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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 야고보(샤스탕 야고보)(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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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인명 정 야고보(샤스탕 야고보) (鄭 James(Chastan James))
축일 9월 20일
성인구분 성인
신분 신부, 순교자
활동지역 한국(Korea)
활동연도 1803-1839년
같은이름 샤스땅, 야고버, 야고부스, 야코보, 야코부스, 쟈크, 정 야고보, 정아각백, 정야고, 제임스
성지와 사적지 게시판
제목 하느님의 종 브뤼기에르 주교15: 샤스탕 신부, 조선 선교를 자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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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24-05-07 조회수46 추천수0

[‘하느님의 종’ 브뤼기에르 주교] (15) 샤스탕 신부, 조선 선교를 자원하다


교황 파견 선교 사제 샤스탕 신부, 저와 동행해 조선 선교 희망

 

 

샤스탕 신부는 브뤼기에르 주교가 조선대목구장으로 임명됐다는 소식을 듣자 제일 먼저 조선 선교사로 자원했다. 샤스탕 신부 성인화.

 

 

길잡이로 신학교 출신 중국인 왕 요셉 선발

 

1831년 9월 9일 그레고리오 16세 교황께서 조선대목구 설정과 함께 저를 초대 조선대목구장으로 임명하신 후 그해 10월 1일 자로 교황청 포교성성 장관 대리가 제게 편지를 썼습니다.

 

“지극히 공경하올 주교님, 조선인 교우들을 위해 대단히 큰 난관을 극복하기 위해 준비하시는 모습을 역력히 알아볼 수 있는 주교님의 편지를 읽었습니다. 그 난관은 조선에 있는 새 영세자들에게 복음의 빛이 비치고, 성사가 거행되게 하기 위해 반드시 넘어야 할 것입니다. 포교성성은 겸손되이 이 모든 일을 이루신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 나폴리 신학교의 중국인 신학생 두 명이 조선으로 들어가기를 원하고 있으며, 또한 주교의 인호를 지니고 그들의 일을 지도하고 주교 직무를 수행할 수 있는 유럽인 선교사도 확실히 선발될 것입니다.

 

포교성성의 판단은 조선을 다른 어떤 주교의 예속으로부터 독립시켜 조선에 새로운 대목구를 설립하자는 것이고, 이 새로운 감목 직분을 주교님께 맡기시는 것은 모두가 하느님의 섭리로 우리 교황이신 그레고리오 16세 성하께 달려 있습니다. 교황님께서는 소칙서 형태로 사도 서한을 인준하시며 발송할 것을 명하셨습니다. 그 칙서에는 사도좌 권한으로 새로운 교황 대리 감목구가 설립되어 귀하께 그 임무가 맡겨지며, 귀하께는 중국의 교황 대리 감목과 동일한 권한이 부여된다는 구절도 들어 있습니다. 이에 대한 책임은 마카오의 경리인 라파엘 움피에레스 신부에게 맡겨집니다. 포교성성은 필요한 것을 준비하도록 할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은 복음의 찬미가가 조선에서 울려 퍼지게 하기 위함입니다.

 

모든 것을 베풀어주시는 하느님 덕분으로 주교님과 함께 떠날 중국인 신학생들 가운데 한 명은 유 파치피코(여항덕)로, 지난달인 1월에 나폴리 신학교에서 떠났고, 다른 한 명은 같은 신학교 학생인 주 요셉으로 산서(山西)대목구 소속입니다. 이에 대해서는 주교님께서 포교성성의 담당자와 함께 일을 논의하실 수 있습니다. 적절한 때 주교님께 맡겨져 시작된 사업을 하느님의 도움으로 마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주교님께서 건강하시고 복되시기를 하느님께 계속 기도하겠습니다.”

 

저는 마카오로 갈 배를 구하면서 페낭에서부터 조선으로 떠날 준비를 차근차근 해나갔습니다. 우선 조선까지 가는 중국 길을 안내할 길잡이 한 명을 선발해 여행 동반자로 삼았습니다. 바로 ‘왕 요셉’입니다. 그는 페낭신학교 신학생이었으나 병으로 얼마 전 그만둔 중국인 청년입니다. 페낭신학교 교장 미셸 샤를 롤리비에(Michel Charles Lolivier) 신부가 추천해줬습니다.

 

롤리비에 신부는 “이 청년은 절대로 쫓겨난 것이 아닙니다. 신학교를 그만둔 것은 건강상 이유였습니다. 그는 신앙심이 깊고, 신학교에서 가장 우수한 학생 중 한 명입니다. 그는 한자를 잘 알고 있으므로 주교님께서 말을 배우시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강조했습니다. 왕 요셉은 샤스탕 신부가 페낭의 중국인 사회 전교회장으로 저에게 추천할 만큼 화교들 사이에 활달한 교리교사로 알려졌습니다.

 

왕 요셉 자신도 저와의 동행을 간절히 원했습니다. 그는 저에게 “주교님께서는 조선으로 가십니다. 하느님의 은총을 입어 저는 이와 같은 여행에 따르는 위험을 무릅쓰고, 또 이 선교 임무 중 생기는 위험에 맞설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무엇보다 하느님을 위하여 자기 생명을 내어 놓는 것은 두려워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열망해야 하는 운명”이라고 말했습니다. 이 말을 듣고 저는 그에게 “나를 따라와도 좋다”고 허락했습니다.

 

파리외방전교회 소속 교황 파견 선교 사제인 샤스탕 신부는 1828년 7월 19일 마카오에 도착한 후 조선 교회 소식을 듣고 조선으로 가기로 마음먹었다. 사진은 샤스탕 신부가 세례성사를 받고 사제수품 후 첫 미사를 봉헌했던 고향 마르쿠 성당.

 

 

샴대목구장 허락하면 조선 선교 동행 약속

 

자크 오노레 샤스탕(Jacques Honore Chastan) 신부도 저와 동행해 조선 선교를 희망했습니다. 그는 교황 파견 선교 사제로 1828년 7월 19일 마카오에 도착한 후 조선 교회 소식을 듣고 조선 선교를 자원한 바 있습니다. 1829년 1월부터 페낭신학교 교수로 재임하고 있는 그는 프랑스 디뉴교구 몽타냑본당 주임 베지앙(Vezian) 신부에게 1830년 8월 25일 편지를 써 “친구여 오시오. 열심한 우리 여러 친구 중에서 몇 명을 데리고 오시어 조선으로 보내달라고 청하시오. 조선으로 가게 되면, 여러분은 그곳에서 재생의 성사가 되는 세례 성사 외에 어떤 성사도 받지 못했고 하느님의 말씀 듣기를 갈망하는 사람들을 만날 것입니다. 만나는 조선 교우들에게 여러분은 말씀이라는 빵을 주고 영원한 생명을 위한 빵을 줄 것이요, 그 교우들이 순교할 수 있도록 그들에게 마음의 준비를 시킬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도 그곳에서 진짜 사도적 생활을 해서 순교할 준비를 할 것입니다. 그러고 나서 순교자들이 누리게 되는 영광을 누리실 것입니다”라고 조선 선교를 추천할 만큼 조선에 대한 애정이 깊었습니다.

 

저는 샤스탕 신부에게 샴대목구장 플로랑 주교님께서 허락하시면 교황 파견 조선 선교 사제로 받아주겠다고 약속했습니다. 그는 곧장 이 소식을 프랑스에 있는 사촌 알르망(Allemand) 신부에게 편지로 알렸습니다. “주교님께서 저를 데리고 함께 가실 결심을 하셨습니다. 사촌 신부님도 그렇다고 여기시겠지만, 이는 당연한 것입니다. ?우리는 이달 말에 출발해 마카오로 갈 것입니다. 그곳 포교성성 대표부가 주님의 포도밭 가운데 소중한 몫인 조선으로 들어가는 방편을 제공할 것입니다. 이 위험천만의 여정을 시도하는 것은 오직 주님을 위한 것이며, 그분의 무한한 호의에 우리가 희망하듯이 그곳에 이르게 되는 행복을 누리려면 우리는 중국을 횡단해야 하고, 또 달단(만주) 땅도 일부 가로질러야 합니다. 그런 다음에야 비로소 세상에서 가장 의심 많은 민족이 사는 곳으로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제가 중국어를 아는 것이 중국을 가로지를 때 도움이 될 것이고, 한자를 쓸 줄 알기에 조선어를 배우는 데 많은 도움이 될 것입니다. 제가 조선에 다다르는 행복을 누리게 된다면 저의 주요 임무는 젊은이들을 가르쳐 사제품에 오르도록 양성하는 일이 될 것입니다. 그곳에 유럽인 사제들을 들여보내는 데에 어려움이 있으므로, 현지인 성직자가 없다면 그곳 교우 공동체를 제대로 보살필 수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샤스탕 신부가 1832년 7월 12일 사촌 알르망 신부에게 보낸 편지)

 

프랑스 디뉴 인근 마르쿠 성당에서 블레온느 강을 건너 약 1.5㎞ 거리에 있는 성인의 생가.

 

 

싱가포르와 마닐라 거쳐 마카오로 떠나

 

저는 조선으로 가기 위해 싱가포르와 마닐라를 거쳐 마카오로 가기로 했습니다. 샤스탕 신부는 플로랑 주교의 허락을 받고 뒤따라 오기로 하고 저와 왕 요셉은 7월 25일 저녁 7시 싱가포르로 가는 배를 탔습니다. 이틀 전 싱가포르 교우들의 탄원서를 들고 저를 만나러 온 피에르 쥘리엥 마르크 클레망소(Pierre Julien Marc Clemenceau) 신부도 같이 탔습니다. 우리는 8월 17일에 겨우 싱가포르에 도착했습니다. 싱가포르는 1819년부터 영국의 식민지였습니다. 저는 영국인 총독에게 “교황께서 싱가포르 교회 사목권을 프랑스 선교사들에게 주셨기에 포르투갈 선교사들이 아닌 파리외방전교회가 관할권을 갖고 있다”고 분명히 밝혔습니다. 그리고 클레망소 신부가 싱가포르 사목 전담자라고 소개하면서 성당을 지을 땅을 총독에게 요청했습니다. 영국인 총독은 저의 요청을 받아들여 ‘교황청 결정을 따른다’는 내용의 협정서에 서명했습니다.

 

일이 해결되자 저는 마닐라로 가는 배를 구할 동안 포교성성 마카오 대표부장 움피에레스 신부에게 편지를 썼습니다. “존경하올 신부님, (1832년) 7월 25일에 저는 교황님께서 저를 조선의 교황 대리 감목으로 임명하신 것이 확실하다는 편지를 뒤부아 신부에게서 한 통, 랑글루아 신부에게서 또 한 통을 받았습니다. 칙서는 이미 마카오로 발송됐습니다. 이제 대단히 지혜롭게 행동해야만 하니 특히 프랑스 선교사들의 영원한 적수인 포르투갈 선교사들을 조심해야겠습니다. 저는 남경의 주교를 특히 주의해야만 할 것 같습니다. 먼저 일을 보기 위해 싱가포르에 잠시 머물렀다가 가능한 한 빨리 출발할 것입니다. 하지만 바라는 목적을 순탄하게 달성할 수 있다는 어떤 희망도 가지고 있지 못한 상황입니다. 포르투갈 사람들은 포교성성의 훈령을 받지 않으려 할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공개적으로 확실하게 반발하고 있습니다. 이는 포교성성이 선교사들을 동양에 파견하면서 그들에게 보장한 권리를 거스르는 것입니다.”(브뤼기에르 주교가 1832년 8월 22일 싱가포르에서 움피에레스 신부에게 보낸 편지 중에서)

 

저는 왕 요셉과 1832년 9월 12일 싱가포르를 떠나 마닐라를 거쳐 10월 18일 마카오에 도착했습니다. 뭍에 내리자마자 곧바로 움피에레스 신부를 만나러 포교성성 대표부로 갔습니다. 저를 맞은 그는 “저희 집에 오시길 잘하셨습니다. 프랑스 선교지들의 대표부 (르그레즈와) 신부는 주교님을 절대로 받아 주지 않았을 테니까요!”라고 말했습니다.

 

[가톨릭평화신문, 2024년 5월 5일, 리길재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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