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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고해성사] 고해성사의 변천과 그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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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주호식 [ jpatrick ] 작성일2005-01-06

고해성사의 변천과 그 의미

 

 

1. 들어가기

 

고해성사는 신자들이 교회 공동체나 하느님과 깨어지고 상처 입은 관계에 놓였을 때, 다시 화해하고 관계를 맺는 교회의 중요한 전통이며 구원 도구이다. 그러나 고해성사에 대한 잘못된 이해로 말미암아 적지 않은 이들이 고해성사에 대해 부담을 갖거나 많이 꺼리기도 한다. 더욱 중요한 것은 사회가 급변해 가면서 가치관도 빠르게 변하며, 이 때문에 발생하는 죄의식이 사라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타인을 대상으로 봉사하고 사랑해야 하는 관계에서 자기 스스로를 목적으로 삼고 자기만을 사랑하면서 타인과의 관계를 끊어놓는 현실로 변화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계속적인 회개와 쇄신은 교회의 본질에 속한다.” 이는 신자들이 고해성사의 신심을 새롭게 이해하여 스스로 계속해서 쇄신하고 회개하면서 교회의 새로움에 봉사하는 것이 필요함을 뜻한다. 고해성사는 자기의 죄를 단순히 고발하는 것이 아니라 죄와 잘못에서 해방되어 하느님의 자유로운 자녀로서 살아가는 것이다. 따라서 고해성사는 멍에가 아니라 해방과 기쁨으로 가는 좋은 기회라고 할 수 있다.

 

고해성사를 통해서, 개별 인간의 개인적인 죄뿐만이 아니라 사회적인 차원에서도 화해가 이루어져야 한다. 여러 민족들의 충돌, 전쟁과 투쟁, 다양한 사회적 형태의 폭력과 증오, 이념적 민족주의적 분열 양상 등은 여러 가지 복잡한 근거를 갖지만 인간의 죄가 그 원인이라는 것을 통감하여야 한다. 정치?경제적, 사회적, 역사적, 문화적 그리고 종교적 뿌리에 대해 분석하면서, 각 개별적인 인간이 죄스러운 현상의 주체라는 것을 인식하지 못한다면 그 분석은 표피적으로 머물 것임에 틀림없다.

 

자유로운 인간은 진리를 선택함으로써 자유로워진다. 사실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원하시는 것을 부정하는 행위가 죄라고 할 수 있다. 이는 곧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행위에 동참하기를 거부하는 행위인 것이다. 진리를 거부할 때 그는 자유에서 멀어지고 참된 자기 자신으로부터 멀어진다. 자유로운 인간은 자신의 자유에 책임을 진다. 사회적 죄의 현상은 인간이 악을 자유롭게 선택한 결과이기에 인간은 이러한 죄의 현상에 책임을 져야 한다. 단순히 사회적 구조로 파악하고 책임을 미루는 것은 더욱 큰 죄악으로 빠지는 것이기에 개별적으로 그리고 공동체적으로 자신의 책임을 통감하고 자신이 잘못 선택한 것의 결과에 대하여 책임을 지는 것이 인간 본연의 자유에 속하게 된다.

 

따라서 자신의 죄를 아는 것이 하느님과의 일치, 이웃과의 일치 그리고 본연의 자신을 찾는 첫 단계라고 할 수 있겠다.

 

 

2.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사죄의 의미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신약성서에서 죄인들과 함께하심으로써 죄인과 하느님과의 화해, 그리고 이웃 인간과의 화해의 원형을 보여주신다. 그래서 예수님을 반대하였던 사람들은 “저 사람은 즐겨 먹고 마시며 세리와 죄인하고만 어울리는구나.”(마태 11,19; 루가 7,34)라고 비판하기조차 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죄인들과 함께한 것뿐만이 아니라 죄인들을 위하여 돌아가셨다. 이는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마르 2,17; 마태 9,13; 루가 5,32)라는 예수님의 말씀에서도 잘 드러난다. 또한 잃어버린 양, 잃어버린 은전 그리고 잃어버린 아들의 비유에서(루가 15장) 잘 드러나듯이, 하느님께서는 항상 죄인들을 용서하시려고 준비하고 계시며 또 죄인들을 찾아다니시거나 기다리신다. 하느님의 이러한 사랑을 알게 되면 인간은 자신의 죄를 깨우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회개하고 이 복음을 믿어라.”(마르 1,15) 하고 요구하셨던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단순히 경고하는 데에 그치지 않고 그들과 능동적으로 함께하고 그들의 회개를 위해 도와준다. 곧 예수님께서는 단순히 선포하는 데에 머물지 않고 자신의 인격을 통해서 하느님과의 화해를 실현시키셨다. 예수님은 곧 자신의 삶과 죽음을 통해서 하느님과 화해가 가능하고 또 자신이 하느님과의 화해라는 것을 보여주신 것이다.

 

죄인들에 대한 하느님의 용서를 보여준 예수 그리스도의 삶은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에게는 자신들의 종교적 근거, 곧 율법을 뒤흔드는 행위로 보였다. 그래서 예수님은 율법에 따라 죄인으로 판결받으시고 결국 살해당하신다. 그러나 자신의 부활을 통해서 무엇이 더욱 근본적이고, 바른 것인지 그리고 생명을 가져다주는지를 보여주신다. 단순히 율법을 준수하면 생명을 얻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가신 그 길이야말로 생명을 가져다준다는 것이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진정한 율법임을 뜻한다. 

 

하느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인간의 죄를 용서하신다는 것은 인간에게 주어지는 하느님의 선물로서, 오로지 하느님의 권능에 속한다고 할 수 있겠다. 이러한 용서는 구체적으로 여러 가지 측면을 보여준다.

 

첫째, 죄의 용서와 하느님과의 화해는 먼저 하느님의 말씀을 들음으로써 가능한 것이다. 하느님의 말씀은 하느님의 주도에 따라 그 말씀을 듣는 이들에게 전달된다. 그 말씀의 핵심은 바로 용서와 화해의 말씀이다. 이 말씀을 듣고서 인간은 자신에게 하느님의 용서가 필요하다는 것을 느끼고,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기도하며 하느님께 응답을 하게 된다.

 

둘째, 불의로 말미암아 상처 입은 이웃과의 보속을 통한 화해는 하느님과의 화해에서 본질적인 전제라고 할 수 있다.

 

셋째, 이러한 하느님과의 화해는 자신만을 위한 삶에서 타인을 위한 삶으로 전환하는 사랑의 실천 안에서 가능하다. 예수 그리스도의 실천적인 사랑 안에서 죄인들은 하느님과 화해를 하고 용서를 받은 것이다.

 

넷째, 화해는 대화를 통해서 이루어진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에게 말을 걸고 계시며 인간은 자기비판과 자기반성으로 하느님께 응답하는 것이다. 

 

다섯째, 화해는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에 동참하는 것에서 이루어진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금욕적으로 사셨고 나아가서 가난한 이들, 배척받는 이들과 함께하셨으며 죄인들을 위하여 돌아가셨다. 이러한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에 동참하는 것은 바로 이웃과 화해하고 하느님과 화해하는 것이 된다.

 

여섯째, 하느님과의 화해는 교회를 통하여 이루어진다. 교회는 처음부터 스스로를 하느님께 부르심을 받은 공동체로 이해하였다. 이 집단은 폭력과 죄로 점철된 세상의 한가운데서 화해와 평화가 실현된 공동체를 건설하라는 사명을 받았다. 교회도 죄인이 모인 집단이지만 하느님께서 만드신 교회는 이 죄인들의 죄를 용서하는 근성사(根聖事)로 이해된다.

 

 

3. 고해성사의 변천

 

고해성사는 역사적으로 여러 가지 명칭을 가졌다. 과거에는 ‘참회의 성사(Sacramentum paenitentiae)’라는 용어가 사용되었는데, 이는 하느님께 대한 자세와 마음의 변화를 강조한 것이다. 트리엔트 공의회(1545-1563년) 이후에는 사제 앞에서 죄를 고백하고 용서받는다는 것을 강조하였기에 ‘고해성사(Sacramentum confessionis)’라고 불리게 되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1962-1965년) 이후에는 하느님과 교회 공동체 그리고 이웃과의 화해라는 차원을 강조하고자 ‘화해의 성사(Sacramentum reconciliationis)’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러한 명칭의 변화와 함께 고해성사에 대한 이해와 예식도 변하게 되었다. 초대교회에서는 평생에 단 한 번만 고해성사가 허락되었으나 나중에는 여러 번 할 수 있도록 바뀌었다.

 

1) 초대교회의 참회성사

 

초대교회의 법적 참회성사는 마태오 복음 18장 18절과 고린토 1서 5장을 바탕으로 실행되었다. 살인, 간음 그리고 배교가 고해성사를 해야 하는 경우에 해당되었으나 그 밖의 다른 중죄는 미사나 기도 그리고 선행을 통하여 죄를 씻을 수 있다고 보았다. 

 

당시의 법적 참회성사는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었다고 할 수 있겠다. 첫째, 주교는 죄를 고백한 교인에게 보속을 부여하고 그러고 나서 다른 일반 신자들과 함께 공적인 참회예절을 한다. 주교에게 안수를 받은 다음 죄를 고백한 이는 보속을 행하는 자라는 것을 표시하는 의복을 입고 성체성사로부터 배제되었다는 상징적인 추방을 통해서 속죄인의 신분으로 분류된다. 교회 공동체는 큰 슬픔을 나타내면서 이 과정을 함께한다. 

 

둘째, 고대교회 참회성사의 특징은 보상행위를 강조한 것이다. 곧 충분하고 합당한 보속이 행해졌을 때에야 비로소 죄가 용서받았음을 선포하였다. 보속은 죄의 경중에 따라 달랐고 이들의 속죄 기간은 매우 길었다. 가벼운 보속이나 짧은 기간 동안의 보속은 죄인들에게 도움이 되지 못하고 그들의 구원을 위한 필연적인 과정을 기만하는 것이라고 간주하였다. 그리하여 1년 또는 다년간 지속되는 보속 기간 동안에 속죄인은 자신에게 부과된 보속을 다 채워야 했다. 이 기간 동안 속죄인은 기도하는 가운데 단식과 자선을 실천하고, 사회적 지위, 혼인 그리고 부부간의 성생활을 포기한 상태로 지내야 했다. 속죄인은 교회 공동체 예식에 단지 부분적으로만 참가할 수 있었다. 이를테면 그들은 미사에는 참여할 수 있었으나 성찬 전례가 시작되면 그 자리를 떠나야 했다. 보속기간 동안 교회 공동체는 그들의 참된 보속행위를 위하여 청원기도를 바쳤다. 

 

셋째, 충분한 보속 기간이 끝난 뒤에 그들은 주교의 안수를 통하여 교회 공동체에 다시 받아들여졌다. 4세기부터는 일반적으로 성목요일 장엄 미사에 다시 받아들여져 성체를 모실 수 있는 신분을 얻게 되었다. 다시 교회 공동체에 받아들여지는 것은 교회 공동체와 화해했음을 표시하는 것이었고, 나아가서 하느님과 화해한 것으로 이해되었다. 곧 교회 공동체에 다시 받아들여짐을 통하여 죄가 용서되고 본연의 의미의 고해성사가 끝난 것이다. 

 

가장 특징적인 것은 초대교회에서는 세례성사가 한 번 있듯이 참회성사도 오로지 한 번만 가능하였다는 것이다. 따라서 또다시 중대한 죄를 지었을 경우에는 회개가 충분하지 않은 것으로 인식되었고 또 다른 참회성사의 기회는 주어지지 않았다. 교회는 다시 죄에 빠진 이 교인을 위하여 기도를 하고 하느님의 자비에 맡기기만 하였을 뿐이다. 그러나 죄에 다시 빠진 이가 고해성사를 받을 수 없다고 하여 그가 구원될 수 없다고는 말하지 않는다. 이에 대한 한 가지 예로, 니케아 공의회는 임종에 이른 자에게 병자성사를 거부해서는 안 된다고 가르친다. 이는 곧 임종자가 죄의 상태에 있다고 하더라도 그에게 마지막 구원의 기회는 제공되어야 한다는 것으로 보는 것이다.

 

2) 비밀성을 지닌 반복 가능한 참회성사로 발전

 

6세기까지는 고해성사가 평생 단 한 번만 가능하였기 때문에 오용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무엇보다도 보속이 과중했고 또한 죄가 용서되어 교회 공동체에 다시 받아들여졌다고 해도 보속을 계속해서 수행해야 했기에 이러한 부담을 피해서 노년기 또는 죽음에 임박해서 참회성사를 하려는 경향이 많아졌다. 이 시기에 고해성사를 하면 보속이 비교적 가벼워지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새로운 경향으로 말미암아 보속행위는 교회 공동체에서 사라지게 되었다. 또한 속죄인이 자신의 삶 안에서 죄를 잘 이겨나가도록 교회 공동체가 관심을 갖고 기도를 하는 전통도 사라졌다. 

 

6세기에 이르러 비로소 아일랜드와 영국에서 새로운 고해성사의 모습이 나타났고 이것이 유럽 대륙으로 확산되기에 이르렀다. 처음에는 초대교회가 실행하였던 전통적인 고해성사와 새로운 형태의 고해성사가 공존하여 8세기 말까지는 적지 않은 논란도 있었지만 점차로 초대교회의 참회성사 형태는 사라졌다.

 

이 새로운 고해성사의 형태에서는 살인, 간음 그리고 배교 등의 중대한 죄뿐만이 아니라 다른 모든 죄도 고백할 수 있었고, 또한 죄의 고백을 반복할 수 있었다. 아울러 고백의 비밀이 유지되었고 보속행위 또한 공동체 차원을 벗어나 개인의 차원에서 실행되었으며, 평생 하여야 할 필요도 없었다. 

 

사제는 참회성사에서 중대한 죄뿐만이 아니라 광범위한 죄까지 다루어야 했으므로 죄에 따른 적절한 보속을 부과하도록 기록한 ‘보속 일람표’를 참조하였다. 이 보속이 끝나면 속죄인은 사제에게 와서 사죄를 받았다. 이는 곧 초대교회에서 이루어졌던 죄의 고백→보속→사죄의 형식은 그대로 유지되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10세기 말에서 11세기 초에는 속죄인이 사제에게 사죄를 받은 다음에 보속행위를 실행하는 것으로 바뀌었는데, 오늘날까지 그 형태가 유지되고 있다. 물론 중세까지도 일상에서 일어나는 가벼운 죄는 일반적 죄 고백, 선행 그리고 자선과 단식을 통해서 용서받을 수 있고 또 극복될 수 있다는 초대교회의 의식이 계속해서 유지되었다. 아울러 초대교회에 있었던 공식적인 보속기간은 점차로 사라져 보속은 속죄인이 개별적으로 비밀리에 실행하도록 맡겨졌으며, 교회 공동체의 성체성사에서 배제되지 않았다.

 

여기에서 시대의 흐름에 따라 강조점이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초대교회에서는 속죄인의 보속과 교회 공동체가 강조되었던 반면에 초기 중세에는 속죄인의 죄 고백이 강조되었고, 죄의 고백 자체가 겸손한 행위로서 속죄의 일부라고 인정되었다. 

 

초기 스콜라 시대(12세기)에는 통회가 가장 본질적인 요인으로 인정되어 진정한 통회가 이루어진 가운데 하느님께서 용서하신다고 보았다. 그러나 13세기에는 사제의 사죄를 가장 결정적인 것으로 보았다. 초대교회 때에는 사제의 사죄가 죄의 용서를 청하는 기도로 이해되었기에 교회 공동체에 받아들여진 이후에야 진정으로 죄가 용서되었다고 생각하였으나, 13세기부터는 사제의 사죄경이 죄를 용서하는 것으로 이해되기 시작한 것이다. 따라서 속죄인의 보속행위와 교회 공동체와의 화해를 중요하게 여긴 초대교회의 이해가 사라졌다고 볼 수 있다. 

 

한편, 토마스 데 아퀴노(1225-1274년)는 사제의 사죄가 결정적인 것이라고 인정하면서도 진정한 통회가 성사를 갈망하는 것과 밀접히 연결되어 있고 그 자체로 죄를 용서받는 것이라고 보았다. 그는 질료형상론을 바탕으로 참회성사에 주관적 차원을 ‘질료’로 그리고 객관적인 사제의 사죄를 ‘형상’으로 보았다. 이는 곧 주관적 차원인 통회, 죄의 고백 그리고 보속과 객관적 차원인 사죄 모두가 고해성사에서 빠질 수 없는 구성 요소라고 본 것이다. 그의 이론은 피렌체 공의회(1439년)와 트리엔트 공의회(1545-1563년)에서 교회의 가르침으로 채택된다.

 

또한 1215년 라테라노 공의회는 반복적으로 이루어지던 새로운 참회성사의 전통을 받아들여 모든 신자가 양심에 따라 적어도 일 년에 한 번은 참회성사를 의무적으로 하도록 규정하였다. 1983년에 개정된 교회법에서도 “모든 신자는 사리를 분별할 나이에 이른 후에는 매년 적어도 한 번 자기의 중죄를 성실히 고백할 의무가 있다.”(제989조)라고 말하면서 라테라노 공의회의 결정을 그대로 수용한다.

 

 

4. 현대의 새로운 고해성사 이해

 

1) 기본 노선

 

20세기 초에는 그 이전에는 볼 수 없었을 정도로 참회성사의 참여도가 절정에 달하였다. 교황 비오 10세(1903-1914년)가 고해성사를 보고 모든 미사성제에서 성체를 영하도록 권고하였을 정도였다. 그러나 20세기 중반에 이르러 고해성사를 보는 사람들은 점차 감소하게 된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초대교회에서 강조되었으나 지난 400여 년간 잊었던 고해성사의 교회론적 차원을 다시 강조하였다. 「교회 헌장」은 다음과 같이 가르친다. “고해성사를 보는 신자들은 하느님께 끼친 모욕에 대하여 그분의 자비로 용서를 받으며, 또한 동시에 범죄로 상처를 입혔던 교회, 사랑과 모범과 기도로써 죄인들의 회개를 위하여 노력하는 교회와 화해를 한다”(11항). 지난 400여 년 동안은 고해성사에서 죄를 고백하는 이와 죄를 용서하는 사제 두 부분만이 강조되었다. 그러나 이제는 ‘용서와 평화를 위한 교회의 봉사’라는 차원이 강조되고, 이를 하느님과 세상과의 화해를 목적으로 하는 삼위일체적인 구원역사의 관점에서 고찰하게 된다. 이러한 입장을 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도 다시 확인하였다. 요한 바오로 2세는 고해성사가 교회의 기본과제이며, 교회는 화해를 위한 표지이고 도구라고 가르친다.

 

또한 1973년에 반포된 「고해성사 지침」은 고해성사가 전체 교회의 사업이고 축제의 성격을 가지고 있다고 가르친다. 곧 고해성사는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듯 인간에게 부담을 주고 경악하게 하는 심판이 아니라 오히려 전 인격적인 인간을 포괄하는 전례적 축제인 것이다. 이 축제 안에서 인간은 하느님과 화해하고 이웃들과 화해하며 자신이 다른 형제들과 함께 있음을 느낀다. 이 축제가 열리는 교회는 바로 인간과 화해한 하느님께서 현존하는 곳이고, 바로 이 교회 안에서 인간들은 하늘나라를 이웃 인간들과 미리 맛보는 것이다.

 

2) 주관적인 차원

 

(1) 통회

 

통회는 트리엔트 공의회가 가르치듯이 용서를 받기 위한 필수적인 것이다. 이 공의회는 통회가 우선 죄의 무가치함을 인식하는 것이고 죄에 대한 혐오와 죄에서 벗어나겠다는 의지, 나아가서 삶을 변화시켜야 하겠다는 원의 그리고 하느님께 향하겠다는 결심을 포함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통회는 곧 하느님께 자신을 열고 하느님께 나아가고자 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따라서 다시 한번 믿음과 소망 그리고 사랑을 자신의 삶에 재생하고자 하는 첫 단계이다. 곧 통회는 하느님과 화해하고자 하는 가장 기본적인 전제이고 준비인 것이다. 

 

통회는 대화의 과정을 갖는다. 다시 말하면 하느님께서 먼저 인간에게 죄를 용서하여 준다는 말씀을 하시고 인간은 하느님께 향하고자 하는 응답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인간은 하느님의 사랑의 빛으로 말미암아 죄를 보고 자신이 하느님을 향하는 길에서 많이 벗어났음을 깨닫고, 하느님을 향하는 것이야말로 자신을 완성하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자신이 죄의 한가운데에 있다는 것을 아는 것은 이미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은총을 베풀고 있고 인간이 이미 그 은총 안에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말한다.

 

(2) 죄의 고백

 

죄의 고백은 교회의 중재를 통하여 하느님 앞에서 죄를 고백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에서 교회는 성사권을 가진 사제에 의하여 대표된다.

 

① 초대교회의 공적인 법적 참회가 나중에 개인적인 비밀고백으로 대체되었기 때문에 개인의 죄의 고백은 화해의 성사에서 결정적인 요소로 자리잡게 된다. 따라서 이 고백은 고해라고도 불린다. 이른바 ‘죽을 죄’ 또는 대죄의 경우 빠짐없는 고백이 중요하였다. 

 

② 제4차 라테라노 공의회(1215년)는 적어도 일 년에 한 번은 대죄를 고백하여야 한다고 규정하였다. 이 공의회는 사제 앞에서 하는 고해성사가 그리스도께서 부과하신 과제이고 신법에 따라 제정된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신법에 따라 모든 ‘죽을 죄’가 있는지를 잘 성찰한 다음에 자세히 고백하여야 한다고 가르친다. 그 밖에 다른 죄들은 필요에 따라 고해할 수 있다고 한다. 또한 죄의 고백은 정확해야 하고 겸손해야 하며 형식적으로 완전해야 하고 비밀이 유지되어야 한다. 

 

③ 오늘날의 ‘죄의 고백’에 대한 이해는 다음과 같다. 

- 중대한 죄를 교회 앞에서 개인적으로 고백해야 하는 필요성은 교회의 신앙전통의 핵심에 속하는 것이다. 

- 죄와 ‘죄의 고백’은 단순한 개인적인 차원이 아니라 사회적이고도 교회적인 차원이다. 따라서 대죄가 무엇인지는 이웃 인간이나 교회 공동체 차원에서 고찰되어야 하고, 고백이 실행되어야 한다.

- 이러한 맥락에서 죄의 양적인 고백보다는 질적인 고백이 중요시된다.

- 속죄인은 ‘죄의 고백’에서 자신이 구체적인 죄의 상황 안에서 하느님을 갈구한다는 것을 깊게 표현하여야 한다. 그래서 하느님의 은총으로 말미암아 교회의 중재를 통하여 그분의 응답, 곧 사죄를 받게 된다. 이렇게 해서 속죄인은 하느님에게서 새로운 생명을 받아 이웃 인간과 교회 공동체에서 새롭게 살게 되는 것이다.

 

(3) 보속

 

보속은 하느님의 은총을 바탕으로 이웃과 하느님께 죄를 보상하는 행위이다. 초대교회에서 보속은 그야말로 형벌의 성격이 짙었으나 오늘날에는 죄로 상처 입은 이웃과의 관계, 하느님과의 관계 그리고 자신의 상처를 치유하는 성격으로 이해된다. 피렌체 공의회와 트리엔트 공의회는 보속을 통회, ‘죄의 고백’과 함께 고해성사의 필수적인 구성요소라고 가르친다.

 

3) 객관적 차원인 사죄

 

사죄는 ‘죄의 고백’을 들은 사제가 실행하게 된다. 사제는 그리스도에게서 파견되어 직무를 맡은 이로서 교회 공동체를 대표하여 사죄권을 받는다. 초대교회에서 사죄는 속죄인이 주교를 통하여 다시 교회 공동체와 화해하는 것으로 보았다. 그러나 중세에는 대죄의 용서는 속죄인의 통회를 통하여 이루어진다는 주장도 있었다. 결국 토마스 데 아퀴노는 통회와 사죄가 동시에 죄의 용서를 가져다준다고 종합한다. 토마스 데 아퀴노의 이러한 가르침은 오늘날까지 유효한 것으로 인정된다.

 

사제의 사죄는 법적인 행위라기보다는 죄인의 죄가 용서받았다고 선언하고 설명하는 봉사행위로 이해되어야 한다. 따라서 사죄는 결국 교회의 봉사직이 구체적으로 드러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교회는 하느님의 용서를 말함으로써 통회하는 죄인을 심판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과 이웃에게 더욱 가까이 가도록 용기를 주는 것이다.

 

[사목, 2004년 6월호, 이규성(예수회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