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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니파시오(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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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인명, 축일, 성인구분, 신분, 활동지역, 활동연도, 같은이름 목록
성인명 보니파시오 (Boniface)
축일 6월 5일
성인구분 성인
신분 대주교, 선교사, 순교자
활동지역
활동연도 675?-754년
같은이름 보니파시우스, 보니파키오, 보니파키우스, 보니파티오, 보니파티우스, 보니페이스, 빈프리트, 윈프리드, 윈프리트
성인 기본정보

   성 보니파티우스(Bonifatius, 또는 보니파시오)는 675년경 영국 웨식스(Wessex)의 크레디톤(Crediton)에서 귀족 가문의 아들로 태어나 빈프리트(Winfrid, Wynfrith)라는 이름을 얻었다. 그는 불과 7살의 나이에 잉글랜드 남서부 데번셔(Devonshire)의 엑서터(Exeter)에 있는 성 베네딕토 수도원 학교에 들어갔다. 그리고 14살이 되던 해에는 햄프셔(Hampshire)의 너슬링(Nursling)에 있는 성 베네딕토 수도원 학교에서 윈버트(Winbert) 수도원장의 지도하에 교육을 받았다. 그는 그곳에서 앵글로-색슨 수도원의 사상과 신학적인 지식 · 선교 활동 등에 필요한 교육을 받고 너슬링의 성 베네딕토회에 입회하여 서른 살의 나이에 사제품을 받았다. 그 후 너슬링 수도원 학교의 교장이 되어 교수와 설교자로서 성공적인 활동을 했다. 그는 많은 시를 쓰고 영국에서 최초로 라틴어 문법서를 저술해 출판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영국에서 명성을 얻는 것보다는 프리슬란트(Friesland) 지방의 선교사가 되기를 희망했다. 그래서 716년에 수도원장의 허락을 받고 프리슬란트로 갔으나 라드보트(Radbod) 공작의 방해로 선교 활동을 할 수 없게 되자 다시 너슬링 수도원으로 돌아왔다. 717년 너슬링 수도원의 원장이 선종한 후 후계자로 선출되었으나 성 빈프리트는 이를 사양하고 이듬해 교황 그레고리오 2세(Gregorius II)를 알현하기 위해 로마로 갔다. 몇 차례 교황을 알현한 그는 719년 5월 교황으로부터 라인강 동쪽에 사는 이교도들에게 선교하라는 사명을 받고 길을 떠났다. 이때 교황은 그에게 선교 활동에 대한 당부와 함께 빈프리트라는 이름 대신 로마의 순교자인 ‘보니파시오’라는 새로운 이름을 주었다.

   이때부터 성 보니파시오는 우선 튀링겐(Thuringen)에서 지식인들에 대한 설교를 시작했고, 라드보트 공작이 사망하자 프리슬란트로 가서 위트레흐트(Utrecht)의 성 빌리브로르도(Willibrordus, 11월 7일) 주교를 도와 3년을 활동했다. 성 빌리브로르도는 그를 후계자로 지명하고자 했으나 독립된 활동을 원한 성 보니파시오는 722년 가장 이교도적 지역인 헤센(Hessen)으로 가서 아뫼네부르크(Amoneburg)에 최초의 베네딕토회 수도원을 설립했다. 그가 이곳에서 많은 사람에게 세례를 주고 성공적인 선교 활동을 펼치자, 교황은 성 보니파시오를 로마로 불러들여 주교로 서품하고 교회 법령집과 독일의 모든 수도자와 관리들에게 보내는 추천서를 써주었다. 이 서한은 그의 독일 선교 활동을 보호하기 위한 것으로, 특히 프랑크 왕국의 재상인 카를 마르텔(Karl Martell)의 보호를 받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다.

   성 보니파시오는 카를 마르텔의 보호를 받으며 723년부터 725년까지 제2차 헤센 선교에 나섰다. 이때 그는 가이스마르(Geismar)에서 이교도들이 신성시하는 떡갈나무를 베어 경당을 짓는 데 사용했다. 그런데 이 사건을 계기로 개종자들이 확산하는 결과가 나타났다. 그 후 그는 교황의 명을 받고 튀링겐으로 가서 교리 지식이 부족한 사제들과 이교도적 관습에 빠진 이들을 위해 오르트루프(Ohrdruf)에 수도원을 세웠다. 그리고 영국의 수도자들을 독일 선교사로 파견받아 교육과 선교 활동을 돕도록 했다. 732년 교황 그레고리오 3세는 그를 명의 대주교로 승품하고 장차 설립될 독일 교회의 주교들을 서품할 수 있는 권한을 주었다. 그는 독일 남동부 바이에른(Bayern) 지방에 잘츠부르크(Salzburg) 교구, 레겐스부르크(Regensburg) 교구, 프라이징(Freising) 교구들을 설립하고 여러 교구에 수도원도 세웠다. 하이덴하임(Heidenheim) 수도원에 이어 744년에는 성 스투르미오(Sturmius, 12월 17일)와 함께 풀다(Fulda)에 수도원을 설립했다. 풀다 수도원은 몇 년 지나지 않아 독일 지역 내에서 종교적 · 지성적 생활의 중심지가 되었다. 동시에 성 보니파시오의 지속적인 선교 활동과 영성적 쇄신을 위한 근거지가 되었다.

   성 보니파시오는 독일과 프랑크의 교황 특사로 임명되어 활동하면서 피핀 3세를 프랑크의 유일한 통치자로 세우는 대관식을 거행하기도 했다. 그는 쾰른에 자신의 대주교좌를 설립하고자 했으나 프랑크 주교들의 반대로 무산된 후 마인츠(Mainz)의 대주교가 되었다. 피핀 3세의 견제로 활동에 제약을 느낀 성 보니파시오는 마인츠의 대주교직을 사임하고 성 빌리브로르도가 선종한 후 다시 이교도적 관습에 떨어진 프리슬란트 지역을 재건하는 데 여생을 바쳤다. 그러던 중 754년 6월 5일 성령 강림 대축일에 도쿰(Dokkum) 근처 보르네(Borne) 강변에서 개종자들에게 견진성사를 주려고 준비하던 중 프리슬란트 이교도들의 급습을 받아 동료 52명과 함께 살해되어 순교의 월계관을 썼다. 그의 유해는 위트레흐트와 마인츠를 거쳐 그의 유언대로 풀다 수도원 성당에 안치되었다.

   성 보니파시오는 독일 지역 사람들의 개종에 헌신하고, 신설된 독일 교회가 로마 교회와 밀접하게 일치하도록 조직하고, 성직자의 개혁과 선교 활동을 위한 수도회 설립 등에 헌신해 ‘게르만족의 사도’ 또는 ‘독일의 사도’로 불리며 공경을 받고 있다. 그의 축일은 교황 비오 9세(Pius IX)에 의해 1874년부터 로마 보편 전례력 안에서 기념하고 있다. 옛 “로마 순교록”이나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 모두 6월 4일 목록에서 교황에 의해 독일로 파견되어 많은 이들을 그리스도교로 개종시키며 마인츠에 대주교좌를 세우고 독일의 사도로 활동하다가 이교도에 의해 순교한 성 보니파시오에 대해 기록하였다.♣

참고자료

  • 김정진 편역, 가톨릭 성인전(상) - '성 보니파시오 주교 순교자', 서울(가톨릭출판사), 2004년, 421-424쪽.
  • 한국가톨릭대사전편찬위원회 편, 한국가톨릭대사전 제5권 - '보니파시오', 서울(한국교회사연구소), 1997년, 3437-3439쪽.
  • L. 폴리 저, 이성배 역, 매일의 성인, '성보니파시오 주교 순교자', 서울(성바오로), 2002년, 134-136쪽.

사진/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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