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대 그레고리우스 1세(Gregorius I, 또는 그레고리오)는 이탈리아 로마의 부유한 원로원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의 가문은 이미 두 명의 교황, 즉 성 펠릭스 3세(Felix III, 526-530년, 9월 22일)와 성 아가피토 1세(Agapitus I, 535-536년, 9월 20일)를 배출한 로마의 유서 깊은 귀족 가문이었다. 그는 로마에서 법학 등 고등 교육을 받고 573년 로마 시장이 되었다. 574년경 아버지 고르디아누스(Gordianus)가 세상을 떠나자 성 그레고리오는 로마 첼리오 언덕에 있는 부모의 저택을 성 베네딕토의 규율을 따르는 성 안드레아 수도원으로 만들고, 그 수도원에 입회하여 오래전부터 꿈꿔 왔던 수도 생활을 시작했다. 그는 시칠리아(Sicilia)에 있는 가족 소유 토지에도 5개의 수도원을 더 세웠다. 578년 교황 베네딕토 1세(Benedictus I)에게 부제품을 받고, 579년 교황 펠라지오 2세(Pelagius II)에 의해 콘스탄티노플의 교황 대사로 파견되었다. 586년경 로마로 돌아온 그는 다시 성 안드레아 수도원에서 수도 생활을 계속하며 교황 펠라지오 2세를 도와 교회의 어려운 문제를 해결하고자 노력했다. 590년 교황 펠라지오 2세가 선종하자 그는 수도자로서는 처음으로 만장일치로 제64대 교황에 선출되었다. 전염병이 로마를 휩쓸고 있던 시기에 그는 출중한 행정 능력과 깊은 신앙심으로 어려움을 극복해 나갔다. 그는 교회 법령을 정비하고 무능한 성직자들을 해임하며 사제와 주교들의 영적 쇄신을 강조하고, 막대한 경비를 들여 기아와 전염병으로 시달리는 시민들을 구호하기 위한 자선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는 지혜롭게 교황청 재산을 관리했고, 랑고바르드족(Langobards)으로부터 포로들을 석방시키고, 부당한 박해를 받던 유다인들을 보호하였다. 그는 중세 교황권의 창시자로 평가될 만큼 활동적인 교황이었다. 593년 랑고바르드족이 로마를 침공하겠다고 위협했을 때 직접 랑고바르드족과 담판을 지어 로마의 평화를 지켜냈다. 이로써 그는 랑고바르드족의 왕과 함께 평화의 수호자로서 존경을 받았다. 이렇듯 그는 위대한 주교이자 유능한 정치적 감각의 소유자였다. 또한 그의 학덕은 누구도 넘볼 수 없을 정도로 높았고 실제로 많은 저서를 남겼다. 중세 주교와 사제가 꼭 읽어야 하는 교과서와도 같은 “사목 지침서”(Liber Regulae Pastoralis), “욥의 윤리”(Moralia in Job) 등 각종 성경 해설집과 설교집, 당시의 신학 · 전례 · 역사 · 사회학의 풍부한 자료를 제공해 주는 800여 통의 서한을 모은 “서간집”(Registrum Epistolarum), “그레고리오 전례서”(Sacramentarium Gregorianum) 등을 집필하였다. 특히 그는 교회의 성가를 재조정하고 그레고리오 성가도 제정하여 ‘그레고리안 성가’의 편집자로 추앙받고 있다. 또한 성인들의 삶을 통해 자신의 삶을 돌아보고자 했던 그는 총 4권의 “이탈리아 교부들의 생활과 기적에 관한 대화집”(Dialogi de Vita et Miraculis Patrum Italicorum)을 저술했는데, 제2권에서 누르시아(Nursia)의 성 베네딕토(Benedictus, 7월 11일)의 생애를 다루었다. 이러한 방대한 저서에 담긴 그의 사상은 서방교회의 신학과 전례 생활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고 유럽의 역사에도 큰 발자국을 남겼다. 그는 게르만족의 개종뿐만 아니라 영국 앵글로색슨족의 개종에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는 수도원장으로 재임할 때 로마 시내에서 영국에서 온 포로들이 노예로 팔리는 것을 보고는 그들에 대한 연민과 관심을 품게 되었다. 교황이 된 후 그는 597년에 성 안드레아 수도원의 원장인 성 아우구스티노(Augustinus, 5월 27일)와 40여 명의 수도자를 영국의 켄트 왕국에 파견했고, 601년에는 영국에 요크(York) 대교구와 캔터베리(Canterbury) 대교구와 12개의 소속 교구를 설정하였다. 그는 교황권이 교회의 최고 권위임을 재확립하는 동시에, 교황을 일컫는 칭호인 ‘하느님의 종들의 종’(Servus Servorum Dei)이란 표현을 처음 사용함으로써 교황권이 지배의 특권이 아니라 봉사하는 특권임을 분명히 했다. 그는 또한 베네딕토 수도회를 면속시켜 교황의 권위 아래 두었다. 그는 라틴 교부의 일원이자 서방교회의 전통적인 4대 교부 중 한 명으로 꼽히며, 중세 교황권의 창시자로 평가되고 있다. 고대에서 중세로의 전환기에 그의 다양한 활동과 영성적 위대함으로 인해 ‘대교황’이란 호칭으로 불린다. 그는 604년 3월 12일 로마에서 선종하여 성 베드로 대성당에 안장되었고, 사후 즉시 성인품에 올랐다. 축일은 선종한 날인 3월 12일에 지내오다가 1969년 로마 보편 전례력 개정과 함께 라틴 교회에서는 그가 교황으로 착좌한 9월 3일로 옮겨 기념하고 있다. 그래서 옛 “로마 순교록”은 3월 12일 목록에서 성 대 그레고리오 1세의 생애와 업적을 전해주며, 9월 3일에 그의 교황좌 착좌를 기념한다고 했다.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은 보편 전례력 개정 정신에 따라 9월 3일 목록에서 교황이자 교회 박사인 성 대 그레고리오 1세의 생애와 업적을 기록하고, 3월 12일에 그의 선종을 기념한다고 언급하였다. 동방교회와 영국 성공회, 루터교 등에서는 여전히 3월 12일에 그의 축일을 지내고 있다. 그는 음악가, 가수, 학생, 교사의 수호성인으로 공경을 받고 있다. 교회 미술에서 성 대 그레고리오 1세는 교황의 전통적 상징인 예복과 삼중관(三重冠, Papal Tiara)을 쓰고 있고, 방대한 저서와 그레고리안 성가를 상징하는 책이나 악보를 들고 있는 모습으로 표현된다. 그리고 그의 귓가에 비둘기가 주로 그려지는데, 이는 그가 방대한 작품을 저술할 때 성령께서 비둘기 모양으로 그의 귓전에 머물며 영감을 불어넣어 주셨다는 이야기에서 유래하였다. 그리고 성 그레고리오의 미사를 주제로 한 작품도 많이 있는데, 이는 그가 미사를 집전하던 중 십자가 위의 고통의 그리스도께서 제대 위에 나타났다는 환시에서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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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 [그레고리오 1세 ...] | 명작으로 보는 교회사 한장면: 세바스티아노 리치의 성모 성화 ...|1| | 주호식 | 2020/07/20 | 659 | 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