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순교자 성월 특집1: 오메트르 신부의 파리외방전교회 입회 | |||
---|---|---|---|---|
이전글 | 함께 보는 우리 성인과 복자들: 성 최경환과 복자 이성례 부부 | |||
다음글 | 성인처럼: 가난한 사람들의 어머니, 성녀 마더 테레사 | |||
작성자주호식 | 작성일2024-09-04 | 조회수10 | 추천수0 | |
순교자 성월 특집 (1) 오메트르 신부의 파리외방전교회 입회
2023년 6월 16일 오전에 파리에서 유학 중인 3분의 신부님과 함께 파리 몽파르나스 역에서 TGV를 타고 2시간을 달려 앙굴렘(Angouleme) 역에 도착하였다. 1866년 갈매못에서 순교한 성 오메트르(Pierre Aumaitre) 신부님의 유적지를 순례하려는 것이었다. 그날 오후에 오메트르 신부님이 다녔던 꼬냑(Cognac) 리슈몽(Richermont)에 있는 소신학교(현재 직업학교)를 가 보았다. 이어 그곳 본당(Sacre Coeur)을 방문하였는데, 기쁘게 맞아준 본당 신부님과 신자들과 함께 사제의 성화의 날 미사를 봉헌하였다. 본당 신부님은 앙굴렘 교구에 1984년 시성식 이후에 건축된 오메트르 신부님의 기념 성당(L’eglise St. Pierre Aumaitre)이 있고, 성당 앞 도로 이름은 성 오메트르 거리(Rue St. Pierre Aumaitre)이며, 주교좌 성당에는 오메트르 신부님의 유해 일부가 모셔져 있다고 친절하게 알려주셨다.
이튿날 앙굴렘에서 북쪽으로 45km 떨어진 휴펙(Ruffect)을 향해 출발하여 베르떼유 쉬르 샤랑트(Verteuil-sur-Charette)에 있는 오메트르 신부님이 세례를 받은 성당(Saint-Medard)을 방문하였다. 세례대가 그대로 있었고, 성당 벽에는 오메트르 신부님의 상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던 듯 따뜻하게 맞이해 주었다. 이 성당에서 4km를 가 전형적인 시골 마을인 에제끄(Aizecq)에 가서 생가 방문하였다. 태어난 집 당시 그대로 보존되어 있었는데, 그것이 오히려 더 감동적이었다. 그 마을에는 당시 귀족의 성채 안에 있던 작은 성당이 지금은 오메트르 성당으로 명명되었는데, 성인의 초상화와 성인을 기념하는 작은 책자 등이 비치되어 있었다. 마을 성당에서 200mm 떨어진 양지바른 곳에 있는 부모님의 묘지를 방문했다.
오메트르 신부님은 1837년 4월 8일 프랑스 서남부에 있는 앙굴렘 교구에 있는 작은 마을인 에제끄의 선량한 농부 가정에서 5남매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소신학교를 거쳐, 앙굴렘 대신학교에서 공부하다가 교구장 주교의 허락을 얻어 1859년 8월에 파리외방전교회에 입회하였다. 그는 입회하러 파리로 가기 전, 자신의 결정을 가족들에게 이야기하면서 “앙굴렘 대신학교로 가지 않고 파리에 있는 파리외방전교회 신학교로 가서 신학부 과정을 끝낼 것이다.”라고 하였다. 하지만 가족들은 속지 않았다.
오메트르는 십자가 아래 계셨던 성모님의 고통을 이야기하면서 어머니를 위로해 드리려고 하였다. 어머니는 “나도 그 모든 것을 이해하고 있어. 이 불행을 견디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노력을 다하기를 간절히 바래고 있어. 그런데 그렇게 할 수가 없구나. 이제까지 너무 많은 고통을 당하면서도 하느님께만 내 고통을 보여 드렸었는데. … 너에게서 위안을 얻기를 희망했던 나는 이 세상에 내게 속한 것이 아무것도 없는 나는 이제 어떻게 한단 말이냐?”라고 하였다. 그는 이 말씀으로 오래 버틸 수가 없을 것 같았지만, 눈물을 조금 밖에 흘리지 않았다. 이런 용기를 느껴본 적이 없었다. 모친 앞에 무릎을 꿇고 축복해 달라고 청했고, 모친은 그렇게 해주었다. 하지만 부친은 “떠나거라. 나는 너를 더 이상 보고 싶지 않다.”라고 화를 내셨다. 부친은 아들이 떠나는 것을 막기 위해 주교님을 뵈러 가고 싶다고까지 하였다. 하지만 결국 아버지는 떠나는 아들을 축복해 주었다.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들은 ‘출발하는 선교 사제는 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하게 간직한 것, 즉 가족, 친구, 조국을 떠나는 것이다. 위험과 고난으로 가기 위해 휴식과 평온을 포기하는 것이다’라는 확고한 인식을 갖고 있었다. 고향과 가족과의 영원한 이별은 선교 영성에 큰 역할을 하였다. 이것은 선교지를 위해 자신을 온전히 봉헌할 수 있는 자유를 주는 근본이었다. 돌아올 수 있는, 돌아갈 수 있는 자기의 뒤 문을 닫고 가족을, 고향을 떠난 것이다.
[2024년 9월 1일(나해) 연중 제22주일(피조물 보호를 위한 기도의 날) 원주주보 들빛 5면, 여진천폰시아노 신부(단양 성당)]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