백자의 능력에 상응하게 보속을 주어야 한다7)
다 할 수 없는 과중한 보속은 또 다른 죄를 짓게 하고, 고해성사를 점점 회피하게 한다. 우리 속담에 ‘혹 떼려다가 혹 붙인다’는 말이 있다. 죄 사함을 받기 위해 고해성사를 보았는데 고해성사 때 받은 보속을 다 못하여 또 다른 죄를 하나 더 짊어지게 된다면 이는 분명 바람직한 일이 아니다. 그래서 생긴 법칙이 ‘지옥에 보내는 것보다는 차라리 연옥에’라는 것이다. 곧 과중한 보속을 주어 죄에다 죄를 덧씌우고 지옥에 가게 하느니 연옥에 가더라도 가벼운 보속을 주는 것이 더 낫다는 생각이다.8)
3) 보속은 한정되고(determinata), 짧고(brevis), 외적(externa)이어야 한다
예를 들면, “보속으로 선행을 한 번 하시오.” 하는 막연한 내용은 고백자가 고민하게 만드는 것이 된다. 어떤 종류의 선행을, 얼마나 해야 되는지가 불분명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시기적으로도 ‘항상’, ‘오랫동안’ 등 애매한 표현을 사용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표현은 고백자에게 제대로 보속을 채운 것인지 어떤지 하는 불안한 마음을 안겨 주기 십상이다. 그리고 ‘한 달 이상’ 어떤 희생을 하라든가 ‘다음 고백 때까지’ 무엇을 하라는 보속은 ‘짧은’ 것이라고 볼 수 없다. 위에서 말한 원칙 중 ‘외적’이라는 것은 남들이 알아볼 수 있는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보속을 하는 당사자가 ‘확실히 보속을 했다.’는 확신을 가질 수 있는 감각적인 것을 말한다.
3. 고해 신부의 역할과 고뇌
일반적으로 고해 신부는 아버지, 재판관, 의사, 교사 등 4가지 역할을 해야 한다. 복음서에 나오는 ‘잃어 버린 아들의 비유’의 아버지처럼, 죄로 불안해하고 죄스러워하는 고백자들을 따뜻이 감싸 주고 하느님의 사랑을 느낄 수 있도록 해야 하며, 죄의 경중과 문제의 핵심을 지적하며 올바른 판단을 하도록 가르치는 판사의 자세가 필요하다. 그리고 고백자의 내면을 꿰뚫어 보며 고백자가 악습에서 벗어나도록 무엇을 어떻게 하는 것이 급선무인지를 가르쳐 줄 수 있는 의사와 교사의 역할도 할 수 있어야 바람직한 고백 사제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고백자가 악습에서 벗어나고 영적으로 성장하기 위해서 어느 정도 힘든 보속이 필요하다는 의견도 있다. 좋은 행동이 지속되면 덕이 되고, 나쁜 행동이 거듭되면 악습이 되고 습관이 굳어지면 성격을 형성한다고 한다. 따라서 안일한 방법으로 악습을 고치겠다는 것은 달걀로 바위 치기와 같은 것이다. 우리는 가끔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자꾸만 그 일에 끌리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는데, 이것은 죄에 대한 매력이나 애착을 끊지 못하기 때문이다. 일찍이 성 토마스는 “죄에 대한 애착이나 매력을 끊는 것은 처벌적이고 고통스런 방법으로 가능하다.”9)라고 했다. 이런 면에서 죄에 비해 보속이 우스꽝스러울 정도로 가벼운 것이어서는 효과 있는 보속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고백자에게 참으로 또 효과적으로 참신한 보속을 준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고백 사제는 고해성사 예식서가 말하고 있듯이 죄로 파괴된 질서를 회복하고, 죄인이 앓고 있는 영적 병을 고치려면 어떤 보속이 가장 효과적인 약이 될 수 있는지 항상 고심하며 연구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토요일 저녁이나 성탄, 부활 축일 전에 줄지어 서 있는 고백자들 각자에게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며 가장 적절한 보속을 주기는 거의 불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사제들은 성당에서 간단히 외울 수 있는 기도문이 그래도 가장 효과적인 보속이라고 생각하는지도 모른다.
고해성사를 주는 사제의 입장에서는 고백자가 누구인지 잘 알면, 그 사람에게 더 적합한 보속을 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고백자가 자신의 신분을 밝히지 않는 한 고해 신부는 고백자를 아는 듯한 인상을 주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다. 왜냐하면 많은 고백자는 대부분 자신을 밝히기를 원하지 않기 때문이다.
4. 어떤 보속을 줄 것인가?
1) 기도의 보속
많은 경우에 한 시간 내내 고해성사를 주는데 보속은 꼭 같은 것을 주는 경우가 많다. 큰 죄를 지었으면 ‘십자가의 길’ 한 번, 또는 ‘묵주기도’ 몇 번, 또는 ‘평일 미사 참여’ 등등이고 소죄를 지었을 경우에는 ‘주님의 기도’, ‘성모송’ 몇 번 등이 보통이다. 이 외에도 성체 조배, 자녀를 위한 기도, 부부를 위한 기도, 부모를 위한 기도 등 많은 특별한 경우에 바치는 기도가 있다. 물론 기도 자체가 때로는 훌륭한 보속일 수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리고 기도는 보속을 주는 편에서나 받는 편에서나 쉽고 간편하다는 이점이 있기도 하다. 그러나 천편일률적인 보속은 삶 속에 살아 있는 은총의 계기가 되어야 할 성사 생활을 기계적인 것으로 만들 위험도 있다.
2) 생활 속의 보속
그래서 요즘은 여러 신부님들이 좀더 생활 속에서 체험할 수 있는 보속들을 주려고 시도하고 있다. 예를 들면, 과음하는 사람들에게는 얼마간의 금주를, TV 때문에 자신의 의무를 소홀히 한 이들에게는 얼마간 TV 안 보기 등의 절제를, 혼인 서약에 불충실한 사람들에게는 가족과의 외식이나 선물을, 말로 실수를 많이 하는 이들에게는 침묵의 보속을, 용서하지 못하는 이들에게는 그 사람을 위한 영성체를, 남의 허물을 들추어내는 악습에는 남을 칭찬하기를, 인색하거나 낭비를 많이 하는 이들에게는 자선을, 자녀에게나 가족 상호간에 심한 말로 상처를 준 경우에는 사랑의 편지 쓰기를 명하는 것도 좋을 것이다.
이 밖에도 여건이 허락한다면 그 사람의 악습을 고치는 데 도움이 될 책을 읽어보도록 하는 것도 좋을 것이다. 그리고 갖가지 봉사 활동, 피정이나 성지 순례뿐 아니라, 생활 속의 크고 작은 수많은 희생을 보속으로 줄 수도 있다.
3) 성서를 읽고 쓰는 보속
2000년 대희년을 앞두고 우리 한국 교회의 희망적인 한 현상을 들자면 많은 신자들이 성서 공부와 성서 쓰기를 시작했다는 점이다. 그래서 요즘은 성서 읽기 쓰기를 보속으로 주는 사제들도 있다. 사실 “하느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힘이 있으며 어떤 쌍칼날보다 더 날카롭다.”(히브 4, 12)라고 할 수 있다. 죄의 종류별로 그에 맞는 성서 구절을 제시하면 더욱 효과적이다. 어떤 사제는 아예 성서 구절을 예쁜 카드에 적어 놓았다가 주기도 한다. 이렇게 정성을 기울인다면, 그 보속 카드를 아마 두고두고 책갈피에 꽂아 두고 묵상을 할 것이다. 십계명에 따라 보속으로 참고가 될 만한 성서 구절을 제시해 보고자 한다.10)
* 제1계명 - 기도(아침, 저녁 식사 전후)를 하지 않을 때 : 시편 12-16;25;27; 마태 6,1-15 - 성호 긋기를 부끄러워할 때 : 마르 8,34-38; 루가 9,23-26 - 믿음의 부족과 내세에 대한 의심이 많을 때 : 루가 16장(부자와 나자로) - 대학 입시생(부모와 본인)이 미사와 기도를 하지 않을 때 : 시편 127
* 제2계명 - 맹세나 헛맹세를 잘 할 때 : 마태 5,33-37; 시편 38;39; 야고 3장 - 하느님과 예수님께 저주나 원망을 할 때 : 마르 3,20-30 - 미신 행위(점을 치거나 사주팔자 관상보기)나 저주를 할 때 : 시편 115; 135
* 제3계명 - 주일 미사에 자주 참석하지 않을 때 : 시편 27; 31-33; 92; 96-98; 마르 2,23-28 - 새롭게 생활하게 할 때 : 로마 12; 골로 2,20―4,6
* 제4계명 - 부모, 시부모와 불화가 있을 때 : 집회 3장 - 가정에서 부부와 자녀 관계에 불화가 있을 때 : 에페 4,17 - 6,4 - 형제 자매 관계에 불화가 있을 때 : 시편 55(마음이 상했을 때); 야고 2,14-26(도와줌) - 자녀의 신앙 교육을 소홀히 할 때 : 루가 12,35-48; 집회 30장
* 제5계명 - 살인(낙태, 임신 중절) : 시편 6; 38; 51; 88; 루가 15; 요한 8장 전반부 - 싸움과 증오 : 마태 51,21-26; 1고린 13장; 시편 55(억울한 하소연) - 과음 : 집회 31,25-31; 37,27-31 - 신자끼리 법정 투쟁할 때 : 1고린 6,1-11
* 제6/9계명 - 결혼 문제 : 1고린 7장 - 음행 : 1고린 6,12-20 - 고백자가 남을 용서하도록 할 때 : 요한 8장 전반부
* 제7/10계명 - 남에게 경제적 손해를 입혔을 때 : 사도 5,1-11 - 자신이 경제적 손해를 봤을 때 : 시편 37;73 - 교무금이나 헌금, 공익에 인색할 때 : 마태 6,19-34; 2고린 8-9장 - 세상 재물에 얽매일 때 : 루가 12장(어리석은 부자의 비유)
* 제8계명 - 말(혀) 조심 : 시편 39(혀); 집회 27,4-7(말); 루가 6,37-45(악한 마음)
* 기타 여러 경우 - 오랜만에 성사를 보고 새 출발을 할 경우 : 골로 2,20―4,6; 로마 12장 - 고해성사를 형식적으로 볼 때 : 로마 13,8-10; 마태 23장; 루가 11,37 - 12,7 - 그날의 독서와 복음을 보속으로 줄 수도 있다. (특별히 주일에) - 시편은 기도의 책이므로 늘 사용할 수 있는 성서이다.
* 이를 위해 고해소에 성서, 필기구를 준비해 두는 것이 바람직하다.
5. 보속의 사회적 국가적 차원
우리는 지금까지 개인적이고 가정적 차원에서 보속을 살펴보았다. 그러나 보속의 문제는 개인적인 차원뿐 아니라, 사회적 국가적 차원에서도 요청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가장 쉬운 예로 제2차 세계대전 후 일본과 독일이 제2차 세계대전의 피해국을 상대로 한 보상의 경우를 들 수 있다.
“그가 무릎을 꿇었다. 무릎을 꿇어야 할 이유가 없는 그가, 무릎을 꿇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무릎을 꿇지 않고 있는 다른 모든 사람을 대신해 지금 무릎을 꿇고 있다.” 이것은 서독의 동방 정책의 기수 빌리 브란트 수상이 폴란드와 국교 정상화 조약을 맺기 위해 1970년 12월 7일 폴란드의 수도 바르샤바를 방문해 나치스에게 희생된 유다인 기념비 앞에서 무릎을 꿇고 용서와 화해를 비는 감동적인 모습을 묘사한 글이다. 현장에 있던 폴란드인들까지 놀라게 한 브란트의 이러한 행동은 그가 철저한 나치스 반대자였다는 점에서 더욱 진한 감동을 주는 것이다.11) 독일은 자신들이 제2차 세계대전 중에 저지른 만행에 대해 ‘전후 보상법’을 통해서 철저히 보상을 하였을 뿐 아니라, 나치 전범자들 5천 명 이상을 적발하여 법적으로 처벌하였다.12) 그리고 최근에도 “독일 정부와 기업은 1999년 10월 7일 2차 대전 중 나치 독일에 의해 강제 노역에 동원된 생존자들에 대한 보상금으로 33억 달러를 제시하였다. 워싱턴에서 이 날 오후에 열린 협상에서 오토 람스토프 독일 협상 대표는 ‘사실 33억 달러는 당시 고통받은 사람들 모두를 돕기에는 부족하다’고 시인하고, 그러나 ‘사회 보장비 등이 삭감되고 있는 상황에서 보상금 지급에 대해 독일 국민들을 설득하기는 쉽지 않다’고 덧붙였다. 이번에 제시된 33억 달러 중 11억 달러는 독일 정부가 부담하고 나머지 22억 달러는 바이엘, 크루프, 지멘스, 폴크스바겐, IG-파르멘 등 제2차 세계대전 동안 강제 노역을 이용한 것으로 알려진 기업들이 부담한다.”13)라고 하였다. 이렇게 독일은 물질적으로는 물론 정신적으로도 ‘그 정도면 되었다’고 할 정도로 충분한 대가를 치렀다. 바르샤바 전몰 용사 기념탑 앞에서 브란트의 ‘무릎 꿇음’이 바로 그 상징이라 할 수 있다. 우리는 독일이 참으로 다양한 형태의 보상과 사과를 하였음을 잘 알고 있다. 뿐만 아니라, 자신들이 저지른 비인간적인 만행의 현장과 실체를 그대로 보존하며 반성과 재발 방지의 교육장으로 살고 있다.14)
이에 비해 같은 제2차 세계대전의 만행을 저지른 일본의 태도는 대조적이다.
“판결 선고는 10초만에 끝났다. ‘원고의 청구는 어느 것이나 기각한다. 소송 비용은 원고의 비용으로 한다.’ 그리고 재판부는 황급히 퇴장했다. 방청석에는 분노하여, 퇴장하는 재판장을 부르는 소리, 망연자실하여 한숨을 쉬는 소리로 한동안 어수선하였다.” 이는 지난 1999년 10월 1일 오전 11시 30분, 도쿄 지방 재판소 103호 법정에서 있었던 일이다. 1993년 4월 5일 재일 한국인으로 종군 위안부 피해자인 송신조 할머니가 일본을 상대로 사죄와 배상을 요구한 이래 6년 반에 걸친 심리 후의 판결은 10초만에 패배로 끝난 것이다.15)
일본은 그 동안 종군 위안부 모집이 국가가 개입한 것이 아니라고 발뺌하여 왔다. 그러다가 당국이 개입한 증거 서류가 발견되고 명백히 일본 당국이 조직적으로 저지른 범죄임이 확실한데도 정부 차원의 배상과 사과를 끝까지 거부하고 있는 것이다. 요즘도 일본과 한국 사이에는 장관이나 당국자들의 ‘망언’과 그에 대한 우리 측의 ‘규탄’이 되풀이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자신들의 비인간적인 만행을 진정으로 뉘우치는 기색을 조금도 찾아볼 수가 없는 뻔뻔스런 모습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국가적 사회적 차원에서도 참으로 자신들의 잘못에 대한 참된 뉘우침이 있다면, 당연히 그 뉘우침을 드러내는 보속이 뒤따라야 하는 것이다.
맺는 말
보속은 뉘우치는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당연한 결과이다. 참으로 자신의 죄나 과오를 뉘우친다면 그 뉘우침은 반드시 보속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는 자신이 그 죄를 뉘우친다면 같은 잘못을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스스로 어떤 대책을 세우기 마련이다. 도둑을 맞았으면 도둑을 막을 방도를 세우기 마련이고, 화재를 입었으면 화재 방지 시설을 철저히 하기 마련이다. 바꿔 이야기하자면, “진지하게 보상할 의무가 있음을 알고 이를 겸손되이 실천하지 않는다는 것은 통회가 불충실하다는 증거라 할 수 있다.”16) 이렇게 볼 때 보속과 회개는 별개의 것이라고 할 수 없다. 뿐만 아니라, 우리 죄를 속죄하기 위해 스스로 십자가의 제물이 되신 주님의 사랑을 생각할 때 자신의 죄를 속죄하기 위한 보속은 그리스도교인의 기본적인 삶의 자세라 할 수 있다.
옛날 영성 서적에 보면 모병습관(毛病習慣)이라는 말이 있다. 이는 깎고 깎아도 계속 길어나는 털과 같이 뿌리뽑기 힘든 악습을 뜻하는 말이다. 우리가 한 번의 통회로 모든 악습에서 해방될 수 있다면 성인이 되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성 프란치스코는 자신의 욕정에서 벗어나기 위해 가시가 많은 장미 덩굴에서 구르기도 했다고 한다. 김유신 장군은 과거의 유혹에서 벗어나기 위해 습관대로 기방(妓房)으로 향하던 애마의 목을 베었던 것이다.
고해 신부가 정해 준 보속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일상의 생활 안에서 스스로 악습에서 해방되고 영적으로 나날이 새로워지기 위해 자발적으로 보속을 해야 한다.17) 보속하는 정신이야말로 죄의 벌을 면하고, 악습을 고치는 영약이며, 우리를 나날이 새롭게 하는 것이다. 매일의 생활 속에서 자신의 위치에서 자신의 몫과 의무를 다하기 위해서 겪어 내야 하는 수많은 고통을 우리가 지금까지 지은 모든 죄와 또 하느님을 등지고 사는 세상 사람들의 죄까지도 보속하는 자세로 기쁘게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이렇게 삶 속의 보속이 생활화될 때 우리는 참으로 그리스도의 수난과 구원에 동참하는 진정한 화해의 대희년을 준비하는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다.
1) James Cardinal Gibbons, [교부들의 신앙], 장면 옮김, 398면. 2) 위의 책, 400면. 3) 교회 역사 안에서 대사를 베푼 많은 사례를 볼 수 있다. 토마스 데 아퀴노는 교황 그레고리오 1세가 로마의 사도좌 성전을 참배한 신자들에게 대사를 베풀었음을 증언하였다. 9세기의 교황 세르지오는 실베스테르 성당과 마르티노 성당의 참배자들에게 3년과 30, 40일의 대사를 주었고, 11세기에는 교황 레오 9세가 비순디니 주교좌 성당 축성식에 참석한 신자들에게 각자의 보속의 1/10에 해당하는 감면 대사를 주었다. 1300년에 교황 보니파시오 18세는 성년 대사를 선포하는 동시에, 그 후부터는 100년에 한 번씩 이를 선포하도록 규정하였다. 그 후 1350년에 교황 클레멘스 6세가 성년을 50년마다 한 번씩 하기로 하였고, 1475년 교황 바오로 2세는 이를 25년마다 선포하도록 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4) “Articuli pro Clero”, 1584년, Sappro, 194.:[교부들의 신앙], 401면에서 재인용. 5) “고백성사의 새로운 방향”, [사목] 17호(1971.5.), 39면. 6) Dz, 699.905.923.925 참조. 7) 위와 같음. 8) Angelo Crazoli, La Practica dei Confessori, 1952년, 80-85면 : 배문한, 앞의 글, 42면에서 재인용. 9) 토마스 데 아퀴노, Summa contra Gentiles 3, 158. 10) 이것은 마산교구 황봉철 신부가 교구 사제들에게 사목 자료로 제공한 것임. 11) 이민호, [독일, 독일 민족, 독일사], 느티나무 출판사, 1990년, 205면 참조. 12) 리영희, [자유인], 범우사, 1991년, 267면 참조. 13) Digital Chosunilbo, 1999년 10월 8일자. 14) 1979년 ‘세계 문화 유산’으로 지정된 폴란드의 ‘오수비엥침’(Oswiecim) 박물관은 매우 특이한 곳이다. 20세기에 들어서 세워진 축조물로서 마흔 살의 ‘어린’ 나이에 당당히 ‘세계 문화 유산’이 되었다. 최연소 문화 유산인 것이다. … 대개의 박물관이 과거의 영광스런 기록들을 전시하는 데 반해 이 곳은 한 인간 집단이 다른 인간 집단들을 무참히 학살한 현장으로, 다시는 그런 비극을 이 땅에서 되풀이해서는 안 된다는 뜻에서 대략 학살의 현장을 그대로 보존하여 보여 주고 있다. 오수비엥침은 독일 점령 시절(1939-1945년) 나치 강제 수용소가 세워져 350만의 무고한 유태인들이 죽어 간 아우슈비츠(Auschwitz)의 옛 이름이다. 이 전관에는 나치의 만행을 기억하기 위한 국별 전시관, 소련, 폴란드, 체코, 유고, 오스트리아, 헝가리, 프랑스, 벨기에, 이탈리아, 네델란드, 유다인 관 등이 있다. 이와 비슷한 전시 공간은 예루살렘의 야드 바셈(Yad Vashem : 홀로코스트 기념관)에서, 제네바의 국제 적십자사 박물관도 있다. 야드 바셈의 ‘현충의 방’에선 유럽 지도 위에 21개의 강제 수용소의 위치를 표시하고 있다(Digital Chosunilbo, 1996년 10월 1일자 참조). 15) [조선일보], 1999년 10월 13일자, 7면, “時論-10초만에 끝난 위안부 재판” 참조. 16) B. Haring, Christian Reneval in a Changing World, 1966년, 454면 : 배문한, 앞의 글에서 재인용. 17) Dz, 906.923 참조.
[사목, 1999년 12월, 유영봉(마산교구 해운동 천주교회 주임 신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