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에퀴티우스(또는 에퀴시오)는 5세기 말경 이탈리아 중부 아브르초(Abruzzo)의 발레리아 속주(오늘날의 라퀼라[L’Aquila] - 리에티[Rieti] - 티볼리[Tivoli] 지역)에서 태어났다. 그는 누르시아(Nursia)의 성 베네딕토(Benedictus, 7월 11일)와 동시대 사람으로 그가 몬테카시노(Monte Cassino)에 수도원을 세울 당시 발레리아의 어느 은둔소에서 고적한 생활을 시작하였다. 그에 대해 알려진 사실 대부분은 교황 성 대 그레고리오 1세(Gregorius I Magnus, 9월 3일)의 “대화집”(Dialogi)에서 나온 것이다. 교황이 지인을 통해 전해 들은 바에 따르면 성 에퀴시오는 수도자였으며 성 베네딕토와 함께 이탈리아와 서방 교회에 수도원 생활을 널리 전파한 인물이었다. 젊은 시절 성적 유혹에 시달렸던 성 에퀴시오는 로마(Roma) 동쪽 발레리아의 한적한 곳에서 은수자의 삶을 시작했고, 기도와 수련을 통해 절제의 삶을 실천하며 다른 사람들의 모범이 되었다. 그는 먼저 테르니(Terni)에 수도원을 세웠고, 이어서 발레리아 속주 여러 곳에 남녀 수도원을 세웠다. 성 에퀴시오는 대부분의 초기 수도원장들처럼 부제품이나 사제품을 받지 않은 평신도였고, 수도원 안에 머물러 있지 않고 복음을 선포하기 위하여 여러 지방을 다녔다. 당시 한 귀족으로부터 주교로부터 설교 권한을 받지 못했으니 설교할 수 없다는 말을 듣기도 했다. 그러자 그는 자신이 받은 계시를 들려주었다. “어느 날 밤 어떤 젊은이가 환시 중에 내 곁에 서 있다가 내 혀를 만지면서 당신의 도구로 사용하겠다고 말씀하셨다. ‘자, 네 혀 위에 내 말을 얹어두니, 어디든지 가서 말씀을 전하여라.’ 이때부터 나는 없어지고 오로지 하느님에 대해서만 말하게 되었다.” 하지만 그의 설교를 못마땅하게 생각한 어느 성직자가 교황에게 이 사실을 알리고 설교하지 못하도록 했다. 그래서 교황의 명으로 어느 성직자가 그를 조사하러 왔고, 성 에퀴시오는 즉시 순종하겠다고 다짐하며 피곤할 테니 하룻밤 주무시고 가라고 권유했다. 다음 날 아침 어떤 사람이 당도했는데, 그는 성 에퀴시오가 하느님의 사람이니 그를 괴롭히지 말라는 환시를 본 교황 성 아가피토 1세(Agapitus I, 4월 22일)가 보낸 사람이었다. 성 에퀴시오는 571년 이전에 라퀼라 인근 피촐리(Pizzoli)에서 선종하여 산 로렌조(San Lorenzo) 성당에 묻혔다. 그의 무덤은 많은 이가 찾는 순례지가 되었고, 고대 기록에 따르면 성 에퀴시오 수도원은 두 명의 교황과 여러 명의 주교와 추기경을 배출하였다. 하지만 후대에 성 에퀴시오 수도원은 그가 깊은 애정을 가졌던 성 베네딕토회에 흡수되었다. 1461년의 지진으로 인해 산 로렌조 성당에서 그의 유해가 보관된 옛 지하 납골당이 발견된 후 그는 라퀼라의 공동 수호성인으로 공경을 받게 되었고, 18세기의 지진으로 큰 피해를 본 후에는 그의 유해를 예수회가 관리하는 산타 마르게리타(Santa Margherita) 성당으로 옮겨 안치하였다. 옛 “로마 순교록”은 8월 11일 목록에서 발레리아 지방에 성 에퀴시오 수도원장이 있었는데, 그의 성덕은 교황 성 대 그레고리오 1세에 의해 증명되었다고 전해주었다.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은 같은 날 목록에서 오늘날의 움브리아(Umbria) 지역에 교황 성 대 그레고리오 1세가 기록한 것처럼 성 에퀴시오 수도원장이 있었는데, 그는 뛰어난 성덕으로 인해 많은 수도원의 설립자가 되었고, 그가 가는 곳마다 성경 말씀이 전해졌다고 기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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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호 | 성인명 | 제목 | 작성자 | 작성일 | 조회수 | 추천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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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 [에퀴시오(8.1 ...] | 성인 이름에 담긴 뜻: 에퀴티오(Equitius) | 주호식 | 2025/08/06 | 23 | 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