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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달베르트(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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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인명, 축일, 성인구분, 신분, 활동지역, 활동연도, 같은이름 목록
성인명 아달베르트 (Adalbert)
축일 4월 23일
성인구분 성인
신분 주교, 순교자
활동지역 프라하(Prague)
활동연도 956-997년
같은이름 아달베르또, 아달베르뚜스, 아달베르토, 아달베르투스
성인 기본정보

   성 아달베르트는 956년 보헤미아(Bohemia)의 리비체(Libice, 오늘날 체코 중앙에 있는 도시) 성(城)에서 그곳의 영주인 슬라브니크(Slavniks) 공작의 아들로 태어나 보이테흐/보이테크(Vojtech)라는 이름을 얻었다. 그는 신학을 공부하기 위해 오늘날 독일의 작센안할트주(Sachsen-Anhalt州)에 있는 마그데부르크(Magdeburg)로 유학을 떠났다. 그곳에서 견진성사를 받으면서 그의 스승이자 마그데부르크의 초대 대주교인 성 아달베르투스([라] Adalbertus, 또는 아달베르토, 6월 20일)의 이름을 따서 세례명을 보이테흐(Vojtech)에서 아달베르토(또는 아달베르트)로 바꿨다. 그는 981년에 스승이 선종하자 선교 활동과 성직자 개혁의 원대한 이상을 품고 보헤미아로 돌아왔다. 그리고 이듬해에 서른 살이 채 되지 않은 젊은 나이에 프라하의 주교로 임명되었다. 독일 출신 프라하의 초대 주교가 선종한 후 그의 굳은 신심과 탁월한 능력을 인정받아 주교로 선출되었고, 이로써 성 아달베르트는 체코인으로서는 처음으로 프라하의 주교가 되었다.

   성 아달베르트 주교는 성직자들의 생활을 개혁하고 악습과 이교도적 잔재를 제거하려고 노력하며 보헤미아 전역과 이웃 헝가리에 그리스도교 복음을 전파하는 데 헌신하였다. 하지만 그의 사목적 열정과 높은 이상을 이해하지 못하고 옛 이교 전통을 옹호하는 극단적 민족주의자들의 반대에 부딪혀 결국 보헤미아의 볼레슬라프 2세(Boleslav II, 967~999년 재위) 대공과 충돌하고 말았다. 프라하를 떠나라는 위협을 받고 990년 로마(Roma)로 간 성 아달베르트는 그곳에 있는 ‘성 알렉시오와 성 보니파시오의 베네딕토 수도원’에서 수도승이 되었다. 그 후 992년에 볼레슬라프 2세의 요청을 받은 교황 요한 15세(Joannes XV)의 명령으로 다시 프라하로 돌아갔으나 상황은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다. 몇몇 귀족과 심하게 대립하였고, 체코 왕들과 슬라브 대공들 간의 분쟁에 휘말리기도 하였다. 게다가 간통죄로 잡힌 한 귀족 여인을 보호하기 위해 수녀원에 피난처를 제공했으나 군중들이 그녀를 끌어내 살해하는 사건이 일어나자 그녀의 죽음에 개입한 모든 이들을 파문하였다. 이로 인해 그는 995년에 다시 프라하를 떠나야만 했다.

   로마의 수도원으로 돌아온 성 아달베르트는 프라하로 돌아가라는 교황 요한 15세에게 주교직을 사임하고 선교 활동에 투신하겠다는 뜻을 전하고, 마자르족 선교를 위해 오늘날 헝가리 북부 도나우강(Donau R.) 우안에 있는 에스테르곰(Esztergom)으로 갔다. 그는 헝가리의 게자(Geza) 대공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이민족, 특히 독일과의 우호 관계를 맺도록 도와 그리스도교에 문호를 개방하도록 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또한 그는 이미 파사우(Passau)에서 파견한 선교 사제에게 세례성사를 받은 게자 대공의 아들 성 스테파노(Stephanus, 8월 16일) 왕자에게 견진성사를 주었는데, 일부 전승은 그가 헝가리에 머물던 어느 날 장차 성왕(聖王)이 될 바이크(Vaik) 왕자에게 스테파노라는 이름으로 세례와 견진성사를 모두 주었다고도 한다.

   그 후 그는 교황청의 새로운 명령에 따라 보헤미아 선교에 나서고자 했으나 볼레슬라프 2세는 그가 돌아오는 것을 여전히 반대하였다. 그래서 그는 두 명의 동료 수도승, 이복동생인 성 가우덴시오(Gaudentius, 10월 11일)와 1003년에 동료들과 함께 순교한 성 베네딕토(Benedictus, 11월 12일)와 함께 프로이센(Preussen) 지방 이교도들을 개종시키기 위해 유럽 북동부 발트해 연안의 평야 지역인 포메른(Pommern)으로 가서 적극적인 선교 활동을 펼쳐 처음에 큰 성공을 거두었다. 하지만 이교 신앙을 고수하려는 많은 이교도의 반발을 사 폴란드의 첩자라는 누명을 쓰고 997년 4월 23일 그단스크(Gdansk)에서 무참하게 살해당했다. 그의 시신은 볼레슬라프 2세에 의해 그니에즈노(Gniezno)로 옮겨졌다가 1039년에 프라하의 성 비토(Vitus) 대성당으로 옮겨 안장되었다.

   성 아달베르트는 프라하의 주교이자 클뤼니 수도원의 개혁 정신에 영향을 받은 베네딕토회 수도승으로서 신성로마제국 황제 오토 3세(Otto III)와 절친한 친구였으며, 슬라브 지역 선교에 큰 영향을 끼쳐 ‘슬라브의 사도’요 ‘프로이센의 사도’로서 큰 공경을 받고 있다. 옛 “로마 순교록”은 4월 23일 목록에서 프로이센에서 프라하의 주교이자 폴란드와 헝가리에 복음을 전파한 성 아달베르트 순교자를 기념한다고 전해주었다.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은 같은 날 목록에서 프라하의 주교이자 순교자인 성 아달베르트가 교회 안에서 많은 어려움에 직면했으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여러 차례 선교 여행을 떠나며 온 힘을 다해 이교도의 관습을 근절하기 위해 노력했다고 했다. 하지만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음을 깨닫고 로마로 가서 수도승이 되었다가 이웃인 프로이센 사람들에게 신앙을 전파하기 위해 폴란드에 도착했다가 발트해 연안 비스툴라강(Vistola R.) 어귀에 있는 텐키텐(Tenkitten)이라는 마을에서 이교도들의 창에 찔려 순교했다고 기록하였다.♣

참고자료

  • 김정진 편역, 가톨릭 성인전(하) - '성 아달베르토 주교 순교자', 서울(가톨릭출판사), 2004년, 60-63쪽.
  • 한국가톨릭대사전편찬위원회 편, 한국가톨릭대사전 제8권 - '아달베르토, 프라하의', 서울(한국교회사연구소), 2001년, 5617-561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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