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에우세비우스(또는 에우세비오)는 3세기 말엽 이탈리아의 사르데냐(Sardegna)섬에서 신앙심 깊은 부모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의 박해 때 체포되어 재판을 위해 로마로 호송되던 중 사망했다고 한다. 그 후 성 에우세비우스는 어머니와 함께 로마로 이사 가서 살게 되었다. 그곳에서 그는 당시 교황인 성 에우세비우스(8월 17일)에게 세례성사를 받으며, 어머니의 뜻대로 교황과 같은 세례명을 선택했다. 그리고 로마에서 교육받게 된 덕분에 훗날 교황이 된 리베리우스(Liberius, 352-366년)와 알렉산드리아(Alexandria)의 주교인 성 아타나시우스(Athanasius, 5월 2일)를 알게 되었다. 로마에서 사제품을 받은 그는 340년 또는 345년에 교황 성 율리우스 1세(Julius I, 4월 12일)에게 주교품을 받고 베르첼리의 교구장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강론을 통해 그리스도교를 널리 전파했고, 교구 내의 성직자 개혁 운동을 전개하며 모든 성직자가 기도 · 노동 · 연구 · 고행 등의 공동 규칙을 지키며 성직 생활과 수도 생활의 일치를 시도하길 원했다. 그래서 그 역시 일단의 성직자들과 함께 공동체를 이루며 살았다. 밀라노의 성 암브로시우스(Ambrosius, 12월 7일)는 그에 대해 주교 직분을 수행하면서도 수도 생활을 실천한 서방 교회의 첫 번째 주교였다고 기록했다. 그는 정통 교회와 교리를 철저히 지켜온 주교였다. 그는 아리우스 이단(Arianism)에 대한 강력한 반대 입장을 고수해 많은 곤욕을 치러야만 했다. 352년 아를(Arles) 교회회의에서 정통 교리를 옹호하는 성 아타나시우스를 단죄하는 결의를 하자, 그는 리베리우스 교황의 명으로 아를에 있던 콘스탄티우스 2세 황제를 방문해 아리우스 이단과 가톨릭 정통 신앙 사이의 논쟁을 해결할 새로운 교회회의의 소집을 요구했다. 아리우스 이단의 지지자였던 황제는 그 기회에 서방에 아리우스주의를 확산시킬 목적으로 355년 밀라노(Milano) 교회회의의 소집을 받아들였고, 주교들에게 성 아타나시우스를 단죄하는 결의안에 서명하도록 강요했다. 성 에우세비우스는 이에 강력히 반대했고, 그로 인해 황제에 의해 유배형을 받고 팔레스티나(Palestina)의 스키토폴리스(Scythopolis)로 떠나야 했다. 너무도 심한 모욕과 고통을 당한 그는 이에 항의하는 뜻으로 나흘 동안 단식투쟁을 벌이기도 했다. 360년에 그는 스키토폴리스에서 다시 카파도키아(Cappadocia)로, 그다음에 이집트의 테베(Thebae, 나일강 중류에 있는 고대 이집트 신왕국시대의 수도로 오늘날의 룩소르 Luxor)로 유배지를 옮겨야 했다. 361년 콘스탄티우스 2세 황제가 죽고 배교자 율리아누스가 황제가 등극하면서, 유배된 모든 주교는 자신의 주교좌로 돌아가도 좋다는 허락이 내려졌다. 자유를 찾은 그는 362년 알렉산드리아로 가서 성 아타나시우스와 함께 새 교회회의를 소집했다. 그 회의에서는 니케아 신경을 복원하고, 그리스도의 신성과 육화의 신비를 부정하는 이단에 맞서며, 분열의 고통을 겪고 있는 안티오키아(Antiochia) 교회 문제 등에 대해 논의했다. 여기서 안티오키아 교회로 파견될 사절로 뽑힌 그는 331년 아리우스파에 의해 안티오키아의 주교로 선출된 멜레티우스(Meletius) 추종자들 사이의 불화를 조정하고자 했으나 아무런 효과도 얻지 못하고 세월만 허비했다. 그래서 그는 안티오키아를 떠나 자신의 교구로 돌아오는 길에 일리리쿰(Illiricum) 지방의 여러 교회를 방문해 정통 교회를 옹호하고 아리우스 이단을 배격하는 운동을 꾸준히 전개했다. 363년, 비로소 베르첼리 주교좌로 돌아온 그는 여생을 성 힐라리우스(Hilarius, 1월 13일)와 함께 아리우스 이단에 물든 밀라노의 주교들에 반대해 정통 신앙을 옹호하는데 헌신하다가 371년 8월 1일 하느님의 품에 안겼다. 베르첼리 주교좌성당 도서관에 있는 고대 라틴어 복음서 사본은 보물처럼 간주되고 있는데, 이 사본은 성 히에로니무스(Hieronymus, 9월 30일)의 불가타 사본보다 시기적으로 더 앞선 것이라 한다. 학자들은 성 에우세비우스의 손에 의하여 기록되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고, 이 사본을 “베르첼리의 사본”(Codex Vercellensis)이라 부른다. 그는 또한 “아타나시우스 신경”(Symbolum Athanasianum)의 저자 중 한 사람이다. 1969년까지 그의 축일은 주교품을 받은 날에서 비롯해 12월 15일 또는 교황 베네딕투스 13세(Benedictus XIII)의 뜻에 따라 12월 16일에 기념하면서 동시에 하늘나라로 떠난 8월 1일에도 경축해왔다. 로마 순교록은 8월 1일에 그에 대해 기록하며 주교이자 순교자로 명시하고 있다. 그가 비록 순교하지는 않았지만, 교회 전승 안에서 순교자로서 공경을 받는 이유는 가톨릭의 정통 신앙을 지키다가 많은 수난을 겪었기 때문이다. 1969년 전례 개혁 이후 그의 축일은 현재 8월 2일에 기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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