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고해성사] 상담식 고해성사에 나타나는 정신병리학적인 문제들(영성지도와 심리치료를 중심으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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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주호식 [ jpatrick ] | 작성일2005-01-06 | |||
상담식 고해성사에 나타나는 정신병리학적인 문제들(영성지도와 심리치료를 중심으로)
들어가는 말
고해자 안에 나타나는, 종교적 특색을 띤 환각이나 망상 같은 정신병리적 문제들은 고해사제들에게 큰 부담이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렇다고 고해사제가 그런 고해자들을 무조건 외면할 수는 없을 것이다. 고해성사의 유효성만을 두고 말한다면, 사죄경만으로도 죄는 사해진다. 그러나 고해자의 회심의 기쁨이나 위로까지 생각한다면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현실적으로 많은 고해자들이 죄의 사함만이 아니라 영성적 위로를 기대하고 고해소를 찾는다. 교회는 이럴 경우를 생각해서 사제의 영성과 필요한 지식을 갖추기를 권장한다. 만일 고해사제가 이 점을 소홀히 한다면 많은 고해자들이 고백소 밖에서 영성적 대안물들을 찾아헤맬 것이고, 교회를 떠날 수도 있을 것이다.
2000년을 넘어선 인류의 현실은 혼란스럽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은총의 기회라고도 생각된다. 지난 세기에 고해소 밖에서 적지 않게 영적 위로를 갈구하던 인류는 다시 영성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심리학 안에도 영성이 개입됨을 깨닫고 있다고 생각된다. 또 하나는 이제 사목자들도 상당한 수준의 심리학적 소양을 쌓아가고 있다.
이 글에서는 고해소에서 나타날 수 있는 심리적 현상들을 피상적이나마 살펴보고, 이럴 때 고해사제의 역할이 무엇인지를 가늠해 본다. 나아가서 앞으로의 사목 방향도 약술하고자 한다.
1. 당면한 과제
종교적 특색을 띤 환각이나 망상, 선입견들은 정신병에서 흔히 나타나는 현상인데, 영성지도에서도 이와 같은 사례들을 들 수 있다. 그렇다고 영성 내담자들이 고의적으로 속이는 것도 아니어서 고해신부들이 판단하기가 좀처럼 쉽지 않다.
아빌라의 데레사도 이런 점을 잘 알고 있었다. “이와 같은 실례를 얼마든지 들어 내 말을 입증할 수가 있습니다. 후딱 하면 발현이니 현시니 하고 믿는데 그건 안 됩니다. 그리고 속이려는 마음은 추호도 없으면서 고해신부를 어지럽고 뒤숭숭하게 해드리는데, 사정을 밝히기 전에 좀 더 기다리고 숙고하여 획일성을 검토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런 사정을 실제로 경험해 보지 않으면 그 아무리 학식이 있는 고해신부라도 좀처럼 알기 어려운 것입니다.”1)
그렇다면 정신질환이나 정서적 미성숙을 나타내는 영성 내담자들은 일률적으로 영성지도에서 제외시켜야 할 것인가? 그렇지는 않다고 생각된다. 왜냐하면 영성지도에서 때때로, 심리적인 어려움이 있다 해도 영성지도를 잘 받음으로써, 오히려 영성적으로 훌륭하게 된 사례들을 보기 때문이다.
2. 역사
기독교와 치료의 관계는 역동적이면서도 흥미롭다. 이런 관계는 역사를 통해 계속해서 이어져 내려왔다.2) 어떤 경우는 창조적인 관계였는가 하면, 어떤 경우는 파괴적이기도 했다. 때로 건강을 해치는 심리적 요인들이 영성적 문제로 간주되기도 했고, 악의 세력에서 오는 것으로 오해하기도 했다. 초대 교회부터 현대 심리학이 나타나기까지는 심리학과 영성지도 간에 뚜렷한 차이가 나타나지 않는다. 전통 교회에서는 고해성사가 영성지도에서 영혼의 치유의 성사로서 꾸준히 지속되어 왔다.
그러다가 프로이드 학파의 정신분석을 기점으로 놀라운 변화가 심리학에 있었는데, 그에 따르면 인간 심리는 관찰과 측정을 통해서 과학적으로 연구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이런 견해는 많은 사람들을 심리학으로 끌어들였고, 상대적으로 전통을 이어온 영성지도는 정서적인 안정을 찾는 영성 내담자들에게 소외되기 시작하였다. 성사와 전례 안에서 회심의 맛을 찾는 많은 사람들이 교회를 떠나, 심리학에서 건강과 행복을 찾는 경향이 생겨났다. 그 반작용으로 사목자들은 시대에 뒤떨어지지 않으려고 본당 사목을 떠나 심리학적 훈련을 받고 또 그런 교육을 신자들에게 가르치기도 하였다. 그런데도 적지 않은 신자들이 영성적 만족을 얻지 못하고 아직도 방황하며, 심지어 신흥 종교나 뉴에이지 등에서 영적 갈망을 메우려는 이유는 무엇일까?3)
3. 영성과 심리의 차이
영성과 심리 사이에는 유사성도 많지만, 그 근거는 전혀 다르다. 가장 뚜렷한 차이는 영성은 기도, 하느님과의 상호관계 등에 치중하지만, 심리는 기분, 감정과 같은 정서적 차원들에 주로 치중한다는 점이다. 영성지도에서는 참된 인도자는 하느님이시며, 지도자나 내담자는 서로서로의 은총의 통로이다. 그러나 심리치료의 경우는 원칙적으로 치료자와 내담자뿐이다.4) 영성지도 중에 있는 것은 기도 중에 있는 것이며, 심리치료에서 보기 힘든 어떤 독특한 분위기, 말하자면 그윽한 평화, 밝고 고요한 상태 등이 뒤따른다. 책임감에서도 큰 차이가 있는데, 영성지도에서는 물론 지도자가 최선을 다하려고 노력하지만, 최종적으로 모든 것을 주님께 맡기기 때문에 심리치료에서와 같은 중압감은 덜 느껴진다.
성숙 과정에서도 차이가 있는데, 영성에서는 단계 이론을 인정하기는 해도 심리 발달의 경우와는 달리 많은 예외를 인정한다. 일반 심리학에 너무 치우친 어떤 영성지도자들은 영성지도가 성공적이 되려면 반드시 먼저 어떤 정서적 성숙에 도달해야 하는 줄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5) 논리적 의미로서는 그 말이 당연하겠지만, 실제 영성지도에서는 많은 예외를 만나게 된다. 그 이유는 하느님께서 항상 우리의 단계 이론에 맞추어 일하시는 분은 아니시기 때문이다.
영성지도자는 하느님의 놀라우신 은총을 받아들일 자세를 갖추어야 한다. 아빌라의 데레사도 이 점을 잘 알고 있었다. “오, 참된 임금이시여! 당신을 임금님이라 부르는 것은 정말 맞갖은 일입니다. 당신은 눈 깜빡할 사이에 영혼을 풍요롭게 만드시어 영혼을 꾸며주시고, 영원히 이를 수 있게 해주시니 말입니다.” 6)
4. 고해와 정신분석의 차이
고해에서 죄가 사해지는 근원은 십자가상에서 우리에게 얻어주신, 그리스도의 수난 공로에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고해의 유효성을 두고 말한다면 고해사제의 인격과는 상관이 없다. 고해사제의 개인적인 힘이나 현명함으로 죄가 사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신분석에서는 분석가 개인의 자질이나 현명함이 치료 과정에 중요한 영향을 미친다.7) 그렇다고 해도 참회자가 위로부터 오는 은총을 충만히 느끼고 기쁨의 노래를 부르려면 고해사제의 영성이 무엇보다도 요구된다.
그래서 교회는 참회자의 죄를 사하는 사제가 은총 지위에 있고, 자신도 하느님의 생명에 밀접히 연결되어 있기를 권장한다. 그저 기계적으로 사죄경을 염하는 사제는 충분히 고해성사를 주지 못하는 것이고, 사제의 직무를 소홀히 하고 있는 것이라 생각된다.8) 고해사제가 영혼의 병을 치유하는 영혼의 의사라면, 분석가는 정서를 치유하는 심리의 의사이다. 사제에게는 죄를 고백하고, 분석가에게는 증후를 말한다. 전자는 윤리계를 대표하고, 후자는 정서계를 대표한다. 통회는 하느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죄를 뉘우치는 것인데, 거기에 반드시 정서가 수반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분석에서는 죄책감의 해소가 중요하며 정서의 수반을 요구한다.
죄와 죄책감은 반드시 같은 것은 아니다. 그래서 죄는 사해졌는데 죄책감은 계속 남아 세심증에 시달리는 경우들이 있다. 고해신부의 사죄경은 고해에서 절대적인 요소인데, 분석에서는 그런 것을 찾아보기 힘들다. 어떤 분석가도 죄를 사할 힘과 권위를 주장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고해에서는 양심 안에 있는 죄책을 자백하고, 분석에서는 무의식 안에 있는 정신 상태를 자백한다. 고해에서는 자기 탓을 인정함이 중요한데, 분석에서는 상황에 따라 그렇게 된 것이 많기 때문에, 자기 탓의 인정이 그리 중요하지 않다. 전자는 부끄러움을 느끼지만, 후자는 그럴 필요가 별로 없다.
고백의 내용은 대체로 간단하고, 요점적이고, 추상적이며, 지난 고백 이후의 내용들인데, 분석의 내용은 대체로 길고, 구체적이며, 어릴 때부터의 내용들로 시간이 많이 걸린다. 고해에서는 사제와 참회자 사이의 관계가 자유로워 고해의 유효성에 관한 한, 참회자는 어느 사제에게 가든지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분석에서는 치료 동맹을 맺기에 이리저리 옮겨 다닐 수가 없다.
5. 식별과 진단
영성지도의 큰 관심사 가운데 하나는 어떤 체험이 하느님에게서 오는 것이며, 어떤 것이 악의 세력 또는 자신의 성향에서 오는지를 식별하는 일이다. 모든 영성 체험들이 기쁨과 평화를 주는 것은 아니다. 어두움이나 전율을 주는 것도 많은데, 식별은 항상 쉬운 것도 아니며, 절대적인 구별도 힘들다. 일반적으로 하느님에게서 오는 경우는, 그 체험들이 더욱 깊어져 가면서 선, 사랑, 신앙 등이 커간다. 식별에 도움이 되는 몇몇 질문들을 가정해 볼 수 있다.
영성 내담자의 체험들이 정직하고 사랑스럽게 느껴졌는가? 하느님께 대한 신뢰를 증가시켰는가? 하느님과 이웃 사랑을 촉진시키는가? 대화할 때 기도의 분위기를 느꼈는가?9) 그러나 이런 가정들도 절대적인 것은 아니다. 구별만을 일삼다 보면, 호기심의 포로가 되어 왜곡만을 일으키고, 영적 결실이 없는 경우들이 생긴다. 어떤 원인을 직접 하느님에게서 온다고 단정 짓기보다는 신중하게 시간을 두고 지켜보는 편이 현명하다.
심리학이 영성 식별의 절대적 기준은 될 수 없다고 해도, 진단을 통해서 일단 성급한 결론을 자제하게 하는 역할은 가능하다. 여기서 우리는 식별과 진단 사이의 차이를 알아둠이 좋을 것이다. 진단은 정신적 여러 현상들을 분류하여 이름 붙인 것이다.10) 이것은 개인에 대한 현상들의 어떤 부분을 밝힌 것이지, 현상 속에 숨은 본질을 말하는 것은 아니어서, 이것 자체로 어떤 사람의 인격을 평가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대표적인 것으로 「정신장애 진단 및 통계 편람」(DSM)이라는 분류체계가 있다. 식별은 병명을 붙이는 것이 아니라 사물의 본성을 예리하게 통찰한다는 뜻으로, 일반적으로 각자에게 주어진 능력의 의미가 강하다. 예민한 영성적 감각의 도움을 받아 정확한 식별을 한 영성가들이 많은데, 그들의 식별이 훌륭하다 해도 현대적 관점에서 볼 때 병명을 붙인 진단에 대해서는 틀린 것들이 나타난다. 진단에 과도히 집착하는 것은 본래 영성지도자들의 몫은 아니며, 잘못하다가는 영성 내담자를 대상화시키고 선입견을 갖기 쉬우므로, 누구라고 함부로 진단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6. 영성지도에 나타나는 정신병리적 문제들
전이는 영성지도에서 극단적으로 복잡하고 끈끈한 문제들을 일으켜 통제하기 힘든 관계에까지 이르는 수가 있다. 전이는 상담 때 나타나는 특수 상황으로서, 내담자가 어렸을 때 중요한 의미가 있었던 사람들에게 가졌던 감정을 상담자에게 옮겨놓는 것을 말한다. 깊은 전이는 결코 일방적일 수 없어서, 영성지도자가 깨어있지 않으면 탈선에까지 이르는 수가 있다. 치매나 섬망으로 기억이나 주의 집중이 떨어져, 기도에 혼란이 올 수도 있다.
이럴 때 도움이 되는 것은, 기도란 개인의 집중 능력에 비례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성령께서 원하시는 대로 따라가는 것이라는 점을 상기시키는 것이다.11) 정신분열증에서는 종교적 망상이나 환각이 자주 나타나는데, 이것을 식별하는 데 반드시 전문적인 지식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성급하게 속단하지 말고, 증상을 몇 개월 지켜보는 것이 현명하다.
강박행동은 의례화된 것이 특징이어서 틀에 박힌 행동을 수없이 한다. 그러나 그것들을 종교예식에 나타나는 반복적 절차들과 같다고 속단해서는 안 된다. 정상적인 기도에서는 횟수보다, 기도의 순수한 지향이 중요함을 깨우쳐주어야 한다. ‘이상한 언어’의 현상은 정신병리적 개념에 따르면 해리 현상과 가깝지만 그렇다고 병적이라고 규정짓기는 힘든데, 이유는 아직도 심리학적 개념만으로는 영성적 모든 현상을 충분히 정의하기에 부족하기 때문이다. 이런 성령의 은사들은 해리 장애라기보다는 다른 적절한 용어들이 있어야 할 것이다.
꿈에 대해서도 너무 중요시하는 영성 내담자들이 있지만, 모든 심리학자들이 꿈을 중요시하는 것은 아니다. 그렇더라도 영성지도자는 내담자들이 자기의 꿈에 대해 자유롭게 이야기할 수 있는 아량을 베풀어야 할 것이다. 실제로 성서에서는 하느님께서 꿈을 통교의 수단으로 사용하신 실례들이 있다. 영성지도자는 내담자들이 자신들의 꿈을 어떤 열정과 방식으로 대하고 있는지를 살펴서 왜곡이 없도록 도와야 할 것이다. 꿈 분석에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몰두되어 영성에서 이탈하는 경우들이 있기 때문이다.
7. 상호 협력
어떤 사람은 분명히 심리치료의 대상인데도 영성지도를 받으러 오는 수가 있다. 때문에 처음 몇 차례 면담을 하면서, 영성 내담자가 영성 심화의 대상인지 아니면 심리적 장애의 대상인지를 판별해야 할 것이다. 만일 심리치료의 대상이 확실하면 의뢰해야 하지만, 영성지도가 심리치료에 앞서 주도 역할을 해야 하는지 어떤지를 결정해야 한다.
어떤 경우는 우울증이나 정신분열증으로 생기는 무능력 때문에 자살이나 직업 상실을 미리 예방할 필요가 있다. 또 어떤 때는 조증 때문에 생긴 재산 낭비, 알코올 중독이나 망상증으로 발생하는 가족 파멸을 미리 손써야 할 경우들도 있을 것이다. 따라서 위와 같은 경우들이 의심되는 경우에는 내담자가 정신과 진단을 받도록 주선하는 것이 현명하다.
다만 주의해야 할 점이 한 가지 있다면, 의뢰에서 미칠 수 있는 영성 내담자와의 신뢰 문제다. 내담자와 상의 없이 갑자기 의뢰가 이루어지는 경우 내담자는 당혹감을 느끼고 영성지도자를 신뢰하려 하지 않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따라서 영성지도자가 내담자의 상황을 제3자에게 이야기할 때는 원칙적으로 내담자의 동의가 필요하다. 심리치료자와 영성지도자가 영성 내담자의 문제를 상의할 때도 되도록이면 내담자를 참여시켜야 신뢰를 잃지 않기 위해 바람직할 것이다. 영성지도와 심리치료를 병행하는 일이 점점 보편화되어 가고 있는데, 이것은 영성지도와 심리치료자의 협력이 이루어지기 때문이기도 하고, 영성 내담자 자신이 양편을 다 만나고 싶어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여기서 중요한 일은 영성적 삶이 진행되기 전에 반드시 심리적인 문제들이 먼저 해결되어야 한다는 오해이다.12)
바오로 사도는 고린토 1서에서 ‘내 몸에 가시로 찌르는 것 같은 병’을 말하면서, 주님께 세 번씩이나 그것을 치워주시기를 간청했다. 우리는 그 가시가 구체적으로 정확히 무엇을 뜻하는지 알 수는 없지만, 그것이 생리적이건 심리적이건, 그 고통들이 예수님과의 관계를 반드시 막는다거나, 그런 가시가 먼저 치유되어야 영성적 삶이 가능하다는 식으로 속단할 수는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이어서 바오로 사도에게 “너는 이미 내 은총을 충분히 받았다. 내 권능은 약한 자 안에서 완전히 드러난다.”(2고린 12,9) 하고 말씀하시기 때문이다.
8. 전망
영성지도자들이 사목과 심리 연구를 같이 한다는 것은 현재로서 벅찬 일이지만, 당면한 상황들은 사목자들이 그 양쪽 분야에 자주 서도록 재촉할 것이다. 이제 사목자들이 심리학 지식을 갖추지도 못했고, 심리장애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시대는 지나간다. 어려움 속에서도 충분한 심리학적 소견을 갖추어가는 사목자들이 늘어나기 때문이다. 아마 영성과 심리는 앞으로도 계속해서 우여곡절을 거쳐, 상호 노력을 통해, 더욱 더 세련되어 갈 것이다. 이단들도 생겨날 수 있지만 그런 혼란을 통해서 오히려 정리되고 풍요로워질 것이다. 서로 확실히 접근되어 갈 것이다. 용어 문제에서도 지금 같은 혼란은 많이 줄어들고, 질서가 잡힐 것이다.
심리치료는 다시 영성의 필요성에 눈뜨게 될 것이다. 과거에는 영성 가운데 심리가 개입된다고 생각했으나, 이제는 심리 중에도 영성이 개입된다는 것을 깨닫기 시작하는 것 같다. 영성과 심리의 관계는 결국 신앙과 과학의 관계 안에 내포될 것이다. 하느님의 세계 안에서 모든 진리는 하나이며, 신앙과 과학은 상호 배타적인 것이 아니라, 한 질서 안에 있다. 그러므로 양 분야에 서는 것을 두려워하고 피하기만 할 것은 아니다.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모든 것을 하느님의 계시에 기꺼이 내놓고 시험받게 함이 좋을 것이다.13)
맺음말
고해자가 고해성사를 통해 영성적 기쁨과 위로를 간절히 원한다고 해도, 그것들은 궁극적으로는 예수님께서만 주실 수 있는 선물이지 고해사제가 만들어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것이 정서적 안정을 제공해 주는 심리치료자와 다른 점이다. 고해사제는 영성과 심리적 안정은 반드시 일치하지 않는다는 점을 영성 내담자가 깨닫게 해주어야 할 것이다.
예컨대 죄책과 죄책감은 같은 것이 아니다. 죄가 사해졌는데도 세심증에 시달리는 고해자들이 있기 때문이다. 이럴 때 고해사제의 영성적 위로와 안내가 필요하다. 그래도 정서적으로 불안하여 통제하기 불가능할 때에는 심리치료자와 협력하고, 의뢰까지도 생각해야 할 것이다. 이런 극단적인 경우라도 영성 내담자에 대한 신뢰를 잃지 않도록, 의뢰하기에 앞서 내담자에게 동의를 받고 동참할 수 있게 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끝으로, 질병 속에서도 영성이 가능한 것처럼, 정신질환 속에서도 영성은 가능하다는 점을 사목자는 이해해야 할 것이다. 역사 속의 많은 영성가들 안에서 우리는 그런 사례들을 발견할 수 있으며, 바오로 사도의 말씀도 이 점을 뒷받침한다고 생각한다.
“하느님께서 내 몸에 가시로 찌르는 것 같은 병을 하나 주셨습니다. 그것은 나를 줄곧 괴롭혀왔고, 나는 그 고통이 내게서 떠나게 해주시기를 주님께 세 번이나 간청하였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너는 이미 내 은총을 충분히 받았다. 내 권능은 약한 자 안에서 완전히 드러난다.’ 하고 번번이 말씀하셨습니다”(1고린 12,7-9 참조).
----------------------------- 1) 성녀 예수의 데레사, 『창립사』, 서울 가르멜 여자 수도원 옮김,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1978년, 75면.
2) 켈시 M.T., 『치유와 기독교』, 배상길 옮김, 대한기독교출판사, 1995년, 43면.
3) 주교회의 신앙교리위원회, 『건전한 신앙 생활을 해치는 운동과 흐름 II』,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03년, 3면.
4) 부르노 죠르다니, 『영성지도』, 박영호 옮김, 미루나무, 1994년, 64면.
5) 베네딕트 J. 그뢰셀, 『심리학과 영성』, 김동철 옮김, 성 바오로, 1999년, 172면:“심리적 적응이라 함은 곧 영적 성장을 의미하는가? 해답은 ‘아니오’이다.”
6) 부산 가르멜 여자 수도원,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 소품집』, 분도출판사, 1997년, 270면.
7) Paul A. Dewald, 『정신치료의 이론과 실제』, 김기석 옮김, 고려대학교 출판부, 30면:“같은 이론적 토대를 가지고 있는 치료자들이라 할지라도 사람에 따라 환자를 치료하는 기술이나 경험이나 능력에 상당한 차이가 나는 것입니다. 치료자의 이 같은, 겉으로 나타나는 개인적인 특징과 또 자신이 지금 하고 있는 치료법에 대해서 스스로 품고 있는 열의와 기대감은 그 정신치료의 최종 결과에 큰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이고 또 상당한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이 잘 알려져 있습니다.”
8) 풀톤 쉰, 『영혼의 평화』, 정진석 옮김,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1993년, 159면:“이런 까닭에 교회는 통회자의 죄를 사하는 사제가 성총지위에 있기를, 곧 그 자신도 하느님의 생명에 참여하고 있는 사람이기를 요구하는 것이다(그렇지만 이것은 대죄 가운데 있는 사제가 사죄권이 없다거나, 사죄권을 행사할 때 효력이 없다는 뜻은 아니다. 이런 위법에 대해서는 사회적, 윤리적 책임을 진다.). 정신분석은 결코 분석가의 윤리적 적격성에 관한 문제를 제기하지 않는다. 그러나 교회는 사제가 고해소에 들어갈 때마다 이 문제를 제기한다.”
9) 조던 오먼, 『영성 신학』, 이홍근 옮김, 분도출판사, 1989년, 461면.
10) 이정균, 『정신의학』, 일조각, 1982년, 126면:“정신질환의 경우 아직 원인에 관해 밝혀진 것이 적기 때문에 원인적으로만 분류하기에는 많은 어려움이 있다. 그러나 환자의 진료와 연구를 위해서는 어떤 분류든 채택하여야 하기 때문에, 증상론적 방법을 사용하여 증후군을 형성시켜서 우리의 지식을 체계화하는 방법이 임상 정신의학에서 널리 이용되고 있다.”
11) 쿠르트 코흐, 『영적 구원 치료』, 이중환 옮김, 기독교문서 선교회, 1990년, 239면:“뇌의 동맥 경화증이 보통 인간의 집중력 장애를 가져오기 때문에 노인이 기도생활을 하거나 성경을 읽는 일은 어려워질 것이다. 그러므로 노인들은 그들이 기도했을 때 한때는 자기들 것이었던 기쁨이 종종 결핍된다. 이제 기도하는 것은 힘들게 되었고 하느님과 관계를 유지하는 데 기도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고 있음에도 그것이 힘에 부친다는 것을 자주 발견하게 된다. 자신의 기독교적인 삶이 많은 생명력을 상실했음을 느끼게 되면 그는 자책하기 시작할 것이다.”
12) Max Thurian, Confession and Psychoanalysis, Mowbray, London:Oxford, 1985, p.82.
13) 데이비드 마이어스, 말콤 지브스, 『신앙의 눈으로 본 심리학』, 박원기 옮김, 한국기독학생회 출판부, 1996년, 19면.
[사목, 2004년 6월호, 김상균(한국교회사연구소 고문서고 담당, 신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