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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릴로(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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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인명, 축일, 성인구분, 신분, 활동지역, 활동연도, 같은이름 목록
성인명 치릴로 (Cyril)
축일 6월 27일
성인구분 성인
신분 총대주교, 교회학자, 교부
활동지역 알렉산드리아(Alexandria)
활동연도 380?-444년
같은이름 시릴, 시릴로, 시릴루스, 치릴루스, 키릴로, 키릴로스, 키릴루스
성인 기본정보

   성 키릴루스(Cyrillus, 또는 치릴로)는 380년경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의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그 도시의 총대주교이자 삼촌인 테오필루스(Theophilus)의 영향으로 성직자가 되기로 한 그는 알렉산드리아에서 고전과 신학 교육을 받으며 성장해 삼촌에게 사제품을 받았다. 그는 403년 총대주교인 삼촌을 수행해 콘스탄티노플(Constantinople)로 가서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Johannes Chrisostomus, 9월 13일)를 단죄한 퀘르키아(Quercia) 주교 회의에 참석했으며, 417년까지는 테오필루스의 노선에 따라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를 반대하였다. 412년 10월 15일 테오필루스 총대주교가 사망하자 성 치릴로는 사흘 후에 삼촌을 계승해 알렉산드리아의 총대주교가 되었다. 그는 삼촌보다 더 뛰어난 신학적 역량과 야망을 지닌 인물이었다. 그런데 성 치릴로의 지지자와 그의 경쟁자였던 티모테우스(Timotheus)를 지지하던 사람들 사이에 격렬한 싸움이 일어나 큰 상처를 입고 출발하게 되었다. 그 후에 성 치릴로는 자신이 축출했던 노바티아누스(Novatianus) 이단을 상대로 일련의 공격을 재개했고, 그리스도인들을 공격하던 유대인들을 추방하는 일에 관여했다. 하지만 유대인들의 반란이 계속되자 오레스테스 총독 또한 그의 행위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결국 성 치릴로는 세속 정부의 권위를 인정하며 유대인들 문제에서 손을 뗐다.

   신학적으로 성 치릴로는 주로 알렉산드리아의 성 아타나시오(Athanasius, 5월 2일)의 노선을 따르며 아리우스주의(Arianism)에 대항하였다. 가톨릭교회의 정통 신앙을 지키기 위해 애쓰던 그는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인 네스토리우스(Nestorius)와의 분쟁에 휘말렸다. 네스토리우스는 가톨릭교회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神性)과 인성(人性)이 동일하다고 가르치는 데 반해서 신성과 인성이 분리되어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성모님은 하느님의 어머니가 아니라 단순히 인간 예수의 어머니이기 때문에, 성모 마리아에게 주어졌던 ‘하느님의 어머니(천주의 모친)’ 즉 ‘테오토코스’(Theotokos)라는 호칭을 사용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그로 인해 수많은 사람이 이단에 빠지고 많은 성직자와 수도자들이 혼란을 겪게 되었다. 성 치릴로는 429년에 발표한 부활절 서간에서 예수님은 참 하느님이며 참 사람이므로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를 ‘하느님의 어머니’라고 부르는 교회의 전통은 정당하다며 네스토리우스의 주장을 정면으로 반박하고 사람들이 이단에 빠지지 않도록 경고하였다. 그리고 교황 성 첼레스티노 1세(Coelestinus I, 7월 27일)를 설득해 430년 8월 로마에서 주교 회의를 개최하여 네스토리우스를 단죄하도록 했다. 그리고 그에 맞추어 성 치릴로도 같은 해 11월에 알렉산드리아에서 주교 회의를 열어 네스토리우스의 가르침을 단죄하고 교회 일치를 도모하고자 했다. 그러고 나서 두 회의를 통해 네스토리우스의 그릇된 신앙에 대해 단죄하는 결정문을 직접 보내고 이에 승복할 것을 요구하였다.

   그러자 네스토리우스는 교황이 아닌 테오도시우스 2세 황제(408~450년 재위)에게 성 치릴로를 이단으로 고소했다. 당시 네스토리우스가 총대주교로 있던 콘스탄티노플은 황제가 거주하던 곳이었다. 황제의 신임을 믿고 고소했으나 황제는 이 문제를 독단적으로 해결할 수 없다며 공의회 소집을 요구하였다. 그래서 이루어진 것이 431년의 에페수스(Ephesus) 공의회이다. 교황 성 첼레스티노 1세는 성 치릴로로 하여금 네스토리우스를 축출하도록 지시하였고, 성 치릴로는 에페수스 공의회에서 교황의 특사 자격으로 의장직을 맡아 회의를 주재하였다. 이때 200명 이상의 주교들이 대거 참여하여 큰 성황을 이루었다. 에페수스 공의회는 네스토리우스가 결백하다고 주장하는 안티오키아(Antiochia)의 총대주교인 요한 1세(Joannes I)와 안티오키아 학파의 신학자들이 대거 몰려오기 전에 네스토리우스와 그의 추종 세력을 단죄함으로써 성 치릴로의 승리로 끝났다. 네스토리우스는 결국 유배되었고, 이런 과정을 겪으면서 그리스도론에 대한 교회의 정통 교리가 확고히 정립되는 계기가 되었다. 2년 후인 433년에 성 치릴로는 안티오키아 학파와 화해를 이루었다. 안티오키아 학파는 에페수스 공의회에서 결의한 대로 마리아께 ‘하느님의 어머니’라는 칭호를 부여하는 것을 인정했고, 그리스도가 성부와 동일하며 인간 예수와 동일함을 인정하는, 즉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이 동일하다는 결론에 합의했다. 성 치릴로는 이 같은 결의와 합의를 끌어내는 데 크게 이바지했고, 그래서 ‘성모 마리아의 신학박사’라는 별칭을 얻었다.

   하지만 네스토리우스 이단이 완전히 사라지기까지는 더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그 후로도 성 치릴로는 모든 생애를 바쳐 이단 척결을 위해 사목적 · 학문적으로 온갖 노력을 다했다. 성 치릴로는 삼위일체와 강생에 관한 교의 확립과 신학 논문 저술에 여생을 바쳤고, 그리스도교 사회에 깊이 뿌리박고 있던 펠라기우스주의(Pelagianism)와 네스토리우스주의를 배격하는 일을 지속해 교회에 큰 발자취를 남겼다. 그는 알렉산드리아가 낳은 가장 위대한 신학자였다. 그의 저서는 정확한 사고와 명확한 전개 및 그 합당한 근거 제시로 후대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그가 남긴 저서 중에는 구약과 신약 성경에 관한 여러 주석서와 많은 교의 신학 논문을 비롯해 배교자 율리아누스 황제에 대한 반박문과 편지 그리고 다양한 강론들이 전해져 온다. 그리스 교부의 한 명인 성 치릴로는 444년 6월 27일 알렉산드리아에서 선종했고, 1882년 교황 레오 13세(Leo XIII)에 의해 교회 학자로 선포되었다. 옛 “로마 순교록”은 2월 9일에 그의 축일을 기념하며, 1월 28일 목록에서 가톨릭 신앙의 수호자인 성 치릴로가 평화롭게 잠들었다고 적었다. 동방 정교회에서는 6월 9일이나 1월 18일에 그를 기념하고, 비잔틴과 콥트 정교회에서는 6월 27일에 그의 축일을 기념하고 있다. 1969년 로마 보편 전례력 개정 이후 가톨릭교회도 6월 27일에 성 치릴로의 축일을 기념하고 있고,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도 6월 27일 목록에서 알렉산드리아의 주교이자 교회 학자인 성 치릴로의 신학적 업적에 대해 기록하였다.♣

참고자료

  • 김정진 편역, 가톨릭 성인전(하) - '알렉산드리아의 성 치릴로 주교 학자', 서울(가톨릭출판사), 2004년, 345-347쪽.
  • 한국가톨릭대사전편찬위원회 편, 한국가톨릭대사전 제11권 - '치릴로, 알렉산드리아의', 서울(한국교회사연구소), 2005년, 8323-8324쪽.
  • L. 폴리 저, 이성배 역, 매일의 성인, '알렉산드리아의 성치릴로 주교 학자', 서울(성바오로), 2002년, 153-15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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