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니케포루스(또는 니체포로)는 758년경 동로마 제국의 수도인 콘스탄티노플에서 성상 파괴주의자인 콘스탄티누스 5세 황제(741~775년 재위)의 비서관이었던 테오도루스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황제의 성상 공경 금지령을 거부하여 고문을 받고 추방당했다. 어린 성 니체포로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 궁정에서 성장한 후 관리로서 일하게 되었는데, 그 또한 아버지의 정신을 이어받아 성상 파괴주의자의 강력한 반대자로 성장했다. 그는 궁정의 관리로서 경력을 쌓으며 뛰어난 웅변과 학식 그리고 정치적인 수완으로 유명해졌다. 그는 레오 4세 황제(775~780년 재위)의 미망인이자 아직 어린 아들인 콘스탄티누스 6세(780~797년 재위)의 섭정이었던 이레네(Irene of Athens) 황후의 비서관이 되었고, 787년 제2차 니케아(Nicaea, 오늘날 튀르키예 북서부에 있는 이즈니크[Iznik]) 공의회에 서기로서 참석하였다. 그 후 그는 보스포루스(Bosporus) 해협의 소아시아 연안에 있는 한 수도원으로 가서 금욕적인 수행을 하며 다양한 학문 연구에 정진하였다. 802년경 이레네 황후가 몰락한 후 그는 수도인 콘스탄티노플로 소환되어 가장 가난한 이들을 위한 병원의 책임자로 임명되었다. 806년 2월 25일에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인 성 타라시오(Tharasius, 2월 18일)가 선종했을 때, 평신도였던 성 니체포로가 본인의 뜻과는 상관없이 니케포로스 1세 황제(802~811년 재위)에 의해 콘스탄티노플의 새 주교로 임명되었다. 그는 당대의 유력한 수도승들로부터 강력한 비판과 반대를 받았으나 교구의 개혁을 추진하고 수도원 규칙을 강화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던 중 다시금 성상 파괴론자들의 세력이 커지고 그들을 지지하는 아르메니아인 레오 5세 황제(813~820년 재위)가 즉위하면서 위기가 찾아왔다. 그는 황제의 성상 파괴 정책을 강력히 반대하다가 여러 차례 죽을 고비를 넘긴 뒤 마르마라해(Sea of Marmara) 북쪽의 칼케돈(Chalcedon, 오늘날 튀르키예 이스탄불[Istanbul]의 아시아 해변 쪽에 있는 카디쿄이[Kadikoy])에 있는 성 테오도로(Theodorus) 수도원으로 추방당했다. 성 니체포로는 이 수도원에서 15년 정도 지내다가 선종했는데, 그동안에 성상 파괴주의자들을 반대하는 몇 편의 글을 남기고 두 권의 역사서를 저술하기도 했다. 820년 미카엘 2세 황제(820~829년 재위)가 즉위하면서 성상 파괴 논쟁에 간섭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로 복귀하라는 제안을 받았지만, 그는 단호히 거절하고 죽을 때까지 수도원에 머물렀다. 성 니체포로는 828년 또는 829년 6월 2일 수도원에서 선종하였다. 그의 유해는 847년 3월 13일 동방 정교회에서 성녀로 공경받는 테오도라(Theodora, 2월 11일) 황후에 의해 장엄하게 콘스탄티노플로 이장하여 성 사도 성당(Church of the Holy Apostles)에 안치되었다. 옛 “로마 순교록”은 유해 이장일인 3월 13일 목록에서 콘스탄티노플에서 성 니체포로 주교가 선조들의 전통과 성상 공경을 옹호하며 성상 파괴론자인 아르메니아인 레오 5세 황제에게 단호히 맞섰고, 그로 인해 유배지에서 14년 동안 고통을 겪은 뒤 하느님 나라로 떠났다고 전해주었다.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은 선종한 날인 6월 2일로 축일을 옮겨 같은 내용을 전해주며, 그가 오늘날 튀르키예에 속한 보스포루스 해협의 수도원으로 추방당해 오랫동안 지낸 후 평화롭게 주님께로 돌아갔다고 기록하였다. 다만 그의 선종 시기를 629년으로 표기했는데, 이는 829년의 오자로 보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