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녀 비보라다는 오늘날 스위스 북부에 있는 클링나우(Klingnau)에서 슈바벤(Schwaben) 귀족 가문의 딸로 태어나 성(城)에서 자랐다. 그녀는 장크트갈렌의 수도원 학교에 다니는 오빠와 부모를 돌보며 일찍부터 집에서 금욕적인 삶을 실천하였다. 부모님이 모두 돌아가신 후 사제가 된 오빠 히토(Hitto)를 찾아가 생활하며 오빠에게 라틴어를 배워 시편과 성무일도를 함께 바칠 정도가 되었다. 그녀는 오빠와 함께 로마(Roma)의 일곱 성당을 순례한 후 오빠가 성 베네딕토회 수도회에 들어가려는 결정을 적극적으로 지지하였다. 그녀는 수도원에서 도서관의 수많은 책을 장정하는 일을 도왔고, 집에 와서는 어려서부터 했듯이 가난하고 병든 사람들을 돌보았다. 그녀의 집은 일종의 구호소가 되었다. 그즈음 성녀 비보라다는 장크트갈렌에서 학생으로 공부하던 아우크스부르크(Augsburg)의 성 울다리코(Uldaricus, 7월 4일)를 알게 되었는데, 그는 나중에 고향인 아우크스부르크의 주교가 되었고 종종 그녀에게 영적인 조언을 구하였다. 평소 은수 생활을 꿈꾸던 성녀 비보라다는 912년 처음으로 장크트갈렌 수도원 근처 성 제오르지오 성당의 은수처에서 교육을 받으며 은수자의 삶을 준비하였다. 그리고 916년부터는 성 마뇨(Magnus) 성당 옆에 있는 작은 움막에서 살았다. 여기서 그녀는 많은 예언과 기적을 베풀어 유명인사가 되었다. 성 울다리코 주교를 비롯해 많은 사람이 조언을 구하기 위해 그녀의 은수처를 찾아 그 앞에 달린 작은 종을 울렸다. 그러면 그녀가 작은 창문을 통해 영적인 조언과 예언을 해주었다. 성녀 비보라다가 미리 본 환시 중 하나는 자신의 순교에 관한 것이었다. 그녀는 926년에 헝가리 마자르족(Magyars)이 장크트갈렌을 공격할 것을 예언하면서 수도원장에게 수도원 도서관의 귀중한 보물인 오래된 책과 사본들을 라이헤나우(Reichenau) 섬의 수도원으로 옮기고 수도승들도 피신하도록 했다. 그녀는 기병 중심인 마자르족이 호수를 건너 섬까지 가지는 않으리라고 보았다. 하지만 자신은 은수처를 절대 떠나지 않겠다는 약속을 지키기 위해 그대로 남아 있다가 보물을 찾겠다고 지붕을 뚫고 들어 온 마자르족의 전투 도끼에 맞아 926년 5월 1일 또는 2일 숨을 거두었다. 성녀 비보라다는 이교도 약탈자들로부터 수도원의 사제와 수도승들의 생명을 구하고 그리스도의 증인으로서 잔혹한 죽임을 당했기 때문에 일찍부터 순교자로서 공경을 받았다. 성녀 비보라다는 1047년 1월 교황 클레멘스 2세(Clemens II)에 의해 로마 교황청의 공식 시성 절차에 따라 성인품에 오른 최초의 여성이 되었다. 최초의 남성은 성녀 비보라다와 영적인 우정을 나누었던 성 울다리코로 993년에 교황 요한 15세(Joannes XV)가 직접 시성식을 거행하였다. 그녀가 구한 장크트갈렌 수도원의 도서관은 1983년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고, 성녀 비보라다는 스위스와 독일 등에서 도서관과 사서의 수호성인으로 공경을 받고 있다. 교회 미술에서 그녀는 성 베네딕토회의 수도복을 입고 그녀가 구한 도서관을 상징하는 책과 순교를 상징하는 도끼를 들고 있는 모습으로 묘사된다.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은 5월 2일 목록에서 오늘날 스위스에 속한 장크트갈렌에서 동정 순교자인 성녀 비보라다가 성 마뇨 성당 근처 작은 방에서 은거하면서 사람들의 필요를 돌보았고, 신앙과 종교적 약속 때문에 헝가리인 침략자들의 손에 죽임을 당했다고 기록하였다. 성녀 비보라다는 프랑스어로는 성녀 귀보라(Guiborat), 독일어로는 성녀 바이브라트(Weibrath)라고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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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호 | 성인명 | 제목 | 작성자 | 작성일 | 조회수 | 추천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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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 [비보라다(5.2 ...] | 성녀 비보라다: 사서와 책 제본자들의 수호성인 | 주호식 | 2010/05/02 | 515 | 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