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아비투스(또는 아비토)는 5세기 중엽에 프랑스 중부의 오를레앙(Orleans) 또는 중남부의 오베르뉴(Auvergne)에서 태어난 듯하다. 그에 대해 확실히 알 수 있는 것은 많지 않은데, 투르(Tours)의 주교이자 역사가인 성 그레고리오(Gregorius, 11월 17일)에 따르면 성 아비토는 페르슈(Perche) 관구를 설정했던 프랑스의 수도원장이며, 오를레앙에 안장되어 큰 공경을 받았다고 한다. 성 그레고리오는 성 아비토의 이름으로 봉헌된 성당을 방문했으며, 그의 전구로 많은 기적이 일어났음을 인정해야 한다고 했다. 성 아비토는 오베르뉴의 리옴(Riom) 근처 강변에 있는 작은 메나(Menat) 수도원 학교에서 수학하면서 아니솔(Anisole)의 성 카릴레포(Carilefus, 7월 1일)와 친구가 되었다. 성 아비토와 성 카릴레포는 수도 생활에 헌신하기로 마음먹고 오를레앙 근처에 있는 미시 수도원으로 가서 평수사로 입회하였다. 성 아비토는 신심이 깊었으나 많이 배우지 못해 단순했기 때문에 동료들의 조롱감이 되기도 했다. 하지만 수도원장인 성 막시미노(Maximinus, 12월 15일)는 그의 성덕과 자질을 알아보았기에 그를 지하 저장고의 책임자로 임명하고 자신의 후계자로도 지명하였다. 성 아비토는 스승의 명이라 어쩔 수 없이 임무를 수락했으나 그 무거운 짐을 계속 짊어질 수가 없었다. 그는 단순하고 고적한 은수자의 삶을 원했기 때문에 결국 조용히 수도원을 떠나 숲속 외딴곳으로 가서 은둔소를 만들었다. 그의 친구인 성 카릴레포도 고독한 삶을 갈망했기에 두 사람은 함께 프랑스 북부 페르슈 지방으로 갔고, 그곳에서 성 가릴레포는 갈라져 메인(Maine)으로 갔다. 그들은 이집트 사막 교부들의 엄격한 금욕주의를 실천하고자 노력했다. 520년 미시 수도원의 성 막시미노가 선종한 후 새로운 수도원장을 선출해야 했을 때, 수도승들은 선종한 수도원장의 유언에 따라 후임자로 성 아비토를 만장일치로 새로운 수도원장으로 선출했다. 그리고 사람을 보내 그를 찾아낸 후 겨우 설득해서 모셔올 수 있었다. 성 아비토는 신임 수도원장으로서 전임자인 스승의 가르침에 따라 수도원의 규칙과 생활을 지도했고, 항상 가장 뛰어난 모범을 보여주었다. 그는 비엔(Vienne)의 주교인 성 아비토(Avitus, 2월 5일)의 노력으로 가톨릭으로 개종한 성 시지스문도(Sigismundus, 5월 1일) 왕이 프랑크 왕국의 왕 클로비스 1세(Clovis I)의 둘째 아들인 오를레앙의 클로도미르(Clodomir) 왕과의 전투에서 패해 포로가 되었을 때 성 시지스문도를 살리기 위해 노력했다. 클로도미르는 ‘적을 뒤에 남겨두라는 것은 어리석은 조언’이라며 성 아비토의 부탁에도 불구하고 524년에 성 시지스문도와 그의 아내와 아이들을 무참히 살해하였다. 그 뒤에 늘 은수자의 삶을 동경했던 성 아비토는 수도원장직을 사임하고 페르슈 인근 울창한 숲속으로 다시 들어갔다. 세상과 동떨어져 고독한 삶을 살고자 했으나 많은 사람이 그를 찾아와 가르침을 청하자 할 수 없이 새로운 수도원을 짓게 되었다. 그는 국왕 클로타르 1세(Chlotar I)의 지원을 받아 루아르강(Loire R.) 근처에 새 수도원과 성당을 세웠다. 이곳은 나중에 셀드생타비(Celle-de-Saint-Avit)로 불렸고, 지금은 샤르트르(Chartres) 교구에 속한 샤토덩(Chateaudun)이 되었다. 성 아비토는 530년경 6월 17일 샤토덩에서 거룩한 죽음을 맞이했다. 그가 선종한 후에 그의 시신을 모시기 위해 샤토덩과 고향인 오를레앙 간에 충돌이 생기기도 했다. 결국은 성 아비토의 유언과 오를레앙의 미시 수도원에서 수도 생활을 시작했다는 점 등을 들어 오를레앙으로 그의 시신을 모시고 유물 일부를 사토덩에 주는 것으로 정했다. 성 아비토의 유해는 루아르강을 따라 오를레앙으로 옮겨져 도시 성벽 밖의 생조르주(Saint-Georges) 성당에 안치되었다. 옛 “로마 순교록”은 오를레앙의 사제요 증거자인 성 아비토의 이름을 전해주었고,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은 같은 날 목록에서 프랑스 오를레아에서 성 아비토 수도원장을 기념한다고 기록하였다. 성 아비토는 미시 수도원에 있을 때 친구인 성 카릴레포와 함께 사제품을 받았다고 한다. 그는 보통 미시의 성 아비토 또는 페르슈의 성 아비토로 불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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