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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빈켄티우스(Vincentius, 또는 빈첸시오)는 3세기에 에스파냐 북동부 사라고사 인근 우에스카(Huesca)에서 영사 가문 출신인 에우티키우스(Euthicius)와 귀족 출신의 에놀라(Enola)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귀족 신분에 걸맞게 훌륭한 교육을 받고 자라 사라고사의 주교인 성 발레리오(Valerius, 1월 28일)의 제자가 되어 수학한 후 부제품을 받았다. 그리고 연로한 주교를 대신하여 백성들에게 설교하고 가르치는 직분을 부여받아 충실히 수행하였다. 그러던 중 303년 2월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284~305년 재위)와 막시미아누스 황제(286~305년 재위)의 칙령 이후 그리스도교에 대한 극심한 박해의 시대를 맞이했다. 성직자들의 그리스도교 전례 집전이 금지되고 로마의 신들에 대한 숭배 의식이 의무화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사라고사의 대표적인 그리스도인인 성 발레리오 주교와 성 빈첸시오 부제가 체포되었다. “순교자들의 행전”(Acts of the Martyrs)을 통해 전해지는 오랜 전승에 따르면, 황제의 박해 때 그리스도교를 너무나 미워하던 에스파냐의 로마 총독인 다키아누스(Dacianus)는 가장 먼저 성 빈첸시오를 주목해 성 발레리오 주교와 함께 체포해 철사로 결박한 채 발렌시아(Valencia)로 끌고 와 감옥에 가뒀다. 잔인한 박해자인 다키아누스는 이미 연로한 성 발레리오 주교는 추방하고, 감옥에 갇혀 굶주림으로 쇠약해진 성 빈첸시오 부제에게 그리스도교를 배신하고 황제에게 희생 제사를 바칠 것을 강요했다. 하지만 이를 단호히 거부한 성 빈첸시오는 심한 고문을 받았다. 성 빈첸시오의 순교에 관한 전설은 그가 얼마나 극심한 고문을 견뎌냈는지 잘 전해주었다. 총독은 그를 벌거벗긴 채 나무에 묶고 창과 쇠갈퀴로 찌르고 살점을 떼어냈으며, 뜨겁게 달군 철판 위에 올려놓고 불로 지지며 더 큰 고통을 주기 위해 상처에 소금을 뿌리기도 했다. 하지만 그 어떤 고문에도 그는 그리스도를 배신하거나 신앙을 포기하지 않았고, 성경을 어디에 숨겼는지 말하지 않았다. 그는 모든 고문과 고통을 참아내며 순교할 결심을 굳혔다. 성 빈첸시오의 용기에 감명을 받은 다키아누스 총독은 마치 호의를 베풀 듯 그에게 침대에 누우라 권하며 성경과 신앙 서적을 내놓으면 용서해주겠다며 회유하였다. 하지만 귀중한 신앙 서적이 박해자의 손에 불타버리도록 할 수는 없었다. 성 빈첸시오는 총독에게 “당신의 광포함이 더 커질수록 내 기쁨은 그만큼 더 커집니다. 그러니 당신이 나를 위해 마련해 둔 고통을 어떤 방식으로도 줄이지 마십시오. 그래야 내가 나의 승리를 더욱더 빛나는 것으로 만들 수 있습니다.”라고 당당히 말하였다. 더는 그의 결심을 꺾을 수 없다고 판단한 총독은 상처투성이의 성 빈첸시오를 철 조각과 도자기 파편이 널려있는 지하 감옥으로 던져넣었다. 순교록에 따르면 그때 감옥 안으로 아름다운 광채가 쏟아져 들어오며 천사가 나타나 그를 위로하고 승리의 월계관을 약속했다고 한다. 이러한 모습을 지켜본 간수는 회개하고 개종하였다. 온갖 고문으로 산송장이 된 성 빈첸시오는 결국 304년 1월 22일 감옥 안에서 순교의 영광을 얻었다. 그럼으로써 성 빈첸시오는 에스파냐의 첫 순교자가 되었다. 총독은 그의 시신을 황량한 들판에 던져 들짐승들의 먹이가 되도록 했다. 하지만 천사들이 그의 시신을 지키고 까마귀들이 나타나 들짐승들을 쫓아냈다. 총독은 다시금 그의 시신을 자루에 담은 후 큰 돌을 묶어 바다에 던져버렸다. 하지만 파도가 그의 시신을 해안가로 돌려보냈고, 신자들이 발견해 정중히 매장했다고 한다. 성 빈첸시오 부제의 순교 이야기는 그가 받은 가혹한 고문과 함께 일찍부터 널리 알려지고 그에 대한 공경도 빠르게 퍼졌다. 에스파냐 태생으로 5세기 초에 사망한 시인 프루덴티우스(Prudentius)는 이탈리아와 에스파냐 순교자들의 이야기를 모은 서사시 “페리스테파논”(Peristephanon)에서 성 빈첸시오의 순교를 찬양하는 시를 지음으로써 그에 대해 거의 최초로 증언한 주요 인물이 되었다. 그 외에도 놀라(Nola)의 성 바울리노(Paulinus, 6월 22일), 히포(Hippo)의 성 아우구스티노(Augustinus, 8월 28일), 교황 성 대 레오 1세(Leo I Magnus, 11월 10일) 등 많은 이들이 그를 칭송하는 글을 남겼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그에 대한 공경이 로마 제국 전역과 그리스도인이 있는 곳이면 어디든 널리 퍼졌다고 증언하며 여러 차례 그에 대해 설교하였다. 성 빈첸시오 부제의 유해는 발렌시아와 사라고사, 리스본(Lisbon), 파리(Paris), 로마(Roma), 폴란드와 영국 등지까지 모셔져 유럽 전역에서 공경을 받았다. 그는 오늘날에도 그의 고향과 발렌시아뿐 아니라 포르투갈 리스본과 유럽 여러 도시의 수호성인으로 공경을 받고 있다. 그는 초기 전례서와 성사집에서 성 스테파노 첫 순교자(Stephanus Protomartyr, 12월 26일)와 로마의 성 라우렌시오(Laurentius, 8월 10일)와 함께 각기 다른 지역의 대표적인 부제로 기념되었다. 특히 성 빈첸시오는 에스파냐의 첫 순교자로서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Santiago de Compostela)와 함께 널리 알려진 사도 성 대 야고보(Jacobus Magnus, 7월 25일) 다음으로 이베리아반도에서 가장 유명한 성인이다. 그는 또한 프랑스 부르고뉴(Bourgogne)와 오스트리아와 독일 남부 지역에서 포도주와 식초 제조업자의 수호성인으로 공경받고 있다. 그가 왜 포도주 제조업자의 수호성인이 되었는지 확실한 이유는 알 수 없으나 그의 순교 날짜가 포도나무의 첫 가지치기 시기와 일치한다거나 프랑스어에서 그의 이름인 뱅상(Vincent)의 말장난, 예를 들면 ‘vin + cent’(세기의 포도주) 등을 이야기하나 확실하지는 않다. 성 빈첸시오는 그의 순교 이야기와 후대의 대중적 공경을 바탕으로 교회미술에서 다양한 상징물과 함께 등장한다. 그는 보통 순교를 상징하는 종려 가지를 쥐고 부제를 상징하는 부제복(달마티카[dalmatica])를 입은 모습이나 철판 위에서 고문을 받는 모습으로 많이 묘사된다. 또한 그의 시신을 지켰던 까마귀와 함께 그려지거나 책이나 맷돌을 들고 있는 모습, 그리고 포도주와 제조업자의 수호성인답게 포도송이를 들고 있는 모습으로도 표현된다. 옛 “로마 순교록”은 1월 22일 목록에서 에스파냐 발렌시아에서 다키아누스 총독이 재임하던 때에 성 빈첸시오 부제 순교자가 감옥에서 굶주림과 고문과 사지가 찢기는 고통을 겪은 후 뜨겁게 달군 석쇠 위에서 고통을 당한 후 하늘로 올라가 순교의 영광을 얻었다며, 그의 수난에 대해 프루덴티우스가 시로써 표현했고, 성 아우구스티노와 교황 성 레오가 극찬했다고 전해주었다.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도 같은 날 목록에서 사라고사의 부제이자 순교자인 성 빈첸시오가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의 박해 기간에 투옥과 굶주림, 고문과 뜨거운 칼날에 고통을 받고 순교에 대한 보상을 받기 위해 에스파냐 발렌시아에서 하늘로 올라갔다고 기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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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번호 | 성인명 | 제목 | 작성자 | 작성일 | 조회수 | 추천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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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 [빈첸시오(1.2 ...] | 성 빈첸시오 부제 순교자 독서기도|1| | 주호식 | 2006/01/07 | 845 | 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