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고해성사] 미디어 시대의 고백 문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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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주호식 [ jpatrick ] | 작성일2005-01-06 | |||
미디어 시대의 고백 문화
미디어 시대의 만개(滿開)
현대는 미디어의 시대이다. 이 무슨 새삼스런 말인가? 미디어의 어원이 중개(medium)에 있다면, 또 그것이 자연과 인간 사이의 중개를 말한다면 미디어는 문화 생성의 도구로서 인류와 처음부터 함께해 왔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오늘 우리가 자신의 시대를 일컬어 미디어의 시대라 하는 것은 미디어가 단지 어떤 도구적 관점에서 매개나 중개하는 것에 머무르지 않고, 사회의 변화 그 자체를 근본적으로 견인하고 있기 때문이리라. 특히 현대의 미디어라고 할 수 있는 영화, 전화, 라디오, 텔레비전, 인터넷 등이 속속 역사 안으로 들어오면서 그것이 갖는 위력은 점점 가속화되었다.
미디어의 위력은 먼저 우리 자신이 그것이 없던 시절을 감히 상상하기조차 힘들 정도가 되었다는 데서 찾을 수 있다. 일반 신자 가정의 예를 보아도 텔레비전이 집 안에서 가장 좋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으며, 가족 간의 대화도 텔레비전 드라마나 뉴스를 중심으로 시작되고 이어지는 경우가 많다. 텔레비전 없는 우리의 일상이란 얼마나 보잘것없으며 창백하고 메마르던가. 전화, 특히나 휴대전화는 이제 개인의 새로운 수호성인(?)으로서 언제나 함께하면서 우리의 무료함을 달래주고 있다. 인터넷은 세계 각국을 제집 드나들 듯이 넘나들면서 우리에게 ‘또 다른 세계’를 제공하고 있다. 그리고 점점 더 이들 미디어는 이종교배의 결합을 통해 진화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런 최첨단 미디어들로 장착한 인간 자신과 그의 일상은 얼마나 달라진 걸까? 미디어를 만들어낸 것은 인간이지만, 어쩌면 지금의 상황은 미디어 자체가 인간을 재창조하고 있다고 할 수 있을 정도이다. 때로 우리는 자기 행동을 텔레비전 드라마나 영화 속에 등장하는 사람들의 행동방식과 비교하여 거기에서 일정한 정당성을 얻으려 하기도 하며, 이들 매스미디어 속에서 모방의 대상을 발견하기도 한다. 바야흐로 미디어가 만들어내는 새로운 삶의 양식들이 지금 우리 앞에 펼쳐지고 있는 것이다. 거기에 대해서 처음부터 어떤 섣부른 가치평가를 내릴 필요는 없다. 그러기에 앞서 이런 사회적 미디어가 파생시키는 문제들이 무엇인지에 대한 더욱 깊은 성찰이 필요하다.
그런데 현재의 미디어들은 우리에게 점점 더 이런 성찰의 시간을 없애는 방향으로 진화되고 있다는 우려가 든다. 이를테면 미디어는 점점 더 자신의 본질적 속성인 매개 자체를 없애는(im-mediate) 방향으로 진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텔레비전을 통해 방금 일어난 사건을 즉각적으로(immediately) 전달받고, 휴대전화는 끊임없이 우리를 호출하여 타인과 관계를 맺으라고 요구한다. 그러나 이런 소통의 즉각성이 곧 성찰의 심화나 친밀감의 깊이로 연결되지 않는다는 데 문제가 있다. 오히려 소통의 엄청난 양적 발전이 이것을 저해하고 있다고까지 사람들은 말하고 있다.
이런 미디어 환경은 성찰과 반성의 측면보다는 찰나적 이미지와 즉각적 행동양식에 빠져들게 한다. 그리고 미디어의 상업주의 전략은 이것을 더욱 부채질하고 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우리의 고민이 시작된다. 미디어는 결코 일기를 쓰지 않는다. 곧 오늘날 미디어는 그렇게 성찰적이지 않다. 그것은 단지 쏟아내고 제공할 뿐 우리에게 성찰과 고백의 여백을 따로 제공하지는 않는다. 아니, 이 성찰과 고백마저 하나의 이미지로 복제해서 다시 우리에게 제공한다. 우리는 이 복제된 이미지를 보고 스스로 성찰하는 척하는지 모를 일이다.
고백의 상품화
일기는 아주 솔직한 자기 고백의 기술이라 불린다. 세상이 잠든 이슥한 시각에 자기 방에 들어가 책상을 말끔하게 정리하고 정성스럽게 연필을 깎은 뒤 흰 종이 위에 또박또박 한 글자 한 글자 써내려 가는 사람을 상상해 보라. 그는 오늘 하루 일어났던 일들과 그에 대한 자신의 반응, 내면적 단상들을 ‘솔직하게’ 적는다. 그는 일기를 통해 자신을 성찰하고, 자신과 대화한다.
그러나 우리 모두 알듯이 일기는 언제나 감추어져 있지 않다. 그것은 항상 내밀한 자신과의 대화에 그치지 않는다. 일기를 쓰는 사람 자신이 이미 그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그는 일기를 쓰면서도 항상 누군가, 다른 사람의 시선을 느끼고 있으며, 누군가에게 읽힐 가능성을 배제하지 못하고 있다. 그의 일기는 우선 가족 중 누군가에게 발견될 수 있고, 사회적으로 유명한 사람이라면 그의 일기는 개인사의 기록이 아니라 사회적 기록으로까지 확대된다.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고, 언제든 공개될 가능성을 염두에 둘 때 일기는 자신만의 내밀한 기록으로 머물지 않는다. 거기에는 늘 자기 정당화와 자기 미화의 욕망이 내재되어 있다. 그런데 이것은 이미 초등학교 시절 우리가 처음 일기 쓰기를 배우던 시절부터 있어왔던 것이다. 요즘도 초등학교에서는 한글 익히기의 일환으로, 그리고 바른 생활 어린이 육성하기의 방법으로 일기를 쓰게 한다. 어쩌면 일기라는 내밀한 자기 이야기 서술 방식은 사회에 적응하고 성장하기 시작한 개인의 사회화 도구일지 모른다.
그런데, 요즘은 아예 출판을 목적으로 일기를 쓰는 사람도 있다. 몇 년 전 탤런트 출신의 한 여성은 『나도 때로 포르노그라피의 주인공이고 싶다』라는 책을 써서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이 책은 일종의 고백의 상업화라고 부를 수 있을 정도이다. 과연 그런 내밀한 사생활이 공개적으로 수많은 익명의 대중에게까지 읽힐 필요가 있었을까? 질문 자체가 우스꽝스러워 보인다. 정답은 대중이 그걸 원하고 있다는 것일 게다. 대중이 원한다면 출판사는 그것을 채워줘야 한다. 그리고 미디어는 이것을 홍보해 주어야 한다. 왜? 대중이 원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진정으로 그것을 바라는 것은 대중이 아니라 그들을 부추겨서 그것을 욕구하게 만드는 자본주의의 상품화 전략이 아닐까? 어떤 사람들은 그 책이 기술하는 일탈적 성윤리를 문제삼지만 정작 더 문제인 것은 이를 통해 돈벌이를 하려는 일련의 욕망이다. 시장의 무제한적 욕망은 전통적 사고방식에서는 도저히 사고팔 수 없는 것마저 상품화시켜서 저자거리에 내놓는다. 그리고 오늘날 이런 자본의 상품화 전략에서 미디어는 최고의 지위를 부여받고 있다.
고백, 그 가운데서도 개인의 성적 체험을 상품으로 연결하고, 많은 사람이 거기에 몰두하는 것은 생각만 해도 끔찍한 노릇이다. 오늘날 유행하고 있다는 연예인들의 누드 사진 찍기 열풍도 모두 이 연장선상에서 이루어지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연예인들의 누드 사진 찍기는 일종의 ‘몸의 고백’, 고백의 영상매체적 변용이라 할 수 있다. 아마도 누드 열풍의 선두주자도 이 탤런트였을 것이다. 평소에 볼 수 없는 곳, 감추어진 부분을 보고 싶어하는 대중의 욕망을 이용한 이런 상업 전략들은 스스로 고백을 창출한다. 여기서 물론 고백의 내용을 결정하는 것은 고백자 자신이 아니라 이것을 바라는 대중의 욕망, 미디어의 욕망이다.
미디어는 스스로 대중을 호명하고, 대중의 욕망을 창출한다. 사람들은 일기장이나 가까운 사람, 또는 고해소에서가 아니라 미디어를 통해 자신을 고백하기를 즐긴다. 그리고 거기서 고백은 카메라의 묘사로 이미지화된다. 이른바 위안부 누드로 사회적 파문을 일으켰던 한 탤런트는 문제가 확대되자 피해 할머니들을 찾아가 무릎 꿇고 눈물을 흘리며 사죄했다. 창백한 뺨, 흐르는 눈물, 자갈 위에 꿇은 무릎 등의 이미지가 참회를 대신한다. 모든 내면의 속뜻이 샅샅이 이미지로 떠올라 보인다. 또는 겉으로는 딴 생각을 하고 있어도 외면적으로 그런 모습을 취하고만 있다면, 그것은 충분히 참회한 것으로 헤아려진다.
모두가 이런 식이다. 이로써 이 누드집을 기획했고, 파문을 확산시켰던 미디어는 위안부 누드 파문이라는 드라마를 종결하고자 한다. 그러나 거기에는 단순한 사죄만으로는 부족한 사회적 토론이 결여되어 있다. 오히려 이런 사죄들은 여하한 사회적 토론에 의해서 장기적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쪽으로가 아니라 단기적 봉합에 머물면서 문제를 잠복시키고 있다. 어떤 철학자의 말처럼, 이미지만을 생산하고 유통시키는 시대정신에는 엄밀한 반성의 정신이 결여되어 있다.
내용 없는 이미지의 남발
작년부터 올해까지 이어진 검찰의 불법 대선자금 수사와 관련한 여야의 정치적 공방에서 가장 많이 사용된 단어 가운데 하나가 ‘고해성사’라는 가톨릭 교회의 신앙언어였다. 그야말로 하루가 멀다 하고 고해성사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 그런데 고해성사를 사용하는 문맥을 살펴보면 진실한 참회와 자기 고백의 실천이라기보다는 상대방이 그렇게 하기를 요구하는 것이 훨씬 더 많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곧 스스로 고해성사를 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에게 고해성사를 요구하는 것이다. 이것은 참회와 고백, 보속으로 이어지는 고해성사의 형식적인 측면에서 볼 때에도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발상이다. 고해성사의 이미지를 빌려 타인의 도덕성을 압박하는 것은 고해성사를 욕보이는 짓이다. 타인의 부정을 고발함으로써 자신의 정당성을 제고하겠다는 사고방식은 전혀 고해성사적이지 않다는 말이다.
이외에도 이번 1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유달리 이런 종교적 언어와 이미지를 과도하게 활용한 경우가 많았다. 이럴 때는 우리가 무척이나 종교적인 나라에 살고 있다는 착각마저 하게 된다. 여당의 대표라는 사람은 노인 폄하 발언으로 문제가 생기자 노인 단체 대표들을 찾아다니면서 무릎 꿇고 큰절을 하면서 용서를 빌었고, 한 야당 대표는 명동성당에서 고해성사를 하고, 조계사에서 108배를 하고, 영락교회에서 참회예배를 하였으며, 또 다른 야당의 선거대책본부장은 자기 정당의 전략적 실수에 대해 사죄하려고 삼보일배를 했다. 물론 선거 전략에서 매스미디어의 중요성이 그 어느 시기보다 높아진 오늘날의 정치 현실에서 무조건적으로 이것을 타박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이미지 정치가 그것이 갖고 있는 본질적 내용마저 왜곡하거나 생략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이런 종교적 이미지의 활용은 일순 많은 신자들의 불쾌감을 자아내지만, 매스미디어로 중계되는 선거는 이런 그림을 선호하고, 이는 정치인들에게 더 많은 이미지를 창출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그 밑으로 한 움큼의 의미도 동반하지 못하는 가시성의 언어들이 미디어를 통해 전파되고 있다. 정치는 바야흐로 관객에게 어떤 감동도 주지 못하는 삼류배우들의 경연장이 되어가고 있는 것이다. 이런 그들이 이제 고해성사마저 자신들만의 연극을 위한 무대장치로 호출하고 있다. 그리고 여기서 사실상 정치와 여론을 대변하는 것은 미디어이다. 미디어는 때로는 연출자가 되어, 때로는 관객이 됨으로써 이런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그 와중에서 이미지를 먹고사는 미디어는 심층적 정책 토론을 지양하고, 이미지의 효용성에 몰두하게 한다.
결국, 많은 사람들이 얘기하듯이 이런 미디어를 매개로 한 이미지 정치는 스스로가 가리키는 내용을 충분히 담아내지 못하고 있다. 부실한 내용에 대비되는 이미지의 과장이 반복될수록 국민들의 정치에 대한 혐오는 그만큼 더 커질 것이다. 어쩌면 오늘 우리 정치에 요청되는 것은 영상매체적 이미지가 아니라 문자매체적 텍스트이리라. 이미지만 헛되이 부풀리는 것이 아니라 책을 정독하듯이 하나하나 꼼꼼하게 자신의 정치적 지향과 이를 채우기 위한 정책적 수단을 고민해 나가는 것이 필요하다는 말이다. 고백과 사죄를 담보하는 실천적 내용의 획득만이 이것에 이르는 첩경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참된 미디어인 성사
오늘날 매스미디어는 사건이나 인물에 대한 입체적 심층적 보도보다는 평면적이고 즉흥적인 감성에 호소하는 경향이 짙다. 또한 ‘얼짱’과 ‘몸짱’ 등의 유행어에서 보는 것처럼 사람을 단지 얼굴과 용모만으로 평가하는 천박함을 드러내기도 한다. 이것은 인간과 사회, 자연계에 대한 분열적이고 단절적인 관점으로 왜곡된 인간관과 세계관을 낳을 우려가 있다. 심층적 의미에서 절연된 표피적 관점, 그리고 대상을 전체적으로가 아니라 부분으로 분해해서 바라보는 것은 인간 자신과 그 사회적 관계, 생태계, 초월적 존재자와의 관련성을 상실케 하는 것이다. 바로 이런 현대적 소외 현상을 오늘의 미디어가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오늘날의 세계는 크게 분열되어 있다. 개인과 개인, 사회와 사회, 국가와 국가가 서로 맞서서 자신의 이익만을 극단화하고 있다. 아니, 인간은 바로 그 자신 안에서 가장 먼저 분열되어 있다고 말하는 것이 적절할 것이다. 이런 분열적 상황을 해소하려면 우리는 먼저 현대인의 인식구조와 삶의 자리에 가장 크게 영향을 미치는 미디어의 문제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미디어를 복음의 힘으로 성화시키는 데 최선을 다해야 한다. 나아가 현대인들이 잃어버린 성사적 사고방식을 다시 복원하고자 미디어를 올바르게 활용해야 할 것이다.
성사는 상징이며 표징이다. 그러나 그것은 단순히 가시적인 물질적 표징에 머물지 않는다. 그 물질적 언어와 사물을 통해 인간의 탄원이 올라가고 신적 현실이 전달되는 그런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성사야말로 참된 미디어라고 할 수 있다. 성사는 탄생, 성장, 혼인, 늙고 병듦, 고통과 죽음에 이르는 전체적인 인간 삶을 하느님 안으로 모아들이고 성화시킨다. 저 세속의 미디어가 실재하는 것은 오직 이 가시적이고 물질적인 세계뿐이라고 사람들을 현혹할 때, 성사는 그 너울을 벗기고 하느님과 그분의 나라를 바라보게 한다. 교회의 성사는 이 세계가 참으로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것이며, 종국에는 다시 그분에게 복귀할 것임을 미리 보여준다. 성사가 세계와 인간의 구원을 위한 것이듯, 인간의 미디어 역시 구원적이어야 한다.
현대의 분열과 단절, 그리고 뿌리깊은 자기소외에 대항하는 교회의 정신은 화해이다. 그리고 이 화해는 요한 바오로 2세 교황 성하의 말씀처럼 참회와 깊은 관련성을 갖는다. 참회는 모든 성사의 전제 조건으로서 우리는 교회 공동체와 더불어 화해의 성사, 참회의 성사를 거행한다.
여기 자신의 잘못에 대해 며칠 밤을 잠 못 이루던 사람이 있다. 다소 퀭한 눈과 야윈 얼굴이 그가 자신의 잘못에 대해 얼마나 괴로워하고 있는지 보여준다. 괴로움의 깊이는 반성의 깊이다. 그러나 아직 그에게는 그 잘못을 불러오는 삶의 습속을 버릴 용기는 없는 것 같다. 그것은 이제껏 그의 쾌락의 원천이었고, 삶이 주는 우울한 단조로움에서 그를 구해줄 유일한 근거였다. 그는 주저한다. 하지만 마지막 한 순간에 그는 그것이 주는 일시적 쾌락보다 빛나는 햇빛 아래서도 당당할 수 있는 평온한 기쁨을 선택하기로 작정한다.
마지막 죄를 고백하고 고해사제의 말을 기다리고 있는 고해자의 등으로 땀이 흐르고 있다. 사제의 사죄경이 고해소를 가득 채우는 순간, 고해자는 자신의 머리 위로 쏟아지는 따뜻한 빛을 느낀다. 그 빛은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고 아주 적당하다. 이어지는 보속에 그의 마음은 희열로 가득 찬다. 고해소를 나와 십자가 앞에 무릎을 꿇은 그의 눈가에 눈물이 맺힌다. 눈물이 그의 망막에 그토록 오랫동안 맺혀있던 무엇인가를 씻어냈나 보다. 갑자기 세상이 변했다.
이렇듯 고백은 참회를 전제로 한다. 그것은 온 존재를 걸고 자신의 잘못과 생활방식을 부정하고 새로운 삶을 시작하겠다는 참회에서 시작한다. 그리고 참회는 우리 자신을 우리보다 더 잘 아시는 분이 지금까지 내게 베풀어주신 그 한없는 은혜를 인식하고 감사하는 데서 싹튼다. 거기서 나는 내가 얼마나 그분의 간절한 손길을 거부해 왔는지, 내 탓으로 얼마나 많은 이웃이 상처받고 고통스러워했는지 깨닫는다.
그러나 우리의 참회는 이런 마음의 다짐만으로는 부족하다. 우리는 육신 없는 영혼만의 존재, 천사가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의 깨달음은 말과 몸짓으로 고백되어야 한다. 그러나 누군가에게 자신의 잘못을 고백한다는 것은 간단치 않은 일이다. 그것은 얼굴 붉어지는 부끄러움이다. 지극한 겸손과 자기 극복의 의지가 없다면 고백은 애초에 불가능하거나, 설령 고백을 했더라도 그것은 형식적인 것에 머문다. 자기에게 유리한 말만을 늘어놓거나, 헛된 이미지에 호소하는 것은 진정한 고백의 모습이 아니다. 부끄러움과 고통을 감내하며 자기 죄로 넘쳐나는 쓰레기통에 코를 박고 나서야 우리는 장미 향기를 맡을 수 있다.
죄를 용서받은 사람은 ‘탕자의 비유’에 나오는 둘째 아들처럼 기쁨에 넘친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죄가 하느님과 이웃에게 얼마나 큰 상처를 남겼는지 더욱 분명히 인식하게 된다. 그는 최선을 다해 그 상처 자국을 없애려고 노력한다. 그것은 법원의 판결에 따른 강제적 보상과는 다른 것이다. 억지로가 아니라 자기가 받은 선물에 대한 감사의 표현이며, 새로운 삶에 대한 약속과 희망으로 그렇게 한다.
때때로 그의 몸과 마음이 떠나온 마을과 그 시절로 되돌아갈 수 있지만, 세례 이후로 그는 그곳이 자신이 영원히 머물 곳은 아님을 안다. 그는 때로 힘에 겨워 비틀거리지만, 고갯마루를 향해 한 발자국씩 오른다.
[사목, 2004년 6월호, 엄재중(본지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