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유스티누스(Justinus, 또는 유스티노)는 100~110년 사이에 팔레스티나(Palestina)의 사마리아(Samaria) 지방에 세워진 로마제국 도시인 플라비아 네아폴리스(Flavia Neapolis, 오늘날 팔레스티나 중부의 나블루스[Nablus])의 한 이교 가정에서 태어났다. 어렸을 때의 성장 과정은 알려지지 않았지만, 그는 진리를 찾는 구도자의 자세로 꾸준히 탐구하는 학구적인 사람이었다. 그는 스토아 철학, 아리스토텔레스 철학, 피타고라스 철학 그리고 플라톤 철학에 연이어 몰두하였지만 만족하지 못했다. 그러던 어느 날 카이사레아(Caesarea)의 바닷가를 산책하다가 한 노인을 만나 인간의 모든 사상, 플라톤 사상에도 한계와 부족함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리스도교에 입문하게 되었다. 그는 132~135년 사이에 에페수스(Ephesus)에서 트리폰(Tryphon)이라는 유다인과 종교에 관한 토론을 벌이고 그 내용을 토대로 155년에 쓴 “트리폰과의 대화”(Dialogue with Trypho) 8항에서 자신의 입교 여정을 이렇게 적었다. “그 후 나는 그 노인장을 다시 뵙지 못했지만, 내 영혼 안에 어느덧 불꽃이 이는 것을 체험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예언자들과 그리스도의 친구들을 사랑하게 되었다. 나는 그 어른의 말씀을 속으로 곰곰이 되씹으면서, 이 철학이야말로 참되고 유익하며 유일한 철학이라고 깨달았다. 이리하여 비로소 나는 철학자가 되었고, 또 이런 이유로 비로소 나는 철학자가 된 것이다. 모든 이가 나와 비슷한 체험을 해서, 구세주의 말씀으로부터 떨어져 나오는 일이 없기를 바란다.” 결국 성 유스티노는 진리를 탐구하는 끈질긴 노력을 통해 살아계신 그리스도를 만나게 되었고, 130년경 에페수스에서 세례를 받고 그리스도교 신자가 되었다. 그가 그리스도교에 심취하게 된 또 다른 이유는 순교자들의 영웅적인 태도에 감동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제2 호교론” 12항에서 이렇게 말했다. “플라톤 학파의 제자였을 때 나 자신이 그리스도인들을 비난했었는데, 사람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죽음에 직면해서도 용감한 그들을 보면서 나는 그들이 악이나 탐욕 가운데 살 수 없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세례를 받은 후 성 유스티노는 이제 구도자로서가 아니라 진리의 설파자, 신앙의 설교가로서 한평생을 하느님께 봉헌하였다. 그는 평신도였으나 스승이며 복음의 사도가 된 것이다. 그는 순회 교사로서 여러 지방을 돌아다니며 가르치다가 안토니누스 피우스 황제(Antoninus Pius, 138~161년 재위)가 있는 로마(Roma)에 도착해서 그곳에 머물며 자기 집에 교리를 가르치는 학교(Schola)를 세웠다. 성 유스티노는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는 황제와 집정관에게 항의하는 2편의 “호교론”(Prima Apologia, Secunda Apologia)을 썼다. 그래서 그는 그리스도교의 첫 번째 호교론자이며 그리스도교에 대한 장문의 글을 남긴 최초의 평신도가 되었다. 165년경 어느 날 성 유스티노는 크레스켄스(Crescens)라는 견유학파(犬儒學派)에 속한 사람과 논쟁을 벌이다가 그의 사주로 인해 로마의 집정관인 유니우스 루스티쿠스(Junius Rusticus)에게 고발되어 다른 6명의 동료와 함께 체포되었다. 그들은 이방 신전에 희생제물을 바치라는 요구를 거절하고 수많은 고문을 당한 후 참수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성 유스티노와 동료들의 순교록”(Martyrium Sancti Iustini et Sociorum)이 전해 오는데, 그들의 심문과 사형 선고에 관한 공식 문헌을 토대로 기록되어 역사적 가치가 크다. 2세기 호교론자들 중에서 가장 뛰어난 신학자요 철학자이자 교부였던 성 유스티노에 대해 옛 “로마 순교록”은 4월 13일 목록에서 언급한 그의 축일을 4월 14일에 기념한다고 기록하였다. 그에 따르면 성 유스티노는 훌륭한 철학자로서 박해 중에 그리스도교를 옹호하기 위해 두 편의 “호교론”을 저술해 황제에게 항의했고, 견유학파에 속한 크레스켄스의 음모로 순교하게 되었다고 적었다. 1969년 로마 보편 전례력을 개정하면서 종종 그의 축일이 성주간과 겹치기 때문에 동방 교회와 같은 날인 6월 1일로 옮겨 그의 축일을 기념하게 되었다.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도 6월 1일 목록에서 철학자로서 그리스도의 진리 안에서 참된 지혜를 발견하고 올바로 따랐던 성 유스티노와 그의 순교에 대해 기록하였다. 즉 성 유스티노는 자기 삶의 방식으로 신앙을 고백하고, 자기가 고백하는 바를 가르침의 대상으로 삼았으며, 저서를 통해 그 진리를 옹호하고 증언하다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안토니누스 황제(Marcus Aurelius Antoninus, 161~180년 재위) 치하에서 순교했다고 기록하였다. “성 유스티노와 동료들의 순교록”은 성 유스티노와 함께 순교한 여섯 명의 동료 순교자들에 대해 전해주었는데, 옛 “로마 순교록”은 그들의 이름이나 순교 행적을 따로 기록하지는 않았다. 그들 여섯 명의 순교자들은 성 유스티노의 제자로서 사실을 왜곡하고 그리스도교에 대한 적대감으로 비방과 비난을 일삼은 크레스켄스와 논쟁을 벌인 스승과 함께 고발되어 체포되었다. 그들은 스승과 마찬가지로 로마의 신상 앞에 희생제물을 바치라는 명령을 받고 “당신 뜻대로 하시오. 우리는 그리스도인이므로 우상에게 제사를 바칠 수 없습니다.”라고 당당히 고백하고 채찍질을 당한 후 참수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개정 “로마 순교록”은 6월 1일 목록에서 성 유스티노의 제자로서 그와 함께 영광의 면류관을 받은 순교자들의 이름을 추가하여 기록하였다. 자료마다 그들의 이름이 조금씩 다르지만, 성 카리톤(Chariton)과 그의 아내인 성녀 카리타(Charita, 또는 카리토 Charito), 성 에벨피스토(Evelpistus)와 성 히에락스(Hierax, 또는 제라체 Gerace), 성 파이온(Paeon)과 성 리베리아노(Liberianus)가 그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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