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황 성 에우게니우스 1세(Eugenius I, 또는 에우제니오 1세)는 로마(Roma) 출신의 귀족인 루피니아누스(Rufinianus)의 아들로 알려져 있으나 그의 출생 시기와 초기 생애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거의 없다. 그는 사제로서 교회 내에서 여러 직책을 수행하며 많은 활동을 했는데, 특히 애덕 실천과 뛰어난 성덕으로 널리 알려졌다고 한다. 노령의 성 에우제니오 1세가 654년 8월 10일 교황으로 즉위하던 당시 교회에는 그리스도론과 관련한 문제로 신학적 · 정치적 분쟁이 끊이지 않았었다. 이를 둘러싸고 동방 교회와 서방 교회의 대립은 정치적인 문제와 결합하여 두 교회의 일치를 어렵게 만들고 대립을 심화시켰다. 이런 상황에서 교황 성 에우제니오 1세의 선임 교황들은 동방 교회 내에 만연된 그리스도 단성설(單性說, monophysitismus)과 그리스도 단의설(單意說, Monotheletismus) 등을 이단으로 단죄하면서 451년 칼체돈(Chalcedon) 공의회의 결정 사항, 즉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神性)과 인성(人性)은 혼합과 구분 없이 한 위격(位格) 안에서 일치한다는 정통 교리를 전파하려고 노력하였다. 게다가 그의 선임자인 교황 성 마르티노 1세(Martinus I, 4월 13일)는 그리스도 단의설 이단을 단죄하고 그에 대한 언급을 금지했을 뿐만 아니라 동방 교회에 만연한 단성설이나 단의설을 수용해 정치적 안정을 도모하려던 황제들의 정책을 정면으로 반박하였다. 그로 인해 동로마 제국 황제인 콘스탄스 2세(641~668년 재위)의 명령으로 체포되어 콘스탄티노플로 압송되어 갖은 모욕을 당한 후 사형 선고를 받았으나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의 간청으로 크림반도(Crimea)에 있는 케르소네수스(Chersonesus)로 유배를 떠난 상태였다. 이렇게 전임 교황이 죽지 않고 유배 중일 때 성 에우제니오 1세가 교황으로 선출되어 즉위한 것이다. 그래서 많은 사람은 그가 황제의 꼭두각시가 되리라고 생각했다. 그는 즉시 콘스탄티노플로 특사를 파견해 그리스도 단의설을 주장하는 이들과 대화를 시도했고,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로 페트루스(Petrus)를 인정하라는 황제의 요구를 거절하였다. 그리고 황제가 선임 교황에게 저지른 만행을 유럽의 각 왕실에 알리고 황제에게 저항하며 그리스도론에 대한 이단적 주장들을 공적으로 단죄하였다. 콘스탄스 2세 황제는 잔인한 사람이었다. 분노한 황제는 즉시 군대를 동원해 교황 성 에우제니오 1세를 체포하려 했으나 마침 무슬림들의 침략으로 인해 그에 집중하느라 뜻을 실행하지 못했다. 그러던 중 657년 6월 2일 성 에우제니오 1세 교황이 선종하여 성 베드로 대성당에 안장되면서 선임자와 같은 비극을 겪지는 않았다. 옛 “로마 순교록”은 6월 2일 목록에서 로마에 교황이자 증거자인 성 에우제니오가 있었다고 전해주었다.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도 같은 날 목록에서 로마의 성 베드로 대성당에 순교자 성 마르티노 교황의 뒤를 이어 교황이 된 성 에우제니오 1세가 안장되어 있다고 기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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