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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오(오상의)(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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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인명, 축일, 성인구분, 신분, 활동지역, 활동연도, 같은이름 목록
성인명 비오(오상의) (Pius)
축일 9월 23일
성인구분 성인
신분 신부
활동지역 피에트렐치나(Pietrelcina)
활동연도 1887-1968년
같은이름 비우스, 피오, 피우스
성지와 사적지 게시판
제목 영화 카푸친의 성인, 오상의 성 비오: 저는 그분의 고통을 나누는 것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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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21-12-16 조회수129 추천수0

[영화로 보는 성인들] 영화 <카푸친의 성인, 오상의 성 비오>, 감독 카를로 카를레이


“저는 그분의 고통을 나누는 것뿐입니다”

 

 

성 파드레 비오(1887~1968)

 

1887년 5월 25일, 이탈리아 남부 캄파냐 주의 작은 마을 피에트렐치나에서 소작농의 아들로 태어났다. 원래 이름은 프란체스코 포르지오네. 15세에 카푸친작은형제회에 수련자로 입회하여 비오라는 수도명을 받았고, 1910년 사제 서품을 받았다. 1918년 두 손과 두 발, 옆구리에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 그리스도의 오상을 받은 이후, 50년 동안 고통 속에서 매일 미사와 고해성사를 통해 사람들을 회개의 삶으로 이끌었다. 많은 병자들을 치유하는 기적을 베풀었고, 병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을 위해 ‘고통을 더는 집’을 세웠다. 평생 크고 작은 병에 시달리면서도 기도와 희생의 삶을 살다가 1968년 9월 23일 81세의 나이로 선종. 1982년부터 7년 동안 교황청이 시성 여부를 조사했고, 1999년 복자 선언에 이어 2002년 6월16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성인으로 시성되었다.

 

기적. 믿는 사람도 있고, 믿지 않은 사람도 있습니다. 믿는 사람에게는 아이슈타인의 말처럼 모든 것이 신비이고, 믿지 않는 사람에게는 불가해한 우연이나 속임수일 뿐입니다. 무엇이 기적을 만들까요. 인간의 초능력이 아닙니다. 간절한 마음과 믿음입니다.

 

 

기적을 믿지 않는 어느 신부

 

임종을 하루 앞둔 여든한 살의 비오 신부에게 한 신부가 찾아옵니다. 그는 기적을 믿지 않습니다. 비오 신부의 ‘오상(五傷)’이 여전히 거짓이거나 조작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끈질기게 비오 신부에게 속이고 있는 것, 숨기고 있는 것을 죽기 전에 모두 털어놓으라고 다그칩니다.

 

그의 눈에는 비오 신부가 있지도 않은 기적이란 케케묵은 방식으로 사람들의 믿음을 악용해 광신을 부추기고 미신을 조장하는 인물로 보입니다. 마치 사이비 종교인을 대하듯 “교회에 당신 같은 사람은 필요 없다.”고 매몰차게 비난합니다. “왜 이곳(산조반니로톤도성당)을 떠나지 않느냐. 인기인이 되어서 유명한 곳으로 만들려는 것 아니냐.”라고 빈정대기도 합니다.

 

파티마의 세 아이가 그랬듯이 비오 신부의 기적과 그것이 가져온 은총과 예언, 용서와 치유의 힘 역시 성직자들과 교회로부터 끝없이 의심을 받습니다. 물론 그를 찾아와 다그치는 신부는 영화가 설정한 가공의 인물입니다. <파티마의 기적>에서 성모 발현에 의심을 가진 니콜스 교수와 같은 역할을 맡은 것이지요. 그렇다고 그의 존재가 완전히 허구라고 말할 수도 없습니다. 실제로 평생 비오 신부를 사이코패스, 자해 범죄자 취급을 하면서 괴롭힌 게멜리 신부도 있었으니까요.

 

교회 역사에서 과학적으로 불가능하다는 이유로 믿음의 기적들을 의심하는 사람들은 늘 있었습니다. 성직자라고 다르지 않았습니다. 게멜리 신부도 그랬습니다. 그는 “교회도 변해야 한다. 어떤 시대인데. 교회에 갇혀 있을 수 없다. 과학적으로 따져야 한다.”면서 비오 신부의 오상으로 많은 사람들이 마법과 주술을 믿게 되고, 그러니까 많은 사람들이 그런 성인 만들어낸다고 비판합니다.

 

 

“교회는 예언적 카리스마를 전달하는 곳임을 잊지 마시오.”

 

그렇게 보일 수도 있습니다. 기적을 믿지 않는 사람에게는. 그러나 그의 주장에 대한 추기경의 반박은 교회가 진정 어떤 곳인지를 깨우쳐줍니다. “그렇다면 성당 제대도 필요 없을 것 아니요. 성인 축일도 없애고, 성인호칭 기도도 폐지하고. 과학적인 것만으로 교회를 채울 수는 없소. 교회는 예언적 카리스마(은사)를 전달하는 곳임을 잊지 마시오.”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없다고 해서 그것이 진실이 아니라고 할 수 없습니다. 마법이나 주술은 더더욱 아닙니다. 과학이, 인간이 알고 있는 진실이 얼마나 될까요. 파티마에서 성모님을 만났던 루치아 수녀는 “과학적 탐구가 진실이듯, 믿음 역시 진실 탐구다.”라고 말합니다. 비오 신부에게 그 믿음은 무엇이었을까요.

 

<카푸친의 성인, 오상의 성 비오>는 오상 50년째 되는 날, 그 진실을 듣기 위해 그를 찾아갑니다. 결코 비오 신부와 그의 오상을 미화하거나 과장하지 않습니다. 비오 신부 스스로 말한 것처럼 자신 안에 주님을 모시고, 주님 안에 자신을 맡긴 작은 형제일 뿐인 한 성직자의 삶과 신앙의 길을 진솔하게 이야기합니다.

 

기적에 우연은 없습니다. 소년 프란치스코에게 그것은 간절한 기도와 믿음에서 시작됩니다. 큰 나무 아래에서, 들판에서 악마의 소리를 들은 소년은 그 무서움에 하느님에게 도움을 청하고, 하느님은 그 소년을 품에 안습니다. 그 순간, 소년은 하느님이 계시는 한 아무도 날 해치지 못한다는, 온 마음을 다해 기도하면 주님께서 들어주신다는 믿음을 얻습니다.

 

 

믿음과 용서의 기적을 행하시기 위하여

 

소년의 눈과 마음과 사랑은 주님의 것입니다. 주님의 기적은 이렇게 당신을 간절히 원하고 따르려는 사람들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마치 성 프란치스코의 가장 큰 기적은 700년이 지나도 젊은이들을 수도원으로 부르듯이. 비오 신부에게 예수님의 고통이 들어온 것 역시 그를 통해 긴 시간 믿음과 용서의 기적을 행하시기 위해서였습니다.

 

비오 신부도 처음에는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왜 예수님이 자신의 고통을 나에게 주었는지 깨닫지 못합니다. 골고타 산의 신음소리를 들었고 그분이 그곳에 계신다는 느낌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너는 죽음을 이겼다고 하는 자를 믿는구나. 그런데 어쩌지 내가 바로 그 죽음의 주인이야. 거부해도 뜻대로 안 될 걸. 너와 예수는 실패자야. 사제직을 그만둬, 경고야.”라는 사탄의 위협과 맞닥뜨리고서야 알게 됩니다. 예수님이 죽음의 고통과 예언적 능력을 함께하면서 이루시려는 것이 다름 아닌 악으로부터의 구원이라는 사실을.

 

이때부터 영화는 비오 신부의 놀라운 예언과 깊고 넓은 용서와 사랑의 실천을 보여줍니다. 예언자적 가르침은 전쟁터로 나간 청년들의 생명을 지켜주고, 큰 화를 당할 뻔한 마을의 여자를 구해주고, 자신의 죄를 모르고 남을 비난하는 남자를 회개시킵니다. 게멜리 신부까지도 기꺼이 용서합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의 잘못이 아닙니다. 선한 사람을 갈라놓는 악마의 짓입니다. 진정한 고통은 사랑하는 사람에게서 옵니다. 용서하십시오. 기도는 용서의 열쇠입니다.”

 

 

비오 신부의 삶이 감동적으로 그려져

 

우리는 결코 다른 사람의 고통을 나눌 수 없습니다. 그런데 오상을 통해 고통을 함께 하는 비오 신부에게서 사람들은 예수님을 본 건지도 모릅니다. 악마가 어머니를 데려가는 슬픔을 눈물의 기도로 이겨내고, 자신을 위해 기적을 청할 수 없다는 하느님과 약속을 지키기 위해 병든 아버지를 그대로 떠나보내면서 사람들에게 진정한 사랑과 용서와 은혜가 무엇인지를 보여줍니다.

 

이 영화에서 우리의 가슴을 강하게 울리는 장면은 마지막 비오 신부와 그를 찾아온 신부가 서로 고해성사를 하고 사죄경을 하는 모습입니다. 영화가 만든 허구적 상황 설정이지만 50년 동안 ‘예수님과 고통을 나누고’ 살아온 비오 신부의 삶이 압축적이고 감동적으로 그려져 있기 때문입니다.

 

 

“이 얼마나 위대한 신비입니까”

 

스스로 무식하고, 성질이 더럽고, 많은 사람들을 힘들게 했다면서 죽기 전에 고해성사를 하겠다는 비오 신부. 수년 전 민병대에 쫓기는 어린 군인이 죄중에 죽을 수 없다면서 고해성사만이라도 해달라는 요구를 무서워서 거절하고 문을 닫아버린 신부. 그때 상징(형상)으로 그의 옆에서 “그 청년을 도우시오.”라고 외쳤던 비오 신부. 그 소리를 듣지 못한 것을, 그동안 비오 신부를 박해하고 단죄한 자신의 죄를 눈물로 참회하는 신부.

 

그런 그에게 비오 신부는 두려움은 인간의 감정이라면서, 그렇게 하지 않았다면 함께 걸으신 주님을 알아보지 못했을 것이라면서 이미 용서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 신부가 비오 신부의 간절한 부탁에 울음 섞인 목소리로 사죄경을 줍니다. “거룩한 교회가 나에게 준 권한으로 당신의 모든 죄를 사하노라.”

 

비오 신부는 이렇게 생의 마지막 기도를 하고 눈을 감습니다. “얼마나 많은 은사를, 얼마나 많은 선익을, 얼마나 많은 기적을 저에게 주셨는지요. 저는 당신 안에서, 당신은 저 안에서 살고 고통 받았습니다. 이 얼마나 위대한 신비입니까. 감사합니다, 저의 주님. 전 준비되었습니다. 원하시면 데려가세요.”

 

이 영화는 비오 신부가 강조한 신앙생활에서 가장 소중한 4가지를 다시 한 번 되새기게 합니다. 영혼의 목욕인 고해성사, 그분을 마음으로 모시는 성체성사, 양심의 성찰, 그리고 완덕의 길로 들어서게 만드는 영적 독서를.

 

[평신도, 2021년 겨울(71호), 이대현 요나(언론학박사,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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