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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사팟(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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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인명, 축일, 성인구분, 신분, 활동지역, 활동연도, 같은이름 목록
성인명 요사팟 (Josaphat)
축일 11월 12일
성인구분 성인
신분 대주교, 순교자
활동지역 폴로츠크(Polotsk)
활동연도 1580?-1623년
같은이름 요사파트, 쿤체비치, 쿤체빅
성인 기본정보

   성 요사팟 쿤체빅(Josaphat Kuncevyc)은 1580년경 당시 폴란드 관구에 속했던 현 우크라이나 북서부의 볼린(Volyn) 관구에 속한 볼로디미르(Volodymyr)라는 작은 마을에서 태어나 요한(Joannes)이란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 그가 태어난 시기는 리투아니아의 동방 교회에 분열이 일어나던 때로 폴란드의 지배를 받던 리투아니아의 동방 교회와 가톨릭교회가 대립한 상황이었다. 1596년에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연합(Union of Brest-Litovsk)이 맺어지자 리투아니아 교회는 가톨릭교회와 일치를 주장하는 파와 분리를 고집하는 파로 나누어졌으며 나름의 교계제도를 구성하였다. 귀족 가문 출신인 그의 아버지는 상업에 종사했고, 그의 부모는 자녀들에게 올바른 신앙을 심어 주고자 노력했다. 볼로디미르에서 공부하던 시절에 그는 탁월한 재능을 드러냈는데, 비잔틴 전례 언어인 슬라브어를 열심히 공부했고, 시간 전례(성무일도) 기도를 열심히 바쳤다. 고향에서 공부를 마친 그는 부모의 가업을 잇고자 상업을 배우기 위해 빌나(Vilna, 오늘날 리투아니아의 수도인 빌뉴스[Vilnius])로 가서 포포빅(Popovyc)이라는 사람의 견습생이 되었다. 당시 도덕적으로 문란하고 여러 종파가 활동하던 곳에서 도제교육을 받던 중 그는 벤자민 루트스키(Benjamin Rutsky) 같은 탁월한 지도자들을 만났다. 그들의 지도를 받으며 상업이나 무역보다 수도 생활에 더 큰 관심을 두게 되었다.

   성 요사팟은 포포빅의 딸과 결혼하면 사업을 물려주겠다는 제의도 거부하고, 1604년 빌나에 있는 성 바실리오회의 삼위일체 수도원에 입회하여 요사팟이라는 수도명을 받았다. 열성적으로 수도 생활에 정진하면서 그를 만나러 사람들이 찾아올 정도로 유명해졌다. 해박한 지식을 지녔던 그의 스승 벤자민 루트스키도 그의 영향으로 같은 수도회에 입회하였다. 성 요사팟은 예수회원인 파브리키우스(Fabricius)에게 개인 교수를 받고 1609년에 사제품을 받았다. 그는 곧 몇몇 수도원의 원장이 되었고, 설교로 유명해진 한편 우크라이나 교회와 로마 교회 간의 일치를 위한 지도력을 발휘해 큰 성공을 거두었다. 그의 영향으로 입회했던 벤자민 루트스키는 삼위일체 수도원의 원장이 되었고, 그는 폴란드에 새 수도원을 세우라는 사명을 받고 파견되었다. 1617년 11월 12일 비텝스크/비쳅스크(Vitebsk/Viciebsk, 오늘날 벨라루스 공화국의 도시)의 주교로 임명된 성 요사팟은 그 이듬해에 폴로츠크(오늘날 벨라루스 북부 베텝스크주에 있는 도시)의 대주교가 되었다. 대주교로서 그는 혼란하던 교구를 바로잡고 교회 일치를 이루기 위해 더욱 노력하였다. 로마와의 반목, 기혼 사제 문제, 느슨한 규칙, 폐허가 된 성당 등을 고치기 위해 시노드를 소집하고 교회개혁에 박차를 가해 상당한 성공을 거두었다. 그래서 리투아니아의 많은 교회가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연합에 참여함으로써 가톨릭교회의 영향력이 리투아니아 안에서 크게 성장하였다.

   그러나 그의 성공과 함께 그에 대한 분리파의 증오도 더욱 커졌다. 카자크(Kazak)의 지도자인 사하이다크니(Peter Sahaidachny)의 노력으로 리투아니아에 새로운 정교회 교계제도가 세워졌고, 일치파에 대항하는 분리파의 반대는 더욱 조직적으로 진행되었다. 성 요사팟과 뜻을 달리하던 일단의 분리파 주교들은 그가 실제로는 라틴 전례의 사제이며, 로마 가톨릭은 리투아니아 민중에게 맞지 않는다고 주장하며 대립 주교를 내세웠다. 이런 극도의 혼란 속에서 온갖 위험을 극복하며 비텝스크로 사목 방문을 떠난 성 요사팟은 새로운 정교회를 주장하는 분리파에 의해 1623년 11월 12일 도끼와 총탄으로 죽임을 당해 드비나강(Dvina R.)에 던져졌다. 교회 일치를 위한 열정으로 인해 ‘일치의 사도’로 불리며 순교자로서 공경을 받는 그의 순교 이후 많은 사람이 가톨릭으로 개종했고, 그의 전구로 인해 수많은 기적이 일어났다. 그래서 그는 1643년 5월 16일 교황 우르바노 8세(Urbanus VIII)에 의해 복자품에 올랐고, 1867년 6월 29일 교황 복자 비오 9세(Pius IX)에 의해 시성되었다. 그는 교황청의 공식 절차를 거쳐 공식적으로 시성된 로마 교회와 연합한 동방 교회의 첫 번째 성인이었다. 그의 순교 이후로도 로마 교회와 일치한 수많은 동방 교회의 신자들이 순교하였고, 공산화된 구소련에서 강제로 러시아 정교회로 편입되었다.

   그의 유해는 폴로츠크에 모셔져 공경을 받았는데, 제1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16년 러시아 정교회에 의한 모독의 위험을 피하려고 비밀리에 오스트리아 빈(Wien)의 성녀 바르바라 성당으로 옮겼다. 그 후 1949년 빈이 소련의 점령하에 있을 때 로마로 옮겨졌고, 1963년 교황 성 바오로 6세(Paulus VI)의 뜻에 따라 성 베드로 대성당 내 성 대 바실리오(Basilius Magnus) 제단 아래로 옮겨 안치하였다. 옛 “로마 순교록”은 11월 12일 목록에서 폴로츠크의 대주교이자 성 바실리오회의 수도자인 성 요사팟이 비텝스크에서 순교했는데, 그는 가톨릭과의 일치를 반대하는 분열주의자들에 의해 잔인하게 살해당했으며 1867년 교황 복자 비오 9세에 의해 시성되었다고 전해주었다. 시성과 함께 그의 축일이 로마 보편 전례력의 11월 14일로 지정되었는데, 이는 천상 탄일인 11월 12일에 이미 교황 성 마르티노 1세(Martinus I)의 축일을 기념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1969년 전례력 개정 이후 교황 성 마르티노 1세의 축일이 4월 13일로 옮겨지면서 성 요사팟 주교의 축일을 천상 탄일인 11월 12일에 기념하게 되었다.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도 11월 12일 목록에서 폴로츠크의 주교이자 순교자인 성 요사팟이 끊임없는 열정으로 가톨릭과의 일치를 위해 헌신하며 비잔틴-슬라브식 전례를 키웠으나 오늘날 벨라루스의 비텝스크에서 적대적인 군중의 잔혹한 공격을 받아 교회 일치와 가톨릭 신앙을 지키다가 목숨을 잃었다고 기록하였다.♣

참고자료

  • 김정진 편역, 가톨릭 성인전(하) - '성 요사팟 주교 순교자', 서울(가톨릭출판사), 2004년, 185-187쪽.
  • 한국가톨릭대사전편찬위원회 편, 한국가톨릭대사전 제9권 - '요사팟 쿤체빅', 서울(한국교회사연구소), 2002년, 6539-6540쪽.
  • L. 폴리 저, 이성배 역, 매일의 성인, '성요사팟 주교 순교자', 서울(성바오로), 2002년, 287-289쪽.

사진/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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