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손선지 베드로(Petrus)는 충청도 임천 지방의 고인돌에서 태어났다. 그는 부모로부터 교리를 배워 입교하였으며, 어릴 때부터 남달리 신앙과 품행이 뛰어났다. 어른이 되자 샤스탕(Chastan, 鄭) 신부는 그를 전교회장으로 임명하였다. 결혼하여 슬하에 두 자녀를 두었던 그는 인자한 가장으로서 자녀 교육에 힘쓰며 사소한 일이라도 소홀히 하지 않아 모범적인 신자 가정을 이루었다. 그가 거처하던 집은 마을의 공소였기 때문에 더욱 세심한 주의와 노력으로 언제나 신자들을 위하여 봉사하며 살았다. 그가 47세가 되던 1866년 추수기에 접어들자 신자들에 대한 박해가 좀 완화되는 듯 하다가 얼마 후 더욱 혹심한 박해로 변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의 공소 예절에서 그는 신자들을 보고 “곡식이 익으면 바람결에 날리어 땅에 떨어지는 법입니다. 이제 하느님께서는 다가올 박해에 나 같은 사람도 당신 곳간에 가두시려는 모양이군요.” 하며 자기는 순교하겠다는 뜻을 밝히고, 무사하기를 원하는 사람은 피신하라고 당부하였다. 그해 12월 3일 저녁 그는 가족과 함께 기도를 하고 있는데 집 밖에서 부르는 소리를 듣자, 즉시 상황을 알아차리고서 재빨리 가족들에게 피하라고 말한 뒤에 자신이 교우임을 자백하여 순순히 체포되었다. 포졸들은 그를 구진포리 주막까지 데리고 가 먼저 이곳에 붙잡아 온 다른 신자들과 함께 밤을 지내게 하였다. 그 사이 손 베드로의 어머니는 마을 원님을 찾아가 아들을 좀 구해달라고 애걸하였다. 또 손 베드로의 아들이 감영에 수시로 드나들며 아버지의 구명운동을 한다는 소식을 듣자, 그는 아들의 효심에는 감동하였으나 크게 꾸짖고는 “나에게는 큰 유혹이 된다. 내 말을 듣는 순간부터 그런 짓을 다시는 하지 말고, 앞으로 무슨 일이 있어도 감영에 오지 말라”고 하면서 일을 중지시켰다. 다음날 그는 전주 감사 앞으로 압송되었다. 그가 전교회장이라는 것을 알고 고문과 주리를 잔인하게 가하다 못해 그의 팔까지 부러뜨렸다. 그가 처형장으로 나설 때 남아서 기다리는 다른 신자에게 자기 옷을 주면서 “나는 이제 죽으러 가오. 이 옷은 더 이상 내게 소용이 없으니 이 옷을 입으시오”라고 말하였다. 이윽고 사형장에 도착한 그는 하늘을 향해 ‘예수 마리아’를 부르고 기도했는데, 희광이가 칼로 그의 어깨를 내려치자 그는 머리를 쳐들고 “장난하지 마시오.”라고 큰 소리로 외쳤다고 한다. 이리하여 그는 전주 숲정이에서 1866년 12월 13일에 순교하였고, 이때 그의 나이는 47세였다. 그는 1968년 10월 6일 교황 성 바오로 6세(Paulus VI)에 의해 시복되었고,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회 창설 200주년을 기해 방한한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시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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