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안토니우스 다니엘(Antonius Daniel, 또는 안토니오 다니엘)은 1601년 5월 27일 프랑스 북부 디에프(Dieppe)에서 태어났다. 그는 1621년 10월 1일 예수회에 입회하기 전에 철학을 2년, 법학을 1년 동안 공부했으나 입회를 위해 공부를 중단하고 20살의 나이에 루앙(Rouen)의 수련소로 들어갔다. 그는 첫 서원을 하고 1623년부터 루앙에서 4년 동안 교사로 활동했는데, 그 당시 뉴프랑스(캐나다)에서 활동하는 예수회 선교사들이 현지 청년들을 프랑스로 보내 대학 교육을 받도록 했었다. 성 안토니오 다니엘은 휴런족(Hurons) 인디언 소년으로부터 선교사들의 활동과 인디언들의 개종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선교에 대한 열망을 품게 되었다. 1627년에 그는 파리(Paris)의 클레르몽(Clermont) 대학으로 가서 신학을 공부하고 1631년 사제품을 받았다. 그리고 프랑스 북부 외(Eu) 대학의 교수로 파견되었다. 그곳에서 그는 영국군이 뉴프랑스(퀘벡) 식민지를 점령하면서 강제 추방당해 프랑스로 돌아온 성 요한 드 브레뵈프(Joannes de Brebeuf) 신부를 만났다. 그들의 만남은 휴런족 선교에 대한 열의를 더욱 굳히는 계기가 되었다. 1632년 봄 성 안토니오 다니엘은 다른 세 명의 사제와 함께 뉴프랑스 선교를 위해 퀘벡주(Quebec州)로 파견되었다. 그는 대서양을 건너 케이프브레턴 섬(Cape Breton Island) 요새에 도착해 암브로시오 다보스트(Ambrosius Davost) 신부와 함께 프랑스 정착민을 돌보며 1년을 지냈다. 1633년 봄 다시 배를 타고 출발해 6월 24일 퀘벡에 도착했다. 그들은 영국이 뉴프랑스를 포기한 후 다시 선교지로 돌아온 성 요한 드 브레뵈프 신부를 만나 그에게 휴런족의 언어와 관습을 배우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듬해에 성 요한 드 브레뵈프 신부와 함께 휴런 지역으로 첫 여행을 떠났다. 당시 무역 중심지였던 세 개의 강(Three Rivers) 지역에서 가죽 교역을 위해 온 휴런족 인디언들을 만나 그들의 카누를 타고 휴런호(Lake Huron)의 아이호나티리아(Ihonatiria)에 도착했다. 1635년 초에 성 요한 드 브레뵈프와 성 안토니오 다니엘 신부는 본격적인 선교활동을 시작했다. 그들은 아이들을 위한 오두막을 짓고 휴런어로 기도문과 교리 그리고 성가를 가르쳤다. 당시 예수회는 휴런족 선교가 성공하기 위해서는 휴런족의 젊은이들 가운데에서 선교사가 나와야 한다고 굳게 믿었다. 그래서 인디언을 위한 신학교를 퀘벡에 세우기로 하고 아이들을 잘 가르치던 성 안토니오 다니엘 신부를 책임자로 임명했다. 그래서 그는 퀘벡으로 돌아가 새로운 학교를 설립하고 1636년 가을 단 5명의 소년으로 학교 문을 열었다. 하지만 그 계획은 성공하지 못했고, 성 안토니오 다니엘은 1638년 여름 온타리오주(Ontario州)의 역사적 지역인 휴로니아(Huronia, 웬다케[Wendake])로 돌아왔다. 그리고 이듬해 11월에 카히아그(Cahiague)에 새로운 선교부를 설립하기 위해 파견되었다. 그가 새 임지에 도착했을 때 천연두가 유행하고 있었기에 그는 오두막을 돌아다니며 환자들을 돌보았다. 당시 인디언들은 ‘검은 옷’을 입은 예수회 선교사들이 전염병이라는 대재앙을 몰고 온 악마라고 생각해 선교사들을 경계하거나 위협하곤 했다. 그는 당당히 자기가 도착하기 전부터 이미 병이 있었고, 자기 때문이면 병자들을 치료하지도 않았을 것이라며 인디언들을 설득했다. 그렇게 신뢰를 얻고 개종자에게 세례를 주며 8년 정도 그곳에서 지내며 카히아그를 대표적인 그리스도교 마을로 변모시켰다. 성 안토니오 다니엘은 1647년에 온타리오주의 힐즈데일(Hillsdale) 근처 휴런족의 추장 마을인 티아나오스테이(Teanaostaye)로 이동했다. 그는 이 마을에서도 활발히 활동해 큰 성공을 거두었지만 당시 휴런족에 적대적인 이로쿼이족(Iroquois)의 위협은 점점 커졌다. 1648년 6월 말에 성 안토니오 다니엘은 연례 피정을 위해 생트마리(Sainte-Marie) 선교 본부에 갔다가 7월 2일 돌아왔다. 그런데 7월 4일 미사를 봉헌하고 나왔을 때 이로쿼이족의 공격이 시작되었다. 그는 여자와 아이들을 피신시키며 그들과 함께 피신하기를 거부하고 병자와 죽어가는 이들이 있는 오두막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가능한 많은 이들에게 전대사와 세례를 주며 “오늘 우리는 천국으로 갑니다.”라고 위로했다. 당시 많은 휴런족이 무역을 위해 퀘벡으로 떠났기에 남아 있는 이들로는 방어할 수가 없었다. 결국 남은 휴런족은 죽음을 준비하며 성당으로 왔고, 성 안토니오 다니엘 신부는 사제복을 입고 십자가를 들고 성당 문 앞에서 이로쿼이족을 막아섰다. 이로쿼이족은 그를 향해 총과 화살을 쏘고 성당에 불을 지른 후 잔인하게 훼손한 그의 시신을 그 안으로 던져버렸다. 나중에 예수회 동료들이 그의 시신을 찾으러 왔으나 흔적조차 찾을 수 없었다고 한다. 성 요한 드 브레뵈프 신부와 성 안토니오 다니엘 신부를 포함한 7명의 동료 순교자들은 1925년 6월 21일 교황 비오 11세(Pius XI)에 의해 시복되었고, 1930년 6월 29일 로마에서 같은 교황에 의해 ‘캐나다의 순교자’(수호성인) 또는 ‘북미의 첫 순교자들’로서 성인품에 올랐다. 그들의 기념일은 로마 보편 전례력의 9월 26일에 추가되었으나 1969년 전례력 개정 이후부터 성 이사악 조그가 순교한 다음 날인 10월 19일(10월 18일 성 루카 복음사가 축일과 중복을 피하고자)로 변경해 기념하고 있다.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은 7월 4일 목록에서 휴런족 가운데서 미사를 거행한 후 적대적인 이교도들의 공격을 받고 신학생들을 보호하기 위해 성당 문 앞에 서 있던 성 안토니오 다니엘 예수회 신부가 그들의 칼과 화살을 맞고 쓰러진 후 화형을 당했다고 전해주었다. 그리고 10월 19일 목록에서 성 요한 드 브레뵈프와 성 안토니오 다니엘 신부와 동료 순교자들의 선교활동과 순교 사실을 전하며 그날 그들 여덟 명 모두를 함께 기념한다고 기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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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 [안토니오 다니엘 ...] | 예수회의 성인들: 성 요한 드 브레뵈프, 성 이사악 조그와 ... | 주호식 | 2015/04/09 | 349 | 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