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7년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161~180년 재위)의 칙령으로 오늘날 프랑스에 해당하는 갈리아 지방의 리옹과 비엔(Vienne)에서 그리스도인에 대한 박해가 시작되었다. 이 두 도시는 론강(Rhone R.)의 우안과 좌안에 형성되어 동방으로 향하는 무역로의 시작점이 되었고, 도시의 인구 중에 그리스와 소아시아 출신의 그리스도인도 많이 있었다. 황제의 박해가 시작되자 이교도들은 그리스도인을 조롱하고 학대하며 약탈을 일삼았다. 그들은 그리스도인이 어린아이를 죽이고 그 살과 피를 먹고 마신다는 거짓 주장으로 군중을 흥분시켰다. 그리스도교의 성체성사를 이해하지 못하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사욕을 채우기 위한 악의적인 모함에 가까웠다. 그 외에도 그리스도인들이 로마의 신상 앞에 희생 제사를 바치지 않기에 황제에 대한 반역죄를 저질렀다고 고발하기도 했다. 또한 그리스도인은 서로 ‘형제’ · ‘자매’라는 용어를 사용하며 근친상간을 저지른다는 터무니없는 비난과 소문을 만들어냈다. 이러한 주장을 심각하게 받아들인 리옹의 군 사령과 지방 태수는 그리스도인을 체포하기 시작하였다. 그리스도인들은 재판장으로 끌려가 부당한 심문을 받고 감옥에 갇혀 혹독한 고문을 당한 후 48명이 끝까지 신앙을 고백하고 순교하였다. 이들을 보통 ‘리옹의 순교자들’로 부르고 있다. 이들의 영광스러운 순교에 대해서는 믿을만한 동시대의 증언이 전해지고 있다. 갈리아 교회는 이들이 순교한 후 바로 소아시아와 프리기아(Phrygia)의 교회에 편지를 보내 그들이 당한 순교에 관해 자세히 전해주었다. 그리고 이러한 사실은 리옹의 초대 주교이자 리옹의 순교자 가운데 대표적 인물인 성 포티노(Pothinus)의 후임으로 리옹의 제2대 주교가 된 성 이레네오(Irenaeus, 6월 28일)에 의해서도 확인되었다. 그가 다른 교회에 편지를 써서 보낸 사람일 수도 있다. 교회사학자로 유명한 카이사레아(Caesarea)의 에우세비우스(Eusebius)가 그의 저서 “교회사”(Historia ecclesiastica)에서 그 편지의 상당 부분을 수록하여 오늘날까지 전해지게 되었다. 리옹의 순교자들은 보통 6월 2일에 ‘리옹의 성 포티노와 성녀 블란디나와 동료 순교자들’이란 이름으로 함께 축일을 기념하고 있다. 옛 “로마 순교록”은 6월 2일 목록에서 리옹에 수많은 거룩한 순교자들이 있었다면 그들의 이름을 전해주었다. 성 포티노 주교, 성 상토(Sanctus) 부제, 성 베시오(Vetius), 성 에파가토(Epagathus), 성 마투로(Maturus), 성 폰시코(Ponticus), 성녀 비블리스/비블리데스(Biblis/Biblides), 성 아탈로(Attalus), 성 알렉산데르(Alexander), 성녀 블란디나(Blandina)와 다른 많은 순교자가 있었다고 적었다. 그들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와 루키우스 베루스 황제(161~169년 재위) 시대에 용감하게 싸운 전투는 리옹 교회가 아시아와 프리기아 교회에 보낸 편지에 기록되어 있는데, 이들 순교자 중 한 명인 성녀 블란디나는 낮은 신분의 젊은 여성으로 작은 체구의 소유자였지만 누구보다 더 오래 더 끔찍한 시련을 겪었다. 하지만 절대 흔들리지 않았고, 순교의 월계관을 얻고 승리하도록 앞서 권고한 이들을 뒤따라 칼날을 받고 순교하였다. 옛 “로마 순교록”이 모두 10명의 순교자 이름을 전해주었으나 성 베시오와 성 에파가토는 실제 둘이 아니라 성 베티우스 에파가투스(Vetius Epagathus, 또는 베시오 에파가토) 한 사람을 잘못 적은 것이다. 동시대의 증언에 따르면 리옹의 그리스도인들이 분노한 군중에 둘러싸여 재판을 받을 때, 군중 속에 있던 젊은 그리스도교 신자인 성 베시오 에파가토가 그들을 변호하게 해달라고 요청하였다. 하지만 요청은 거부되었고 그 또한 체포되어 다른 신자들과 함께 감옥에 갇혔다. 성 포티노 주교는 소아시아 출신으로 1세기 말에 태어나 ‘사도들의 말을 직접 들은 사람들’ 가운데 한 명으로 갈리아 지방에 선교사로 와서 리옹의 초대 주교가 되었다. 그가 체포되었을 때는 이미 90세를 넘긴 병들고 힘없는 노인이었다. 그러나 그는 관리들 앞에 똑바로 서서 재판을 받고 그리스도를 옹호하였다. 재판관이 그리스도교의 하느님이 누구냐고 묻자 그는 “당신이 참 인간이라면 반드시 알게 될 것이오.” 하고 대답할 정도로 대담하였다. 결국 그는 의식을 거의 잃을 때까지 매를 맞고 감옥에 갇혀 이틀 만에 숨을 거두었다. 성녀 비블리스는 신앙을 부인하고 배교했던 사람 가운데 하나였으나 체포되어 고문을 받자 마치 깊은 잠에서 깨어나듯 정신을 차리고 당당히 신앙을 고백하였다. 박해자는 그리스도인의 식인 행위에 대해 자백하라고 강요했으나 그녀는 “동물의 피조차 먹는 것을 금지한 우리가 어떻게 어린아이를 먹을 수 있겠습니까?” 하며 당당히 증언하였다. 비엔의 부제인 성 상토는 붉게 달군 쇠로 지지는 고문으로 심한 화상을 입었으나 라틴어로 “나는 그리스도인이다.”라는 말만 반복하였다. 리옹의 순교자들 가운데 가장 유명하고 큰 공경을 받는 이는 성녀 블란디나이다. 그녀는 노예였으며 그녀의 여주인과 함께 순교하였다. 성녀 블란디나는 어리고 약하고 힘없는 노예 신분이었지만 심문과 고문을 받는 내내 “나는 그리스도인이고, 우리는 부끄러운 짓을 하지 않아요.”라고 말하였다. 박해자들은 나약해 보이는 성녀 블란디나가 고문을 받으면 배교할 것으로 생각했다. 그래서 그녀를 성 상토 부제와 성 마투로 새 영세자와 소아시아 페르가몬(Pergamon) 출신의 유력 인사인 성 아탈로와 함께 원형경기장으로 끌고 가서 관중들의 흥을 돋우려 갖은 고문을 자행했다. 성 마투로와 성 상토는 뜨거운 철판 위에 올려져 고통을 받고 참수되었다. 성 아탈로는 로마 시민이었기에 황제의 명을 기다리며 다시 감옥에 갇혔다. 성녀 블란디나는 말뚝에 묶인 채 굶주린 사자들 앞에 놓였다. 하지만 놀랍게도 사자들이 마치 고양이처럼 그녀의 상처를 핥을 뿐이었다. 그래서 그녀 또한 다시 감옥에 갇혔다. 그 무렵 리옹에서 축제가 벌어지면서 주변 지방으로부터 많은 사람이 모여들었다. 지방 태수는 감옥에 갇힌 그리스도인들을 다시 불러내 심문하며 로마 시민권을 가진 이들은 참수하고 나머지는 야수에게 던져주라고 판결했다. 그들이 심문받는 동안 비엔에 살던 의사인 성 알렉산데르가 신자들을 격려하는 손짓을 했다. 그로 인해 체포된 성 알렉산데르는 당당히 그리스도인임을 선언하고 사나운 야수들 속에서 순교하였다. 성녀 블란디나는 다른 동료 그리스도인들이 잔인하게 고문을 당하고 결국은 야생 동물에게 갈기갈기 찢기는 모습을 모두 지켜봐야 했다. 그리고 그녀도 15살의 소년인 성 폰시코와 함께 다시 경기장으로 끌려 나왔다. 그들은 온갖 고문을 당했으나 굴복하지 않았다. 성 폰시코는 성녀 블란디나의 격려로 힘을 얻어 모든 고통을 참아냈다. 마지막으로 성녀 블란디나만 남았을 때, 박해자들은 그녀를 채찍질하고 불에 달군 철제 의자에 앉혀 고통을 주며 성난 황소에게 넘기는 등 다양한 고문을 계속했다. 황소도 그녀를 죽이지 못하자 결국 칼로 목을 찔러 처형하였다. 이토록 잔인한 고문을 당하면서도 48명의 순교자 중 누구도 신앙을 포기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은 박해자들과 남아 있는 이들을 위해 기도하였다. 박해자들은 순교자들의 유해 공경을 막기 위해 시신을 모두 불태워 론강에 던져버렸다. 다른 그리스도인들에 의해 겨우 건져진 순교자들의 유해 일부는 인근 성당에 모셔졌다.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은 6월 2일 목록에서 프랑스 리옹에서 성 포티노 주교와 성녀 블란디나와 46명의 동료 순교자들이 탄생했다고 적었다. 그들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 시대에 겪었던 고통스럽고 반복된 시련에 대해서는 리옹 교회가 아시아와 프리기아 교회에 보낸 편지에 증언되어 있는데, 90대 고령의 주교인 성 포티노는 감옥에 갇힌 직후 숨을 거두었고, 다른 이들도 감옥에서 죽거나 수천 명의 관중이 지켜보는 경기장에서 순교하였다. 로마 시민으로 확인된 이들은 참수하고 나머지는 야수들에게 던져졌는데, 마지막으로 성녀 블란디나가 가장 오래 가혹한 고문을 겪은 후 칼에 찔려 순교하였다. 그럼으로써 그녀 또한 신앙을 지키고 순교하도록 앞서 자신이 권유했던 다른 신자들을 뒤따라 순교의 영광에 참여했다고 기록하였다. 아울러 “예로니모 순교록”(Martyrologium Hieronymianum)에서 언급한 것처럼 ‘48명의 리옹의 순교자들’ 이름을 전해주었다. 옛 “로마 순교록”의 9명 외에 성 자카리아(Zacharias) 신부, 성 마카리오(Macarius), 성 아스클리비아데스(Asclibiades), 성 실비오(Silvius), 성 프리모(Primus), 성 울피오(Ulpius), 성 비탈리스(Vitalis), 성 콤미노(Comminus), 성 옥토베르(October), 성 필로메노(Philomenus), 성 제미노(Geminus), 성녀 율리아(Julia), 성녀 알비나(Albina), 성녀 그라타(Grata), 성녀 에밀리아(Aemilia), 성녀 포타미아(Potamia), 성녀 폼페이아(Pompeia), 성녀 로다나(Rodana), 성녀 콰르시아(Quartia), 성녀 마테르나(Materna), 성녀 헬피스(Helpis), 성 유스토(Justus), 성 아리스테오(Aristeus), 성 고르넬리오(Cornelius), 성 조시모(Zosimus), 성 티토(Titus), 성 율리오(Julius), 성 조티코(Zoticus), 성 아폴로니오(Apollonius), 성 제미니아노(Geminianus), 성녀 다른 율리아(Julia), 성녀 아우소나/아우소니아(Ausona/Ausonia), 성녀 다른 에밀리아(Aemilia), 성녀 잠니카(Jamnica), 성녀 다른 폼페이아(Pompeia), 성녀 돔나(Domna), 성녀 유스타(Justa), 성녀 트로피마(Trophima), 성녀 안토니아(Antonia)까지 모두 48명의 순교자 이름을 기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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