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녀 조증이 바르바라는 명문가의 딸로서 어려서부터 훌륭한 교육을 받았으며, 16세에 남이관 세바스티아누스(Sebastianus)에게 출가하여 아들 하나를 두었으나 난지 얼마 되지 않아 죽었다. 그리고 1801년 신유박해 때 시아버지와 어머니가 희생되고 남편은 귀양살이를 하게 되었다. 그 때 남편을 따라갈 수도 없었고 또 의지할 데도 없었으므로 시골 친정으로 돌아가 남동생 집에서 갖은 고생을 하며 살았다. 그 당시 조선에는 신부가 한 분도 없었고 신자들과의 교류도 없었기에 바르바라도 자연히 냉담하게 지냈다. 30세 때에 서울로 올라온 그녀는 열심한 신자 친척집에 머물면서부터 예전의 허송세월을 보충하려는 뜻으로 신앙을 지키며 열심히 살았다. 또 바르바라는 친척인 정하상 바오로(Paulus)가 북경으로 선교사를 모시러 가는 계획을 도우며 그 여비를 보태기 위해서 쉬지 않고 일하였다. 1832년에 남편이 귀양지에서 돌아오자 그녀는 남편과 함께 유 파치피코(본래 이름은 余恒德) 신부를 보살펴 드렸고, 나중에는 집에 신자들을 위한 강당을 마련할 정도로 적극적이었다. 유 신부가 중국으로 돌아간 후 바르바라는 작은 집을 구하여 이사하였는데, 모방(Manbant, 羅) 신부와 샤스탕(Chastan, 鄭) 신부와 앵베르(Imbert, 范世亨) 주교를 자신의 집에 영접하였다. 조 바르바라는 가끔 이런 말을 하였다. “만일 박해가 일어나면 우리는 죽어야 할 터이니, 천주의 영광을 현양하고 우리 영혼을 구하기 위하여 고통을 참아 받을 마음의 준비를 하자.” 과연 이것은 빈 말이 아니었고 그녀의 행동과 말이 일치하게 되었다. 그때는 기해박해가 한창이었기 때문에 남편은 시골에 가서 숨어 있었고, 바르바라는 혼자 있다가 7월 붙잡혔다. 그녀는 그녀의 이름도 밝히지 않고, 남편의 피신처도 대지 않았으며, 신앙을 배반하지도 않았기에 고문을 20회 이상이나 당하였다. 바르바라는 “만 번 죽어도 나는 천주를 배반할 수 없고 또 내 남편이 어디 숨어 있는지 알지도 못합니다.” 하고 말하였다. 하느님께 대한 충성과 비밀을 지킨 것 때문에 바르바라는 주리를 틀리고 곤장을 180대나 맞았고, 형조로 옮겨가서도 다시 세 차례나 곤장을 더 맞았다. 바르바라는 마침내 사형 선고를 받았다. 사형 집행일이 되자 옥에 갇혀 있던 모든 신자들이 그녀와 함께 있을 수 없게 된 것을 슬퍼하였다. 조증이 바르바라는 사형장에 나가기 전에 둘러싼 신자들을 애정과 신앙에 넘치는 말로 위로하고, 신앙을 증거하는데 굳건하라고 격려하며 서소문 밖의 형장으로 나아갔다. 때는 1839년 12월 29일이었으며, 그녀의 나이는 58세였다. 그녀는 1925년 7월 5일 교황 비오 11세(Pius XI)에 의해 시복되었고,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회 창설 200주년을 기해 방한한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시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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